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131)

***

욕실 거울 앞에서 꽤 오랜 시간을 서 있어야 했던 루비아나는 땀범벅이 되어 다시 욕조에 들어가야 했다. 제 발로 걸어가지도 못하고 루이먼드의 품에 안겨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힘든 건 아니었으나 루이먼드가 그녀를 안고 욕실에 들어가지 않으면 죽는 병에 걸렸으니, 그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안겨서 이동했다.

루이먼드는 하녀들을 불러 뜨거운 물을 새로 채우게 한 뒤, 직접 루비아나를 씻겨 주었다. 하녀들은 욕실 안으로 한 발자국도 못 들어오게 했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옷이 목욕물에 젖어 몸에 착 달라붙는 걸 구경하다가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루이도 씻어야 되지 않느냐는 말을 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루이먼드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루비아나에게 달려들었다.

루비아나는 스스로 불러온 재앙, 아니 축복으로 인해 오랫동안 욕조 안에서 머물러야 했다. 뜨겁던 욕조물이 미지근해져도, 후끈하게 달아오른 욕실의 공기는 쉬이 식지 않았다.

습기 찬 곳에서, 그것도 뜨거운 물 속에서 영차영차 움직이는 건 의외로 체력이 많이 필요한 일이었다. 루비아나는 욕실에 들어갈 때보다 더 지쳐서 나왔다.

‘이러다 금방 애 들어서겠어.’

둘은 무슨. 체력만 되면 셋도 낳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에게 안겨 욕조를 나오며, 아쉴레앙 공작가의 후손이 끊길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여러 복잡한 상황을 다 제쳐 두고 루이먼드를 남편으로 삼은 건 최고의 선택이었다.

역시 외할머니의 말씀이 맞았다. 남편감을 고를 땐 다른 조건 다 제쳐 두고 잘생기고, 참하고, 아랫도리 실한 것만 보면 된다고 하셨던 그 말씀.

루이먼드는 옷도 입혀 주고 머리카락도 잘 말려 준 다음, 루비아나를 얇은 담요에 돌돌 말아 다시 안아 들었다.

루이먼드는 루비아나가 제 발로 걷는 걸 못 하게 하려고 작정한 사람 같았다.

스무 발자국 남짓한 거리의 침실까지 걸어가며, 루비아나는 매서운 눈으로 복도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누구든 이 근처를 우연히 지나다가 이 모습을 보게 된다면 반드시 그 우연의 대가를 치르게 하리라. 자신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살의에 불탔다.

다행히도 시녀장이 미리 그 근처를 접근 금지 구역으로 선포한 덕에, 복도에는 둘 외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루비아나를 침실에 도로 데려다 놓은 루이먼드는 그녀를 소파에 앉혀 놓고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곤 혼자 침실을 휙 나가 버렸다.

‘아니 나보고는 혼자 나가지 말라더니, 자기는 혼자 나가?’

루비아나는 잠깐 배신감을 느꼈으나 루이먼드가 곧 아침 식사가 든 트레이를 직접 끌고 오는 걸 보고는 마음을 풀었다.

아침 식사를 끝낸 뒤, 기운을 차린 루비아나는 모처럼 활기찬 하루를 보내 보려고 마음을 먹었다. 마음만.

일단 서재로 가서 밀린 일을 하고 시녀장도 괴롭히고 하려고 했는데.

“……비아.”

루이먼드가 또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울먹울먹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가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조심스럽게 손목을 붙잡고는 손등을 손가락으로 부볐다.

“급한 일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요.”

그 울먹울먹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다.

“아니, 그렇게 급한 일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루이먼드가 고개를 들었다. 반짝 빛나는 눈가는, 그럴 리 없지만 그 잠깐 새 울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속으면 안 돼, 이 사람은 원래 눈이 촉촉해. 눈빛이 저렇다고.’

루비아나의 이성이 절절하게 외쳤으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은 아니라는 건가요?”

루이먼드가 작정하고 활짝 웃어 보였다.

루비아나의 이성은 그 눈부신 웃음에 철저히 패배했다.

서재에 가득 쌓여 있는 서류? 칼레나의 독촉? 그게 뭐 중요하고 급하단 말인가?

나중에 하면 되고, 한 번 더 혼나면 되지.

“뭐,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좀 더 같이 있어요.”

“좀 더, 말입니까?”

“네. 조금만, 조금만 더요.”

결코 ‘조금’일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루비아나는 두 팔을 펼쳐 루이먼드를 안아 주며, 그의 너른 등을 토닥토닥 쓸어내리며 자신이 황제가 아니라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공작이어서 미남에게 빠져도 제국 말고, 가문만 하나 말아먹고 말 테니. 얼마나 소박하고, 남들에게 피해도 안 주고…….

“비아, 딴생각하지 말랬는데.”

“아…….”

***

그렇게 잘생긴 남편에게 홀려 중요한 나랏일을 등진 대가는 아주 컸다.

칼레나는 이 이상의 방탕한 삶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점심 식사 시간 때부터 한 시간에 한 번씩 황실 시종을 보냈다.

“맡긴 일은 어찌 됐는지 폐하께서 궁금해하십니다.”

“적어도 오늘은 답을 주실 줄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더는 늦으면 안 되니, 반드시 오늘 안에 검토한 것을 넘겨 달라고 하셨습니다.”

시종들은 앵무새같이 했던 말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하면 되잖아, 하면!”

결국 루비아나는 침실에서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다.

천근만근 무거운 발을 움직여 서재로 가 산더미 같은 서류를 처리해야 했다.

침실에 토끼 같고 다람쥐 같지만 사실은 마수 같은 요망한 남편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데, 종일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어야 하다니. 루비아는 팍팍한 현실에 괴로워했다.

그러면서도 묘하게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내가 지난 한 달 동안 뭘 하고 살았던 거지?’

잊고 있었던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루비아나는 당장 급한 서류부터 처리해 시종장들 손에 실려 보냈다. 그렇게 떠나보내기를 몇 명째.

“오늘은 일단, 제가 마지막입니다.”

마지막 시종이 서류를 받아 들며 말했다.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말이네. 그래, 폐하께서 날 잠은 재우면서 갈구기로 마음 먹으셨나 보지?”

서류 속에 갇힌 괴물 공작의 녹색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반나절쯤 시달리고 나니 황제에 대한 충성심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이때다 싶어 언니를 신나게 갈구는 동생에 대한 분노와 증오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폐하의 깊은 뜻을 제가 감히 어찌 알겠습니까? 공작님, 내일은 월례 회의가 있는 날입니다. 꼭 참석하길 바란다는 폐하의 전언이십니다.”

“가서 폐하께 내 말을 전해 줘. 막 결혼해서 한창 신혼인 사람한테 이렇게 일거리를 막 보내도 되냐고.”

사이 안 좋은 척하자면서, 남들 눈에 띄지 않게 뒷문으로 일거리를 들여보내는 건 도대체 어느 나라 어느 황제의 총애란 말인가? 루비아나가 투덜거렸다.

그렇게 마지막 황실 시종을 보내고 나니, 창밖이 깜깜했다. 벌써 한밤중이었다.

루비아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하, 웃음을 터트렸다.

칼레나든 루이먼드든, 그녀의 시간을 빼앗는 재주가 참으로 탁월했다.

루비아나는 난장판이 된 서재를 둘러보았다. 종이와 펜으로 전쟁을 벌이면 그 전쟁 한복판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은 모습이었다.

중간에 시녀장과 루이먼드가 번갈아 가며 들어와 샌드위치같이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걸 주고 갔던 것 같은데. 그걸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루이먼드가 한 입이라도 먹으라고 들이밀어서 한 입 먹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그렇다고 지금 딱히 배고프진 않았다. 시간에 쫓겨 급한 일을 막 마치고 난 후에 따라오는 탈진감에 몸이 늘어졌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가만히 앉아 있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문가에 기대서 있는 루이먼드가 보였다. 목 끝까지 크라바트를 둘러매고, 짙은 색 정장과 구두까지 갖춰 신은 모습이었다.

“살아 있습니까?”

“아마도?”

루비아나가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의복을 갖춰 입고 있는 루이먼드를 본 지도 근 한 달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깔끔한 정장 차림인 루이먼드를 보는 게 어색해 목을 긁었다.

하필 손가락이 닿는 곳에 키스 마크가 선명히 나 있었다. 본인은 알지 못했으나, 그걸 지켜보는 루이먼드 입장에서는 입안이 다 바싹 말랐다.

당장이라도 번쩍 들어 안고 침실로 달려가고 싶은데. 아니, 거기까지도 가기 힘들 것 같았다.

루이먼드는 서재에 놓인 장의자를 힐끔, 바라보았다.

‘저기서…….’

검은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하지만 지난 한 달 동안 그랬던 것처럼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진 않았다.

오늘 점심 식사도 제대로 못 하고 이 시간까지 서류에 파묻혀 고생하는 루비아나를 보며, 루이먼드도 나름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그래서 루비아나가 열심히 일하는 동안, 그도 그간 소홀했던 저택 관리에 신경 썼다.

시녀장에게 장부를 건네받고, 저택을 둘러보며 청소 상태를 꼼꼼히 살폈다. 부엌에 가서 주방장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식재료 수급 현황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찾아온 황실 시종이 떠나는 걸 보고선, 루비아나의 빈속을 달래 줄 것들을 챙겨 급히 서재로 왔다.

황실 시종이 칠칠맞게 문을 닫지 않고 가, 반쯤 열린 문 너머로 서재 안에 혼자 있는 루비아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루이먼드는 잠깐 문에 기대 루비아나를 구경했다.

가끔 루비아나가 말없이 자신을 구경하듯 바라볼 때마다 뭐 볼 게 있다고 쳐다보는 걸까 궁금했더랬다.

‘이런 기분이었던 걸까? 아니, 지금의 나와 같은 기분이었으면 좋겠는데.’

털썩, 의자에 쓰러지듯 앉아서 뻐근한 목을 꺾어 대며 투덜거리더니 창밖을 보고는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서재를 둘러보며 머리를 감싸다가 갑자기 의욕이 샘솟는지 펜과 잉크를 정리하고, 주변을 치울 것처럼 굴더니 이내 지친 표정으로 다 내려놓고 다시 털썩.

남들이 보기엔 별다른 모습이 아닐 수 있으나 루이먼드의 눈엔 그저 귀엽고 안쓰러웠다.

저대로 책상 위에 올리고 입 맞추고 싶다는 생각도 들긴 했다.

손가락에 펜을 끼워 휘휘 돌리다 손가락에 잉크가 묻자 어이없다는 듯 픽 웃을 땐, 당장에 달려가 그 잉크 묻은 손을 대신 닦아 주고 싶었다. 입술로.

당장 다가가 날 드러내고 몸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닿고 싶은 마음과 꾹 참고 지켜보고 싶은 마음.

두 마음이 팽팽하게 줄다리기했다.

결국 노크를 하게 된 건 그 두 마음 중 어느 쪽 때문도 아니었다. 루비아나가 자신의 배를 손으로 문질러서였다.

별생각 없이 한 행동일 수도 있으나, 루이먼드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루이먼드는 옆에 세워 둔 트레이를 끌고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루비아나는 책상 앞의 소파를 권하고, 자신도 그 맞은편에 앉았다.

아직 따뜻한 음식들을 테이블 위에 올렸지만 루비아나는 그리 반가워하지 않았다. 루이먼드가 티 포트와 찻잔을 꺼냈을 땐 대놓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종일 무리했잖아요, 술은 안 됩니다.”

“무리했으니까 피로를 푸는 김에 한잔하는 것도 나쁘지 않던데요.”

“빈속에 안 좋아요. 그렇다고 딱히 입맛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죠?”

루이먼드가 수프 접시를 슬쩍 앞으로 밀며 물었다. 아니라고 하면 이 수프를 다 먹어 증명해 보라 할 것 같았다.

루비아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합니다.”

“그러니까 안 됩니다.”

루이먼드는 단호하게 말하며 루비아나 앞에 찻잔을 놓고 차를 따랐다.

황금빛 찻물이 찻잔 안에서 찰랑였다. 향 하나는 끝내주게 좋았다.

루비아나는 그 향에 이끌려 한 모금 마셔 보았다.

“음…….”

‘맹숭맹숭하군.’

향만 좋은 차였다. 그래도 루이먼드가 따라 준 거니 남기기 싫어 홀짝홀짝 마셨다.

루이먼드는 그런 그녀를 기특하다는 듯 바라보며 슬쩍 말을 꺼냈다. 지금 마시고 있는 차에 대한 이야기였다.

산지가 어쩌고저쩌고, 가향 비율이 이러쿵저러쿵 아는 척했다면 아무리 루이먼드의 말이라 하더라도 루비아나는 귀담아듣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루이먼드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이 차에 얽힌 전설을 이야기해 줬다.

방금 전까지 복잡한 내용을 검토하고 머리를 굴렸던 터라, 이런 말랑하고 부드러운 분위기가 더없이 반가웠다.

루비아나의 입가에 절로 웃음이 맺혔다.

그녀는 누가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차를 더 따라 마셨다. 더는 술을 찾지 않았다. 시녀장이 봤다면 감격하다 못해 통곡할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 꽃을 말려 만든 차를 우리면, 분명 꽃은 하얀색인데 찻물은 황금색이 된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어떤가요, 옷 속에 황금을 숨기고 다녔던 자린고비 놈을 말려 우린 차 맛이?”

“별맛 안 납니다.”

루비아나는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 긴장이 풀리고 몸과 마음이 편해지는 것과는 별개로, 두 잔 세 잔 마셔도 별맛이 안 느껴지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맞아요, 별 볼 일 없는 놈이니까, 별맛 안 날 수밖에요.”

루이먼드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루비아나의 마음도 한결 더 편해졌다.

그래서인지 슬슬 식욕이 돌기 시작했다. 루비아나는 말랑한 빵을 들어 씹었다.

“잘 생각했어요, 이것도 좀 들어요.”

루이먼드는 반가워하며 가져온 음식을 골고루 권했다.

루비아나는 제 손으로 집어 먹기도 하고, 루이먼드가 먹여 주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먹으며 배를 채웠다.

무척 힘들고 고된 하루였는데, 이렇게 루이먼드의 보살핌을 받으니 그리 나쁜 하루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레나에게 열 받았던 마음도 슬슬 가라앉았다.

‘레나, 너는 루이한테 정말 고마워해야 해.’

흔들렸던 자매의 우정을 지켜 준 루이먼드에게 치얼스.

술은 아니지만, 루비아나는 반쯤 남은 찻물을 벌컥 들이켜는 것으로 건배를 대신했다.

그런데 루이먼드의 눈이 그새 그윽해졌다.

‘아니 내가 뭘 했다고?’

한 거라곤 무드 없이 차를 원 샷 한 것밖에 없었다. 설마 그걸 보고 저렇게 되진 않았겠지 싶은데.

“비아.”

동굴에서 울리는 것 같은 목소리가 루비아나를 사로잡았다. 그의 목소리가, 그의 눈빛이 원하는 건 명백했다.

루비아나는 자신을 열렬히 원하는 눈빛을 정면에서 마주하며 가볍게 몸을 떨었다.

매일 힘들다, 너무 심하다,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정말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좋았다. 이 남자가 자신을 이렇게 열렬히 원하는 게.

“비아.”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을 부르듯 부르는 게.

루이먼드가 빈 잔에 차를 따라 주는 대신 루비아나의 손에서 찻잔을 빼앗아 대신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루비아나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닿자마자 떨어지는 가벼운 입맞춤이었지만, 뜨겁게 달군 인두로 지진 듯 닿은 부위가 화끈거렸다.

까만 눈은 당장이라도 루비아나를 아그작아그작 씹어 먹고 싶어 미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루비아나에게 허락을 구했다.

“비아, 괜찮아요?”

이 말을 할 때만큼은 거절 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루비아나는 그런 그가 신기하고 안쓰러웠다.

‘왜? 왜 아직도 망설여?’

그렇게 허락해 주고 허락해 주고 또 허락해 줬다. 이 정도면 굳이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될 텐데. 거절당하고 거부당할까 봐 겁내지 않아도 될 텐데.

그는 여전히 모든 주도권이 루비아나에게 있고, 자신은 그저 선택받는 존재라는 듯 조심스러웠다.

지금의 모습만 보노라면, 루비아나는 제 남편에게 확신을 주지 않고 잘난 얼굴과 몸만 취하는 못된 여자였다.

루이먼드는 그런 여자에게, 그럼에도 헌신적으로 자신의 모든 걸 바치고, 그렇게 자신을 바칠 수 있는 것에 설레는 호구였고.

억울할 수도 있겠으나 루비아나는 이 구도가 마음에 들었다. 자신에게 닿지 못해 안달 난 루이먼드의 모습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뭐 어때, 아무튼 3년간은 내 거야. 내 거라고.’

한 달 만에 돌아온 현실 감각은 잠시 다시 외출을 보냈다. 이 밤이 끝나고 다시 데려오면 될 일이니까.

루비아나는 제 손을 비틀어 루이먼드에게서 빼냈다.

루이먼드가 다급히 도로 잡으려 하였으나 루비아나가 좀 더 빨랐다.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루이먼드보다 항상 빠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팔목을 낚아채 잡아당겼다.

“어어…….”

루이먼드가 휘청거리며 루비아나 쪽으로 기울었다.

그는 그 와중에도 한 손으로 테이블을 짚어 균형을 잡으려 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그릇들이 떨어져 깨질까 봐 걱정했다.

‘사람을 이렇게 불 질러 놓고 뭘 신경 쓰는 거야?’

루비아나는 발끈하여 한 팔로 루이먼드의 목을 휘감았다.

“비아? 비…… 읍.”

지금까지 루이먼드가 그랬듯 입술을 콱 부딪쳤다.

테이블을 잡고 있던 루이먼드의 팔이 휘청였다. 테이블이 흔들리며, 음식이 든 그릇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뒹구는 소리가 들렸다. 와장창.

하지만 두 사람 중 누구도 접시가 깨졌을까 신경 쓰지 않았다.

루비아나는 소파에 느긋이 기대앉아 있는 채로, 루이먼드는 어정쩡하게 일어서 몸을 굽힌 채로.

그렇게 이어 가던 입맞춤은 루이먼드가 루비아나를 안아 든 후에도 끊어지지 않았다.

루이먼드는 아까 눈여겨보았던 장의자에 루비아나를 눕혔다. 그러고는 손으로 다리를 타고 내려 구두를 벗겼다. 루비아나의 발 역시 손만큼이나 거칠고 상처가 많았다. 그래도 루이먼드에게는 작고 곱게만 느껴졌다.

루이먼드는 루비아나의 발을 손으로 감싸고 그 발등에 기꺼이 입을 맞췄다. 루비아나는 누워 그 광경을 보며 허-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남의 발에 입 맞추는 모습이 이렇게 성스러워 보이다니. 루이먼드와 이런저런 짓을 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이 불경스럽게 느껴지려 하는데.

고개를 들어 루비아나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전혀 성스럽지 않았다.

아주 상스러웠다. 짐승의 눈빛이었다. 아니, 발정기 마수쯤 되는 거 아닌가?

루비아나는 성스러운 입맞춤보다는 이 상스러운 눈빛이 더 마음에 들었다.

마음껏 날뛰어 보라지. 루비아나는 날뛰는 걸 다루는 게 전문이었다.

“비아.”

루이먼드가 그르렁거리는 듯한 신음을 내며 루비아나에게 달려들었다. 루비아나는 기꺼이 그를 끌어안았다.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티 포트에는 아직 마시지 않은 차가 남아 있었지만, 루비아나는 더 이상 별 볼 일 없는 놈이 죽어 피어난 꽃을 우린, 별 볼 일 없는 맛을 내는 차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별 볼 일 있는 남자에게 집중하기에도 바빴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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