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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뒤. 루비아나와 루이먼드는 각자의 일정대로 외출할 예정이었다.
루비아나는 북부로 보낼 물자를 확인하기 위해 계약한 상단주를 만나러 가는 것이었고, 루이먼드는 루비아나가 기꺼이 허락해 준 사교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나가는 것이었다.
그놈의 초대장 분류 때문에 내리 사흘 각방을 써야 했던 루비아나는 새벽부터 저기압 상태였다.
혼자 드넓은 침대에서 자다가 아무래도 허전하고 짜증 나서 일찍 깼다.
찬물로 목욕해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도 않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드레스 룸으로 갔는데. 거기에 루이먼드가 있었다.
“루이?”
순간 루비아나는 자신이 환각을 보는가 싶었다.
‘사흘 안 봤다고 환각을 보다니. 미쳤군.’
북부에서 저도 모르게 마수의 독에 감염되었던 게 이제야 효과가 나타나는 걸까? 루비아나는 손으로 눈을 벅벅 문질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입니까!”
놀라서 훌쩍 다가와 몸을 더듬는 손길이 따뜻했기에 환각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루이먼드는 금세 커다란 타월을 구해 와서는 루비아나의 머리카락을 말려 주었다. 루비아나는 자신의 드레스 룸에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다.
“이래서, 내가 하루라도 신경을 안 쓰면……. 정말 그동안은 어떻게 살았던 겁니까? 이러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걱정하는 말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루비아나는 괜히 울컥했다. 반갑고, 서러워서.
‘이렇게 걱정해 줄 거면 어젯밤에 같이 잤으면 됐잖아. 아니, 사흘 전부터 같이 잤으면 되잖아.’
다섯 살짜리 애도 안 할 유치한 생각이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멈출 수 없었다.
“고개 들어 보세요.”
루비아나는 시키는 대로 고개를 들어 루이먼드를 바라보았다.
잔뜩 흐트러진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불만 많아 보이는 녹색 눈이 드러났다.
루이먼드는 하마터면 그 눈에 입을 맞출 뻔했다. 사흘 만에 마주 보는 루비아나의 눈이 너무 예뻐서.
하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대신이라긴 뭐하지만, 그 예쁜 눈을 가리기 위해 다시 타월로 젖은 머리카락을 마구마구 닦았다.
물론 역효과였다. 하얀 타월에 감겨 흔들리는 붉은 머리카락은 또 어찌나 예쁜지. 도저히 입을 안 댈 수 없었다.
“너무, 너무 거친 것 같은데.”
“이래야 금방 마릅니다.”
“아니, 그래도 너무……”
“가만히 있어요. 마음에 안 들면 욕실에서 잘 말리고 왔어야지요.”
“…….”
루비아나가 다시 얌전해진 틈에, 그녀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손에 감아 입을 맞췄다.
루비아나에게 들킬까 봐 한 번 두근. 고작 머리카락일 뿐인데, 그녀에게 닿았다는 게 떨려서 또 한 번 두근.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아무튼 내 심장에 안 좋은 사람이야.’
호수에 빠졌다 나온 사람처럼 걸어오는 루비아나를 보자마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큰 타월로 몸을 돌돌 감싸고 머리의 물기를 닦아 내고 있자니 놀란 마음이 가라앉기는 했지만.
이제는 눈을 감고 제 손길에 얌전히 몸을 내맡기는 루비아나의 모습 자체가 문제였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귓속까지 파고들었다.
‘이러다 내가 내 명에 못 죽지.’
한탄하면서도, 머리카락에 가려져 보일락 말락 한 루비아나의 입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닿고 싶었다.
미치도록 입 맞추고 싶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왜 참아야 하지?’
순간 발끈했으나 그럼에도 참아야 했다.
‘왜냐하면 난 화나 있으니까!’
이걸 못 참고 발정 난 개처럼 달려들면, 지는 거니까.
‘부부 사이에 벌써부터 내 것 네 것을 구분해 관리하려고 해? 그런 게 어딨어? 언제는 리먼스 부인에게 다 맡겨서 알아서 하라고 했으면서. 잠깐 새 마음이 바뀌어서, 내 건 내가 알아서 관리하겠다고?’
사흘 전 저녁 식사 자리만 생각하면 복장이 터졌다.
‘왜? 밤에 나 몰래 리바두르 후작 부인 모임에 다녀오려고? 거기서 이 예쁜 머리카락, 더 예쁜 눈, 더더 예쁜 입술로 누굴 홀리려고?’
루비아나는 그저 벽에 기대서 있을 뿐인데, 사람들이 미혼 기혼 안 가리고 벌 떼처럼 주변에 몰려드는 광경이 절로 상상됐다. 남자도 몰려들고 여자도 몰려들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그게 헛된 망상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에 더 속 터졌다.
아쉴레앙 공작에게 계약 결혼을 제안하고자 그녀가 참석한다는 연회를 쫓아다닐 때 여러 번 봤던 광경이니까.
찬기운 폴폴 남기는 루비아나가 창가에 기대 술을 홀짝대면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남자든 여자든 루비아나를 힐끔거리며 쳐다보기 바빴다.
다들 말 한번 걸고 싶어 드릉드릉하며 마른침만 삼키곤 했다. 루이먼드도 그중 하나였다.
물론 무리 중 절반은 루이먼드를 힐끔거리고 있었고, 루이먼드는 그들의 시선을 부담스러워했으나. 루이먼드의 기억 속에서 그 부분은 싹 지워지고 없었다.
루비아나가 결혼해 기혼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녀도, 그들의 찐득하고 끈적끈적한 시선은 여전할 텐데.
그런 곳에 루비아나를 보낼 순 없었다. 절대. 절대.
‘누가 그 꼴을 가만히 두고 볼 줄 알고?’
검은 눈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루비아나가 자신 말고 다른 남자에게 한눈이라도 팔면, 결혼 계약서 11조항을 들이밀 생각이었다.
‘그걸 무기 삼아, 저번처럼 한 달쯤 아무 데도 못 가게 하고 저택에 잡아 놔야지.’
물론 이견 후속 대책이고, 예방책도 준비해 놓았다.
루비아나 성격에 자신에게 오는 초대장을 직접 관리할 리 없고 결국엔 시녀장에게 맡길 텐데, 아직까지 시녀장은 루이먼드의 편이었다.
“저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안주인께 보고드려야 하는 법이지요. 저는 지금까지 그랬듯 늘 루이먼드 님께 여쭙고 움직일 것입니다.”
그날 밤, 시녀장은 혼자 동쪽 서재에 멍하니 앉아 있는 루이먼드에게 와 이렇게 말해 주었다. 난 네 편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니 다시는 리바두르 후작 부인이 여는 모임 같은 곳을 마음대로 가지 못하리라.
그런 마음을 품고 이른 아침 눈을 떠, 루비아나보다 먼저 루비아나의 드레스 룸에 와서 셔츠를 다렸다.
오늘 입을 옷을 다시 한번 체크하고, 루비아나를 기다렸더랬다.
‘이제 화가 풀린 건가?’
그런 루이먼드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루비아나는 태평하게 생각하며, 자신의 몸을 루이먼드에게 내맡길 뿐이었다.
아직도 루이먼드가 왜 화났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왜 화난 거냐고 물어보진 않았다.
겨우 화가 풀린 것 같은 상대에게 그런 질문을 해 다시 화나게 만들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으니까.
카드릭이나 루단테였다면 그냥 물어봤을 것도 같은데. 루이먼드니까. 루비아나는 궁금하고 억울한 마음을 꾹 참았다.
그리고 루이먼드가 주는 대로 옷을 갈아입었다. 어느새 자신이 하녀들 말고 루이먼드의 시중을 받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건 깨닫지 못했다.
먼저 저택을 나선 건 루비아나였다.
루비아나는 말에 오른 후 자신을 배웅 나온 루이먼드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잘 다녀와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사흘간 서먹했던 기억이 아직 선명해 혹시나 루이먼드가 인사를 받아 주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다행히 루이먼드가 웃어 주었다.
“내 걱정 하지 말고 늦지 않게 와요.”
“그래요. 저녁은 꼭 같이 먹도록 하지요.”
드레스 룸에서 느꼈던 화해의 기운이 틀린 게 아니었다. 루비아나는 안도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저택을 나섰다. 입가에 절로 웃음이 어렸다.
루비아나는 그대로 신나게 말을 몰아 펠트하르그 공작저에 잠깐 들렀다. 다행히 카드릭은 아직 입궁 전이었다.
카드릭은 일찌감치 입궁 준비를 끝내고 서재에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 집사장이 찾아와 이른 아침에 손님이 찾아왔다고 하자 처음엔 심드렁한 태도를 보였다.
“공작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이런 아침에? 어떤 예의 없는 자가 감히……”
“아쉴레앙 공작님이십니다.”
“……!”
카드릭은 서류를 집어 던지듯 내려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지금, 어디 있지?”
“밖에 계십니다. 일단 저택 앞까지 모시긴 했는데…….”
“왜 저택 안으로 들이지 않고 밖에 세워 둔 거지? 당장 안으로, 아니, 내가 나가 보지. 들어오라고 하면 귀찮다고 도로 갈 게 분명해.”
카드릭은 문을 부술 듯 열어젖혔다. 그대로 뛰쳐나가려나 싶었는데, 빙글 돌아서 집사장에게 물었다.
“나, 괜찮은가?”
“완벽하십니다.”
“복장이 괜찮은가 말이야.”
“완벽하십니다.”
“얼굴은, 머리는 어떻지? 혹시 머리가 삐치거나 하지 않았나?”
카드릭은 평소 잘 만지지 않는 안대까지 손으로 더듬었다.
“상처가 삐져나오거나 하진 않았고?”
“더없이, 더없이 완벽하십니다.”
집사장은 흐트러짐 없이 대답했다.
“이른 아침부터 웬일이지?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이 여자가 이른 아침부터 찾아오는 게 정상적인 상황은 아닌데.”
카드릭은 투덜대며 다시 돌아섰다. 말은 그렇게 해도 입가엔 웃음이 번져 있었다. 집사장은 지적하려다가 말았다.
‘어지간히 좋으신가 보군.’
카드릭의 오랜 짝사랑은 그의 측근들 사이에선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때문에 펠트하르그 공작가 가신단이 카드릭을 황제의 부군으로 밀지 않은 지 제법 오래되었다.
두 공작가의 결합이 가능할지, 제국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민하며 미리 대비하려고 준비하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 공작님이 뭐가 부족해 몇 년째 마음고생하고 있는 거냐고, 당장에 혼사를 밀어붙이자고 버럭버럭 화내는 강경파도 없지 않았다.
카드릭은 서둘러 달려 나갔다. 저택 현관에 루비아나가 말을 탄 채로 서 있는 걸 보고는 하, 웃음인지 탄성인지 모를 것을 토해 냈다.
발걸음이 느릿해졌다. 호흡이야, 고작 그 정도 뛰었다고 거칠어질 리 없고. 카드릭은 애초부터 느긋이 걸어 나온 사람처럼 루비아나 앞에 섰다.
“여-.”
“아침부터 웬일이지?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
“아침부터 비꼬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아주 좋네. 참 고마워.”
“…….”
카드릭은 입을 꾹 닫아걸며, 왜 루비아나 앞에 서면 말이 곱게 나오지 않는지 모를 일이라고 자책했다.
그의 독설에 말문이 막혀 본 적 있는 사람들이 그의 이 마음을 안다면 ‘넌 원래 그랬어!’라고 외칠 만한 생각이었다.
“뭐, 별다른 일은 아니고. 나온 김에 들렀어. 할 말도 있고 해서. 아직 입궁하려면 시간 좀 있지?”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아니, 뭐 그렇게까지야. 그냥 여기서 이야기하고 말지? 곧 입궁해야 하잖아. 나도 가 봐야 할 곳이 있어서.”
루비아나는 깔끔하게 카드릭의 제안을 거절했다.
옆에 서 있던 하인에게 손짓해 루비아나의 말고삐를 잡으라고 지시하려던 카드릭이 멈칫했다.
“그냥, 여기 서서 이야기하자고?”
“뭐, 길게 할 이야기도 아니고 해서.”
“이젠 나와 차 한 잔도 안 마시겠다는 건가?”
얼굴이 굳었다. 목소리도 얼굴만큼이나 딱딱해졌다. 루비아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뭘 새삼…….”
“네 남편이 그러라고 시켰나?”
“여기서 내 남편 이야기가 왜 나와? 난 원래 이랬거든!”
루비아나도 덩달아 울컥했다.
“아.”
하지만 곧 어떤 깨달음이 그녀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내가 예의 없는 행동을 하면 나만 욕먹고 끝나는 게 아니라 루이도 나랑 같이 쌍으로 욕을 먹게 되는 건가?’
결혼해 부부가 된다는 건 그런 의미이기도 했다. 어느 한쪽이 잘못하면 같이 욕먹게 된다는 것.
‘그래서 루이가 나와 가문의 평판을 걱정했던 건가?’
사흘 밤낮으로 한 달 치 초대장을 정리할 만큼?
지난 사흘간, 홀로 차가운 침대에서 잠들며 서운했던 마음이 스르륵 녹아내렸다.
‘화난 게 아니라 내가 욕먹을까 봐 걱정해 준 거였군.’
이렇게 생각하니 더더욱, 자신 때문에 루이먼드가 욕먹는 게 싫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폭군의 사생아라는 이유로 내 남편을 죽이려고까지 한 이놈에게는 더더욱.’
카드릭에게 루이먼드를 깎아내릴 여지를 더는 주고 싶지 않았다.
루비아나는 즉시 말에서 내렸다. 가볍게 땅을 딛고 서서 고개를 드니, 카드릭의 얼굴이 한 뼘 남짓한 거리에 놓였다.
두 사람의 거리는 카드릭이 조금만 고개를 숙이면 루비아나의 이마에 코가 닿을 만큼이 되었다.
“……!”
카드릭은 갑자기 가까워진 루비아나를 감당치 못하고 돌처럼 굳어 버렸다.
루비아나는 아무렇지 않게 그의 어깨를 툭 치고는 지나쳤다.
“들어간다, 들어가. 들어가면 될 거 아냐!”
붉은 머리카락이 코와 뺨을 스쳤다. 카드릭은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비참함에 가까운 설렘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손은 이미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