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131)

***

한차례 또 뜨거운 시간을 보낸 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품에 안긴 채 다 식은 빵을 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무엇이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든 거지?’

열렬히 사랑했던 사이인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떨어져 있다 겨우 사랑을 이뤄 결혼한 사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둘은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3년의 계약 결혼을 먼저 제안한 건 이쪽이고, 결혼 전에도 내 저택에 머물며 살고 있었으니 갑자기 환경이 달라져 사람이 변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도통 모를 일이었다.

‘왜 갑자기 이렇게 짐승이 돼 버린 거지?’

물론 결혼 전에도 참 실한 남자라는 건 두어 번 경험했다. 침실에서 한 번, 황궁에서 또 한 번. 그때 경험했던 루이먼드도 참 대단했지만, 지금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처음엔 루이먼드가 괜히 무리를 하고 있는 건 아닌가 걱정했다.

“혹시 무리하는 거면, 안 그래도 됩니다. 우리 결혼 계약서에도 적어 놓았듯 일주일에 세 번이면 되니까. 혹시 그게 힘들면 더 줄여도 되니까.”

“비아, 지금 그 말, 지금의 나로는 부족하다는 말로 알아들으면 될까요?”

“아니, 부족하다는 게 아니라 넘친다는 말…… 읍.”

루이먼드가 애써 무리하는 게 아니라는 건 그날 밤 몸으로 충분히 확인했다. 그래서 더 의아했다.

‘결혼식을 기점으로 사람이 변해 버린 건 분명한데…… 남자는 원래 결혼식을 기점으로 이렇게 사람이 바뀌기도 하나? 아니, 결혼식이 뭐기에?’

루비아나는 결혼식을 올린 지 3주쯤이 다 되어서야 ‘결혼식이란 뭔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에 빠져들었다.

그녀가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들 정도로, 결혼식 이후 루이먼드는 장난이 아니었다. 목줄을 벗은 복슬이, 길들이기 직전의 왕눈이를 보는 느낌이랄까?

내 남편이 마수급이라니.

루비아나는 마수급 남편의 품에 안긴 채로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 항의했다.

“우리 적어도, 식사는 식당에서 합시다.”

“어째서요? 매번 리먼스 부인이 가져다주고 있는데. 물론 그녀의 수고에는 항상 고마워하고 있습니다만.”

루비아나의 붉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배부른 웃음을 짓고 있던 루이먼드의 얼굴이 순식간에 무표정으로 변했다.

“그 수고로움이 미안하기도 하고……”

“리먼스 부인은 괜찮으니 전혀 신경 쓰지 말라고 했습니다만.”

“말만 그렇게 하는 거지 속으로 엄청 귀찮아하고 있을 겁니다. 리먼스 부인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니까요.”

말을 하다 보니 시녀장을 비난하는 것처럼 말하게 됐다. 루비아나는 자신이 말을 하고도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아니요, 비아. 리먼스 부인을 그렇게 나쁘게 말하지 말아요. 그분은 진심으로 비아를 아끼고 있는 분이예요.”

“아니, 리먼스 부인이 싫다는 게 아니라……”

“아무리 비아라도, 리먼스 부인을 그렇게 말하는 건 싫어요.”

루이먼드가 루비아나를 꽉 끌어안으며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정말로 싫은 듯했다.

루이먼드가 얼마나 시녀장을 믿고 있는지 절절하게 느껴졌다. 그 지점에서, 루비아나는 살짝 빈정이 상해 버렸다.

“나입니까, 리먼스 부인입니까?”

말하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아니, 잠깐.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닌데?’

주제는 분명, 이제 식당에 가서 밥 좀 먹자였다. 그게 어쩌다 이렇게 됐단 말인가?

‘미쳤군, 미쳤어.’

루비아나가 뒤늦게 후회하는 사이, 루이먼드는 루비아나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큭큭 웃었다.

“웃지 마십시오.”

루비아나가 쪽팔려 귀를 붉히며 퉁명스럽게 말해도 쉬이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당연히 비아, 당신이지요.”

그는 실컷 웃고 나서야 루비아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느냐는 말투였다. 남이 그렇게 말했다면 무시하는 듯한 발언으로 들려 짜증이 났겠으나, 루이먼드가 그렇게 말하니 오히려 마음이 풀렸다.

“비아, 내가 리먼스 부인을 좋아하는 건 그분이 당신을 정말로 걱정하고 아껴 주기 때문입니다.”

뭐, 그렇다는데 무슨 할 말이 더 있으랴? 루비아나는 민망한 마음에 뺨을 긁적이다 그 모습을 귀여워 죽겠다는 듯 바라보던 루이먼드에게 뺨을 한 번 깨물렸다.

“아무튼, 오늘부터 식사는 식당에서 합시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루이.”

“…….”

“루이, 부탁입니다.”

“……비아, 당신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루이먼드가 축 처져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안쓰럽던지, 하마터면 식당에 내려가자는 말을 취소할 뻔했다.

루비아나가 안쓰러운 마음을 꾹 참고 버티자, 한참 뒤 루이먼드는 쯧, 혀를 차며 불쌍해 보이던 표정을 싹 지워 버렸다. 물론 루비아나가 제 표정을 보지 못하도록, 그녀의 품에 안긴 상태에서.

그러한 과정을 거치고야, 루비아나는 3주 만에 중앙 계단을 내려와 식당에 올 수 있었다.

3주 만에 보는 식당 문이 얼마나 반갑던지, 남편 손을 붙잡고 어르듯 문고리를 어루만졌다. 그 모습을 본 시녀장은 당황했고, 루이먼드는 얼굴을 싸하게 굳혔다.

보다 못한 루이먼드가 루비아나를 제 품에 끌어당겼다.

“루이?”

“음식이 식겠어요. 내가 열게요, 비아.”

그는 문손잡이에 남은 루비아나의 손길을 지우려는 듯 문손잡이를 거칠게 비틀어 문을 열었다.

식당은 3주 만에 주인 부부를 맞이했다.

주방장이 3주 만에 솜씨를 발휘한 식탁은 풍성했다. 루비아나는 물론이거니와 식당에 내려오기 싫어했던 루이먼드마저 만족시키기 충분했다.

루이먼드야 제 입에 음식을 넣는 것보다, 와구와구 맛있게 먹는 루비아나를 보는 것에 더 만족하긴 했지만.

분명히 식사의 질은 식당에서 먹는 게 훨씬 나았다. 시녀장이 성실하게 준비한들, 식사를 트레이에 담아 옮기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으니까.

문제는 식사 중반에 일어났다. 튀긴 가재 위에 뿌린 소스가 루비아나의 손에 튀었다. 루비아나는 아무 생각 없이 소스를 냅킨에 닦아 내려고 했다.

그때. 루비아나의 손을 홀린 듯 보고 있던 루이먼드가 루비아나의 손을 잡아챘다. 기사 훈련을 받지 않은 학자의 행동이라기엔 너무도 민첩했다.

루비아나가 어…… 하는 새, 손가락이 루이먼드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

루비아나도 놀랐고,

“……!”

시녀장도 놀랐고,

“……!”

주인 부부에게 인사하러 나온 주방장도 놀랐다.

“루이!”

루비아나가 급히 손가락을 빼내려고 했지만, 루이먼드가 놓아주지 않았다.

‘학자의 집 출신 주제에 어디서 이런 힘이!’

편견을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또 편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루비아나가 학자의 집 출신 루이먼드를 만만히 보고 제 힘을 모두 쓰지 않는 사이, 루이먼드는 진심으로 전력을 다해 루비아나에게 덤비고 있었다.

루비아나가 속수무책으로 루이먼드에게 당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비아.”

루이먼드가 손을 핥고 올라가 루비아나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쪽.

루비아나는 짜릿한 감각에 놀라 손을 오므렸다. 루이먼드는 오므린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술을 댔다.

“…….”

정신이 다 아득해졌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를 말려야 한다는 것도 잊고 그를 보았다.

‘그냥 마수가 아니라 전격 마수였던 건가!’

사람을 감전시켜 꼼짝도 못 하게 만들고 잡아먹는.

‘이런 마수라면, 잡아먹혀도 괜찮을 것 같은데.’

마수로부터 제국을 지켜야 하는 사명을 가진 북부의 아쉴레앙 공작에게 이런 마음이 들게 만들다니. 아무튼 잘생기고 볼 일이었다.

“어머, 어머!”

뒤에 선 하녀가 부끄럼을 참지 못하고 방정맞게 소리를 냈다.

‘아차.’

그 덕에 루비아나는 정신을 차리고 손을 빼냈다. 이번만큼은 방심하지 않고 힘을 줬기 때문에, 루이먼드는 그녀의 손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루이먼드는 눈을 치켜뜨고 루비아나 뒤에 서 있던 하녀를 노려보았다.

“죄, 죄송합니다.”

하녀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죄송은 무슨.”

용서의 말은 상냥한 루이먼드 님이 아니라 무서운 아쉴레앙 공작님에게서 나왔다.

“넌 나가 보렴.”

시녀장이 루이먼드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걸 보고 하녀를 내보냈다.

그래 봤자 소용없는 것을. 루이먼드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얼굴을 풀었다. 그는 이미 하녀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해 두었다.

루비아나는 덩달아 부끄러워할 줄 알았던 루이먼드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자신의 손만 바라보자 난감했다.

‘뭘 자꾸 봐? 이게 맛있어 보이나?’

자신의 손을 보고 침 흘리지 말고 더 맛있는 거나 먹으라는 마음으로 잘 구운 닭다리를 집어 루이먼드의 접시에 올려 주었다.

“고마워요, 비아.”

루이먼드가 배시시 웃으며 우아한 칼질로 닭뼈와 다릿살을 해체했다. 그러고는 살점 대부분을 다시 루비아나의 접시에 옮겨 주었다.

“아, 나한테 도로 안 줘도 되는데…….”

“많이 먹어요. 굳이 식당에 내려와서 식사하고 싶어 했잖아요.”

루이먼드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그는 아예 식탁 위에 턱을 괴고는 루비아나가 먹는 모습을 구경했다.

‘삐졌군, 삐졌어.’

아무래도 침실을 벗어난 것에 대한 원한이 깊은 듯 했다.

루비아나는 닭다리를 손으로 들고 뜯어 먹는 걸 좋아했지만, 어쩔 수 없이 포크로 콕콕 찍어 먹어야 했다.

오랫동안 전쟁터를 떠돌아 행동거지가 거칠어지긴 했지만. 그녀는 엄연히 유서 깊은 룩센 백작가의 장녀였던 귀족이었다. 지금은 제국의 세 공작 중 한 명이고.

어릴 적 배우고 익힌 예의범절이 여전히 몸이 배어 있었다. 그 예의범절에 따르자면 식사 중에 그릇 부딪치는 소리를 내는 건 큰 무례였다.

달그락, 달그락, 루비아나는 자꾸만 포크로 접시를 두들겨 대며 그 예의 없는 행동을 했다. 평소에 안 하던 짓이었다.

시녀장이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마디 하고 싶어 입술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저렇게 바라보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 있겠어? 먹는 데에만 집중할 수 없어서 그런 거라고.’

루비아나가 억울해하며 눈짓으로 루이먼드를 가리켰다.

시녀장은 루비아나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것을 중단했다. 그만큼 루이먼드의 눈빛이 끈적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뺀다면, 3주 만에 식당에서 먹는 첫 끼니는 그럭저럭 괜찮게 마무리되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루비아나가 만족스럽게 식기를 내려놓기 무섭게 루이먼드가 벌떡 일어났다.

“루이?”

“가요, 비아.”

루이먼드가 대뜸 루비아나의 손목을 붙잡고 급하게 식당을 벗어났다.

“어? 어어?”

루비아나는 당황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미혼의 하녀들도 덩달아 당황해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녀장을 비롯한 기혼자들은 그러려니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왜? 뭐야, 저 표정?’

그들의 갸륵한 표정이 무슨 뜻인지는 침대에 내던져지듯 눕게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루비아나는 박력 있게 웃통을 벗어 던지는 루이먼드를 보며 비명을 질렀다.

“루이? 아니 왜!”

“잠깐만요, 잠깐이면 돼요. 금방 끝낼게요.”

“아니, 그러면서 한 번도 금방 끝난 적이 없을 텐…… 읍.”

사람 입을 입으로 막는 데 아주 도가 튼 루이먼드였다.

결국 루비아나의 우려대로, 루이먼드는 그녀를 금방 놔주지 않았다. 든든히 먹은 음식을 모두 소화하고야 품에서 놔주었다.

그것도 완전히 놔준 건 아니고, 꽉 끌어안고 있던 팔을 느슨하게 풀어 준 것에 불과했다.

‘아니 왜? 뭐가? 뭣 때문에? 도대체 어디에서? 뭐가?’

루비아나는 혼돈에 빠져 머리를 싸맸다.

속으로만 생각했다 싶었는데 어느새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왔는지, 루이먼드가 웃으며 속삭이듯 답을 말해 주었다.

“물 마시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요, 비아.”

“……?”

전혀 이해가 안 되는 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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