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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과 피로연, 그 이후의 일정은 당연히 첫날밤이었다.
시녀장과 저택의 고용인들은 당연히 그 준비를 완벽하게 해 놓았다. 먼저 저택에 들어온 루이먼드는 장미 꽃잎이 동동 떠 있는 목욕물에 몸을 담가야 했다.
“이, 렇게까지 할 필요가……”
“당연히 있습니다, 루이먼드 님.”
목욕 시중을 돕던 하인이 딱 잘라 말했다. 그는 시녀장이 특별히 엄선한 자였다.
결혼한 지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건만 아직도 부인과 알콩달콩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걸로 유명했다.
“누가 뭐래든 첫날밤은 특별하니까 말입니다.”
하인은 자신의 결혼식 첫날밤이 떠오르는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런 하인을 보자니, 이제까지 별생각 없었던 루이먼드는 덩달아 떨리고 설렜다.
‘비아와의 첫날밤, 이란 거지.’
이미 몸을 맞춰 본 적 있으나, 하인의 말대로 결혼식 첫날밤은 결혼식 첫날밤이었다. 의식하고 나니,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긴장됐다.
루이먼드가 뒤늦게 긴장하기 시작하자, 하인은 원래 그런 거라면서 루이먼드의 등을 팡팡 두드려 주었다.
“다시는 오지 않을, 인생에서 딱 한 번뿐인 날입니다. 힘내십시오!”
“고, 고맙네.”
이상하게 위안도 되고 힘도 되었다. 루이먼드는 시녀장의 세심한 배려에 감사했다.
그리고.
“내가 긴장하면 뭐 하냐고. 내 부인이 돌아오질 않는데…….”
드넓은 침대 위에 혼자 벌러덩 누운 채로,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 축 늘어졌다.
창밖은 여전히 시끌시끌했다. 루비아나는 침실에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흰 침대 시트 위에 흩뿌려진 장미 꽃잎을 보고서는, 뭘 이렇게까지 하냐고 타박하면서도 부끄러워했던 때가 언제인지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기다리다 지친 루이먼드는 꽃잎 가득한 침대에 풀썩 쓰러지듯 누워 외로움에 몸부림쳤다.
‘언제 오는 거지? 왜 안 오는 걸까?’
목욕 시중을 도와준 하인 때문에 덩달아 흥분해서는 설레고 긴장했던 것도 독이 되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긴장했던 몸이 풀어지며 새삼 피곤이 몰려들었다.
루비아나만큼은 아니나, 루이먼드에게도 오늘은 꽤나 고단한 하루였다. 뜨거운 물에 목욕하고, 몸에 사락사락 감기는 비단 가운을 입고 폭신한 침대에 누우니, 슬금슬금 졸음이 몰려왔다.
‘자면 안 돼!’
눈을 부릅뜨고 잠기운을 몰아내려던 것도 잠깐이었다. 루이먼드는 금방 졸음에 먹혀 버렸다.
‘자면 안 되는데…… 자면 안 되……나? ……조금만, 조금만 눈 감고 있자.’
눈만 감고 있다가 루비아나가 오면 벌떡 일어나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고, 그렇게 곯아떨어져 버렸다.
“뭐, 첫날밤이랄 게 별거 있겠습니까? 그냥 몸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그러는 거지요. 그러실 일은 없지만, 나중에 오는 신부를 기다리다가 먼저 자 버리는, 그런 신랑만 되지 않으시면 됩니다. 핫핫핫.”
목욕 시중을 돕던 하인의 당부가 색색거리는 고른 숨에 뾰로롱 날아가 버렸다.
***
나름 빨리 자리를 정리한다고 정리했는데, 끝나고 나니 하늘이 어둑해져 버렸다.
‘이런, 이렇게 기다리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루비아나는 급히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그녀에게 시녀장보다 먼저 따라붙는 사람이 있었다. 루비아나가 급히 루단테에게 보냈던 부하였다.
“알아 왔어?”
“예. 게일 오드릭, 직위는 아덴 왕국의 직위를 그대로 이어 대령. 수도 외곽 경비 업무를 맡았다고 합니다.”
“새벽 전투 전에 투항한 자인가?”
“전투 시작 직전에 상관이 투항하자 어쩔 수 없이 무기를 내려놓았다는데, 취하면 그 장소가 어디든 고래고래 아덴 왕국 만세를 외쳤다고 합니다.”
부하가 아까 낮에 결혼식을 급습한 괴한들의 우두머리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했다. 성격이 호탕하고 실력이 좋아, 따르는 무리가 꽤 있었다고 했다. 아무래도 그 무리를 이끌고 이번 소동을 일으킨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배후 없이 혼자 벌인 일이다?”
“도미넨트 공작님께서 좀 더 조사해 보긴 하겠지만, 일단은 그렇게 봐도 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
루비아나가 비웃듯 숨을 토하며, 별생각 없이 서쪽 계단으로 올라갔다.
“공작님!”
루비아나를 마중 나온 시녀장이 그 모습을 보고는 중앙 계단 위에서 소리쳤다.
루비아나는 아차 싶어 서쪽 계단 난간을 잡고 아래로 훅, 뛰어내렸다. 부하가 그림자처럼 바짝 뒤쫓았다.
“따로 빼내라 했던 두 명에 대해서도 알아봐.”
“네.”
“잠깐. 그 건은 도미넨트 공작에게 가져가지 말고 독자적으로 해 봐.”
“그러면 시간이 좀 더 걸립니다.”
“알고 있어. 그래도 최대한 빨리 해 봐.”
“예.”
루비아나가 중앙 계단을 오르자 부하는 돌아서 발소리 없이 사라졌다.
계단을 두 칸 세 칸씩 덥석 뛰어오르자, 시녀장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맞았다.
“공작님…….”
“나, 리먼스 부인이 그런 표정 지으면 심장 떨려. 그러지 마.”
“제가 안 그러게 생겼나요?”
시녀장이 한숨을 푹 내쉬며 아까 전까지 루비아나의 부하가 서 있던 곳을 바라봤다.
그 눈빛이 조금 깊어지려는 찰나, 루비아나가 시녀장을 지나쳐 안으로 걸어갔다. 시녀장은 얼른 그 눈빛을 지우고 루비아나를 뒤쫓았다.
“낮에 있었던 일은 별일 아니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아, 다친 데는 없지?”
“저와 저택 사람들은 모두 무사합니다.”
“다행이군. 그래도 다들 놀랐을 테니, 며칠 좀 느슨하게 풀어 줘.”
“그건 루이먼드 님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시녀장은 이미 저택 관리에 대한 모든 권리를 루이먼드에게 가져다 바친 듯했다.
“내 허락도 없이 내가 준 권한을 남한테 넘겼나 보지? 어?”
루비아나가 우스갯소리를 하듯 말했다.
“루이먼드 님이 남인가요?”
시녀장 또한 놀라지 않고, 웃음 띤 목소리로 바로 반박했다.
“아, 이젠 이렇게 부르면 안 되지요.”
시녀장이 얼른 호칭을 고쳤다. 공작님 부군께서는, 으로. 루비아나는 그 호칭이 제법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티 내진 않았다.
“급하게 바꾸지는 말고, 루이랑 상의해서 천천히 바꿔.”
“공작님 부군께 여쭤 보고 그분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벌써 루이 편이 다 됐군.”
“설마 이제야 아신 건 아니시죠?”
“…….”
“공작님, 돌아서지 마세요. 욕실은 이쪽입니다.”
시녀장은 빙긋 웃으며, 자신에 대한 반항의 의미로 도로 서쪽 계단으로 가 버리려고 하는 루비아나를 붙잡았다.
루비아나는 장미 꽃잎이 둥둥 떠 있는 목욕물을 보며 얼굴을 구겼다.
“이게 무슨 짓……”
“루이먼드 님께서도 똑같이 다 하셨습니다.”
“…….”
“그런데 공작님만 안 하신다면, 첫날밤을 치를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지요?”
“……젠장.”
루비아나는 얌전히 장미 꽃잎이 둥둥 뜬 물에 들어갔다.
시녀장이 팔을 걷어붙이고 시중들었다.
피로연 중 한차례 씻는다고 씻었는데, 아직도 몸에서 핏물이 나왔다. 목욕물을 세 번 갈고 나서야 핏물이 가셨다.
시녀장은 목욕하는 내내 입을 멈추지 않았다. 황궁의 시종장이 시녀장으로 분장하고 와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결혼식 첫날밤은 성스럽고 소중한 날이고 어쩌고저쩌고. 루비아나는 그녀의 말을 뒷등으로 흘려들었다.
씻고 나오니, 하녀들이 이상한 걸 내밀었다. 속이 다 비치는 드레스와 얇디얇은 비단 가운이었다.
쓰읍. 루비아나가 뒤따라 나오는 시녀장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시녀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평소에 쓰던 가운을 꺼내 주었다.
“진작 그랬어야지.”
루비아나는 평소대로 셔츠와 바지를 입고, 가운을 몸에 걸쳤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리먼스 부인, 생각을 해 봐. 내가 저걸 입어 뭐 하겠어?”
“뭘 하긴요, 당연히 특별한 밤을!”
“가슴에 손을 얹고 솔직히 말해 봐. 내가 저걸 입어도 루이보다 예쁠 거 같아?”
“그, 그야 당연……”
“늦었어.”
루비아나가 하녀들이 들고 있는 걸 한 손가락으로 들었다 내려 놓으며 픽, 웃었다. 그 얼굴을 정면에서 본 하녀들은 그 웃음이 좀 능글맞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전혀 틀린 게 아니었다.
“자꾸 이런 거 들고 오면, 확 가져가서 정말 리먼스 부인 말대로 특별한 밤을 보낼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입진 않겠지? 나보다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사람 있잖아.”
“공작님!”
시녀장이 기겁했다. 옆에 서 있던 하녀들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정말 특별한 밤이 될 것 같기는 하네.”
말을 하다 보니 욕심이 나는지, 루비아나가 드레스를 챙기려 들었다. 본인이 입으려 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입히겠다는 듯이.
“아, 안 돼!”
시녀장이 후다닥 달려와 드레스를 빼앗았다.
절대 내줄 수 없다는 듯 꽉 끌어안고는, 루비아나를 경계하며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루비아나는 하하, 웃으며 시녀장에게 손짓했다.
“가지고 싶으면 말을 하지. 줄게 가져.”
“피, 필요 없습니다!”
“부끄러워하긴, 괜찮아. 리먼스 부인도 특별한 밤을 보내길 바랄게. 나는 그거 없어도 특별한 밤을 보낼 수 있을 것 같거든.”
“아니라니까요!”
시녀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평소엔 절대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루비아나가 눈을 번쩍 떴다.
“오, 지금 나한테 화낸 거야?”
“……아닙니다. 큰 소리로 말한 것뿐입니다.”
“아냐, 분명 화낸 것 같았는데?”
“힘, 주어 또박또박 말한 겁니다.”
“아닌 것 같은데…….”
“안 가 보십니까?”
시녀장이 등을 떠밀었다. 루비아나는 밀리고 밀려 하녀들 곁을 지나가다 그들과 눈을 마주쳤다.
“다들, 괜한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 남편이야,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는 것도 안 돼.”
입가엔 여전히 즐거워 보이는 미소가 어려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
“히, 히끕. 넵.”
하녀들이 지레 찔려 겁에 질렸다.
“공작님!”
“알았어, 알았어.”
시녀장이 있는 힘껏 루비아나를 밀었다. 루비아나는 긴장감 하나 없는 모습으로 문밖까지 주르륵 밀려 나갔다.
“아무리 그래도 첫날밤 인데…….”
“어쩜 저렇게 아무렇지 않으신 걸까요, 공작님은?”
문틈 사이에서 하녀들의 하소연이 들렸다.
시녀장이 뭐라 말하며 다독이는 것 같은데, 그 목소리까지는 들리지 않고 문이 닫혔다.
“긴장할 게 뭐 있어?”
루비아나는 그들의 질문에 답하듯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침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