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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먼드가 잠깐 하인들에게 저택 정원 정리에 대해 지시할 게 있다고 자리를 비웠을 때, 루비아나는 시녀장에게 아주 진지하게 물어봤다.
“혹시, 결혼하고 나서 나 몰래 내 남편에게 뭐 먹이고 있어?”
“딱히 드리는 건 없습니다만.”
“그런데 왜 저러지?”
루비아나는 장의자에 길게 누워 손을 뻗었다.
북부에서 온 보고서가 테이블 위에 쌓여 있었다. 그것을 잡으려는데, 시녀장이 서류를 빼앗고 따뜻한 잔을 들려 주었다.
몸에 좋은 약차였다.
시녀장은 루이먼드를 챙기는 게 아니라 루비아나를 챙기고 있었다. 루비아나는 이게 뭐냐고 묻지도 않고 후후 불어 마셨다.
“원래 신혼은 그런 거랍니다.”
시녀장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그 전부터 같이 살았는데? 딱히 신혼이라고 달라질 게 있나?”
“그거랑은 상관이 없지요.”
“왜 상관없어?”
루비아나가 빈 찻잔을 내려놓고 기어이 보고서를 들어 올렸다. 그렇다고 보고서를 성실히 읽는 것도 아니었다.
성의 없이 한 장 한 장 훌훌 넘겼다. 마수들의 개체 수가 급격히 늘고 있음. 겨울이 일찍 찾아올 것으로 예상. 귀환 요망. 제발 좀!
루비아나가 수도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북부는 벌써 그녀의 빈자리에 허덕이며 휘청이고 있었다.
“엄살은.”
루비아나는 북부의 비명을 한마디로 넘기고는 턱을 괴고 시녀장을 올려다보았다.
“왜 상관없다고?”
“주변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의 문제지요.”
“마음의 문제?”
‘그렇다기엔 루이는 결혼 전에도 이미 마음의 준비가 돼 있었던 것 같은데.’
루비아나는 제게 계약 결혼을 제안했던 루이먼드를 떠올렸다.
“결혼식을 한다는 건, 세상에 인정받는 거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내 사람이라는 걸.”
시녀장은 제 말을 안 믿는 루비아나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그렇긴 하지. 결혼 서약서를 작성하고, 그걸 교회에 영원히 보관해 두니까. 음, 그래서 마음이 놓인다는 건가?”
그런 마음이라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루비아나 역시 비슷한 마음이니까.
그녀는 아직, 결혼식장에서 두 걸음을 남겨 두고 루이먼드가 갑자기 멈춰 섰을 때 조급해졌던 기분을 기억하고 있었다. 얼른 결혼식을 끝내 세상 사람들에게 이 남자가 내 남편이라는 걸 보여 주고 싶었던 만큼, 법적으로 부부가 된 지금 상태가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그럼 좀 느슨해져야 하는 거 아냐? 잡은 물고기를 보고 더 안달복달하는 이유가 뭐지?”
루비아나의 머리에 물음표가 백만 개 맺혔다.
“아유,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시녀장이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견딜 수 없이 좋으신 겁니다, 루이먼드 님께서는요. 공작님은 안 그러세요?”
“……나도 뭐, 싫진 않지.”
“좋으시면서.”
“누가 싫댔나? 좋아. 하지만 걱정도 된다고.”
“그때가 좋은 때입니다. 걱정 마시고 지금 이때를 즐기세요.”
웃는 시녀장의 얼굴이 어쩐지 씁쓸해 보였다.
“지금 무슨 생각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내가 걱정한다는 건 루이의 건강이 걱정된다는 의미야.”
“아.”
“아아?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었던 거지? 아무래도 확인해 봐야겠어.”
“아무리 공작님이라 하셔도 제 머릿속까지 들여다보실 방법은 없으실 겁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스스로 말하게 할 수는 있지.”
루비아나가 으스스하게 웃으며 시녀장을 올려다봤다.
수도에서 나고 자란 연약한 귀족 영식들은 이 눈빛을 한번 보면 기겁하며 꽁무니 빠지게 도망가던데. 시녀장은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루비아나를 걱정했다.
“루이먼드 님께도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내가 루이한테 그럴 리 없잖아.”
루비아나가 코웃음 쳤다.
“이참에 전속 주치의를 두어 저택에 머물도록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의사?”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아아, 기억났어. 저번에도 한 번 말했지, 루이가 저택에 오기 전에.”
“그리고 바로 거절하셨지요.”
“…….”
“어떻게 할까요, 이번에도 그만둘까요?”
“……리먼스 부인, 은근히 뒤끝 있어.”
“은근히요?”
시녀장이 인자하게 웃으며 루비아나를 바라봤다.
루비아나는 얼른 말을 고쳤다. 아니, 은근히는 아니지 대놓고, 아주 깊게 있지.
“말했잖아, 난 리먼스 부인을 신뢰하고 있다니까. 주치의 건은, 뭐, 그러도록 하지. 이제 식구도 늘었는데.”
루비아나는 그동안 뭘 그렇게까지 하나며 손사래 쳤던 일을 바로 승낙했다.
저택 내에 주치의를 머물도록 하는 건 웬만한 규모의 귀족들에겐 당연한 일이지만, 루비아나는 지금까지 그러지 않았다. 딱히 수도에 오래 머물 예정이 아니었으니까. 아플 일도 없었고.
하지만 이젠 사정이 달라졌다. 루이먼드를 생각하면, 저택에 의사 한 명쯤 데려다 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루이에게 먼저 허락을 구해야 하는 건가?”
“공작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제가 기회를 봐서 루이먼드 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부디 그 기회가 생길 수 있도록 작작 좀 붙어 있으란 말을 하진 않았다. 루비아나에게 말한 것처럼, 시녀장은 이 좋은 신혼 시절을 두 사람이 마음껏 즐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루이의 허락을 구해야 한다는 거군.”
“앞으로도 계속 그러셔야 할 겁니다.”
시녀장은 놀리듯 말하고는, 마침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때 그 의사는 어떠신가요?”
“그때 그?”
“네. 인근에서 이름이 제법 알려진 의사입니다만.”
“나쁘지 않아. 아니, 마음에 들어.”
루이먼드의 상태를 보고 감히 자신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지 않았던가?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환자부터 살피는 패기가 마음에 들었다.
의사가 알았다면 제발 마음에 들어 하지 말아 달라고 절규했겠지만. 그가 모르는 사이 대화가 이 정도로 이루어졌으니, 이제 그는 필히 아쉴레앙 공작가의 전속 주치의가 되어야 할 운명이었다.
“그럼, 그렇게 일을 진행하겠습니다. 물론, 루이먼드 님께 여쭙고요.”
“아아.”
루비아나는 알았다는 듯, 혹은 귀찮다는 듯 손을 흔들고는 눈을 감았다. 할 말을 다 했으니 잠깐 눈을 붙일 생각이었다. 루이먼드가 오기 전에 체력을 좀 비축해 놓지 않으면…….
달칵.
“비아, 여기 있었군요.”
……비축해 놓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루비아나는 방금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어느새 루이먼드가 코앞까지 와 있었다. 장의자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루비아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루이, 어서 와요.”
루비아나는 반갑게 그를 맞았다. 체력 비축 문제와는 별개로, 반갑긴 했다.
‘아니 내가 이 얼굴을 안 보고 있는 동안 어떻게 숨 쉬고 살았지?’
절대 입 밖으로 꺼낼 일 없겠지만,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화사한 은발이 반짝반짝 빛났다. 까만 눈은 또 얼마나 예쁜지. 역시 어른 말 들어 틀린 게 하나 없었다.
‘역시 남자는 잘생기고 볼 일이야. 실해서 밤일을 밤낮 상관없이 잘하면 더 좋고.’
밤새 무리해 뻐근하던 몸이 순식간에 괜찮아졌다.
‘사람이 너무 잘생기면, 치유 능력 비슷한 효과를 가지기도 하는구나.’
루비아나는 새삼 루이먼드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루비아나의 표정이 잘 보이는 위치에 서 있던 시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돌아섰다. 질렸다는 표정이었지만 입가는 웃고 있었다.
“루이, 일은 다 끝났습니까?”
“네. 간단히 지시만 하고 왔어요. 아까 창밖으로 보니까 정원수들이 시들하던데, 아무래도 영 마음에 걸려서요.”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쪽, 루이먼드는 옆에 시녀장이 있는 걸 못 본 사람처럼 루비아나의 얼굴에 입을 맞춰 댔다. 마치 커다란 개가 달려들어 얼굴을 핥는 것 같았다. 루비아나는 간지러워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루비아나는 지난 3주 만에 새로 생긴 버릇대로, 당연하게 루이먼드의 목을 껴안고 입맞춤을 받아들이려다 멈칫했다. 루비아나는 시녀장의 존재감을 무시하지 못했다.
“비아.”
루이먼드는 멈칫하며 절 잡아 주지 않은 루비아나를 탓하듯 그녀의 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고는, 그녀의 손을 제 목에 감았다.
“잠깐, 잠깐만.”
루비아나는 그런 루이먼드를, 조심스럽게 말리곤 시녀장에게 눈짓했다.
‘보아하니 내 남편이 침실까지 갈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리먼스 부인이 나가 있어.’
배려심 넘치는 주인은 충성스러운 시녀장이 혹여나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느라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다.
시녀장은 꿋꿋이 테이블을 정리하고, 북부의 보고서를 탁탁 정리해 책상에 올려 둔 다음, 원래 한 몸이었다는 양 꼭 붙어 있는 두 사람에게 정중히 고개 숙여 퇴장을 알렸다.
“응, 응, 음.”
루이먼드의 목을 껴안고 있던 루비아나의 손이 까딱까딱했다. 새신랑이 매일 밤낮으로 너무 힘이 넘쳐 곤란하다는 식으로 말하며 한숨짓던 사람이 어디의 누구였는지 모를, 경쾌한 손짓이었다.
시녀장은 서재를 나서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설령 쾅 소리를 내고 나간다 해도 둘은 놀라긴커녕 듣지도 못할 터이나 그래도 시녀장은 조심했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보인 시녀장의 얼굴은 은은히 웃고 있었다.
아마도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리라. 그녀 역시 한때 저런 신혼 생활을 즐겼던 때가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