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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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일도 끝나고 포도주도 한 병 비운 루비아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먼스 상단주는 당연하게 일어서 루비아나를 따라 나왔다.

문 앞까지 배웅하려는 건가 싶어 가만 놔뒀는데, 아예 복도까지 따라 나오더니 문을 열쇠로 잠갔다. 철컥.

“어디 가나?”

“아이고, 오늘 제 업무는 오직 공작님을 뵙는 것뿐이었습니다. 좀 일찍 퇴근해서 아내한테 가 보려고 말입니다.”

그냥 볼일이 있다고 하면 될 것을. 피먼스 상단주는 굳이 구구절절 말했다.

그러고도 더 말하고 싶다는 듯 입술을 움직여 댔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 달라는 눈빛은 덤이었다.

‘싫은데.’

루비아나는 남의 가정사 따위 궁금하지 않았다.

‘내 집안일만으로도 벅차.’

못 들은 척 무시하려고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그럼 수고하……”

“어쩌다 보니 제가 아내랑 대판 싸워서 한 일주일, 말 한마디 안 하고 지냈지 뭡니까.”

피먼스 상단주는 눈치가 매우 빠른 자였다. 그는 루비아나가 제게 왜 그러냐고 물어보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닫고는 제멋대로 떠들어 댔다.

루비아나는 그 말을 듣고 멈칫했다. 지난 사흘간, 루이먼드와 서먹했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그래서?”

루비아나가 반응하자 피먼스 상단주는 신나서 줄줄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에 식사 중에 괜히 중얼거리지 뭡니까. 오늘 친구들하고 무슨 모임이 있다나 뭐라나. 결혼 생활 20년쯤 했는데 그게 무슨 신호인지 모르겠습니까? 진짜 모르면 나가 죽어야지요.”

“무슨 신호?”

결혼 한 달 차 루비아나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뿅뿅 솟았다. 피먼스 상단주는 자신의 깨달음을 제자에게 전수하는 대현자처럼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화해하자는 신호입죠.”

“그게?”

“딱 들으면 딱 아니겠습니까. 왜 굳이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네가 나랑 평생 말 안 하고 살려고 작정한 거 아니면, 내가 친구들이랑 만나는 곳에 와라. 와서 밥값도 멋지게 내고, 정신머리가 있으면 선물도 좀 들고 와 친구들한테 뿌려서 내 기 좀 살려 봐라.’인 거죠.”

“……그런 뜻이라고?”

루비아나는 오늘, 루이먼드가 무슨 모임에 참석할 거라고 말했던 걸 떠올렸다. 분명, 아침 식사를 하며 말했더랬다.

‘설마?’

팔에 닭살이 돋았다.

‘루이먼드도 똑같은 신호를 보냈던 건데, 내가 못 알아들은 건가?’

그러고 보면 뭔가 이상했다. 지난 사흘간 그렇게 서먹하게 굴던 루이먼드가 왜 하필이면 오늘, 이른 아침부터 드레스 룸으로 찾아왔단 말인가?

그는 직접 옷을 골라 주었고 입혀 주었다. 마치 자신의 아내를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

루비아나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어쩌겠습니까? 귀찮아도 가야지.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아마 한 달 내내 아내하고는 말 한마디 못 할 게 분명합니다. 침실에서 쫓겨난 지 일주일인데, 이제 슬슬 다시 합쳐야지요.”

피먼스 상단주는 일주일째 차가운 손님방에서 혼자 이불을 싸매고 자고 있다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기혼자 특유의 허세였다.

돈도 잘 벌고 유능한 내가 내 아내한테는 이렇게 잡혀 산다. 난 아내의 모임에 찾아가 떡하니 밥값도 내고 선물을 뿌릴 정도로 돈도 잘 번다. 그뿐인가? 이 나이에도 아직 팔팔해서 부인이랑 쭉 한 침대를 쓰며 살았다아아아아아.

행간마다 화목한 가정, 유능한 나를 이렇게 휘어잡고 사는 멋진 내 아내에 대한 자랑하는 마음이 그득그득 실려 있었다.

이전 같았으면 피먼스 상단주가 뭐라고 떠들든 귀담아듣지 않았을 것이다. 아예 말을 꺼내기 전에 휭하니 가 버렸겠지.

하지만 지금의 루비아나는 예전의 루비아나가 아니었다. 루비아나는 피먼스 상단주의 자랑을 주의 깊게 들었다. 그리고 물어보았다.

“여기, 귀족들이 쓰는 고급품도 다룬다고 했지?”

“예? 예에. 예, 지난번에 말씀드렸다시피 결코 엘몽 상단에 뒤지지 않습니다.”

엘몽 상단은 귀족들의 고급 사치품을 주로 다루는, 역시나 펠트하르그 공작가 소속의 상단이었다.

그냥 여기서 피먼스 상단주와 헤어져 엘몽 상단으로 가도 될 일이나 루비아나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혹시나 한발 늦어 서로 어긋나면 피먼스 상단주처럼 앞으로 한 달간 더 각방을 쓰게 될지도 모를 일 아닌가!

“요즘 유행하는 게 뭔가? 가장 비싸고 좋은 것들부터 꺼내 와 보게.”

“아니, 저는 방금 드렸다시피 지금 얼른 가 봐야 하는……”

“있는 대로 살 테니까.”

“에, 엘몽 상단으로 가시면 안 될까요?”

“어서.”

“…….”

피먼스 상단주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그는 연신 아내에게 가 봐야 한다며 발을 동동 굴렀으나 루비아나는 애써 외면했다.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백지 어음을 꺼내는 것으로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만약 둘 중 한 명이 한 달 더 집사람과 각방을 써야 한다면 그건 당연히 피먼스 상단주여야 했다. 자신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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