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131)

***

욕실에서 침실까지는 고작 스무 발자국 남짓한 거리였다. 침실 문 앞에 선 루비아나는 금빛 문고리를 매섭게 노려보며 혼잣말을 했다.

“괜히 긴장되네.”

스무 발자국 전에, 긴장할 게 뭐 있냐고 말한 사람답지 않은 목소리였다.

매일 봤던 문고리가 왜 오늘따라 마수의 발톱처럼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섣불리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루비아나는 문고리를 잡기 전 손을 몇 번이나 접었다 폈다. 그렇게 한동안 뜸을 들인 다음에야, 문고리를 뽑아 버릴 기세로 문을 벌컥 열었다.

안에서 훈기가 확 퍼져 나왔다. 벽난로와 화로에서 나온 열기겠지만, 방 안에 먼저 와 있는 루이먼드의 온기도 섞여 있을 것 같았다.

그리 생각하니, 훈기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게 아까워졌다. 루비아나는 언제 망설였냐는 듯 얼른 문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으음…. 하아…….”

침대 위에서 아주 야릇한 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야릇하냐면, 마치 신랑이 신부를 기다리지 않고 혼자 잠들어 버린 것 같은 야릇함?

“……루이?”

루비아나는 설마 하는 마음을 안고 살금살금 침대에 다가갔다.

그리고 보고야 말았다. 장미 꽃잎이 수북하게 깔린 침대 위에서 쿨쿨 자고 있는 첫날밤의 신랑을.

“루이?”

“흐으응…….”

“설마, 자고 있는 겁니까?”

“으응…….”

“진짜로?”

“응, 응…….”

대답을 하는 건지 잠꼬대를 하는 건지, 루이먼드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자는 척하는 건 아닐까?’

루비아나는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지만, 루이먼드의 숨소리는 분명 깊이 잠든 사람의 것이었다.

루비아나는 지난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루이먼드가 곤히 잠들었을 때의 숨소리를 잘 알고 있었다. 잠든 척 할 때의 숨소리도.

‘왜 자는 거지?’

엄청 기대를 하거나 긴장을 하진 않았지만,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새삼 울컥, 화가 치솟기도 했다. 당연히 화풀이 대상은 루이먼드가 아니라 시녀장이었다.

‘결혼식 첫날밤은 특별한 거라며!’

괜한 말을 해서 자신을 괜히 설레게 한 죄.

‘일부러 날 욕실에서 오래 잡아 둔 건가?’

목욕물을 세 번이나 새로 받아 목욕시켜 준 죄.

머리카락에서 끊임없이 핏물이 나오자 난감해하던 시녀장의 얼굴 따윈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못된 풍습대로, 신부를 오랫동안 붙잡아 침실로 가지 못하게 막은 게 아닐까 의심할 따름이었다.

‘리먼스 부인, 아주 못된 사람이었군.’

루비아나는 조만간 유언장을 다시 작성하고야 말겠다고 마음먹고는, 침대에 걸터앉아 잠든 루이먼드를 봤다.

“……자는 모습도 예쁘네.”

“으응…….”

“깨어있는 거, 아니죠?”

“으응…….”

“…….”

정말 자고 있는 건가 의심스럽긴 했지만. 아무튼 세상 모르고 자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시녀장에게 화가 난 마음마저 풀리는 것 같았다.

‘많이 피곤했나 보네.’

하긴. 피곤하지 않았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긴 했다.

‘나도 슬슬, 졸리네.’

침대는 충분히 크고 넓었다. 자는 루이먼드를 옆으로 밀어내지 않아도 누울 자리는 충분했다.

루비아나는 장미 꽃잎을 손으로 대충 털어 내고는 옆으로 누웠다. 하암, 낮게 하품하자 잠결에도 그 소리가 들렸는지 루이먼드가 루비아나 쪽으로 몸을 틀었다.

나란히 모로 누워 서로를 바라보는 자세가 되었다. 그래 봤자 루이먼드는 눈을 꼭 감고 있었지만, 루비아나는 그의 잠든 얼굴을 마음껏 볼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이불을 끌어 당겨 루이먼드를 어깨까지 덮어 주고, 자신도 그 속에 들어갔다.

어쩌다 보니 다리가 엇갈렸다. 그 정도 닿았을 뿐인데도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어렸다.

아까 루이먼드의 등에 기댔을 때 잠깐 느꼈던 노곤함이 다시 몰려왔다.

늘 이런 느낌을 경계하고 살았다. 전쟁터든 북부에서든 이런 노곤함에 눈 감는 걸 위험하다고 여겼는데…….

귓가에 감도는 루이먼드의 숨소리가 괜찮다, 괜찮다, 하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이런 첫날밤도 나쁘지 않겠지.’

누가 옆에서 자는 것. 그 숨소리를 들으며 함께 잠드는 것.

꽤 오랜만이었다.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갑자기 마음 한구석이 섬뜩해졌지만, 잠기운에 금방 묻혔다.

그렇게 루비아나는 루이먼드 옆에 누워 스스륵 잠들었다.

***

그림자 하나가 펠트하르그 공작저에 스며들었다.

카드릭은 늦은 밤까지 집무실에 머물며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등 뒤의 커다란 창밖에는 환하게 빛나는 황궁과 잔치가 끝나 조용해진 아쉴레앙 공작저가 보였다.

휙.

등불이 바람에 흔들렸다. 자신의 것이 아닌 그림자가 나타나자, 카드릭은 서류를 내려놓았다. 종일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어 피곤해진 눈가를 꾹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실패했겠지.”

“죄송합니다.”

“들켰나?”

“반란 세력에 섞일 틈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뒤를 밟히진 않았습니다.”

그림자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실망시켜 죄송합니다.”

“아니네. 이번 기회에 없앨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나도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어.”

부하를 위로하기 위해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아쉴레앙 공작은, 괜찮은가?”

“예.”

“그래, 그럼 됐네.”

카드릭은 그의 대답에 만족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림자는 공손히 인사한 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카드릭은 다시 서류를 들여다보고 집중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젠장.”

서류가 와그작 구겨졌다.

***

두 사람은 첫날밤에 손조차 잡지 않고 잠들어 버렸다.

시녀장은 그것도 모르고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두 사람이 걸어 나올 때까지 침실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다른 하인, 하녀들도 실수로라도 그 근처를 지나가지 못하게 했다.

덕분에 루비아나와 루이먼드는 정말 푹 잘 수 있었다.

점심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난 후, 루비아나와 루이먼드가 머리가 잔뜩 뻗친 채로 부스스 걸어 나와 밥 좀 달라고 했을 때에야, 시녀장은 첫날밤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할 말은 많지만 차마 하진 않겠다는 눈으로 루비아나를 바라봤다. 루비아나는 그 시선을 외면한 채 빈속에 수프를 들이부었다.

“어으, 속이 이제 풀리는 것 같아.”

“…….”

어젯밤에 그냥 잤으면서 왜 속이 아파? 시녀장이 그런 눈빛으로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비아, 너무 그것만 먹지 말고 이것도 좀 먹어요.”

루이먼드는 수프만 떠먹는 루비아나를 걱정하며 부드럽게 다진 고기를 넣어 구운 파이를 루비아나 앞에 끌어다 놔 주었다.

“루이도 많이 먹어요.”

“네, 그럴 테니까 비아도요. 어서, 이것도 먹어 봐요.”

지난밤에 손도 안 잡고 잔 신혼부부는 참으로 정답게도 서로를 챙겼다.

밤새 뼈와 살이 녹는 뜨거운 밤을 보냈을 신혼부부의 원기를 회복시켜 주고자 애써 준비해 놓은 것이건만. 밤에 손도 안 잡고 잔 주제에 저렇게 맛있게 먹다니. 시녀장은 아주 슬퍼졌다.

이후, 루이먼드의 목욕 시중 담당이었던 하인이 시녀장에게 불려가 크게 혼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루이먼드는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는 하인을 따로 불러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약간의 사례금을 지급했다.

“이제 와 솔직히 말씀드리는 거긴 한데, 저희 부부도 첫날밤엔 그냥 손만 잡고 자 버렸습니다. 결혼식 준비가 어디 하루 이틀로 되는 일이랍니까? 거기다가 결혼식 당일은 또 왜 그리 정신이 없는지. 침실에 도착하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꾸라져 잠들어 버렸지요.”

하인은 핫핫핫 웃으며 ‘그래도 이렇게 잘 살고 있잖습니까?’ 라고 말해, 루이먼드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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