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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먼드는 루비아나가 탄 마차가 떠나 더는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었다.
“이제 그만 들어가시지요, 루이먼드 님.”
시녀장의 말을 듣고야 저택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두어 번 뒤를 돌아보았다. 떠난 마차가 돌아오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인데도, 괜히 서운했다.
참 매정한 사람이었다, 루비아나는.
한창 신혼 때 다른 사람들은 놓고 가지도 않은 물건을 핑계 대며 가다가도 돌아와 찐-하게 입맞춤을 한 번 더 하고 다시 떠난다든가 한다던데.
‘바랄 걸 바라자.’
루이먼드는 혼자서 괜히 기대했다 실망하는 자신을 속으로 타일렀다.
루비아나와 결혼한 지 이제 한 달 남짓.
한 달이라는 시간은 한 사람을 완벽히 알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지만,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는 걸 대략적으로 알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루이먼드가 본 루비아나는 연인이나 남편을 감동시키는 쪽으로는 센스가 꽝이었다.
가던 길을 돌아와 찐-한 키스를 날리는 로맨틱한 장면 따윌 바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내가 하자는 건 다 받아 주잖아. 그럼 됐지, 뭐.’
섭섭한 마음은 잠깐이었다. 금세 루이먼드의 입가엔 흐뭇한 미소가 어렸다. 지난 한 달간 함께 지냈던 기억이 머릿속에 촤라락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빠 한나절 동안 떨어져 있어야 했던 어제까지, 루비아나는 달려드는 루이먼드를 거절하지 않고 받아 주었다.
안아 주었고 먼저 입 맞춰 주기도 했고, 웃어 주었다. 그 품을 파고들어 꽉 끌어안아도 얼마든 마주 안아 주었고.
뜨거웠던 어젯밤을 떠올리니, 몸이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아침부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루이먼드는 손부채를 부치며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난 한 달간, 딱히 아침이라고 안 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루이먼드는 그새 자신이 했던 짓을 잊고, 음전한 신사처럼 굴었다.
루이먼드는 오랜만에 동쪽 계단을 올라 자신의 개인 서재로 갔다. 그의 개인 서재는 루비아나의 서재만큼 크진 않았으나, 햇빛이 잘 비치고 아늑하게 잘 꾸며져 있었다.
책장 한 면에 소설이 꽉 차 있는 게 가장 큰 특징이었다. 웬만한 연애 소설은 다 꽂혀 있어, 요즘 하녀들에게는 루비아나의 서재보다 루이먼드의 서재가 더 인기였다.
루이먼드는 기꺼이 하녀들에게 서재를 개방해 소설을 마음껏 읽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루이먼드를 향한 하녀들의 충성심이 수직 상승한 이유 중 하나였다.
“여기도 오랜만에 와 보는 것 같네.”
한 달 만이었다.
루이먼드는 의자에 앉아 책상을 손바닥으로 쓸어 보았다. 나무의 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한 달간 가출해 있던 이성이 슬그머니 돌아오는 것도 같았다.
‘요즘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겠어.’
정신 차리면 하루가, 일주일이, 한 달이 눈 깜짝할 새 흘러가 버렸다.
루비아나와 함께한 지난 한 달은 꿈결 같았다.
같이 있으면 만지고 싶고 입 맞추고 싶었다. 만지고 입 맞추면 그보다 더한 걸 하고 싶어 안달 났다.
미친 것 같았다. 발정 난 개도 이 정도는 아니리라.
첫 번째 삶에서 아덴 왕국 제일의 방탕아로 살았더랬다. 왕비와 첫째 왕자, 그레이움 백작의 틈바구니에 끼어 그저 살아남기 위해 선택했던 삶이었다.
정작 그땐 수많은 여자들과 염문을 뿌리면서도, 이만큼 잠자리에 흥분한 적은 없었다. 어떤 여자와 잠자리를 가져도 이성을 잃은 적이 없는데.
지난 한 달간, 그는 처음 여자와 자 본 사람처럼 굴었다. 한번 경험하고는,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탐하고 또 탐하고. 그렇게 정신없이 루비아나에게 빠져들었다.
매일, 상처로 가득한 루비아나의 몸에 자신이 만든 자국이 느는 걸 확인할 때마다 어질어질할 정도로 만족감을 느꼈다.
자신이 만든 자국이 조금이라도 흐릿해질라치면, 그 위에 덧입히고 덧입히길 반복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다 입 맞췄다. 밤새도록 루비아나를 끌어안고 사랑을 나눴다. 이른 아침에도 낮에도 함께했다.
아무리 함께 있어도 질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빠져들었다. 중독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새삼 실감했다.
지난 생에서 마약이나 술 등에 중독된 사람들을 숱하게 만났다. 잠시라도 약과 술이 없으면 견디지 못하고 발작하던 사람들. 루이먼드는 자신의 모습이 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잠깐이라도 눈앞에서 루비아나가 사라지면, 품속에 루비아나가 없으면 안달 났다.
루비아나가 화장실에 가자 그 앞을 서성이며 기다리다가 루비아나에게 혼나기까지 했다.
루비아나가 다신 그러지 말라고 정색하는 바람에 다음부터는 쫓아가지 못했지만, 여전히 루비아나가 눈에 안 보이면 어미를 잃은 새끼 오리처럼 안절부절못했다.
루비아나가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다고 서재에 가면, 루비아나가 돌아올 때까지는 침대에 누워 의미 없이 존재했다. 숨 쉬는 것조차 귀찮았다.
루비아나가 조금만 늦어지는 것 같으면 시녀장이나 다른 하녀가 들고 가는 간식과 음료를 뺏어 들고 서재로 찾아갔다.
루비아나가 조금이라도 버거워하거나 정색하거나 싫어했다면, 루이먼드도 감히 한 달 내내 루비아나를 독점할 생각 따윈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루비아나는 그런 루이먼드를 다 받아 주었다.
루이먼드는 루비아나가 제국에서 손꼽히는 기사, 아주 강한 사람이라는 것에 감사했다.
가끔 이렇게까지 짐승같이 굴어도 되나 싶다가도, 얼마든지 받아 주는 루비아나를 보며 더욱 날뛰게 되었으니까.
지난 한 달 동안 루비아나도 루이먼드만큼이나 저택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처음엔 루비아나가 자신과 결혼해 황제의 총애를 잃는 게 아닌가 걱정했다.
미안하기도 하고, 나 살자고 사이좋은 자매 관계를 금 가게 만들어도 되는 건가 죄책감도 느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마음은 희미해졌다. 루비아나가 황궁에 가지 않고 저택에만 머물러서 좋다는 생각만 들었다.
빠질 수 없는 월례 회의 때문에 루비아나를 황궁에 빼앗긴 지금 같아서는, 황제와 루비아나 사이가 더 나빠져서 이런 정기 회의까지 안 갔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면 좀 더 같이 있을 수 있을 테니까. 이렇게 루비아나를 뺏기지 않아도 될 테니까.
“정말 쓰레기 같은 생각이군.”
루이먼드는 쓰게 웃으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정신 차리자.”
그나마 황제의 명으로 루비아나와 떨어져 있는 지금이 루이먼드에게도 기회였다.
함께 있으면 정신 못 차리고 그녀에게 끌려드니. 이렇게 억지로 떨어져 있을 때라도 외로움을 무기 삼아 정신을 차리고 일해야 했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해. 좀 더 유능하고 멋진 모습을 보여서 비아가 날 더 좋아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벌써 아무것도 안 하고 한 달이나 지나 버렸잖아. 3년은 짧아,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한 채 끝나 버릴 거야.”
그럼 바로 합의 이혼.
루비아나는 그동안 고마웠다고 말하며 깔끔히 돌아서리라.
흠칫.
루이먼드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아무렇지 않게 자신에게 등을 보이는 루비아나의 모습을 상상해서였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안 돼, 이래선 안 돼. 좀 더 유능해져야 해. 고작 저택 관리밖에 안 하고 있잖아.”
루이먼드의 검은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만약 시녀장이 지금 루이먼드의 말을 들었다면,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루이먼드 님만 모르신다고 말해 주었을 것이다.
아쉴레앙 공작저는 현재,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시녀장은 완벽하게 저택을 관리하고 집안 대소사를 관장하는 루이먼드에게 깊이 감사하고 있었다.
하인, 하녀들 역시 두려움을 벗어던지고, 처음으로 아쉴레앙 공작가에 소속감을 느껴 가는 중이었다.
그래도 루이먼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직 배고팠다.
‘더 좋은 모습을 보여 줘야 해. 그래야 비아가 날 더 좋아해 줄 테고, 그러면 3년 뒤에 이혼하자는 말을 안 하겠지?’
순간, 희망찬 미래를 꿈꾸던 루이먼드의 검은 눈이 차갑게 굳었다.
자신과 루비아나의 행복한 미래에 가장 큰 방해물인 사람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펠트하르그 공작.
“나의 루비.”
그가 불길 속에서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했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리라.
“절대, 그렇게는 되지 않을 거야.”
너의 루비가 아니라 나의 비아야. 루이먼드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아쉴레앙 공작저에 들어온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루이먼드는 루비가 박힌 장식을 한 번도 몸에 걸치지 않았다.
결혼식 후 귀족들이 보낸 결혼 축하 선물이 저택에 차고 넘치도록 쌓였는데 루비아나는 당연하게도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시녀장은 목록을 정리해 루이먼드에게 어떻게 할지 물었다.
루이먼드는 일단 펠트하르그 공작이 보낸 건 제일 구석진 창고에 처넣었다. 다른 선물 중에서 루비가 들어간 것 역시 전부 지하 창고에 처박았다.
‘앞으로 내가 여기 있는 한, 이곳에 루비는 발도 들이지 못할 거야.’
루이먼드는 아무 죄 없는 붉은 보석에 대한 증오를 불태웠다.
“루이먼드 님.”
시녀장이 한 뭉치 서류를 들고 들어왔다.
“아, 리먼스 부인. 어서 와요.”
“확인해 주실 것들이 많아서요. 모처럼 혼자서 조용히 쉬시는데 방해했습니다.”
“방해라니요. 리먼스 부인이 그렇게 말하면 오히려 내가 섭섭합니다. 그런 말 말아요.”
“감사합니다, 루이먼드 님.”
시녀장은 온화하게 웃으며 밀려 있던 일거리를 내밀었다.
루비아나가 일하러 자리를 비운 동안은 루이먼드 역시 정신을 차리고 일할 수 있는 상태가 되니까. 시녀장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더 유능해지고 싶다고 의욕에 불타던 루이먼드는 기꺼웠다.
루이먼드는 장부를 확인하고, 시녀장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렸다. 시녀장은 메모까지 해 가며 경청했다. 루이먼드가 말을 할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정말 대단하세요. 수십 년 동안 집안일을 도맡아 온 귀부인들께서도 이만큼 세심하지는 못할 겁니다.”
“하하, 뭐 그렇게까지야…….”
루이먼드는 지난 일곱 번의 삶을 떠올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번이 여덟 번째 삶. 지난 일곱 번 동안 온갖 경험을 했더랬다. 그 경험들이 루이먼드를 이만큼이나 능숙하게 만들어 주었다.
‘같은 삶을 반복해서 살았던 게 아주 쓸모없는 일만은 아니었군.’
루이먼드는 소소하게나마 위안을 받았다. 그래, 그 일곱 번의 삶이 아주 헛된 것만은 아니었어.
루이먼드가 고쳐 준 장부를 돌려받은 시녀장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루이먼드에게 말했다.
“루이먼드 님, 밖에 그레이움 백작이 와 있습니다.”
“……!”
루이먼드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자신이 그런 모습을 보였다는 걸 깨닫자마자 바로 어깨를 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노력했으나 손끝이 떨리는 걸 숨길 순 없었다.
그레이움 백작은 그에게 악몽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레이움이란 이름 따위,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고 잊고 싶은데. 잊을 만하면 이렇게 등장하여 그의 신경을 거슬렀다.
‘왜 찾아온 거지?’
루이먼드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한 번이면 된다고, 한 번만 루이먼드 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문 앞에 서서 떠나질 않는데, 어떻게 할까요?”
말을 전하는 시녀장의 표정 또한 그리 좋지 않았다.
루비아나가 저택에 있었다면, 시녀장은 절대 루이먼드에게 이 문제를 묻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레이움 백작은 일부러 노린 것처럼 루비아나가 없을 때 공작저를 찾아왔다. 시녀장은 그의 방문을 루이먼드에게 알리고, 그의 명령대로 움직여야 했다.
시녀장은 루이먼드의 명령을 기다렸다.
“…….”
루이먼드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안 보고 싶다. 나중에라면 모를까 지금은 더더욱.’
루비아나와 함께하는 삶에 그레이움 백작이라는 이물질이 끼어들었다.
지난 한 달 동안의 소중한 기억에 더러운 얼룩이 묻는 것 같았다. 당장 얼룩을 도려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쫓으라고 말하기엔, ‘아쉴레앙 공작 부군’으로서의 책임감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내부 사정이야 어떻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그레이움 백작가는 아쉴레앙 공작가와 혼인으로 엮인 가문이다.
무턱대고 그레이움 백작가를 박대하면, 다른 사람들 눈에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그레이움 백작가가 힘없는 가문도 아니고.
다들 이러쿵저러쿵 쑥덕댈 것이다. 여론을 휘어잡는 데는 도가 튼 그레이움 백작이 나서서 안 좋은 소문을 흘릴지도 모른다.
아쉴레앙 공작가의 평판에 흠이 갈 게 틀림없었다.
그는 루비아나와 아쉴레앙 공작가에 조금이라도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유능해져서 도움이 되겠다고 다짐했던 게 바로 조금 전이건만.
‘보기 싫다……. 원래도 보기 싫었는데 더더욱 보기 싫어. 그래도…… 봐야겠지?’
루이먼드는 울적한 눈을 들어 시녀장을 올려다봤다.
“안으로 들……”
“늙으면,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괜히 말이 하고 싶어져 입이 근질거려서 말입니다.”
“리먼스 부인?”
“요즘엔 덜하지만, 처음 폐하의 명을 받잡고 이 저택에 왔을 때만 해도, 가장 처치 곤란이었던 건 게으른 주인님도, 딱 있을 것만 있는 황량한 저택도, 겁에 질린 하인, 하녀들도 아니었답니다.”
“……그러면요?”
“저택 주변에 우글우글 모여 있는 방문객들이었지요. 아쉴레앙 공작가와 얕은 인연이라도 맺고자, 매일같이 사람을 보내고, 직접 찾아오는 사람들로 저택 주변이 아주 시끄러웠답니다.”
“그, 랬군요.”
“그때 공작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귀찮으니까 다 쫓아 버려.’”
시녀장이 루비아나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다. 제법 비슷해서 루이먼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비아라면 그러고도 남았을 것 같네요.”
“네, 정말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전 그때 막 이 저택으로 온 지 사흘이 안 됐을 때인데,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겠어요? 오죽하면 아직까지 그때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리먼스 부인, 지금 내게 그 말을 해 주는 건…….”
“마음을 정하시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 말씀드릴 따름입니다.”
“……티가 너무 많이 났나요?”
“그간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 분을 모셔 와서 말입니다.”
시녀장이 은은하게 웃음 지었다. 그다음 말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비아와 비교하면 누구든 그렇겠지요.”
“네. 누구든이요.”
굳이 ‘누구든’에 힘주어 말한 건 루이먼드를 배려해서이리라.
“고마워요, 리먼스 부인.”
“아마 앞으로 영원히 공작저에 찾아오는 손님들을 모두 내쫓아 버리셔도, 아쉴레앙 공작가의 평판엔 조금도 누가 되지 않을 겁니다.”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져서 말이지요?”
루이먼드가 농담처럼 물어보았다. 시녀장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께서 충분히 떨어뜨려 놓았으니, 조금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만나기 싫은 사람을 억지로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루이먼드 맞춤 위안이었다.
만약 시녀장이, 아쉴레앙 공작가의 권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말하며 잔챙이들의 방문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말했다면. 루이먼드는 부담스러워서라도 더더욱 손님 준비에 힘썼을 것이다.
자신 이전에 이미 루비아나가 손님을 챙기긴커녕 집으로 한 번 들인 적도 없다는 말이 오히려 더 큰 안도를 주었다.
‘비아가 그랬으니 나도 그래야지.’
아내가 갔던 길을 남편이 따르는데 어찌 마음 편하지 않으랴?
루이먼드는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시녀장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었다.
“그레이움 백작을 만나고 싶지 않아요. 정중히 돌려보내 줘요.”
“예.”
그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시녀장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레이움 백작을 문전박대하러 가는데 루이먼드의 목소리가 그녀의 발을 붙들었다.
“아, 그러면 말이에요. 그동안 공작저엔 손님이 거의 오지 않았겠군요? 황실 시종 정도 방문한 것만 빼면, 아예 없는 수준이었겠어요.”
별생각 없이, 하지만 당연히 그러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목소리였다.
시녀장은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돌아서 있어 루이먼드에게 들키진 않았다.
“…….”
루이먼드의 말마따나 손님이 없긴 했다. 아예 없는 건 아니고 거의.
황실 시종 말고 툭하면 찾아오던 펠트하르그 공작, 카드릭이 있었으니까.
가끔 루비아나가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문을 열어 주지 말라고 했을 때도 있었다. 그러면 카드릭은 말을 탄 채로 훌쩍 담을 넘어 저택 안으로 들어오곤 했다.
루비아나는 귀찮아하면서도 꼬박꼬박 나가 상대해 줬다.
카드릭이 진한 멜로 눈깔을 장착하고 루비아나를 바라보곤 했지만 루비아나는 어디까지나 카드릭을 친한 동료, 그 이상으로는 보지 않는 듯했다.
‘그러니까 굳이 이 자리에서 말할 필요는 없겠지.’
시녀장은 루이먼드가 카드릭이 보낸 결혼 선물을 창고에 처박아 두라 명령했던 걸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안주인의 마음이 편안하도록 돕는 것도 시녀장의 일이니까. 이 정도 선의의 거짓말은 괜찮으리라.
“리먼스 부인?”
“아, 진짜 그랬나 생각해 보느라 답이 늦었습니다. 네. 루이먼드 님 말씀대로입니다.”
“역시. 그래서 장부에 손님 접대비가 항상 0으로 기록되어 있었던 거군요.”
“예, 그렇지요.”
사실은 카드릭이 찾아와도 루비아나가 귀찮다고 차 한 잔 안 내줘서 그런 거지만.
시녀장은 한창 신혼이라 알콩달콩한 공작 부부의 부부 관계를 지키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