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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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하던 펠트하르그 공작가가 금세 부산해졌다. 집사장은 귀한 손님을 모시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급히 금테를 두른 찻잔을 꺼내고, 어렵게 구한 귀한 찻잎으로 찻물을 우렸다. 카드릭이 지나가는 말로 ‘아쉴레앙 공작이 오늘 달지 않은 과자를 몇 개 집어 먹더군.’이라고 말했던 걸 기억해 씹을거리도 준비했다.

다과를 준비하는 동안 소소한 잡담이라도 나누며 시간을 보내도 좋으련만, 루비아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용건을 꺼냈다.

“동부 치수 사업을 맡게 됐다며?”

“감사 인사라도 받으러 온 건가?”

카드릭은 새삼 화가 나는지 소파의 팔걸이를 움켜잡았다. 빠직, 소리가 들리며 흑단으로 만든 팔걸이에 금이 갔다.

“설마, 내가 뭘 했다고?”

“왜? 아주 큰 일을 했던데. 내가 이 사업을 맡도록 폐하께 추천했다면서?”

“추천까지야. 그냥, 폐하께서 미처 모르시는 것 같아 내가 귀띔했을 뿐이지. 정말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루비아나는 씩, 웃으며 손사래 쳤다. 괜한 오해가 풀려 황제와 카드릭의 사이가 벌어지지 않은 것 자체가 그녀에겐 충분한 보상이라 생각하며 혼자 뿌듯할 따름이었다.

카드릭은 뿌듯해하는 루비아나를 보며 씁쓸히 웃었다.

귀찮은 일을 떠맡게 되었다는 부담감보다, 루비아나가 수도에 머무르는 동안 자신은 동부로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이 더 크다는 걸 그녀는 결코 모르리라.

“감사 인사 받으러 온 게 아니면, 왜 온 거지?”

당연히 말이 곱게 나올 리 없었다.

“뛰어난 인재를 추천해 주러.”

“뛰어난 인재?”

카드릭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루비아나를 알게 된 뒤로 루비아나 입에서 나온 말 중 두 번째로 어이없는 말이었다.

첫 번째로 어이없었던 말은 폭군의 사생아와 결혼한다는 말이었다.

“네가?”

“그래, 내가. 그래서 더 대단한 인재야.”

“그거 참 궁금하군. 어떤 인재가 네 눈에 들었는지.”

“피오니 로렌. 아직 사무관인데, 제법이야. 아주 똑 부러져. 동부 치수 사업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도 아주 강하고.”

“피오니 로렌?”

흐음. 카드릭이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의외인데. 설마 그 사무관의 이름을 네 입에서 듣게 될 줄이야.”

“뭐야, 이미 알고 있었어?”

“이미 눈여겨보고 있었지. 일을 썩 잘해.”

“역시.”

카드릭이 눈여겨보고 있었다면 피오니의 능력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루비아나는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에 만족했다.

한편으로는, 한낱 사무관까지 눈여겨보는 카드릭의 꼼꼼함에 감탄했다.

눈이 하나뿐인데도 뭐든 놓치는 법이 없었다. 만약 카드릭의 두 눈이 온전했더라면 어땠을까?

‘지금보다 두 배는 더 꼼꼼해졌으려나?’

그럼 적어도 제국이 두 배 더 빠르게 안정기에 접어들 수 있었을지도?

그 한쪽 눈을 해 먹은 사람으로서 심심한 아쉬움을 느끼는 바였다.

“그나저나 피오니 로렌 사무관에 대해 어떻게 알게 된 거지? 딱히 북부와 연고가 없는데. 연고라고는…….”

카드릭이 말끝을 흐렸다.

피오니의 유일한 연고지는 학자의 집. 마찬가지로 그 학자의 집 출신이었던 사람이 루비아나 옆에 한 마리 있는 것을 생각해 냈기 때문이었다.

“……네 남편이란 작자가 베갯머리송사라도 한 건가? 친구를 밀어 달라고?”

눈여겨봤던 일 잘하는 사무관에 대한 평가가 순식간에 수직으로 하락했다.

이로써 피오니 로렌은 적어도, 카드릭이 제국의 행정 전반을 장악하고 있는 한 승진은 물 건너가 버린 일이 되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오직 루이먼드의 친구라는 게 죄였다.

“아니, 그냥 친구는 아니고.”

그걸 알 리 없는 루비아나는 일 잘하는 사무관 한 명의 출셋길을 닫아 버린 줄도 모르고 태평했다.

“아주 절친한 친구? 이런 청탁을 넣을 만큼?”

피오니에 대한 평가가 바닥을 치다 못해 지하를 파고들려는데.

“아니, 굳이 말하자면 일생일대의 사랑?”

루비아나의 말 한마디가 피오니의 미래를 다시 비춰 주었다. 피오니에 대한 카드릭의 평가는 단번에 수직으로 상승했다. 본래의 위치를 넘어서 하늘을 뚫을 만큼 급상승.

“그래, 우정…… 뭐?”

카드릭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사랑? 사랑 뭐?

“사랑하는 사이.”

“……가족이었나?”

루이먼드가 폭군의 핏줄을 이은 자 중 유일한 생존자이며, 그레이움 백작의 외손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피오니 로렌 사무관은 평민이라고 들었……”

“가족? 나중에 둘이 결혼하면 가족이 되긴 하겠지. 아직은 아니지만.”

“…….”

카드릭이 입을 쩍 벌렸다. 그런데도 그는 멍청해 보이긴커녕 경악이란 감정을 장엄하게 조각한 대리석 조각처럼 멋있었다.

루비아나는 자신이 만들어 낸 장엄한 조각 위에 다시 한번 끌을 내리찍었다.

“피오니 로렌은 내 남편이 나랑 굳이 위장 결혼을 할 정도로 좋아하는 여자야. 아, 물론 그것과 별개로 피오니 로렌은 정말 똑 부러진 인재야. 그건 너도 알고 있지?”

“……정말, 인가?”

카드릭은 지금 눈앞에 앉아 있는 저 인간이 루비아나가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운 마음이었다.

“내가 이 아침에, 배부르게 식사하고 널 찾아와 이런 농담을 해서 뭐 하게?”

“그건, 그렇지.”

내가 그런 인간으로 보이냐는 루비아나의 질문에 카드릭은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좀 둔하고 무디긴 하지만, 그 정도로 실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쉴레앙 공작, 루비아나는.

“지금 나한테 한 말.”

“응. 왜?”

“왜는 내가 묻고 싶은데. 왜 나한테 이런 말을 해 주는 거지? 네 말대로 이 아침에, 배부르게 식사를 하고 일부러 날 찾아와서.”

카드릭이 지끈거리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물었다.

루비아나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꼰 채 느긋한 모습으로 씩, 웃으며 말했다.

“말했잖아. 널 믿는다고, 펠트하르그 공작.”

언젠가의 그 경고였다. 그 말이 오늘, 그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때마침 집사장이 다과를 들고 들어왔다.

집사장이 그것들을 테이블에 늘어놓을 동안 루비아나와 카드릭 사이엔 가벼운 침묵이 흘렀다.

“편안한 시간 되십시오.”

집사장은 별말 없이 돌아섰다. 카드릭이 황궁으로 출발해야 하는 시간이지만, 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늘이 펠트하르그 변경백이 펠트하르그 공작이 된 이후 최초로 지각하는 날이 되길 바랐다.

집사장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끊어졌던 대화가 이어졌다.

“또 누가 알고 있는 거지?”

“글쎄, 지금은 너?”

루비아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곤 말을 이었다.

“루단테, 그 자식은 아는지 모르겠네. 뭐,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폐하께서 말씀하시겠지.”

“……폐하? 폐하께서도 아시나?”

“왜 모를 거라고 생각해?”

루비아나가 오히려 되물었다.

“그럼 나한테는 왜 알려 주는 거지?”

“말했잖아, 믿어서라고.”

“그딴 말 집어치우고.”

“내 믿음을 소홀히 여기다니, 나중에 반드시 후회할 날이 있을 거야.”

루비아나는 으스스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저주 비슷하게라도 들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실패였다. 자꾸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와서였다.

‘나도 참 우습군.’

아침 일찍, 루이먼드에게 말하지도 않고 카드릭에게 들러 이런 말이나 하는 상황이 너무 같잖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까지 카드릭에게 했던 말, 그리고 앞으로 할 말을 철회할 생각은 없었다.

이건 꼭 필요한 절차였다.

‘내게 귀한 3년을 맡겨 준 두 사람을 위해.’

루이먼드에게 마음이 기우는 걸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3년 동안 실컷 흔들릴 생각이었다.

다만, 완전히 기울지 않도록 받침대를 만들어 놓으려는 것이었다.

“말해, 이유.”

카드릭은 루비아나의 저주에 흔들리지 않았다.

“나중을 대비해 소소하게 부탁하고 싶어서? 아, 지금 당장은 피오니 로렌을 부탁하기 위해서.”

“잠깐, 루비. 너무 빨라, 젠장. 내가 이해할 시간을 달라고.”

카드릭은 자신이 루비아나를 루비라고 불렀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그녀를 말렸다.

하지만 루비아나는 그가 말린다고 하려고 마음먹은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 남편이 그 여자를 사랑해. 그러니까 동부로 데리고 가서 잘 써먹도록 해. 능력만큼 일을 시키고 승진시켜 주되, 부당한 요구를 받지 않도록 신경 써 주고. 그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키워 줘.”

“젠장.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물론, 그녀의 능력만큼 대우해 달라는 거야. 편파적인 관심과 특혜를 주라는 게 아니고.”

“그러니까 피오니 로렌의 뒷배가 되어 주라? 능력을 펼치게?”

“응. 너무 유능해서 놓치기 싫을 뿐 아니라 내가 못 가지면 죽여 버리겠다는 심술을 부릴 수 없을 만큼 대단해서, 우리 황제 폐하께서 그 배우자가 살인범이든 반역자이든 한 번은 봐주고 싶어질 만큼.”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무슨 생각을 하긴. 남편 살릴 생각 하고 있지.”

루비아나는 차를 한 모금 마셔 입술을 축였다. 향은 더없이 좋았으나 이 또한 맛이 맹숭맹숭했다.

‘옛날엔 이런 걸 무슨 맛으로 먹었는지 모르겠네.’

루비아나는 굳이 준비해 준 집사장의 정성을 생각해 찻잔을 꿀꺽 비웠다.

“잘 부탁해.”

그게 끝이었다. 루비아나는 빈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카드릭은 제시간에 맞춰 입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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