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131)

***

아쉴레앙 공작이 한 달 만의 칩거를 깼다.

저택 밖에선 아쉴레앙 공작이 그 결혼식 때문에 황제의 미움을 받아 자숙하는 거라는 요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지만.

아쉴레앙 공작저의 고용인들은 그런 소문을 들을 때마다 코웃음 쳤다.

지금 아쉴레앙 공작 부부의 공용 침실 침대가 부서지기 직전이라 새것으로 바꿔야 할 판인데, 자숙은 무슨.

한 달간의 달달하다 못해 찐득한 신혼 생활에 두 사람은 얼굴에 혈색이 돌다 못해 빛이 났다.

침실과 욕실 접근 금지령이 풀리고, 오랜만에 세숫물을 들고 침실에 들어온 하녀들이 제일 먼저 희생되었다.

“으앗, 눈부셔!”

하녀들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동안 운동 부족이었나 봅니다.”

루비아나가 길게 기지개 켜며 웃고 있었다.

힘들다 힘들다 주문을 욀 땐 언제고, 이제는 한결 가뿐해 보였다.

그러고 보면 처음에 익숙하지 않을 때가 힘들었지 매일매일 하니까 금방 적응해서 괜찮다는 둥,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고 나니 몸이 개운하다는 둥 말을 이었다.

하녀들은 그녀의 말에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어찌할 줄 몰랐다.

“다행입니다, 비아.”

루이먼드만이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루비아나의 말에 기뻐하며 오늘 밤을 기약하듯, 그녀를 껴안고 뺨에 입을 맞췄다.

하녀들은 마음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두 사람을 대신해 부끄러워했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결혼하시고 나서 우리 공작님, 분위기가 좀 달라지신 것 같지 않아?”

“응. 예전엔 진짜 무서웠는데 요즘엔 좀…… 사람 같으셔.”

“맞아, 맞아. 특히 루이먼드 님과 함께 계실 때는 더더욱.”

“아니, 난 루이먼드 님이랑 함께 계실 때만 그나마 사람 같아 보이던데.”

하녀들은 자신들이 어느새 루비아나를 ‘우리’ 공작님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루이먼드는 드레스 룸까지 따라가서 셔츠를 골라 주고 크라바트를 다정히 매 주었다.

루비아나는 말로는 이렇게까지 해 줄 필요 없다고 하면서도, 루이먼드를 말리지 않고 가만 내버려 두었다.

집중하여 크라바트를 매어주는 루이먼드를 바라보는 녹색 눈은 예전처럼 차갑지도 싸늘하지도 않았다.

“진짜 이렇게까지 해 줄 필요 없다니까.”

“내가 해 주고 싶어서 그래요.”

“이런 일 시키려고 당신이랑 결혼한 거 아닙니다. 당신은 그냥 편하게……”

“그 셔츠, 내가 다린 거예요.”

“…….”

“비아, 당신을 돌보는 게 정말 즐거워서 그래요. 내가 다린 셔츠를 입고 내가 매 준 크라바트를 한 모습을 보는 게 좋아서. 그러니까 내 멋대로 하게 놔둬요, 응?”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루비아나가 목을 움츠리며 서둘러 돌아섰다. 이번만큼은 루이먼드뿐 아니라 하녀들까지 그녀의 귓불이 붉어진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당연히 루이먼드의 입이 헤벌쭉하게 벌어졌다.

“아, 비아. 진짜 보내기 싫다.”

루이먼드가 끝까지 루비아나에게 치댔다. 차마 입궁하지 말란 소리는 못 했지만, 그러길 은근히 바라는 눈치였다.

루비아나는 미안해서라도 자꾸 덤벼들어 껴안으려 하고 뽀뽀하려고 하는 루이먼드를 끝까지 밀어내지 못했다.

마차에 오르기 직전까지 떨어지지 않는 두 사람의 모습은, 그냥 평범하게 뜨거운 신혼부부의 모습이었다.

북부의 찬 바람을 몰고 온 괴물 공작도, 결혼식 날 납치당할 뻔한 폭군의 사생아도, 여기엔 없었다.

“역시 그건 다 뜬소문이었나 봐.”

“그러게. 우리가 왜 그렇게 공작님을 무서워했던 걸까?”

“생각해 보면 그렇게 무서워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아. 우리가 실수해도 한 번도 화내지 않으셨잖아?”

“난 첫날에 너무 긴장해서 공작님 팔에 뜨거운 차를 엎질렀거든. 꼼짝 없이 산 채로 북부에 끌려가 마수의 먹이가 될 줄 알았는데, 공작님은 오히려 나한테 안 다쳤냐고 물어보셨어.”

“그 말을 왜 이제 해! 그때 네가 막 울면서 들어와서 우린 공작님이 너한테 죽이겠다고 협박이라도 하신 줄 알았잖아.”

“뭐? 어떻게 그런 오해를 할 수가 있어? 나한테 한 번 물어보기라도 하지!”

“무서운 기억을 또 생각나게 하는 걸까 봐 못 물어봤지!”

***

한 달에 한 번, 황궁에서는 월례 회의가 열렸다. 오직 황제와 세 공작만이 참석하는 회의였다.

그 회의에서 국가의 중대사가 결정되었기에, 수도의 귀족들과 관리들은 매달 황궁의 월례 회의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요 몇 년간 황궁의 월례 회의엔 황제와 두 공작만 참석했다. 아쉴레앙 공작의 자리는 늘 공석이었다.

황제의 명을 받고 수도로 돌아온 이후엔 항상 참석했으나, 결혼식 이후에도 참석할 수 있을지 모두의 관심이 모였다.

루비아나는 그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당당하게 황궁에 입장했다.

귀족들은 일부러 그녀가 지나는 길에 서서 서성이며, 부채나 장갑을 떨어뜨려 그녀의 시선을 끌려고 했다. 그러다 어떤 멍청한 귀족 한 명의 잘못 던진 장갑이 루비아나의 구두를 덮었다.

주변에 사람이 몰리건 말건 전혀 신경 쓰지 않던 루비아나가 처음으로 걸음을 멈췄다.

“내게 결투를 신청하는 건가? 그런 거라면 기꺼이 받아 주지.”

루비아나는 지금 제법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그래서 나름 상냥하게 물었건만.

“히이이익, 사, 사, 살려 주십시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장갑을 던졌던 귀족은 루비아나 앞에 엎드려 고개를 숙였다. 손끝 하나 대지 않았는데 펑펑 울며 자비를 구하니, 루비아나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운다고 다 마음이 가는 것도 아니군.’

루비아나는 펑펑 우는 귀족의 얼굴을 아무 감흥 없이 보고는 그냥 지나쳤다.

장갑을 잘못 던진 귀족은 등 뒤에 대고 고래고래 살려 주셔서 감사하다고 소리쳤다.

“저래서야 장가나 제대로 가겠나?”

루비아나는 혀를 끌끌 찼다.

시종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회의장은 단 넷만 모이는 회의 장소로 쓰기엔 너무 장엄하고 거대했다.

커다란 홀 중앙엔 커다란 원탁이 놓여 있었다. 문에서 가장 먼 쪽에는 황금을 부어 태양의 형상을 만든 의자가 놓여 있었다.

원탁을 빙 둘러 다른 자리에 놓인 철의자에는 세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루비아나는 은장 백합을 새긴 의자에 앉았다.

“루비 누나, 오랜만이야.”

“이제야 왔군.”

먼저 와 있던 루단테와 카드릭이 아는 척했다.

“얼굴이 엄청 좋아졌네.”

“한 달 동안 아주 신났나 보군.”

놀라는 목소리와 비꼬는 목소리가 함께 들렸다.

루비아나는 오늘따라 유독 뾰족한 카드릭을 보며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부러워? 부러우면 얼른 결혼하든지.”

세 공작 중 유일한 기혼자가 된 루비아나의 여유였다.

“하고 싶으니까 나 좀 도와 달라고 했잖아.”

“…….”

“거, 진짜 좋더라. 니들도 결혼 꼭 해라. 얼른 해, 얼른.”

“진짜? 뭐가 그렇게 좋아?”

“…….”

“뭐가 좋으냐면…… 그냥 다 좋더라.”

루비아나가 씩, 웃어 보였다. 얼굴에서 빛이 나는 듯했다.

퍽. 카드릭이 주먹 쥔 손으로 원탁을 내리쳤다. 쿠웅- 묵직한 소리가 울리며 원탁이 흔들렸다.

“왜 이래? 탁자한테 불만 있어?”

“탁자, 탁자 안 부서졌나?”

루비아나와 루단테는 카드릭의 주먹보다 돌로 만든 원탁에 금이 갔을까 봐 더 걱정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카드릭의 주먹이 다시 한번 떨렸다.

“뭐야, 잘하면 한 대 치겠다?”

루비아나는 껄껄 웃으며 카드릭의 등을 퍽퍽 내리쳤다.

루비아나는 지금 온 세상이 다 아름다워 보이는 상태였다. 카드릭의 돌발 행동에도 당황하긴커녕, 그 행동조차 긍정적으로 보였다.

“그렇게 손뼈가 부러지고 싶었어? 그럼 다른 방법이 있을 텐데, 왜 굳이 이런 무식한 방법을 쓰고 그래? 그러지 마.”

“…….”

카드릭의 눈에 핏발이 섰다.

루단테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러다가 한번 크게 난리 나지.”

칼레나가 도착하자 회의가 시작되었다. 다른 귀족들의 상상과 달리, 월례 회의는 느슨하고 여유로웠다.

동부 치수 사업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 오갔다. 이어 옛 아덴 왕국의 재건을 꿈꾸는 반란 세력에 대한 정보를 공유했다.

루비아나의 결혼식이 습격받은 건에 대해서는 굳이 말이 오가지 않았다.

어느 것 하나 가볍지 않은 주제였으나 분위기는 그리 진지하지 않았다. 그나마 카드릭이 묵직하게 중심을 잡아 줘서 대화가 다른 내용으로 빠지지 않았다.

루비아나는 적당히 집중해서 듣고, 또 어느 것은 적당히 듣는 척만 하며 칼레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칼레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회의가 끝난 후에도 루비아나가 제게 말 걸 틈조차 주지 않았다.

“폐하, 잠시 알현을……”

“다들 수고 많았어. 다음 회의 때 보자고. 아, 아쉴레앙 공작은 다음 달 월례 회의 때까지 황궁 출입 금지야.”

“잠깐, 폐하. 저랑 얘기를 좀……”

“응, 싫어.”

“폐하!”

“가지, 도미넨트 공작.”

칼레나는 루단테만 데리고 훌쩍 자리를 떴다.

루단테는 칼레나를 뒤따라 걸으면서 루비아나를 돌아보았다. 씩 웃는 모습이 그리 얄미울 수 없었다.

루비아나는 홧김에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려다 말았다. 카드릭이 아까 들었던 말을 고대로 읊을 준비를 하는 게 보였으니까.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안고 회의장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나가면 다음 달까지 못 들어올 텐데. 그냥, 여기 어디 숨어 있다가 밤중에 침실로 찾아갈까?’

다른 사람이 감히 그랬으면 제일 먼저 검을 뽑아 들고 달려들어 목을 벴을 거면서, 루비아나는 나는 괜찮다는 마음으로 황궁에 숨어들 생각까지 했다.

숨을 곳을 찾아 주변을 돌아보다 여태 절 따라오고 있던 카드릭을 발견했다.

“으앗, 깜짝이야! 언제부터 따라오고 있었던 거야?”

“무슨 생각을 하기에 사람이 뒤에서 걷는 것도 모르는 거지?”

“…….”

“말 못 하는 걸 보니 한밤중에 폐하의 침실에 숨어들 생각이라도 했나?”

“……!”

루비아나가 눈을 크게 떴다. 그걸 본 카드릭의 하나뿐인 눈이 팍 찌그러졌다.

“설마, 정말로?”

“……아니야.”

“아니긴. 맞는 거 같은데. 이젠 하다 하다 그런 짓까지 하려고?”

“아니라니까. 귀찮아서 안 해, 귀찮아서.”

카드릭에게 들켰으니 그 계획은 시도하기 전에 실패한 것과 다름없었다.

루비아나는 포기하고, 묵묵히 앞만 보고 걸었다.

이대로 카드릭과 멀어지길 바랐지만, 카드릭은 그렇게 쉽게 떨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카드릭은 오히려 보폭을 넓혀 루비아나 옆에 섰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으니, 두 가문의 문장인 은장 백합과 철십자 장미가 새겨진 망토가 승전기처럼 나부꼈다.

그 모습은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기 충분했다.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적발 녹안의 여공작과 금발 벽안의 남공작.

젊은 두 공작은 더없이 잘 어울렸다.

칼레나와 카드릭이야말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 생각했던 사람들마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는 생각을 바꿨다.

카드릭을 팔꿈치로 툭 치며 소소하게 웃는 루비아나. 늘 굳어 있던 입매가 부드럽게 풀린 카드릭. 두 사람의 모습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어머, 저 두 분이 저렇게 사이가 좋으셨나요?”

“그러게요.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정답게 하시는 걸까요?”

사람들이 부채와 입을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비주얼과 달리, 그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그리 정답지 않았다.

“결혼하더니 정신이 나갔군. 그래서야 어디 북부로 돌아가서 마수들과 잘 싸울 수나 있겠어?”

카드릭의 목소리가 뾰족했다.

“젠장,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닌데.”

그는 직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루비아나는 주변의 파닥거리는 부채질 소리 때문에 듣지 못했다.

“걱정 마. 그놈들 존재감은 엄청나거든. 못 알아챌 수가 없어.”

“그것 참 다행이군.”

“전혀 다행스럽지 않은 것처럼 들리는데?”

“그건 알아채면서 다른 건 왜 못 알아채는지 모르겠군.”

“내가 뭘 알아채지 못했다고 그래?”

둘은 서로의 말꼬리나 잡고 늘어지며 마구간에 도착했다.

루비아나는 마구간 하인이 끌고 오는 제 말을 한 번 어루만져 주고는 가뿐히 올라탔다. 카드릭은 루비아나가 말에 오를 동안 하인을 대신해 말 재갈을 들고 있다 건네주었다.

“오늘 무슨 날이야? 왜 이렇게 잘해 줘?”

“고작 이 정도로 잘해 준다니. 평소 내가 뭘 얼마나 못 해줬다고?”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라고 말해 주고 싶군.”

“내가 매달 선의로 보내 준 보고서를 들춰 보지도 않은 건 기억하고 있나?”

카드릭이 눈살을 찌푸리자마자, 루비아나는 바로 태도를 바꿨다.

“늘 고마워하고 있어. 내 마음 알지?”

루비아나는 자신이 그동안 카드릭에게 얼마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줄줄이 말했다.

가만히 놔뒀다간 1000년 후의 후손에게까지 우정을 강요할 것 같았다. ‘혹시 같은 여자를 두고 싸우더라도 무조건 양보해, 펠트하르그한테는. 알았지?’ 이렇게 유언이라도 남길 태세였다.

이렇게 길게 말하는 루비아나를 보는 게 얼마 만이던가. 카드릭은 잠시 기억을 되짚어 보느라 하마터면 루비아나의 말을 흘려들을 뻔했다.

카드릭은 정신을 다잡고 루비아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그런 자신이 우스워 헛웃음 지었다.

‘뭐 하는 짓인지. 정작 이 여자는 나한테 조금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데. 내 꼴이 참 우습구나.’

한 달 만에 보는 루비아나는 이전보다 훨씬 활기차고 의욕 넘쳐 보였다.

카드릭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감격스러울 정도로 좋다가도,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게 자신이 아니라는 것에 분노를 느꼈다.

“……그가 꽤 마음에 드는가 보군.”

그래서 이를 악물고 물어보았건만, 루비아나는 대수롭지 않게 듣고 답했다.

“왜? 네가 보기에도 내 얼굴이 좋아 보여?”

“…….”

카드릭은 침묵을 택했다.

누가 봐도 지금의 루비아나는 이전보다 훨씬 사람다워 보였다. 오죽하면 아쉴레앙 공작이 온다는 소리만 들어도 도망치기 바빴던 귀족들이 겁 없이 주변으로 몰려들고 있겠는가.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카드릭만큼은, 그걸 인정할 수 없었다.

‘나 말고 다른 남자 때문에 변한 나의 루비라니.’

절로 이가 갈렸다.

카드릭이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자, 루비아나가 다시 말을 걸었다. 이 역시 이전의 루비아나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부러우면 말해. 어디 참한 아가씨라도 소개해 줄 테니까.”

“참한 아가씨?”

“그래. 무려 드래곤 심장을 머리에 이고, 드래곤 가죽을 깔고 앉은 아주 참한 아가씨가 하나 있는데……”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카드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농담 아니라니까. 내가 저번에 절실하게 느낀 게, 차라리 도미넨트 공작보다는 네가……”

“루비.”

푸른 눈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천하의 루비아나도 찔끔할 정도로 강렬한 시선이었다.

카드릭이 그녀를 루비라는 애칭으로 부를 땐, 조심해야 했다. 정말로 화났다는 신호니까.

“알았어, 입 다물고 있을게.”

합. 루비아나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너는!”

발끈했던 펠트하르그 공작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그래? 그럼 난 말을 계속해도 될까?”

루비아나가 입을 가렸던 손을 슬쩍 내리며 물었다.

“더 할 말이 있나?”

“응. 아직 도미넨트 공작에겐 말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뭘?”

“결혼식 때 내 남편을 노리는 세력이 있었어.”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 거지?”

“어?”

루비아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카드릭의 푸른 눈이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흔들렸다.

“펠트하르그 공작답지 않은데, 펠트하르그 공작?”

“뭐가, 말이지?”

“무슨 세력이냐고, 결혼식을 습격한 그 반란 세력과 다른 세력이 나타났던 거냐고 묻지 않네?”

워워. 루비아나가 투레질하는 말을 다독이며 말했다. 아침 식사 메뉴가 뭐였냐고 묻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카드릭은 그녀의 말을 듣고 섬뜩함을 느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나도 귀가 있어. 그 정도 내용은 이미 확인했어.”

“아, 그런가? 역시 네가 도미넨트 공작보다 낫군.”

루비아나는 카드릭을 힐끔 보고는 말을 이었다.

“난 일단, 다른 세력인 것 같아. 게일 대령은 내 남편을 보고 왕자님이라느니 말하며 내게서 빼앗아 가려 했는데, 나중에 등장한 것들은 내 남편을 무조건 죽이려고 했거든. 강궁과 철화살로.”

“그런가?”

“강궁과 철화살.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한낱 수도 외곽 경비대였던 게일 대령따위가 구하기 힘든 물건이지.”

“…….”

“그래서 나는 어떤 세력이, 그러니까 누군가가 다른 목적을 가지고 그 혼란한 상황을 노려 루이를 죽이려 한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어.”

“그래서 왜 그걸 나한테 말하는 거지?”

평정심을 되찾은 카드릭이 다시 물었다. 루비아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믿으니까?”

“……의심하는 게 아니고?”

“지금 내가 널 협박하는 걸로 보여?”

“…….”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던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차분한 녹색과 일렁이는 푸른색.

“널 믿어, 펠트하르그 공작.”

“그것 참 고맙군.”

“지금까지 네가 움직일 땐 항상 정당한 이유가 있었지.”

“그렇게 생각해 줬다면 그 역시 고맙고.”

“앞으로도 그러길 바랄 뿐이야.”

“…….”

“…….”

“…….”

먼저 고개를 돌린 건, 푸른색이었다. 카드릭.

“갈게. 가는 길 배웅해 줘서 고마워.”

루비아나는 재갈을 당겨 말을 몰며 인사했다. 돌아서는 루비아나의 얼굴은 차분하고 서늘했다.

오늘 아침, 입궁하는 길. 일부러 마차를 타고 온 건, 결혼식 날 마지막에 등장했던 그림자 둘에 대한 보고를 듣기 위해서였다.

마차에 먼저 타고 있던 부하는 가는 길 내내 조사한 걸 말해 주었다.

한 달씩이나 걸린 것치고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배후는 물론이거니와 두 놈의 이름조차 밝히지 못했다.

시체는 더없이 깨끗했다. 소지품과 몸 어디에도 수상한 점이 없었고, 얼굴이 온전한데도 그들이 어디 사는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부하는 쭉정이 같은 내용을 보고하면서도 송구스러워하지 않았다. 루비아나 역시 부하의 무능함을 꾸짖지 않았다.

그 쭉정이 같은 내용이 결국엔 알맹이였으니까.

완벽히 깨끗하다는 것이 가장 큰 증거였다.

“현재 제국 내에서 이 정도로 암살자를 키울 수 있는 세력이 얼마나 되지?”

“둘입니다.”

“누구?”

“공작님을 제외한 나머지 공작님 두 분.”

“난 왜 빼?”

듣고 있던 공작이 눈썹을 꿈틀했다. 부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답했다.

“귀찮아서 안 하셨잖습니까? 여전히 귀찮아하시니 앞으로도 키울 일 없겠고요.”

“…….”

정곡을 찔려 버렸다. 루비아나는 민망한 마음을 담아 한 번 웃어 보이고는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창문에 비친 루비아나의 얼굴은 루이먼드와 함께 있을 때와 전혀 다른 온도를 가지고 있었다.

둘 중 하나.

루비아나의 저울은 당연히 한쪽으로 기울었다.

배후를 찾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굳이 이유를 묻고 싶은 마음도,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한번, 경고는 해 둬야겠지.”

루비아나는 다리를 꼬고 느긋하게 웃어 보였다. 부하는 그녀가 매우 화나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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