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131)

***

아쉴레앙 공작저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난동 부리던 그레이움 백작은 금방 정리됐다.

시녀장의 명을 받은 힘 센 하인들은 우르르 달려들어 그를 마차 안에 넣어 떠나보냈다. 그레이움 백작은 신속, 정확하게 그레이움 백작가에 반송됐다.

루이먼드는 언제 그레이움 백작 때문에 고민했냐는 듯 그의 방문 자체를 잊고자 했다.

하지만 그레이움 백작가에선 그리 쉽게 루이먼드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레이움 백작이 실패하고 돌아오자, 이번엔 백작 부인이 나섰다.

그녀는 백작저에 남아 있던 루이먼드가 쓰던 옷가지와 물건들을 들고 공작저를 찾았다. 그레이움 백작처럼 무턱대고 고함부터 지르는 게 아니라 찔끔 눈물을 보였다.

“내가 몸이 약해서, 우리 루이가 결혼식을 치르는 데에도 제대로 나서지 못했지요. 뒤늦게라도, 우리 루이가 결혼 전에 쓰던 물건을 약간 챙겨 왔답니다. 루이가 아끼던 것만으로요. 잠깐 얼굴을 보고 이것만 주고 갈 수 있길 바랄 뿐이에요.”

우아한 귀부인이 울며 이렇게 말하니, 하인들은 어쩔 줄 모르고 바로 시녀장에게 아뢰었다.

하필이면 그때 시녀장은 루이먼드와 함께 있었고, 루이먼드는 누가 찾아왔는지 알게 되었다.

“오늘 비아가 저택에 없는 걸 알고 저러는 게 분명합니다.”

“확실히, 공작님이 계신 줄 알면 저렇게는 못 하겠지요.”

시녀장은 혹시나 또 루이먼드가 곤란해하지 않을까 눈치를 보았다. 루이먼드는 의외로 단호하게 나왔다.

“돌려보내세요. 그레이움 백작가의 물건은 아주 작은 것 하나도 공작저에 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정말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지 못할 건 또 무어랍니까? 리먼스 부인, 내 말대로 해 줘요.”

“예, 루이먼드 님.”

시녀장은 기꺼이 그의 명을 따랐다.

그레이움 백작 부인은 루이먼드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남편의 전철을 따랐다. 곱게 도로 마차에 태워져 그레이움 백작저로 배달되었으니까.

“얼굴을 볼 수 없다면 이것, 이것만이라도! 루이, 네가 마음의 상처가 크다는 걸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잘 알고 있단다. 실망했겠지, 다신 우릴 보고 싶지 않겠지. 하지만 그래도 우린 한 핏줄이야. 교류하지 않겠다는 말 한마디로 끊길 사이가 아니란다!”

마차에 실려 가는 그녀의 애절한 목소리가 널리 널리 울려 퍼졌다.

아쉴레앙 공작가의 철문 앞에는 그레이움 백작이 버리듯 놓고 간 상자들만 수북이 쌓여 있었다.

시녀장은 하인들을 그것들을 짐마차에 실어 백작저로 나르도록 했다.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니, 절대 아무것도 저택 안으로 들여선 안 돼.’

루이먼드는 창가에 서서 떠나는 짐마차를 보며 생각했다.

혹시 저 상자 안에 반역을 모의했다는 증거가 될 만한 거짓 증거라도 들어 있다면 루비아나가 난처해질 것이다. 루이먼드는 그 경우도 염두에 두었다.

설마 그런 유치한 짓을 대놓고 하겠냐 싶을 수도 있지만, 그레이움 백작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옛 아덴 왕국의 간신이었던 시절, 그가 여러 충신과 정적들을 해치운 방법도 이런 방식이었다.

모함이라는 건 사람의 마음에 불안이라는 작은 금을 긋고, 작은 씨앗을 심는 것이라서 복잡할수록 효과가 떨어진다.

단순하고 무식할수록,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잘 흔들었다. 어릴 적부터 그레이움 백작이 하는 짓거리를 가까이서 지켜보며 깨달은 진리였다.

그런 걸 보고 자랐는데, 그레이움 백작 부인이 들고 온 걸 하나라도 공작저에 들일 리가.

‘내가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습니다.’

설령 괜한 오해, 과한 걱정이라 해도 좋다.

설령 상자 안에 자신의 옛 물건들만 들어 있다 하더라도, 루이먼드는 그것들에 미련이 없었다.

그레이움 백작가에서 나올 때 무엇 하나 들고 나오지 않았다. 오직 몸뚱이와 위에 걸치고 있던 옷뿐.

그 뒤로 공작저에 머물며, 백작저에 놓고 나온 무언가가 아쉽거나 그리웠던 적은 없었다.

물론 마음에 걸리는 게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단 하나, 그레이움 백작저에 놓고 온 것 중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그레이움 공동묘지에 묻힌 어머니의 관.

할 수만 있다면 밤중에 몰래 가서 파 오고라도 싶을 따름이었다.

‘그건 나중에 비아와 의논해 보자. 꼭.’

짐을 실은 짐마차가 거리 저편으로 사라졌을 때, 루이먼드도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

그레이움 백작 부인을 물리치고 나면 이번엔 백작가의 세 망나니가 몰려오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러지는 않았다.

루이먼드는 머릿속에서 그레이움이라는 이름을 지워 버리기 위해서라도 일에 몰두했다.

‘비아는 언제 오는 거지?’

아침에 헤어졌던 루비아나가 보고 싶었다.

그레이움 백작가에 실망할수록, 그들을 모질게 외면할수록, 루비아나가 더 보고 싶어졌다.

가슴이 텅 빈 듯 시리고, 외로워졌다. 루이먼드는 그 마음을 티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억지로 더 웃고 더 활발하게 움직였다.

다 알고 있다는 듯 측은하게 절 바라보는 시녀장의 눈빛은 애써 모른 척했다.

“급하게 처리해 주셔야 할 건 다 끝났습니다.”

“그럼 더 할 일이 없는 건가요? 뭐든 좋아요, 해야 할 게 있다면 내게 말해 줘요.”

“그럼, 아주 급한 일은 아니지만…… 꼭 처리해 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말씀드려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리먼스 부인.”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하던 중이었습니다. 이쪽으로 와 주시겠어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이 저택 일과 관련한 건 무엇이든 내게 말해 줘요. 함께 고민하면 좀 더 좋은 쪽으로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이미 전권을 휘두르고 있으면서도 루이먼드는 겸손을 잃지 않았다.

“이미 이곳은 루이먼드 님이 안 계시면 제대로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된 지 오래입니다.”

시녀장은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그의 겸손을 튕겨 냈다.

시녀장이 루이먼드를 데리고 간 곳은 1층 현관 옆, 우편물을 모아 놓는 방이었다.

루이먼드는 별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

“그, 그렇게 열면 안 되는데!”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하녀가 비명을 질렀다.

하녀가 루이먼드에게 달려오기 전, 문 안쪽에 쌓여 있던 편지들이 먼저 루이먼드에게 우르르 쏟아졌다.

루이먼드는 절 덮쳐 오는 거대한 편지 뭉텅이를 바라보며, 놀라 그 자리에 서서 굳어 버렸다.

“루이먼드 님!”

놀란 시녀장이 루이먼드를 뒤에서 잡아당겼으나, 편지 폭풍우를 피할 수는 없었다.

루이먼드는 물론이거니와 시녀장까지 쏟아지는 편지 더미에 파묻혔다. 으악.

근처에서 바닥을 닦던 하인들이 서둘러 달려와 두 사람을 편지 더미 속에서 쑥쑥 뽑아냈다.

“죄, 죄송해요. 도착하는 족족 계속 쌓아만 놓다 보니까.”

“매일 도착하는 양이 장난이 아니라서, 도무지 정리할 엄두를 내지 못했어요.”

우편물 담당 하녀들이 쩔쩔매며 용서를 구했다.

루이먼드는 그들을 꾸짖는 시녀장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산더미 같은 편지들을 들춰 보았다.

대부분 초대장이었다. 아마도 이 제국에서 귀족이라는 귀족들은 죄다 보낸 것 같았다.

“……이게 다 결혼식 이후에 온 초대장은 아니겠지?”

‘설마. 예전부터 온 걸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쌓아 둔 거겠지.’

그렇다 해도 방대한 양이었다. 루이먼드는 새삼, 아쉴레앙 공작가의 위세를 실감했다.

“네, 맞습니다.”

하녀들을 혼내고 온 시녀장이 옆에 서며 대답했다. 루이먼드는 제 귀를 의심했다.

“이게 다 결혼식 이후에 온 거란 말입니까? 한 달 만에, 이 정도나?”

“공작님께서 결혼식 이후 사교 활동을 일절 그만두셨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늘 참석하시던 분이 안 오시니, 다들 마음이 급해져서 계속 연락을 보내온 것이겠지요.”

루비아나는 수도에 온 이후로 남편감을 찾겠다며 여러 연회와 모임을 열심히 찾아다녔다.

그랬던 그녀가 루이먼드를 집 안에 들인 뒤로 칼로 양초 자르듯 모든 교류를 뚝 끊어 버리니. 그녀의 참석을 기대했던 모임의 주최자들은 몸이 달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리바두르 후작 부인께서는 일주일 사이에 스무 통이나 보내셨군요.”

시녀장은 루이먼드의 발치에 떨어진 초대장을 주워 확인하고는 루이먼드에게 공손히 건넸다.

“비아가 나와 결혼한 이후로 사교 모임에 나가지 않…….”

않았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물음표로 말을 끝낼 수 없었다.

“……았지요.”

한 달 동안 저택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함께 있었으니까.

아쉴레앙 공작이 수도의 여러 사교 모임에 곧잘 참석한다는 소문은 루이먼드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루비아나에게 계약 결혼을 제안하기 위해, 루비아나가 참석할 것 같은 사교 모임을 열심히 찾아다닌 적도 있었으니까.

‘나랑 결혼한 뒤로,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니.’

괜히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좀 더 의욕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리먼스 부인, 고용인들을 이쪽으로 최대한 데리고 와 줘요. 일단 분류한 뒤에 답장을 보내야 하는 것, 안 보내도 되는 것을 구분부터 해 보지요.”

루이먼드가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시녀장이 공작저로 온 이래, 처음으로 아쉴레앙 공작가의 사람이 직접 초대장을 정리하고 답변하는 순간이었다.

감격한 시녀장은 서둘러 글을 읽을 줄 아는 고용인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루이먼드는 그들과 함께 우편물을 정리하고 분류했다. 스무 명 가량이 달라붙었는데도,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너무 집중하는 바람에 루이먼드는 물론이거니와 시녀장과 고용인들 중 누구도 밖에서 말소리가 들리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덕분에 루비아나는 누구의 마중도 받지 못하고 말에서 내려야 했다.

‘무슨 일 있나?’

루비아나는 달려온 마구간 하인에게 말고삐를 넘긴 후 느긋이 걸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예의 그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루이먼드와 시녀장과 하인, 하녀들이 둥그렇게 둘러앉아서는 산더미 같은 편지들을 읽고 분류하고 있는 모습을.

‘뭐 하는 거지?’

루비아나는 장갑을 벗으며 그쪽으로 걸어갔다. 뚜벅뚜벅. 구둣발 소리가 크게 났다.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헉, 공작님.”

“고, 공작님께서 오셨습니다!”

하녀와 하인들이 펄쩍 뛰었다. 그들은 얼른 일어나 고개부터 숙였다.

“비아! 왔군요. 어서 오세요. 여기에 집중하느라 마중을 못 나갔네요.”

루이먼드는 편지 속에 파묻혀서는 루비아나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천진난만하고 정다워 보이던지. 루비아나는 걷다 말고 잠깐 멈춰서 심호흡을 했다.

아침에 헤어져서 지금 다시 만났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새삼 루이먼드의 미모에 적응이 안 됐다.

루비아나는 다시 한번, 자신이 아침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추남들을 보고 숨 쉬고 살았는지 실감했다.

특히 발치에 장갑을 던졌던 그놈. 그 우는 얼굴을 보고서도 안쓰러운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게 이해가 갔다.

‘내 성격이 이상해서가 아니라, 이 사람 때문이야.’

집에 이런 미인이 있는데, 어느 놈 우는 게 눈에 들어오겠는가? 그냥 눈에서 물이 나는가보다 싶지.

“쉬고 있지, 또 무슨 일을 그렇게 하고 있는 겁니까?”

루비아나는 시녀장에게 장갑과 망토를 건네고, 루이먼드 앞에 가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근처에 서 있던 하녀, 하인들이 사사삭 옆으로 비켰다.

“정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왜 당신이 합니까? 리먼스 부인을 시키지.”

뒤통수가 따가워졌지만, 루비아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루이먼드는 하하 웃으며 루비아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 좀 일으켜 주십시오. 그리고 중요한 편지는 비아나 내가 직접 답장을 보내는 게 예의에 맞는 일이니 제가 직접 확인을 해 봐야지요.”

“당신과 내가 직접 확인해야 할 정도의 것은 없을 테니까……”

“흠흠.”

뒤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팔을 잡고 몸을 일으키며 뒤를 돌아보았다. 루이먼드도 루비아나의 부축을 받아 편지 더미에서 일어섰다.

“왜, 할 말 있나, 리먼스 부인?”

“절대 없을 리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을 따름입니다.”

“루이가 없을 땐 혼자 알아서 잘했잖아.”

“그건, 공작님께서 도통 관심이 없으시니 어쩔 수 없이 제가……”

“나랑 루이는 앞으로도 관심이 없을 예정이니까, 앞으로도 그대가 그대로 담당하면 되겠군.”

루비아나는 시녀장을 쏘아보았다.

‘루이를 찬 데 앉혀 놓고 이런 일을 시켜?’

‘원래 루이먼드 님께서 하셔야 할 일입니다.’

두 사람의 눈빛이 제법 살벌하게 오갔다.

“비아.”

루이먼드는 루비아나가 자신을 보지 않자, 슬그머니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루비아나는 바로 고개를 돌려 루이먼드를 봤다. 녹색 눈은 언제 시녀장을 구박했냐는 듯 순하게 풀어져 있었다.

“밖에서 식사는 하셨나요?”

“아니요, 같이 먹으려고 시간 맞춰 들어왔습니다.”

“잘하셨습니다. 기다렸는데. 마음이 통했네요.”

루이먼드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

“…….”

그리고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돌리고 서로를 내외하며 들뜬 속을 달랬다.

‘대놓고 기다렸다고 말하면 어떡해!’

루이먼드는 제 가벼운 입방정을 탓했고,

‘와 씨, 앞으로 절대 밖에서 식사하고 들어오지 말아야지.’

루비아나는 아까 월례 회의장에서 끝까지 칼레나를 따라가지 않았던 걸 다행으로 여겼다.

만약 칼레나와 도미넨트 공작 사이에 끼어들었다면 - 그 둘이 끼워 줄 리도 없겠지마는 - 꼼짝없이 황궁에서 저녁 만찬까지 먹고 왔을 텐데.

그랬으면 루이먼드는 절 기다리다 저녁 식사도 거르고 쫄쫄 굶었을 것 아닌가!

루비아나는 절 무시하고 루단테만 챙겨 갔던 칼레나에게 뒤늦게 감사하며 루이먼드와 함께 식당으로 갔다.

한 발자국 뒤에서 걸어오던 루이먼드가 슬그머니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인사가 늦었네요, 잘 다녀오셨습니까? 별일은 없으셨습니까?”

반가워서, 좋아서, 자꾸만 웃음이 났다. 루이먼드는 참지 않고 활짝 웃어 보였다. 낮에 그레이움 백작의 방문으로 속 썩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어졌다.

루비아나는 그 얼굴을 홀린 듯 보다 씩, 웃어 보였다.

“……네, 잘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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