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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릭은 루비아나가 던진 폭탄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넋 나간 주인을 대신해 집사장이 루비아나를 배웅했다.
“자주 찾아와 주십시오. 펠트하르그 공작가는 언제나 아쉴레앙 공작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펠트하르그 공작과는 영 다르군.”
“저로서는 감히 비교되는 것 자체가 송구스러울 만큼 대단한 분이시지요, 저희 공작님은.”
“펠트하르그 공작과 달리 입에 발린 말을 잘한다는 뜻이었어.”
“……저희 공작님께서 아쉴레앙 공작님께 말을 험하게 하십니까?”
“걱정 마, 욕은 안 하니까.”
“…….”
집사장이 당장 저택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표정을 지었다. 루비아나는 그를 현관에 오래 붙잡아 두지 않고, 바로 말에 올랐다.
“주인을 잘 보필하게.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들 잘하겠지만.”
부디 펠트하르그 공작이 오래오래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 답지 않게 덕담을 남겼다.
“펠트하르그 공작이 나보단 오래 살아야 하거든.”
“……받잡기 곤란한 농담만 말씀하시는군요. 앞의 말씀만 마음에 담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집사장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루비아나는 하하, 웃으며 말을 몰아 펠트하르그 공작저를 나섰다.
“젠장, 루비아나 크리스틸 폰 아쉴레앙!”
응접실에서 고함이 터져 나온 건, 그녀가 펠트하르그 공작가의 울타리를 벗어난 뒤의 일이었다.
***
이른 아침부터 카드릭의 속을 뒤집어 놓은 뒤, 루비아나는 원래의 일정대로 움직였다.
말이 멈춰 선 곳은 피먼스 상단 건물 앞이었다. 루비아나는 대기하고 있던 점원에게 말을 맡기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1층과 2층은 피먼스 상단에서 독점하는 물품들이 가득 늘어져 있었다. 그것들을 사러 온 손님들로 북적북적했다.
손님들은 타오르는 불꽃처럼 붉은 머리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그녀의 정체를 알아채고는 기겁하며 손에 든 물건으로 제 얼굴이나 몸을 가렸다.
그런다고 가려질 리 없겠으나, 그렇게라도 루비아나에게서 자신을 숨기고 싶어 하는 노력이 가상했다.
루비아나는 그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3층으로 갔다. 문 앞을 지키고 선 상단 소속 검사들이 존경과 두려움이 섞인 눈빛을 뿜어내며 고개를 숙였다.
루비아나는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그들이 지키는 문을 아무렇지 않게 열고 들어갔다.
“공작님,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피먼스 상단주가 벌떡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다.
그는 이마도 적당히 까지고 있고 뱃살도 적당히 두툼해져 가고 있는 40대 중반의 사내였다. 둥글둥글한 턱 때문인지 겁이 많아 보였으나, 루비아나를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거래를 튼 지 벌써 수년째였다.
피먼스 상단주는 그녀가 기분이 안 좋다고 사람을 100명씩 죽이거나, 보름달이 뜨는 밤마다 마수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피를 마시는 괴물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루비아나는 소중한 고객이자 존경하는 위인이었다.
“요즘 소문이 또 늘어나셨습니다. 나도는 소문을 듣다 보면, 예전에 폭군…… 아니, 폐왕에게 붙었던 소문들이 공작님께로 옮겨 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 상상력이 거기서 거기라는 거겠지.”
제국에서 두 번째로 고귀한 사람은 제게 어떤 더럽고 고약한 소문이 들러붙든 상관하지 않았다.
소문을 듣고도 화내긴커녕 한 번 픽, 웃고 말아 버리는 그 모습 때문에라도 상단주는 루비아나를 존경했다.
루비아나는 그가 센스 좋게 차 대신 물 탄 포도주를 내오는 것에 만족하며 씩 웃었다.
“잘 지냈나?”
“저야 공작님께서 보살펴 주신 덕에 늘 잘 지내고 있습지요. 아, 뒤늦었지만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고귀한 자리에 감히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부족한 것이나마 정성껏 준비하여 선물을 보냈습니다만 마음에 드셨는지요? 혹여 만족스럽지 못하셨다면……”
“만족하고 못 하고는 이제 내 소관이 아니라서. 아무튼, 선물은 고마워.”
루비아나는 그가 무엇을 보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상단주의 꼼꼼한 성격상 나쁜 것을 보내진 않았으리라 짐작했다.
피먼스 상단주는 그녀의 말뜻을 재빠르게 알아차렸다.
“부군께서 집안일을 관장하시는군요.”
“뭐, 결혼하자마자 잡혀 살고 있지. 오늘도 허락받고 나왔어.”
루이먼드가 배웅 나와 줬으니까, 허락받고 나온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루비아나가 기혼자 특유의 엄살 스킬을 어설프게 발휘했다.
벌써 결혼 20년 차인 피먼스 상단주가 그걸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하하하, 천하의 아쉴레앙 공작님께서 말입니까?”
“별수 있겠나?”
루비아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 그 소문은 거짓이었군. 납치해서 억지로 결혼했다더니. 그런 사람이 어떻게 공작님을 휘어잡고 살 수 있겠어?’
피먼스 상단주는 역시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며, 요 며칠 주워들었던 결혼식에 관한 흉흉한 소문들을 머릿속에서 털어 냈다.
“이번에 북부에 올려보낼 물품 목록을 확인하려고 왔는데.”
“아, 여기 있습니다.”
피먼스 상단주는 들고 있던 목록을 얼른 내밀었다.
황제의 명령을 받고 수도로 돌아와 좋은 점이 있다면 이것이었다. 요 몇 년간 편지로만 연락하던 피먼스 상단주를 직접 만나 보고 목록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
루비아나는 북부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상단 두 곳과 굵직한 거래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한 곳은 피먼스 상단.
다른 한 곳은 펠트하르그 공작 가문에서 운영하는 펠틴 상단이었다.
피먼스 상단과는 식량과 옷감을 주로 거래했다. 펠틴 상단에선 군마로 쓸 말과 무기, 갑옷 등을 사들였다.
이맘때 피먼스 상단과의 거래는 매우 중요했다. 이때 식량과 옷감을 제대로 비축하지 못하면, 북부는 혹독한 겨울을 버텨야 한다. 그걸 막는 게 루비아나의 가장 큰 임무 중 하나였다. 어쩌면 마수 소탕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다.
‘백성이 제대로 뿌리박고 살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해. 그래야만 북부가 정말 제국의 땅이 된다.’
그를 위해 루비아나는 매년 막대한 양의 식량을 사들여 북부에 보내고 있었다.
피먼스 상단은 제국에서 밀을 제일 많이 사들이기로 유명한 상단이었다. 그렇게 사들인 밀 대부분은 북부로 실려 갔다.
북부는 이제야 막 농사를 시작했다. 작년에 처음으로 북부의 장벽 안에 일군 밭에서 감자를 수확했다.
엄지손가락만 한 감자알 세 자루.
북부는 고작 그것만으로도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루비아나는 술 창고를 열었고, 북부는 그날, 처음으로 추수제를 지냈다.
그날 저녁, 수확한 감자 중 가장 굵은 것이 루비아나의 접시에 올라왔다.
푸석푸석하니 형편없는 감자였다. 너무 오래 삶아 이상한 맛까지 났다.
루비아나는 그것을 입안에 넣고 오랫동안 씹어 삼켰더랬다.
그 감자가 언젠가는 주먹만 해질 것이다. 줄기마다 주렁주렁 달릴 날이 올 것이다. 북부의 백성이 매끼, 뜨끈한 감자 죽에 빵을 찍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날도 올 테고.
그전까지 북부의 백성을 먹이고 입히는 것, 그것이 루비아나의 임무이고 의무였다.
“올해 밀 확보가 어려웠나 보군. 자루당 가격도 오르고, 확보한 양도 줄었군.”
“어떻게든 작년만큼 확보하려고 했는데, 좀 부족했습니다. 올해도 풍년은 풍년인데, 동부에서 큰 홍수가 연달아 두 번이나 나서 말입니다.”
“흐음…… 그것 때문에 폐하께서 동부 치수 사업에 더욱 신경을 쓰시는 것 같으니, 곧 성과가 있겠지.”
“부디 잘됐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홍수만 안 나면, 매년 밀을 구하는 건 전혀 문제가 없어질 텐데 말입니다. 물론 가격도 많이 내려가겠지요.”
“그래서 밀 대신, 콩을?”
“예. 예년보다 두 배가량 더 사들였습니다. 말린 고기와 생선도 수량을 채웠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루비아나는 목록을 꼼꼼히 확인했다.
피먼스 상단주는 어느새 옆자리에 와 앉아서는 루비아나의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했다.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루비아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어렸다.
“좋아, 만족스러워. 올해도 잘 부탁하네.”
“부족한데도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년에는 밀을 좀 더 확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너무 최선을 다하진 말고. 피먼스 상단에서 밀을 다 사들여 수도에서 밀이 부족해지면, 폐하께서 날 가만두지 않으실 테니까.”
루비아나는 그제야 포도주로 목을 축였다.
“하하, 아모스 상단이 있는 한 그건 불가능하지요.”
피먼스 상단주는 루비아나의 싱거운 농담을 용케 알아듣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루비아나의 농담을 유들유들하게 흘려 넘기면서도, 라이벌 상단에 대한 견제를 숨기지 않았다.
아모스 상단은 펠트하르그 공작가 소속의 또 다른 상단으로, 수도의 식량 공급을 독점하고 있는 거대 상단이었다.
루비아나는 그 아모스 상단을 견제하고자 피먼스 상단과 계약한 것이기도 했다. 카드릭의 충성심을 믿으나 견제는 필요하니까.
그렇다고 아모스 상단을 가진 펠트하르그 공작가와 척을 지면서까지 피먼스 상단의 편을 들어 줄 생각은 없었다.
루비아나는 피먼스 상단의 뒷배가 되어 주길 바라는 피먼스 상단주의 은근한 시선을 모른 척했다.
눈치 빠른 피먼스 상단주는 루비아나의 반응을 보고는 얼른 속내를 감췄다.
“올해도 전액을 사비로 처리하십니까?”
피먼스 상단주는 제가 적었으면서, 계산서에 적힌 끝없는 0을 보자 아찔했다.
루비아나는 저보다 더 싱거운 농담을 할 줄 아는 사람을 처음 본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라고 폐하께서 내게 이것저것 내려 주신 거야.”
“그래도 그렇지, 정말 대단하십니다, 공작님. 이 정도면 공작가 기둥이 매년 하나씩은 뽑혀 나가는 것 아닙니까?”
“설마 하나만 뽑혀 나갈까.”
“저런. 부군께선 이걸 알고 결혼하신 겁니까?”
“당연히 안 알려 줬지.”
“그건 사기 결혼입니다.”
“자네만 조용히 하면 되지 않을까?”
“오, 신이시여. 당신께서 보내 주신 손님께서 제게 사기 결혼의 공범이 되기를 강요하고 있나이다. 당신께선 부부 사이의 평화를 가장 중요히 여기시니, 부디 이분 가정의 평화를 위해 제가 선의의 침묵을 지키는 걸 용서해 주시옵소서.”
피먼스 상단주가 두 손을 모으고 절절한 기도를 올렸다.
신께 신실하거나, 미신에 빠지거나. 불확실한 미래에 돈을 거는 평범한 상인의 모습이었다.
루비아나는 그에게 엄숙히 말했다.
“신께서 그 기도에 대한 답을 내 입을 통해 내려 주시려나 보네. 잘 들어 보게.”
소독하듯 포도주로 입안을 헹구고는 그 포도주를 꿀꺽 마셨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신께서 내 입을 빌려 말씀하시노니, 이 사람을 위해 침묵하면 복이 있나니, 앞으로 큰돈을 벌 기회를 얻게 되리라.”
“신명을 사칭하는 건 큰 죄입니다만, 공작님.”
피먼스 상단주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아직 루텔 수도원에 적을 두고 있다는 걸 잊었나 보지?”
이래 봬도 아직 루텔 수도원 소속 수도사였다. 신명 ‘크리스틸’이 루텔 수도원 본산의 장적에 선명히 기록되어 있으니까.
“제국 전역에 있는 300여 개 루텔 수도원에 들어가는 포도주 공급을 제게 맡겨 주신다면, 믿겠나이다.”
“……그냥 믿지 말든지.”
루비아나는 좋은 포도주나 한 병 홀딱 비워 피먼스 상단주의 재산을 티끌만큼이라도 낭비하자 싶어, 포도주를 잔에 그득 따라 마셨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곧 동부 치수 사업을 크게 시작할 거니, 적당히 끼어들어 한몫 챙기고.”
그리고 슬쩍 말을 흘렸다. 루텔 수도원의 포도주 공급권을 따 줄 수는 없지만, 이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었다.
“한다 만다 말이 많더니, 기어이 하나 보군요.”
피먼스 상단주가 눈을 빛냈다.
그는 수도 상인 길드의 길드장이기도 했다.
수도의 상인 길드는 반(半) 아모스 상단 연합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아모스 상단으로 대표되는 펠트하르그 공작가의 여러 거대 상단들과 맞서기 위해 중소 상단들이 똘똘 뭉쳐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아모스, 펠틴 상단 같은 곳들은 이미 펠트하르그 공작가를 통해 동부 치수 사업에 대한 정보를 전해 들었을 것이다. 카드릭이 사업의 총책임을 맡았으니, 굵직한 독점 계약을 따낼 테고.
하지만 상인 길드에서 미리 준비하여 동부 치수 사업에 뛰어든다면, 펠트하르그 공작가 소속 상단들도 어느 정도는 양보할 수밖에 없으리라.
루비아나는 그것을 노리고 피먼스 상단주에게 정보를 흘렸다.
루비아나에게 귀한 정보를 얻은 피먼스 상단주는 원래도 공손했지만, 더욱 공손해졌다.
그는 올해 북부로 보낼 물품의 비용 처리에 대해 다시 한번 확인했다.
“비용 처리를 작년처럼 진행하면 될는지요?”
“번거롭지만 부탁하네.”
“공작님의 재산 관리 대리인이 올해 공작가의 수익을 국고로 기부하면, 그다음에 제가 황궁으로 가 황제 폐하의 시종장님을 찾아뵙고 대금을 받는 방식 말입지요?”
“음.”
루비아나는 반쯤 빈 포도주병을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 가리고 아웅 격인 방법이지만, 루비아나는 그 번거로운 방법을 지켜 나갔다.
북부가 아쉴레앙 공작가의 사유재산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북부 백성들이 황제와 황실에 밀알만큼이라도 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길 바라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제국이 빨리 안정되어야 이런 귀찮은 짓을 안 할 텐데.’
루비아나는 포도주잔에 한숨을 흘려보냈다.
거대한 영토, 크고 작은 왕국에서 살았던 기억을 아직 가지고 있는 백성, 그리고 귀족들.
제국은 칼레나가 그것들을 품어 안아 탄생시킨 조각보였다. 역사가들이 놀랄 만큼 잘 운영되고 있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았다.
칼레나의 탓도, 세 공작의 탓도 아니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해결될 문제였다.
시간이 지나 통치 제도가 좀 더 정비되고, 행정 체계가 조밀해지고, 황실과 세 공작가가 머릿수를 불려 좀 더 탄탄해지면 될 일.
하지만 학자의 집을 때려 부숴 학자들을 억지로 관리로 만든 칼레나 만큼이나 루비아나도 조급함을 느꼈다.
루비아나를 조급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은, 아무래도 옛 아덴 왕국의 재건을 꿈꾸는 반란 세력이었다.
“그것들 때문에 북부로 가지도 못하고.”
루비아나는 북부에서 날아온 보고서를 떠올리며 목을 뒤로 젖혔다. 이것들은 왜 알아서 하질 못하는 거야?
“예? 방금 뭐라고 하셨는지……?”
“아니, 아무 말도 안 했네.”
루비아나는 시치미를 떼며, 치솟는 한숨을 꾹꾹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