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131)

***

어느 날, 루비아나는 꽤 이른 시간에 눈을 반짝 떴다. 눈이 금방 말똥말똥해져서 다시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루비아나는 시간을 때울 겸, 저를 꼭 끌어안고 잠들어 있는 루이먼드의 얼굴을 한참 구경했다.

평소라면 루비아나의 눈길을 알아차리고 금방 눈을 떴을 루이먼드가, 오늘따라 쉬이 잠에서 깨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루이먼드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잠든 지 채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았으니까. 오늘따라 루비아나가 유독 일찍 눈을 뜬 것이었다.

‘슬슬 이 생활에도 적응하고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검이나 활을 잡아 본 지 한참 된 것 같았다. 새삼 몸이 근질근질해졌다.

‘잠깐만 나갔다 와도 되겠지?’

루비아나는 곤히 잠든 루이먼드를 깨우지 않으려 조심히 움직였다. 잠든 마수의 발에 깔렸을 때처럼 꾸물꾸물 움직여 몸을 빼냈다.

“으음…….”

루이먼드는 잠결에도 귀신같이 품이 비는 걸 느끼며 뒤척였다. 루비아나는 얼른 이불을 돌돌 말아 루이먼드의 팔 사이로 밀어 넣었다.

“하아, 비아…….”

루이먼드가 이불에 폭, 얼굴을 파묻으며 만족한 숨을 내뱉었다.

자면서도 제 이름을 부르는 게 기특해서 머리라도 한번 쓸어 넘겨 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푹 잘 자고 있는데, 더 자게 놔두자.’

새벽녘까지 깨 있었던 건 분명한데 마지막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졸다 잠깐 눈을 뜨다 다시 졸고. 그런 상태였는데, 루이먼드가 자신을 안아 들어 욕실로 가고, 옷을 입혀주던 장면은 기억이 났다. 옷이라고 해봤자 가운 하나긴 했지만.

피곤해하기는커녕 은은히 웃으며 자신을 번쩍 들었다 놨다하는 루이먼드의 얼굴만은 선명히 기억났다.

‘지치지도 않나, 어떻게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거지……? 원래 다 이런 건가?’

꾸벅꾸벅 조는 와중에도 궁금했었더랬다.

그런데 이렇게 곤히 자는 모습을 보니, 차라리 안심했다. 푹 잘 잔다는 건 건강하다는 증거니까.

루비아나는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 침실을 나왔다.

바닥에 깐 양탄자가 두껍기도 하고, 신고 있는 슬리퍼가 폭신해 발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지만, 혹시나 싶어 절로 걸음걸이가 조용해졌다. 물론 그건 침실에서 나오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모처럼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마시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몸도 바싹 긴장했다.

루비아나는 씩씩하게 걸어가 옷을 갈아입고, 오랜만에 활과 화살집을 챙겨 저택 밖으로 나갔다.

새벽과 아침 사이의 경계에 걸린 시간. 하늘이 푸르스름하고 바닥은 어둑했다. 추적추적 비도 내리고 있었다.

루비아나는 손을 먼저 내밀어 비가 어느 정도 오는지 확인해 보고는 그냥 밖으로 나섰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 우비를 가지고 나올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녀장이나 루이먼드가 봤다면 우비를 안 써도 될 비가 이 세상에 어디 있냐고, 비가 오면 무조건 우비를 챙기라고 잔소리했겠지만.

장대비가 쏟아져도 우비는커녕 갑옷이 녹슬 걸 걱정하고 산을 타고 다녔던 북부에서의 버릇이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북부의 관점으로 이 정도 비는 비도 아니었다. 빗물 때문에 가만히 서 있던 사람이 쓰러져 나갈 정도는 되어야 비지.

루비아나는 가벼운 걸음으로 비에 젖은 땅을 밟았다.

뛰듯 걷는 그녀의 발자국이 옅게 남았다가 이내 빗자국에 쓸려 지워졌다.

저택 뒤쪽에 주변과 어울리지 않은 공터가 있었다.

루이먼드가 이 텅 빈 공간을 보고 다른 곳처럼 정원수와 꽃으로 메꾸려 했는데, 루비아나가 이곳은 그대로 놔둬 달라고 부탁했다.

이곳은 루비아나가 심심하면 나와 활을 쏘는 활터였다. 연무장이 따로 있긴 한데, 활을 쏠 땐 그곳보단 이곳을 더 자주 찾았다.

집무실에서 가까워 정신이 흐트러지면 훌쩍 창문을 뛰어넘어 올 수 있어 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이젠, 거기에 더하여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루비아나는 활시위가 팽팽한지 확인하며 저택을 돌아보았다. 침실의 창문이 잘 보였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다면 바로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침실 창문은 아직 어두웠다. 루비아나는 마음을 내려놓고, 화살집을 어깨에 멨다.

화살집에 빽빽하게 들어가 있는 화살을 손바닥으로 한 번 가볍게 쓸고, 순식간에 하나를 뽑아 활시위에 매겼다.

활을 팽팽하게 당겼다. 그 활시위를 당기는 루비아나의 팔뚝의 근육도 팽팽해졌다. 가볍게 걷던 두 발은, 땅에 뿌리를 내린 듯 우뚝 섰다. 땅에 발자국이 깊이 패었다.

녹색 눈은 저 멀리, 손바닥보다 작아 보이는 과녁을 노려보았다.

휘익-.

화살이 날았다.

탁.

과녁의 정중앙에 꽂혔다.

루비아나는 멈추지 않았다.

화살집은 금방 비었다. 사라진 화살들은 과녁에 빽빽이 박혔다. 중앙에 박히고 또 박혀서, 이미 박힌 화살을 쪼개며 새로운 화살이 박히고, 그 위에 새로운 화살이 다시 박혔다.

루비아나는 화살 한 통을 다 쓰고야 멈췄다.

“후우.”

루비아나는 한결 개운해진 얼굴로 긴 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팔이 다 얼얼했다.

루비아나는 팔을 털며 과녁으로 갔다.

과녁 중앙의 붉은 점을 빗나간 화살은 단 한 대도 없었다. 루비아나는 성한 화살은 뽑아 화살집에 다시 넣고, 쪼개진 화살은 과녁 한쪽에 쌓아 두었다.

그러고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루비아나는 여전히 활을 잡은 채로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마수라도 한 마리 나타나면 딱일 텐데 싶었다.

‘실컷 활을 쏘고 피라도 보면 더 나아지……기는, 개뿔.’

루비아나는 고개를 흔들며, 머리카락에 묻은 후드득, 물방울을 털어 냈다.

그렇게 흥분도 털어 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랜만에 활을 잡아 들뜬 기분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몸 역시 적당하게 달아올랐다. 머리와 옷, 온몸이 비로 흠뻑 젖어 있었으나 추운 걸 몰랐다. 아닌 게 아니라 어깨에서 아지랑이 같은 연기가 피어났다.

더운 몸이 찬비를 만나 수증기 같은 게 나는 것이었다. 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게 빗물인지 땀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이제야 몸이 좀 풀리는 것 같네.’

루비아나는 길게 기지개하며 다시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발걸음이 아까보다 훨씬 빨랐다. 그녀의 흥분 상태를 말해 주는 듯했다.

***

루비아나는 흠뻑 젖은 채 저택에 들어가자마자 시녀장을 마주쳤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었다.

막 일어나 머리를 단정히 묶고 식당으로 가던 시녀장. 우비도 안 쓰고 흠뻑 젖어서는 빗물을 뚝뚝 흘리며 저택으로 들어오는 루비아나.

“……!”

“……!”

둘은 서로를 보고 함께 깜짝 놀랐다.

‘망했다.’

루비아나는 낭패감을 느꼈고, 귀신 보듯 놀라던 시녀장의 얼굴은 곧 시뻘게졌다.

“공!”

“쉿!”

“……작님.”

시녀장이 금세 목소리를 낮췄다. 루비아나는 시녀장의 이런 눈치 빠른 태도가 더없이 마음에 들었다.

“이게 지금 무슨…… 꼴이신가요?”

이를 악물고 말하는 모습이 포효하기 직전의 마수 같았다.

“그냥 오랜만에 몸 좀 풀려고 했지.”

“우비를 안 쓰시고 말이지요?”

“딱히 쓸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네, 그래서 흠뻑 젖으시고, 저택까지 다 물바다로 만들려고 하시는군요.”

시녀장은 루비아나가 서 있는 자리에 만들어진 물웅덩이를 우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미안. 씻을게, 얼른 씻을게. 그럼 되지?”

루비아나는 큰 보폭으로 걸어 한 번에 계단 두 칸, 세 칸을 겅중겅중 뛰어올랐다.

“다, 닦고 가셔야지요!”

“쉿! 큰 소리로 말하지 마, 루이가 아직 자고 있거든.”

“공작님께서 제가 큰 소리를 안 내도록 하시면 되는 거 아닐까요?”

“오, 리먼스 부인. 루이가 온 뒤로 날 너무 막 대하는 것 같아.”

“그게 공작님 탓이라는 생각은 안 드시나 보죠?”

“루이를 믿고 날 쉽게 보는 건가 했지.”

“원하시는 대로 루이먼드 님께 다 이르면 될까요?”

“나도 리먼스 부인이 나 구박하는 거 루이한테 다 이를 거거든. 이따 루이가 누구 편을 드는지 두고 보자고.”

루비아나는 계단 아래에 서 있는 시녀장에게 씩, 웃어 보이고는 최대한 보폭을 크게 걸어 욕실로 갔다.

최대한 바닥에 빗물 자국을 덜 만들려고 나름 애썼으나, 시녀장이 이 노력을 알아줄 것 같지는 않았다.

욕실로 가자마자 일단 비에 젖은 옷을 벗었다. 그러고 나니 텅 빈 욕조가 보였다.

찬물은 옆의 큰 항아리에 가득 들어 있고, 뜨거운 물을 원하면 시녀장이나 하녀를 불러와야 할 것 같았다.

‘그냥 찬물로 씻지 뭐.’

안 그래도 오랜만에 활을 잡아 흥분한 상태였다. 찬물을 뒤집어쓰면 몸이 좀 식겠지 싶었다.

항아리 뚜껑을 열어 보려는데, 욕실 문이 열리며 하녀들이 들어왔다. 낑낑거리며 들고 오는 게 뭔가 보니, 뜨거운 물이었다.

“시녀장님께서 절대 찬물로 씻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

‘리먼스 부인이 언제부터 예지력을 가지게 된 거지?’

“아, 시녀장님이 본인은 예지 능력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그런 생각 할 시간에 우비를 쓰고 다니자는 생각을 한 번 더 하시라고도 하셨어요.”

“…….”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예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루비아나는 뜨거운 물로 몸을 씻고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하녀들이 갈아입을 옷을 내밀었다.

‘이크.’

루비아나는 거울 앞에 서서 막 가운을 벗으려다가, 슬쩍 드러난 어깨에 가득 찍혀 있는 붉은 자국에 놀라 얼른 가운을 다시 여몄다.

지난밤의 흔적들이었다. 늘 루이먼드가 씻겨 줘 한동안 남에게 몸을 보인 적 없어서 깜빡 잊고 있었다.

루비아나는 하녀들을 뒤로 좀 물리고, 거울 앞에 가까이 서서 슬쩍 가운을 열어 보았다.

‘이런.’

감탄과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온몸에 키스 마크가 수두룩했다. 크고 작은 상처들을 전부 덮어 상처 자국이 안 보일 정도였다.

특히나 카드릭에게 관통당했던 어깨 상처는, 거기에 상처가 있었나 싶은 수준이었다.

‘하녀들을 내보내고 혼자 갈아입어야겠다.’

한숨을 내쉬며 하녀들에게 명령을 내리려 할 때였다.

꺄악! 옆에서 들뜬 비명이 터져 나왔다. 등 뒤에선 빠르고 성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루비아나는 어렵지 않게 이 침입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루이.”

그의 이름을 부르기 무섭게, 탄탄한 몸이 부딪쳐 왔다. 두 팔이 허리를 감싸 안는 게 느껴졌다.

“내가 하지, 다들 나가 보게.”

루이먼드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차갑고 딱딱했다.

‘어라?’

루비아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근 한 달 가까이 그와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동안 루이먼드는 늘 녹아내릴 듯 달콤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이런 차가운 목소리 따위,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건만.

“루이?”

루비아나는 제 귀를 의심하며 루이먼드를 불렀다.

“비아.”

귓가에 나직한 저음이 닿았다. 역시나 부드럽고 달달했다.

‘아까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루비아나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혼란스러운 건 루비아나 뿐인 듯 했다.

하녀들은 놀라거나 머뭇거리는 대신, 순순히 물러났다.

‘저택 관리를 다 이 사람이 맡고 있다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군.’

어느새 고용인들까지 손에 휘어잡은 듯했다. 루비아나는 약간의 위기감을 느꼈다.

‘반드시 리먼스 부인 말고 내 편을 들게 해야지.’

시녀장과 루이먼드가 힘을 합치면 이곳에서 살아남기 힘들리라.

“비아.”

루이먼드가 벌어진 가운 사이로 드러난 어깨에 입을 맞췄다.

“왜 이 몸을 아무한테나 함부로 보여 주는 겁니까?”

쪽, 다시 어깨에 입술이 닿았다. 함께 부딪쳐 흩어지는 목소리가 그르렁대는 것처럼 들렸다.

“지금, 뭐라고……?”

“앞으로는 나한테만 보여 줘요.”

“방금, 함께 있었던 건 하녀들이었습니다만?”

“네. 그러니까 ‘남’이죠.”

루이먼드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루비아나는 있는 거울을 통해 루이먼드의 얼굴을 보았다. 까만 눈이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어져 있었다.

거기에 대고 차마, 너도 3년 뒤 남이 될 예정이지 않냐고 말할 순 없었다.

아무리 마수 사냥이 일상인 삶을 살고 있다 해도, 얌전히 자고 있는 마수의 코털을 건드려 깨우고 싶진 않았다.

루비아나가 눈만 데굴 굴리며 가만있자, 루이먼드가 빙긋 웃으며 루비아나를 안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어떻게든 자신이 원하는 답을 듣고 싶은 듯했다.

“씻고 입는 데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내가 할게요.”

“아니요, 그럴 것까진 없는데.”

루비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녀들이 많은데 왜 그런 일을 루이, 당신에게 시키겠습니까? 설사 일손이 부족해도 그러진 않을 겁니다. 사람을 더 뽑으면 뽑았지.”

‘내 가문이 펠트하르그 공작가만큼 부자는 아니어도, 모처럼 얻은 남편 손에 물 묻힐 정도는 아니지.’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에게 아쉴레앙 공작가의 재산 규모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루이,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당신 몸을 보고 만질 사람을 더 뽑겠다는 말입니까?”

말이 엇갈렸다.

아쉴레앙 공작가는 목욕 시중 하녀만 1000명을 뽑아도 끄떡없을 거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루비아나는 말을 채 하지도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루이?”

“네, 비아.”

목덜미에 거친 숨소리가 닿았다.

루비아나는 설마, 하는 마음에 물어보았다.

“……혹시 화났습니까?”

“설마요.”

바로 대답이 날아왔다.

‘아닌가? 그럼 왜……?’

루비아나가 마음 놓기 무섭게 루이먼드의 말이 이어졌다.

“잠에서 깨 눈을 떴는데, 계속 함께 있다고 생각했던 내 부인은 보이지 않고, 난 이불을 돌돌 만 것만 끌어안고 있더군요. 화날 리가 있겠습니까?”

“…….”

‘화났구나.’

입술이 닿은 목덜미에 오도독, 소름이 올랐다.

분명 등 뒤에 있는 건 학자의 집 출신 관리인 남편. 태어나서 지금까지 검 한 번 제대로 들어 본 적 없는 샌님인데. 왜 목덜미를 물어뜯길 것 같은 섬뜩함이 느껴지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본능이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널 뒤에서 안고 있는 이놈, 절대 만만한 놈이 아니라고.

“그래도 창밖에 당신이 있어서 오래 찾지는 않았습니다. 당신이 활 쏘는 모습도 실컷 구경했고요.”

“음, 루이, 처음부터 말 안 하고 나가려는 건 아니었는데, 당신이 너무 곤하게 자서 깨우기 싫어서 그랬습니다.”

“그래도 비아, 다시는 이러지 말아요.”

루비아나가 애써 변명해 보았지만 루이먼드에겐 그리 와닿지 않은 듯했다.

루비아나는 절 끌어안은 루이먼드의 팔이 살짝 떨리는 걸 느꼈다.

‘많이 놀랐나 보네.’

루비아나는 오랜만에 죄책감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조금 전 느꼈던 섬뜩함은 깜빡 잊어버리고 말았다.

“미안해요, 얼른 씻고 다시 돌아가려고 했는데…….”

시녀장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니까 찬물로 대충 몸을 씻고 말겠다는데, 굳이 뜨거운 물에 하녀들까지 보내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다니.

루비아나는 시녀장을 원망하며 손을 들어 루이먼드의 뺨을 감쌌다. 루이먼드는 눈을 내리깔고 순순히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 모습이 거울에 고스란히 비쳤다. 참 처연해서 루비아나의 양심을 콕콕 찔렀다.

‘루이가 단 한 번이라도 먼저 일어났다고 널 놓고 어디 나간 적 있니? 늘 네가 깨기를 기다렸다 웃으며 아침 인사를 해 주고, 널 안아 주고 있었잖아. 그런데 넌 어쩌다 한 번, 먼저 일어났다고 신나서 활이나 쏘러 나가? 네 남편이 얼마나 놀라고 실망했겠어!’

양심이 오랜만에 큰 소리를 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활 쏘는 게 뭐 중요한 일이라고, 잠든 남편을 놓고 살금살금 빠져나갔단 말인가.

“미안해요.”

“미안하면, 나중에 나랑 같이해요.”

“뭘? 활 쏘는 걸?”

“네, 당신이 좋아하는 걸 함께 하고 싶어요. 잘하지는 못하겠지만 말입니다.”

“아, 그건 걱정 말아요, 정말 배우고 싶다면, 내가 제대로 가르쳐 줄 수 있으니까.”

루비아나는 씩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루이먼드는 함께 취미를 즐기듯 활 쏘는 걸 생각했지만, 루비아나는 전혀 다른 상황을 꿈꾸고 있었다.

그녀는 북부에서 활 한 번 만져 본 적 없는 죄수들을 반년 만에 마수의 눈을 쏘는 명궁 부대로 훈련시킨 전적이 있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하기 싫다는 놈들을 두들겨 패서 눈밭 위에 굴리고, 얼어붙은 손을 활시위에 묶어 놓고 마수 앞에 세워 놓으면 된다.

활을 쏴서 마수를 죽이지 못하면 네가 마수한테 먹히는 거다. 이렇게 말해 주고 돌아서면, 등 뒤로 미친 듯이 활시위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루이먼드는 하고 싶다는 의욕이 있으니까. 수도에서 마수를 구하는 것도 어렵고.’

나중에 기회를 봐서 좀 순하게 잘 가르쳐 줘야지. 루비아나는 루이먼드를 반년 만에 최강의 궁수로 만들 생각에 즐거워졌다.

루이먼드는 제 뺨을 감싼 루비아나의 손을 잡아 내렸다. 허리에 감은 팔을 풀어 아예 루비아나의 두 손을 꼭 감쌌다.

그녀가 어떻게 활을 만지고 화살을 시위에 메겨 날렸는지 확인하겠다는 듯, 굳은살이 잔뜩 박인 손가락을 제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루비아나는 그 손길이 무척이나 야릇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루이먼드의 얼굴은 너무도 담백했다. 아무런 성적 의도도 없어 보였다.

그는 그저 굳은살 박인 손을 부드럽게 쓸고, 손끝을 문지르다 손가락을 얽어 가볍게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건 나뿐인가? 내가 문제인 건가?’

루비아나는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이 붉어지지 않는지 수시로 확인하며, 간질간질하게 올라오는 감정을 꾹꾹 내리눌렀다.

안 그래도 활을 쏘고 와 가볍게 흥분한 상태인데, 찬물이 아니라 뜨거운 물로 씻어 그 흥분이 미처 가라앉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어젯밤 내내 함께했던 루이먼드와 다시 몸을 맞대고 손가락 장난을 하고 있다니.

당장 루이먼드를 덮치고 싶어졌다.

‘진정해. 난 참을 수 있어. 여기서 또 그러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루비아나는 깊이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런 루비아나를 보며, 루이먼드가 슬쩍 웃었다.

루비아나가 맞닿은 루이먼드의 몸에서 느껴지는 떨림, 근육의 긴장 따위로 루이먼드의 마음을 읽듯, 루이먼드도 루비아나의 바짝 긴장해 굳은 근육, 갑자기 깊어지는 호흡 따위로 루비아나의 기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일찌감치 루비아나가 뭘 참는지 알아차리고, 까만 눈이 그녀의 것보다 더 찐득한 감정으로 뒤덮였건만.

루비아나는 제 얼굴색만 살피기 바빠, 그런 루이먼드를 깨닫지 못했다.

첫인상이 워낙 토끼 같아서였을까? 루비아나는 자꾸만 루이먼드 앞에서 방심했다.

그리고 루이먼드는 그녀가 방심한 틈을 단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었다. 그걸 루비아나가 언제쯤 알아차릴까, 루이먼드는 그게 궁금했다.

‘귀여워.’

이럴 때면 밖에선 모두들 괴물 공작이라고 부르는 루비아나가 귀여워서 견딜 수 없었다. 그녀의 속살을, 한낱 하녀들에게조차 보이기 싫을 만큼.

“뭘 그렇게 참고 있나요?”

루비아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움찔, 루비아나가 어깨를 떨었다.

“내가 참기는, 뭘, 참았다고, 그런 말을 합니까?”

딱 듣기에도 뭔가 참다 들켜 놀란 목소리였다.

루이먼드는 눈을 뜨자마자 텅 빈 품을 보고 느꼈던 상실감과 실망감을 애써 잊고, 루비아나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루비아나의 손을 잡은 채로, 손가락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여 루비아나가 입고 있는 가운의 끈을 풀었다. 옆에서 보면 루비아나가 끈을 푸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안 참아도 되는데.”

“루이?”

“말했잖습니까, 옷 입는 걸 도와드린다고요.”

“아니, 나는 분명 그런 일 안 시킨다고……”

“하게 해 줘요, 비아.”

“……입힐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루비아나가 불신의 눈빛으로 거울 속 루이먼드를 노려보았다. 루이먼드는 최대한 선량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희대의 개소리를 입에 담았다.

“입으려면 일단 벗어야지요.”

끈을 푼 가운이 흘러내렸다. 루비아나는 잡힌 손을 변명 삼아 굳이 그것을 주우려 하지 않았다.

루비아나가 혹여나 주우려고 할까 봐, 루이먼드가 얼른 발로 차 버린 건 그다음의 일이었다.

그 모습을 본 루비아나가 웃음을 터뜨렸고, 루이먼드는 웃느라 떨리는 그녀의 어깨에 깊게 입 맞췄다.

혹시나 해서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은 안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놀라 후다닥, 시녀장에게로 도망갔고. 둘이 제 발로 나오기까지 한동안 욕실 근처는 고용인들 접근 금지 구역이 되었다.

“좋을 때지.”

첫날밤 루이먼드의 목욕 시중을 들었던 하인은 그 소식을 듣고는 흐뭇하게 웃으며, 힘껏 도끼를 내리찍었다.

파삭. 장작이 두 쪽으로 시원하게 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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