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사람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종일 떨어져 있었던 게 한 달 만인지라, 서로가 서로의 하루 일과를 궁금해했다.
대화를 주고받던 중 루이먼드가 정리하고 있던 초대장 이야기가 나왔다.
“처음엔 비아에게 온 것과 제게 온 것을 나누어 보려고 했는데 큰 의미가 없더라고요.”
“그냥 뭉뚱그려서 아쉴레앙 공작가로 보내는 것들이 대부분이었겠지요?”
“그동안 관리를 리먼스 부인에게만 시켰다면서 잘 아시는군요.”
“그 역시 리먼스 부인 덕이지요.”
루비아나는 귀에 못 박일 정도로 잔소리를 듣곤 했다고 투덜댔다. 시녀장은 그 말을 듣고는, 메인 요리 접시를 루이먼드 앞에 내려놓았다. 루비아나가 음식을 덜어 가려면 손을 한참 뻗어야 했다.
루이먼드는 웃으면서 제 접시의 메인 요리를 덜어 루비아나에게 건넸다. 루비아나는 접시를 건네받으며 이것 보라며 시녀장에게 으스댔다.
시녀장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아쉴레앙 공작가 안주인에게, 라고 온 것도 좀 있던데. 저한테 온 거겠지요?”
루이먼드가 물었다.
“아마, 그렇겠지요?”
루비아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먼드는 흐음, 생각에 잠겼다.
“비아, 당신에게 온 초대장들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콕 집어 ‘아쉴레앙 공작님께’라고 보내온 초대장 대부분은 미혼 귀족 남녀가 어울려 노는 곳으로 유명한 모임들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루비아나에게 말하지 않고 다 버리고 싶었다. 특히 일렝시아 후작 부인의 초대장은.
‘이제 필요 없으니까, 참석 안 할 테니까 알아서 처리하라고 해 줬으면 좋겠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자, 어서 말해. 결혼했으니까 그런 데 다시는 안 갈 거라고.
루비아나는 그 눈빛을 정확하게 오해했다.
‘슬슬 외부 활동을 하고 싶은 건가? 하긴, 그럴 때도 됐지.’
너한테 온 건 네가 처리해. 하지만 나한테 온 건 내가 처리하겠어. 당연히 나가고 싶은 모임엔 참석도 할 거고.
루이먼드가 이렇게 선전포고 하는 것처럼 들렸다. 루이먼드의 눈빛이 너무 강렬했기에 이렇게밖에 들리지 않았다.
저렇게 뭔가를 강렬히 바라는 듯한 눈빛이라니. 한 달 동안 저택에 갇혀 있다가 자유를 갈망하는 게 아니면 뭐겠는가? 루비아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래서 리먼스 부인이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라고 한 거구나.’
달달한 신혼 생활은 지난 한 달로 끝나 버렸나 보다. 머리로는 이해하겠는데, 아무래도 심장이 말썽이었다.
‘저택에만 갇혀 있어 답답했나? 하긴, 어느 정도 외부 활동을 하는 게 본인 정신 건강에 좋겠지.’
루비아나는 괜히 섭섭해지려는 마음을 티 내지 않고, 차분하게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나도 언제까지나 쉴 순 없어.’
사실 다음 달 월례 회의까지 또 지난달처럼 지낼 생각이었지만.
‘슬슬, 움직여야지. 일해야지.’
한두 달 정도는 더 아이 가지는 데 집중하려고 했는데. 남편이 싫다는데 어쩌나? 계획을 변경할 수밖에.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황궁 행정관으로 출근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현재 루이먼드는 황실 관리직을 유지한 채로 장기 휴가를 낸 상태였다. 결혼식 전 루비아나가 제안했던 것이었다.
“이건 강요가 아니라 제안입니다. 루이, 결혼 후에도 이러저러한 일로 바쁠 수 있으니 당분간 황실 관리직을……”
“네, 퇴직하겠습니다.”
루이먼드는 너무도 산뜻하게 퇴직을 입에 담았다.
“……?”
“방금 퇴직하라고 말씀하신 거 아니었습니까?”
“아니, 장기 휴가를 내는 게 어떠냐고 말하려고 했습니다만.”
“아…….”
멍한 표정을 짓는 루이먼드를 보며 잠깐 후회했더랬다.
본인이 퇴직하겠다고 하는데 그러라고 할 것을. 당황해서 괜히 말이 헛나와 버렸다.
“네, 그럼 비아, 당신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장기 휴가계를 내고 올게요.”
“아니요, 직접 갈 필요 없습니다. 내일 시녀장에게 말해 인편에 보내도록 하십시오.”
아직 피오니가 동부로 내려가지 않았다. 휴가계를 내러 갔다가 혹시라도 마주칠까 봐 신경 쓰였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비겁한 생각이었다. 사랑하는 연인을 마주치지도 못하게 하다니.
하지만 싫은 건 싫은 거였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가 직접 황궁 행정관에 가지 않길 원했고, 루이먼드는 순순히 그녀의 뜻에 따라 주었다.
‘그때 아무렇지 않아 하기에 괜찮은 줄 알았는데, 사실 답답했던 걸까?’
루비아나는 그때를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비아?”
‘왜 저렇게 웃는 거지?’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루이먼드는 괜히 불안해졌다. 그 불안은 곧바로 현실이 되었다.
“제게 온 건 리먼스 부인에게 맡기십시오. 루이, 당신에게 온 건 당신이 알아서 하십시오. 아까 리먼스 부인에게 맡기라는 말은 그냥 해 본 말이었습니다.”
“…….”
“…….”
루이먼드와 시녀장, 둘이 동시에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 감정 다스리기에 바쁜 루비아나는 계속해서 루이먼드를 배려해 주기만 했다. 듣는 두 사람이 그렇게 안 받아들여서 문제긴 했지만.
“그리고 앞으로 외출할 일이 있으면 굳이 제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얼마든지 다녀오십시오. 제가 그런 것까지 간섭하진 않을 겁니다.”
“…….”
“…….”
루이먼드와 시녀장, 둘은 이제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루비아나는 제 쓰린 속을 달래느라 여전히 알아채지 못했다.
“아, 되도록 밤에는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아침에도, 낮에도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희망 사항은 말하지 않았다.
“강요는 아니고 권고입니다. 아무래도 위험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나랑 같이 저택에만 콕 박혀 있으면 하나도 안 위험할 텐데. 설령 반란 세력이 저번처럼 습격해 와도 내가 지켜 줄 수 있을 텐데.’
부가 설명도 꿀꺽 삼켰고.
“그리고 나갈 땐 반드시 호위를 대동하십시오. 루이, 당신의 호위는 내가 직접 고르도록 하겠습니다.”
데리고 있는 부하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나며, 신을 향한 믿음이 독실해 스스로 고자가 된 놈을 붙여 줄 생각이었다.
‘여자든 남자든 제정신이면 루이의 미모에 홀릴 게 분명하니, 정상적이지 않은 놈을 붙여 줘야지.’
최소한의 감시, 아니, 안전장치를 마련하니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음, 좋아. 이 정도면 뭐, 그럭저럭 참아 줄 수 있을 것 같아.’
루비아나는 내심 만족하며 고개를 들어 루이먼드를 보았다. 루이먼드 뒤에 서 있는 시녀장도 덩달아 보였다.
“두 사람 다 표정이 왜 그래?”
한 사람은 충격에 빠져 있고, 다른 사람은 세상에 이런 등신이 또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루비아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그날 밤,
루비아나는 처음으로 침실에서 퇴짜 아닌 퇴짜를 맞았다.
“공작님 말씀처럼 앞으로 바쁘게 외출하려면, 빨리 초대장을 읽어 보고 답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저한테 온 초대장을 좀 더 읽어 보다 제 서재에서 눈을 붙일 테니 비아는 저 없는 침실에서 푹 잠드십시오.”
루이먼드는 화사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하고는 휙 가 버렸다. 루비아나는 홀로 침실에 남았다.
“왜, 화가 난 거지?”
오랜만에 혼자 잠드는 침실은 꽤 춥고 썰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