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131)

***

결혼 후 첫 외출. 첫 모임 참가.

그 의미는 특별했다.

앞으로 아쉴레앙 공작 부군의 행보가 어떨지 알려 주는 첫 발자국 같은 것이었으니까.

루비아나와 시녀장은 아쉴레앙의 평판 따위는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졌으니 전혀 신경 쓰지 말고 마음대로 하라고 말하곤 했지만 정말 그럴 수는 없었다.

‘그렇게 평판이 땅에 떨어졌다면, 나라도 일으켜 세워야지.’

유능한 모습을 보여 루비아나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첫 번째 방법. 사교계에서 탄탄히 입지를 다져 아쉴레앙 공작가의 명성을 드높이자.

루이먼드는 산처럼 쌓인 초대장 무더기 속에서 현 내무국장의 남편인 회계국장 리스 시모어, 그의 남동생 에릭이 운영하는 살롱을 골랐다.

지금은 별 볼 일 없는 작은 모임에 불과하지만, 그 모임은 5년 안에 제국 최고의 사교 모임으로 거듭난다.

살롱의 주 구성원이었던 무명의 가난한 예술가들이 제국의 예술계를 휘몰아칠 정도로 엄청난 작품들을 발표했기 때문이었다.

에릭의 살롱은 진정 천재 예술가들의 집합소라 할 만했다.

귀족들은 뒤늦게 그 살롱에 참석하고 싶어 에릭을 회유하고 협박했다. 말을 들어 먹지 않으니 납치하려고까지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살롱 입성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자 귀족들은 살롱의 초기 구성원인 천재 예술가들을 빼내려 했다.

그리고 그 역시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성공한 예술가들이 에릭에게 의리를 지키며, 오직 에릭의 살롱에만 참석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에릭의 살롱은 이후로도 오래오래 계속됐다.

제국의 귀족들은 한 번만이라도 그 살롱에 참석하고 싶어, 황실 관리의 남동생에 불과한 에릭에게 설설 기었다.

그 에릭이 루이먼드에게 초대장을 보내온 것이었다. 아직 아무도 그 가치를 몰라주는 살롱의 초대장을.

“바로 이거야!”

루이먼드는 무조건 참석하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오늘, 살롱이 열리는 날.

루이먼드는 루비아나를 먼저 내보낸 뒤, 일부러 수수한 정장을 골라 입고 시모어가 저택으로 갔다.

조용하고 아기자기한 천재 예술가들의 집합소에 끼어들어 그들과 친분을 쌓을 생각이었다.

‘그러면 아쉴레앙 공작가는 미래에 성공할 예술가들을 알아보고 팍팍 후원한 멋진 가문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겠지?’

그러기 위해서 자신에게 할당된 공작가의 예산을 펑펑 쓸 생각도 했건만.

유능한 공작 부군이 되기 위한 첫걸음은, 첫걸음부터 큰 위기에 처했다.

시모어 저택의 응접실. 낡고 해진 옷을 입은 예술가들이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녀야 할 그곳에, 수도의 내로라하는 귀족 영애, 영식들이 빽빽하게 몰려와 있었다.

“어, 어째서…… 나의, 나의 참새 둥지 같던, 나의 살롱이…….”

살롱의 주최자인 에릭 시모어는 구석에 밀려나 웅크린 채 흑흑 울고 있었다. 그를 대신해 살롱 주최자의 자리에 앉아 있는 건 활짝 웃고 있는 오딜 후작 영애, 리사나였다.

“루이. 어서 오세요. 오랜만이죠?”

‘아, 망했다.’

루이먼드는 이게 어찌 된 상황인지 바로 파악하고는 후회했다.

에릭 시모어의 살롱에 참석하고자 한 이유는, 그곳이 곧 제국을 뒤집어 놓을 천재 예술가들이 모여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온건한 성격의 모임이기 때문이었다.

유명한 모임이나 정치적 성향이 분명한 모임에 방문했다가 괜한 오해를 사면 곤란하니까.

그래서 가장 무난한 곳을 골랐는데, 그 무난한 곳이 자신 때문에 더 이상 무난하지 않게 되어 버렸다.

온건하고 무난하다는 건 힘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루이먼드가 참석한다는 말이 퍼지자마자, 사교계에서 힘 좀 쓴다는 이들이 에릭 시모어에게 몰려와 초대장을 강탈, 아니, 빼앗듯이 받아 갔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에릭 시모어와 그의 살롱은 아직 그런 무례를 막아 낼 힘이 없었다.

그리고 그 사교계에서 힘 좀 쓴다는 이들 중에 오딜 후작 영애, 리사나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미리 예상했어야 했는데.’

루이먼드는 자신의 안일함을 반성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라고 말해 줬던 루비아나의 인사말이 그를 지탱해 주었다.

루이먼드가 기죽지 않고 당당히 어깨를 펴자, 귀족들은 그가 아쉴레앙 공작이란 든든한 뒷배를 가지고 잘난 척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특히나 리사나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의 그늘에 숨어 의기양양한 모습 따위, 애증을 더욱 키울 뿐이었다.

그들의 생각대로 루이먼드가 루비아나를 떠올린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처럼 루비아나만 믿고 자신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루이먼드는 그보단, 일종의 책임감 같은 것을 느꼈다.

‘난 이제 아쉴레앙 공작의 남편이야. 내가 움츠러들면 나만 얕보이는 게 아니야. 비아의 평판까지 떨어져.’

루이먼드는 당당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족히 수십 쌍의 눈이 저에게 따라붙는데도, 루이먼드는 기죽거나 움츠러들지 않았다.

“어서 와요.”

리사나는 당연하게 손을 내밀었다. 자신이 이 살롱의 주인이라는 듯 굴었다.

루이먼드는 그런 그녀를 본척만척하고 스쳐 지나갔다.

리사나의 손은 무시당한 채로 허공에 붕 떠 버렸다.

“……!”

리사나의 눈이 커졌다. 주변에 앉아 있던 영애들은 놀라 입을 벌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교계의 꽃이라 불리는 리사나를 무시하다니.

놀람과 경악의 분위기가 주변으로 번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이먼드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구석에 놓인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에릭 시모어의 앞에 멈춰 섰다.

“내, 살롱이…… 내 살롱이…….”

에릭은 패닉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같은 말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는 문득, 주변이 싸늘하리만치 조용해진 걸 깨달았다. 제 머리 위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는 것도.

에릭은 주저하다 살짝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반딱반딱 윤이 나는 구두와 늘씬한 다리가 보였다.

일단 여자는 아니었다. 리사나와 그녀의 친구들이 아니라는 것에 일단 안심. 하지만 완벽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이 살롱 안엔 리사나를 따르는 영식들이 한가득이었으니까.

“왜, 왜…… 저는, 말씀하신 대로 여기 가만히, 가만히 있습니다.”

에릭은 슬그머니 실눈을 떠 제 앞에 선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했다.

“어…….”

에릭은 멍청하게 눈을 끔뻑였다.

“에릭 시모어 경, 초대해 주어 고맙습니다.”

루이먼드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 네?”

에릭은 멍하니 그 손을 바라보기만 했다. 미처 그 손을 맞잡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조금 전 리사나와 마찬가지로 루이먼드의 손이 허공에 붕 떴다.

하지만 루이먼드는 그녀처럼 노여워하거나 수치스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오기 전까지 리사나와 그녀의 무리에게 얼마나 시달렸을까 동정했다.

에릭은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는 급히 루이먼드의 손을 맞잡았다.

“고, 공작 부군을, 예, 제가 초대장을 보내긴 했지만, 그게 예의라고 누가 말해 줘서, 정말 예의상 보낸 거였는데, 그러니까, 와 주셔서 영광, 영광…… 히끅.”

하지만 말을 하다 말고 놀라 딸꾹질했다.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고, 갈색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이런.’

루이먼드는 에릭이 뭘 보고 겁먹었는지 눈치챘다. 그 역시 등에 박히는 따사로운 시선이 느껴졌으니까.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리사나가 얼마나 화나 있는지.

“오랫동안 경의 살롱을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루이먼드는 에릭에게만 겨우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으, 음모?”

에릭이 놀라 눈을 부릅떴다. 눈알이 데굴데굴 굴러 나올 것 같았다.

“아니, 음모 말고 흠모.”

“아…… 네. 흐, 흠모. 흠모…….”

아무래도 정신이 팔려 말을 못 알아듣는 것 같았지만 루이먼드는 그냥 말을 이었다.

‘나중에 정신 차리면 생각나겠지.’

“이번 일은 나의 불찰입니다. 부디, 이해와 용서를 바랍니다.”

“아, 예… 예……… 이해, 용서…… 아름다운, 단어입니다…….”

“언제든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이번처럼 말고, 본래 경의 살롱에서 말입니다.”

“아, 저의, 저의 살롱…… 그런 게 있, 있, 었을는지…….”

에릭의 얼굴은 이제 핏기 없이 새하얬다. 더 놔뒀다가는 소파에 웅크린 채로 기절해 버릴 것 같았다.

루이먼드는 그걸 막기 위해 돌아서야 했다. 더는 리사나를 계속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어쩌다 보니 에릭을 등 뒤로 숨기는 듯한 모양새가 됐다.

드디어 루이먼드가 자신에게 돌아서자 리사나가 빙긋 웃었다. 붉게 칠한 입술이 매혹적으로 휘었지만 루이먼드는 아무 감흥이 없었다.

루이먼드는 이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달콤한 입술을 맛본 뒤였다. 리사나의 매력은 원래도 통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더더욱 통하지 않았다.

아내를 사랑하는 유부남에게 아내 외의 여자란, 그저 돌일 뿐이니까.

“이제야 제가 보이시나 보군요.”

“살롱의 주인에게 먼저 인사하는 것이 예의니까요.”

“살롱의 주인, 이라.”

리사나가 루이먼드의 어깨를 넘겨다보았다. 에릭은 그 시선을 느끼고는 더욱 몸을 떨었다.

루이먼드는 기꺼이 벽이 되어 둘 사이를 막아섰다.

당당한 척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장이라도 리사나가 반지를 열 개 넘게 낀 손으로 자신의 복부를 칠 것 같았다.

여기저기 숨어 있던 건장한 하인들이 벌떡 일어나 이쪽으로 달려들 것 같기도 했다.

‘괜한 생각이야. 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데, 그럴 수 있을 리 없잖아.’

루이먼드는 마음을 다스리려고 애썼으나,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루이먼드 역시 에릭 시모어와 다를 바 없었다.

‘……무서워.’

자신에게 집착하는 리사나가. 그녀의 등 뒤에 서 있는 오딜 후작이. 그와 그레이움 백작이 꾸미는 반역 음모가, 당장이라도 자신의 목을 뎅겅 잘리게 만들지 모를 그 수렁이.

하지만 에릭처럼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벌벌 떨 수는 없었다. 루이먼드는 두려움을 숨기고 어깨를 당당히 폈다.

그래도 끝내 숨기지 못한 두려움이 손끝에 남았다. 루이먼드는 서둘러 뒷짐을 졌다.

그 바람에 에릭은 살롱 안에서 누구도 보지 못한 루이먼드의 떨림을 바로 눈앞에서 보게 되었다.

‘나, 나를 지켜 주시려고 두려움을 무릅쓰고 나서 주시는 건가?’

에릭은 갈색 눈동자에 감동의 눈물이 차올랐다.

리사나는 에릭의 형편없는 얼굴을 보고 흥, 코웃음 쳤다.

“살롱의 주인께서 오늘만큼은 제게 모든 권리와 자리를 양보해 주셨답니다. 아무래도, 아쉴레앙 공작 부군씩이나 되는 귀한 분을 모시는 게 부담스러웠을 테니까요. 굳이 말하자면, 제게 도움을 구한 것이지요.”

아쉴레앙 공작 부군이란 단어에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 악센트가 강했다. 루이먼드는 못 들은 척했다.

“그럼 당신이 이 살롱의 주인이라는 겁니까?”

“오늘만은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리사나가 웃으며 옆의 티 테이블을 가리켰다.

“자, 그럼 제 안내를 받으시겠어요? 이쪽으로……”

“그렇다면 나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이유가 없군요.”

루이먼드가 문 쪽으로 몸을 틀었다.

“자, 잠깐!”

리사나가 다급히 루이먼드의 옷소매를 붙들었다. 루이먼드는 바로 그녀의 손길을 쳐 냈다.

“함부로 만지지 마십시오.”

“…….”

리사나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리사나를 따라온 귀족 무리는 리사나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것도 잠시 잊고 얼이 나가 버렸다.

그들 중 리사나와 루이먼드가 어떤 관계인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리사나가 아쉴레앙 공작 부군이 최초로 참석한다는 사교 모임을 깽판 놓으러 간다니, 얼씨구나 하고 따라온 것이었다.

아쉴레앙 공작가에 보낸 초대장을 거절당한 원한. 폭군의 사생아 주제에 얼굴 하나로 아쉴레앙 공작을 홀려서 부군 자리를 꿰어 찬 루이먼드를 향한 질투. 그런 마음을 가진 영식들이 적극적으로 쫓아왔다.

호시탐탐 루이먼드를 골릴 기회만 노리고 있었건만, 루이먼드를 놀리기는커녕 그의 행동에 연달아 놀라고만 있었다.

살롱을 빽빽하게 채우고 압박하면 지레 겁먹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아서 한 번 놀라고. 리사나가 내민 손을 무시하는 것에서 두 번 놀라고.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였다.

“시, 신사답지 못한 자로군!”

그나마 일찍 정신을 차린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루이먼드에게 삿대질했다. 다른 영식들도 하나둘, 충격에서 깨어나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러게 말이야. 공작 부군이 되었다고 태도를 싹 바꾸는 것 좀 보라지.”

“공작 부군이면 다야? 그 전엔 감히 오딜 후작 영애에게 접근하지도 못했던 주제에.”

“리사나 양이 애써 좋은 자리를 만들어 친분을 나누고자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건만. 굴러들어 온 복을 제 발로 차다니.”

“역시 출신은 어쩔 수 없어.”

영식들은 저들끼리 경쟁이 붙어 점점 더 목소리를 높였다.

작정하고 내뱉는 말은 촌스럽고 유치했으나,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하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루이먼드는 상처 입지 않았다. 꼿꼿한 자세 역시 흐트러지지 않았다.

루이먼드는 오히려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을 슥 훑어보았다.

사내들은 루이먼드와 눈이 마주치자 윽, 하며 입을 다물었다.

루이먼드에게 눌려 입을 다무는 사람들이 차곡차곡 늘어 절반가량이 될 즈음.

리사나가 손을 들어 나머지 사람들의 입을 닫게 했다.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선수 친 것이었다.

하아. 리사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이렇게 되어 아쉽네요, 저는 정말이지, 공작 부군과 잘 지내보고 싶어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건데 말이에요.”

리사나가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그것만으로 그녀는, 상냥한 호의를 거절당하고 무시당한 가련한 피해자가 되었다.

진짜 피해자인 에릭보다 훨씬 더 우아하고 가련해 보였다.

본래 날것의 슬픔보다 꾸며진 슬픔이 남들 눈에 더 아름다워 보이는 법이니까.

이미 리사나를 불쌍하게 보려고 단단히 마음먹은 사람들은, 리사나를 보며 덩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자연히 루이먼드를 향한 적대심은 더 깊어졌다

리사나 옆에 앉은 영애들 중 루이먼드에게 은근한 시선 한 번 안 보내 본 사람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 자리에서 그들은 철저히 리사나의 편이었다.

루이먼드는 딱히 놀라거나 섭섭하지 않았다. 익숙한 일이니까.

그를 신 떠받들듯 쫓아다니고, 한 번이라도 침대에 밀어 넣고자 안달하던 자들이, 공적인 자리에서 태도를 뒤바꾸어 자신을 경멸하듯 바라보는 일쯤이야.

그런 주제에 다른 자리에서 만나면 또 은근한 눈길을 보내며 사랑과 애정 따위를 속삭이겠지.

한두 번 겪어 본 게 아니었다.

‘……비아만은 그러지 않았어.’

어쩔 수 없이, 또, 루비아나가 생각났다.

언제나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한결같은 사람.

그게 황제의 친언니라는 절대적인 권력에서 나오는 여유로움이든, 아니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무심함에서 나오는 것이든,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그녀의 변치 않는 태도에 늘 구원받는 기분이니까.

자신을 향한 악의로 가득 찬 공간 안에 서서, 루이먼드는 새삼 루비아나에게 고마웠다.

단 한 명이라도 누군가 자신을 온전히 바라봐 주고 지지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사람을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하고 단단하게 만들어 준다.

온통 절 싫어하고 창피를 주려고 작정하고 모인 사람들 안에서, 홀로 서 있는데도 버틸 수 있는 이유였다.

어쩌면 어린아이가, 자신을 절대적으로 믿고 사랑해 주는 엄마를 등 뒤에 두고 자신만만한 것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약간 씁쓸하고 설익은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덕분에 이젠 손끝도 떨리지 않았다.

루이먼드는 리사나를 똑바로 보았다. 물론, 그녀가 혹시라도 달려들어 반지 낀 손으로 복부를 강타할 것에 대비해, 적정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와 교제하기 위해 이곳에 오셨다고 했습니까?”

“네. 그래요. 이제야 제 진심을 알아주시는군요.”

루이먼드가 말을 걸자 리사나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그 밝은 표정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렇다면 에릭 시모어 경의 살롱을 이렇게 멋대로 휘젓고 망치지 말았어야 합니다.”

“멋대로, 휘젓고 망치다니요?”

리사나가 눈을 치켜떴다.

“공작 부군께서 결혼 후 처음으로 참석하시는 모임이기에, 공작 부군의 평판을 위해 제가 나선 것입니다.”

감사는 못 할망정 그게 무슨 말인지? 리사나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루이먼드는 차게 웃었다.

“내가 참석하고 싶었던 그 모임은 에릭 시모어 경의 살롱이지, 오딜 후작 영애의 티타임이 아닙니다. 내가 당신을 만나고자 했으면 당신의 티타임 초대장에 응했겠지요, 오딜 후작 영애.”

루이먼드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저에 대해 멋대로 수군대다가 얼른 고개를 돌리는 모습들이라니.

“내가 결혼 후 달라졌다고 했습니까?”

루이먼드는 그들에게 물었다.

“오히려 묻고 싶군요. 내가 결혼하자마자, 내가 이 조용한 살롱에 참석한다는 말에 헐레벌떡 몰려와 있는 당신들은 얼마나 이전과 똑같습니까?”

똑같으면 똑같은 대로, 달라졌다면 달라진 대로 환멸의 대상이었다.

고작 저런 놈이 아쉴레앙 공작의 남편이 되었다는 질투심에 발작하는 모습이라니. 폼 잡으려고 허리춤에 찬 장검이 아까울 따름이었다. 다리 사이에 걸고 있는 건 장검은커녕, 단검의 반절도 안 될 것들이.

‘비아 앞에선 감히 말 한마디 못 할 거면서.’

그 하찮음에 코웃음이 나다가도, 루비아나가 아니라 자신에게 와서 이 요란을 떨어 대 다행스럽기도 했다.

“에릭 시모어 경, 저 때문에 귀한 모임이 이렇게 엉망이 된 것 같아 미안할 따름입니다.”

루이먼드는 눈앞의 리사나를 놔두고, 저 구석에서 멍하니 앉아 있는 에릭 시모어에게 인사했다.

에릭은 덩달아 꾸벅 고개를 숙이다가 주변 사람들의 눈총을 받고는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렸다.

“조만간 제 쪽에서 먼저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우리의 우정이 계속 이어지기만을 바랄 따름입니다.”

그 우정, 오늘 만들고 이어 갈 예정이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다음을 기약할 밖에.

그러면서도 루이먼드는 은근슬쩍, 오늘 만남으로 일단 우리가 인연을 맺긴 맺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그리 말하고는 미련 없이 돌아서려 했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뒷목을 확 잡아챘다.

“그래 봤자 괴물 공작과 결혼한 폭군의 사생아 부군 주제에 잘난 척은.”

혼잣말하는 정도의 목소리였다. 기껏 해봐야 아까 수군대던 것 정도의 목소리.

그럼에도 루이먼드의 귀에 정확히 들어와 박혔다.

“…….”

루이먼드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곧바로 그 목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다.

히익, 하고 고개를 돌리는 청년이 보였다.

“야, 네가 방금 한 말 들은 거 아냐?”

“가만, 가만히 있어.”

옆에 서 있는 친구가 옆구리를 쿡 찌르자 기겁하며 그 손을 쳐 내는 모습까지. 내가 범인이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는 분명 결혼 전 루비아나 주위를 뱅뱅 맴돌던 찌질이들 중 하나였다.

한동안 루이먼드 역시 루비아나 주변을 빙빙 맴돌았기 때문에, 얼굴이 낯익었다.

우연히 루비아나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히이익거리며 도망쳤던 주제에 저딴 말을 지껄이다니.

루이먼드는 그에게로 곧장 걸어갔다.

주변 사람들이 알아서 자리를 비켜 줬다. 덕분에 루이먼드는 거치적거리는 것 없이 곧바로 그의 멱살을 움켜잡을 수 있었다.

“어, 어어어!”

그가 허우적대며 끌려 올라왔다.

늘 좀 떨어져 서로 루비아나를 힐끔거리기만 해서 몰랐는데, 키가 많이 작았다. 머리가 커서 덩치 좀 있겠다 싶었는데 아니었다.

멱살을 잡으니 잡는 대로 끌려 올라와서는 짧은 팔다리를 허우적대며 까치발을 들고 동동거렸다.

그 모습을 보노라니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방금 했던 말 다시 해 봐.”

“무, 무슨……?”

“방금 했던 말 다시 해 보라고.”

“크, 윽, 이, 이것부터 좀 놓고…….”

“놔 달라고? 기꺼이.”

루이먼드는 그를 높게 들었다가 손을 탁, 놨다.

“으아악!”

남자는 엉덩이부터 떨어져 쿵, 소리를 내고는 바닥을 뒹굴었다.

두 손으로 엉덩이를 감싸 쥔 채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조금 풀……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화가 났다.

자신을 욕하는 것이야 백번 천번을 들어도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루비아나는 아니었다. 왜 자신과 한데 묶여 싸잡아 욕먹어야 한단 말인가?

괴물 공작. 결혼 전에도 숱하게 들었고 그땐 아무렇지 않았는데 왜 이제 와선 화가 치솟는지 모를 일이었다.

‘괴물은 누가 괴물이야?’

화만 나는 게 아니었다. 울컥, 울음이 올랐다. 이들 앞에서 드러내기 싫어 꾹 참긴 했지만.

루비아나의 몸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전쟁 중에 다친 거구나 싶은 상처도 있었지만 도무지 사람과 싸워 생긴 상처라 할 수 없는 것도 수두룩했다.

만지는 것조차 미안해서 손을 대지 못하고 입술만 겨우 가볍게 댔다.

그러면 루비아나는 웃으며 그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헤집었다. 그러고는 이젠 괜찮다고, 아프지 않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 담담함에 심장이 시렸다.

수도의 사람들이 낄낄거리며 괴물 공작, 괴물 공작 하고 떠들어 대고 있을 때, 루비아나는 그들을 위해 그 몸으로 북부의 장벽을 지키고 서 있었다. 끝없이 밀려온다는 마수와 싸우고 또 싸우며.

발꿈치에마저 상처가 있는 걸 봤을 때, 루이먼드는 그녀를 안고 싶다는 욕망으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도 잠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느 한구석 성한 곳 없이, 빼곡히 상처로 가득한 몸. 상처 입어도 아무렇지 않게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금 북부의 장벽 위에 우뚝 섰을 삶.

그 삶은, 괴물 공작이라는 멸칭으로 단순히 불릴 만한 것이 아니었다. 폭군의 사생아 남편을 얻었다고 가려질 업적이 아니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루비아나에게 정치적 약점으로 작용할 테고, 사교계 평판에도 누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미리 각오했던 것과는 별개로, 루이먼드는 화가 나 견딜 수 없었다.

사생아 남편의 치부 따위, 그 사람의 빛나는 업적에 비하면 발끝의 때만도 못한 크기일 것인데.

‘감히, 비아를 모욕해?’

그것도 한때, 루비아나에게 찝쩍댈 궁리를 하며 주변을 맴돌았던 놈이?

루이먼드는 추하게 바닥을 뒹구는 남자의 얼굴과 그의 어깨에 달린 가문의 문장을 똑똑히 눈에 담았다.

저놈과 저놈의 가문이 비참하게 몰락하기 전까진, 절대로 절대로 잊지 않으리라.

“그 괴물 공작과 사생아 출신 부군이 당신에게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기대하고 있으라고.”

루이먼드는 그와 그 주변의 사람들이 잘 들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 말했다.

사방에서 헉 소리가 들려왔다.

멋대로 떠들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놀라는 것이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줄 모르는 머저리들.

루이먼드는 더는 이들과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무리를 이끌고 다니는 리사나가 더는 두렵지도 않았다.

“자, 잠깐만, 뭐, 뭔가 오해가……”

볼썽사납게 널브러져 있던 남자가 다급히 루이먼드를 잡으려고 했다.

루이먼드는 그가 잡기 전 발을 빼내곤, 경멸 어린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이대로 나가시면, 더는 저와 교제를 이어 나갈 생각이 전혀 없으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미련 없이 돌아서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리사나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상냥한 선전 포고였다.

사교계의 꽃으로 이름이 드높은 오딜 후작 영애 리사나와 등져서 좋을 것이 하나 없었다.

몇몇 영식들은 자신이 협박받은 것처럼 안색을 굳혔다. 루이먼드 역시 얼굴이 굳었으나, 그들처럼 겁에 질려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말, 오딜 후작가가 아쉴레앙 공작가를 적대하겠다는 말로 알아들어도 됩니까?”

루이먼드는 문고리를 잡은 채, 말했다. 뒤를 돌아볼 가치조차 없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오딜 후작가가 그레이움 백작가와 손잡고 반역 모의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루이먼드는 오히려 감사할 지경이었다.

‘그래, 이대로 나와 비아에게서 떨어져 나가 버려.’

그래도 이곳에 온 보람이 없진 않았다. 자신과 오딜 후작가가 사이 나쁘다는 게 확실히 드러났으니까.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다 증인이었다. 설사 리사나가 입단속을 하더라도, 저들끼리 알아서들 수근수근 떠들어 대리라.

“진심, 으로 하시는 말씀인가요?”

리사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물론입니다. 제발 그래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루이먼드는 이를 악물고 답했다. 제발 내 인생에서 좀 꺼져 줘. 이 간절한 마음이 부디, 닿기를 바라며 문을 벌컥 열었다.

루이먼드는 바로 밖으로 걸어 나왔다. 열린 문 안쪽에서 아까와는 결이 다른 수군거림이 들렸다.

“조금 전에…… 아쉴레앙 공작이랑 좀 비슷하지 않았어?”

“말도 안 돼! ……그러게 좀 비슷했던 것 같기도?”

“부부는 닮는다더니.”

“결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 뒷말은 마음에 들었다.

‘내가 비아와 비슷하다니.’

최고의 찬사 아닌가? 웃음이 나올 수밖에.

‘보고 싶다. 비아가 보고 싶어.’

루이먼드는 사흘간 각방을 썼던 아내를 떠올렸다. 급할 거 하나 없는데 괜히 마음이 조급해졌다.

역시 침대 밖은 위험해, 이상한 사람들만 만나고 이상한 소리만 듣고. 한 3년쯤 침대에만 콕 박혀 있었어야 했는데.

루이먼드는 허니문이 너무 일찍 끝나 버린 걸 아쉬워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빨리 아쉴레앙 공작저로 돌아가고 싶었다.

‘비아는 먼저 와 있으려나?’

그랬으면 좋겠다는 마음 반, 자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반겨 주고 싶다는 마음 반. 아무튼 루비아나와 재회할 생각으로 마음이 가득 찼다.

그 바람에 절 다급히 뒤따라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루이!”

그 소리가 기어이 절 따라잡다 못해, 손목을 잡아채고서야 알아차렸다.

루이먼드는 자신을 붙잡은 사람을 확인하곤 바로 인상을 찡그렸다.

“오딜 후작 영애?”

“어떻게 사람이 변하나요?”

“그게 무슨……?”

“이래 봤자 힘들어지는 건 당신뿐이에요.”

리사나가 우다다, 말을 쏟아 냈다. 루이먼드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이것부터 놓으십시오.”

루이먼드는 잡힌 팔목부터 털어 냈다.

어찌나 세게 잡았던지 손목에 손자국이 선명히 났다. 루이먼드는 손목을 감싸 쥐고 뒤로 물러섰다.

리사나가 그만큼 다가왔다.

“당신이 아쉴레앙 공작과 혼인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짝 돋는 말이었다. 루이먼드는 닭살 돋은 팔을 문질렀다.

“오늘은 그걸 말해 주려고 찾아온 거였어요.”

리사나가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고는 나긋하게 말했다.

“……아니, 다 달라졌어.”

루이먼드가 받아쳤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갈라진 목소리였다.

루이먼드는 제 목을 감싸 쥐었다. 목이 잘렸던 그 끔찍한 느낌이 떠올라 견딜 수 없었다.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고? 아냐. 그럴 리 없어.’

여덟 번 만에, 드디어, 바꿨다고 생각했다. 신혼의 단꿈에 젖어, 감히 3년 뒤를 꿈꾸기까지 했다.

리사나의 말이 그 모든 단내 나는 희망을 깨부쉈다.

‘……설마.’

부정하고 싶었지만 어쩌면 리사나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레이움 백작이 이대로 날 포기할까? 그 몇 번의 협박에 겁먹고 물러설까?’

그 그레이움 백작과 손을 잡은 오딜 후작은? 그들이 거느린 반란 세력은?

목이 서늘해졌다. 매번 뎅강 잘렸던 그 부위가.

리사나의 말대로였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루이먼드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걸 본 리사나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오, 불쌍한 루이. 이제야 현실을 깨달았나요?”

리사나가 손을 뻗어 루이먼드의 뺨을 만지려 할 때였다.

바스락.

소리가 났다.

리사나는 물론이거니와 루이먼드까지 흠칫 놀랐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뒤로 물러섰다.

“누구지? 당장 모습을 드러내!”

리사나가 소리쳤다.

소리가 들린 곳은 두 사람이 서 있는 회랑 밖 정원.

적당히 꽃 덤불이 우거지고 아름다운 정원수가 심어진 곳이었다. 사람의 모습은커녕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토끼나 다람쥐가 나오겠지. 사람이 있었다면, 더 바짝 숨을 테고.’

루이먼드는 제가 읽었던 소설들에서 이와 비슷한 장면들이 여러 번 등장했던 걸 떠올렸다.

‘나오란다고 나오겠어? 게다가 그렇게 화난 목소리로 다그치는데.’

루이먼드는 시니컬하게 생각하며, 방금 전 리사나와 했던 대화를 돌이켜보았다.

몇 마디 나누지 않았다. 반란의 반 자도 꺼내지 않았지만, 누군가 듣고 멋대로 오해하지 않을까 그게 걱정됐다.

그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실례했습니다.”

그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

루이먼드는 바스락 소리를 들었을 때보다 더 깜짝 놀랐다.

“……도미넨트, 공작님?”

루이먼드 만큼은 아니지만, 역시나 갑자기 툭 튀어나온 사람을 알아보고 놀란 리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미넨트 공작, 루단테가 싱긋, 리사나에게 눈웃음쳤다.

“오딜 후작 영애, 여기서 뵙는군요.”

“어, 어떻게 거기에……?”

“아, 에릭 시모어 경을 만나러 왔는데, 오다가 그만 길을 잃었지 뭡니까.”

세상 모든 사람이 길을 잃어도 그만은 절대 길을 잃지 않을 것 같건만. 그는 미아를 자처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황궁에서 막 왔는지, 가문의 문장을 수놓은 망토와 예복을 입고 있었다.

정원에서 한참 길을 헤맸다면서 망토에도, 옷소매에도 작은 잎사귀 하나 매달려 있지 않았다

“하, 하인은 어쩌고…… 아무도 안내해 주는 사람이 없었던가요?”

리사나는 금방 상황을 파악하고는 뾰로통하게 물었다. 그녀 역시 방금 전 루이먼드와의 대화를 루단테가 들었다 해도, 반역과 연관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 듯했다.

오해해 봤자 결혼 전 연이 있었던 남녀의 사랑 다툼 정도로만 들리겠지. 루단테가 그렇게 오해해 준다면, 리사나로서는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인은 또 어딜 갔는지, 하인 역시 잃어버리고 말았군요.”

길을 잃고 하인도 잃고. 죄다 잃어버린 사람이 하하 웃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러게 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제게 일어났지 뭡니까. 이렇게 두 분을 뵙게 되어 얼마나 반가운지 부디 알아주셨으면 좋겠는데.”

루단테가 싱글싱글 웃는 낯으로 성큼 다가왔다. 사람 허리까지 오는 회랑의 턱을 단숨에 훌쩍 뛰어올라서 두 사람 앞에 섰다.

“그런데 두 분께서는 왜 여기에 계시는 건지?”

그는 자신이 두 사람에게 무엇을 물어보아야 하는지는 잊지 않았다.

“…….”

“…….”

루이먼드와 리사나, 두 사람 모두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다.

배려심 많은 사람이라면 모른 척했을 것이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면 알아서 추측하고는 말을 아꼈을 것이다. 하지만 루단테는 그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아, 두 분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기에 저의 날카로운 질문을 듣자마자 얼굴을 굳히시는 걸까요? 참 궁금할 따름입니다.”

그가 대놓고 물었다.

루이먼드에게는 다행하게도, 루단테의 눈은 오롯이 리사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웃고 있는 입술과 달리 두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무례하시군요. 남의 대화를 엿듣는 것도 모자라, 끼어들며 허락조차 구하지 않다니.”

리사나는 금방 표정과 목소리를 갈무리했다. 사교계의 꽃답게 처세에 능했다.

“아, 무례하였다면 죄송합니다.”

루단테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영애에게 용서받기 위해 진실을 고백하자면, 저는 두 분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 전혀 엿듣지 못했습니다. 저 멀리에서 두 분을 보고는, 그저 반가운 마음에 달려와서 말입니다.”

“진실은 신께서만 아시겠지요. 저는 그저 공작님께서 정직하게 말씀해 주셨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용서해 주셔서 더없이 감사합니다.”

“아직 용서했다고는 말하지 않았…….”

리사나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닫았다.

“에릭 시모어 경을 찾아오셨다니, 제가 가서 공작님께서 이곳에 계신다고 알려 드리겠어요.”

그녀는 루단테와 더 말을 섞는 것보다 돌아서는 것을 택했다.

“우리의 대화는 다음에 이어 가도록 하지요.”

리사나는 루이먼드에게 살짝 눈짓하고는 돌아섰다.

걷는 걸음이 어쩐지 바빠 보였다.

루이먼드는 돌처럼 굳은 상태로 리사나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치사하게 혼자만 도망가다니. 루이먼드는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리사나를 싫어했지만, 그녀보다 더 싫은 사람이 옆에 서 있으니 리사나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그녀가 돌아서 함께 가자고 손을 내밀면 그 손을 잡지는 않겠지만 따라갈 용의는 있었다.

하지만 리사나는 혼자 도망가기 바빴고, 루이먼드는 이 자리를 벗어날 명분이 없었다.

“…….”

루이먼드는 뺨에 와 닿는 따사로운 시선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지난 생에서 그의 목을 여러 번 뎅강 벴던 당사자가 옆에 서 있었다.

그냥 서 있어도 끔찍한데,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리 좋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설마 내 목을 자를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루이먼드는 제 목을 감싸 쥔 채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루이먼드 경.”

“……!”

그렇게 긴장해 있으니, 이름 한 번 불린 걸로 화들짝 놀라 물 밖으로 튀어 나온 물고기처럼 퍼덕거릴 수밖에.

루이먼드는 눈을 부릅뜨고 굳은 목을 끼익끼익, 억지로 돌려 루단테를 바라보았다.

루단테는 턱을 문지르며 신기한 동물 보듯 루이먼드를 구경하고 있었다.

“공작 부군이라고 불러야 대답할 겁니까?”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편한 대로 부르세요.”

“그럼 루이먼드 경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루이먼드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눈만 데굴 굴렸다. 루단테는 그런 루이먼드를 여전히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루비 누나 취향이 이런 거일 줄이야.”

“…….”

좋아해야 하나 모욕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애매한 발언이었다.

“아, 지난번에 우리 한 번 만난 적 있죠. 그때 무례했던 건 사과하겠습니다. 내가 좀 오해를 했어요.”

“오해, 라니요?”

무슨 오해? 내 목을 자르고 싶어지는 오해?

루이먼드는 아직도 그가 자신의 목을 쿡 찔렀던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루이먼드가 경계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자, 루단테가 핫핫, 시원하게 웃으며 루이먼드의 등을 퍽퍽 내리쳤다.

‘윽.’

루이먼드는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호, 제법인데?’

루비아나만큼이나 학자의 집 출신 학자들에 대한 강한 편견을 가지고 있던 루단테는 제게 등짝을 얻어맞고도 꿋꿋하게 버티는 루이먼드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자, 일단 가죠, 루이먼드 경.”

“간다니, 어딜 말입니까?”

넌 여기서 오딜 후작 영애가 에릭 시모어를 데리고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지. 루이먼드가 하고 싶은 말을 차마 하진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오딜 후작 영애가 돌아오기 전 어디로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

“뭐지 이 반응? 설마 아까 내가 경을 구해 준 것도 모르는 건 아니겠죠?”

“…….”

몰랐다. 전혀.

“정말로?”

루단테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루이먼드를 바라보았다.

‘구해 줬다고? 나를? 내 목이나 안 자르면 다행일 텐데?’

어처구니없는 건 루이먼드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신기하네. 루비 누나 취향이 이런 거라니.”

루단테가 픽, 웃더니 말을 이었다.

“설마 폐하 취향도 비슷하진 않겠지요?”

“……글쎄요.”

루이먼드는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냐는 시선을 보냈다. 루단테는 딱히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는 듯 루이먼드의 눈빛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일단 움직이긴 합시다. 오딜 후작 영애가 진짜 에릭 시모어를 데려오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에릭 시모어 경을 보러 온 게 아닙니까?”

“내가 왜요?”

“아니, 조금 전에 그렇게 말씀하신 건 공작님이십니다만.”

“하, 당연히 거짓말이죠.”

“…….”

“보기보다 순진하시네. 학자의 집 출신이라 그런 건가?”

“학자의 집 출신이 모두 그렇진 않을 겁니다.”

루이먼드는 정색하고 말했다. 안 그래도 만년 낙제생인 자신 때문에 고생하신 분들인데, 괜한 편견을 더하고 싶진 않았다.

“뭐, 그런 걸로 하죠.”

루단테는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루이먼드는 그 뒷모습을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따라가야 하는데, 따라가기 싫었다.

‘저대로 다시는 이쪽을 돌아보지 않고 영영 사라져 버렸으면.’

간절히 바랐으나 루단테는 그대로 사라져주지 않았다.

“뭐 해요? 안 따라옵니까?”

“……예.”

루이먼드는 터덜터덜 루단테를 뒤따랐다.

루단테는 루이먼드보다 키가 반 뼘 정도 작았다.

‘아마 나이도 나보다 좀 더 어리겠지.’

그런 그에게 맥없이 끌려가는 건, 그가 제국 최고의 기사여서도, 위세 높은 도미넨트 공작이어서도 아니었다.

그가 지난 생에서 무려 세 번이나 제 목을 뎅겅 잘라 먹은 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이번 생 역시…… 수틀리면, 이 자에게 목이 잘리겠지.’

학자의 집이 무너지던 날, 그에게 목을 쿡 찔렸을 때 예감했더랬다.

그랬기에 순순히 그를 뒤따랐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오만상을 찌푸리며 억지로 걷는 루이먼드와 달리, 루단테의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결혼식은 못 갔지만,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난 루비 누나와 경의 결합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사람이니까 내 축하는 믿어도 됩니다.”

“예에…….”

루이먼드는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아,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카드릭 형을 조심해요. 그 형이 축하하는 건 믿지 말고.”

“…….”

“이미 알고 있군요.”

루단테가 킥킥, 웃으며 두 손을 들어 머리 뒤에서 깍지를 꼈다.

“아마 거하게 결혼 선물을 보냈을 텐데, 함부로 만지지 말고 어디 콱 처박아 놔요. 무색무취 독을 발라 놨을지도 모르니까.”

“……!”

“아, 농담이니까 너무 그렇게 대놓고 놀라지 말고.”

루단테가 뒤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켕기는 게 있어 보이니까.”

“…….”

루이먼드는 침묵을 택했다. 리사나와 떠들었던 대화를 말하는 건지, 카드릭의 결혼 선물을 처박아 놓은 걸 말하는 건지, 종잡을 수 없었으니까.

‘도미넨트 공작. 제국 최고의 검사. 황제의 최측근. 펠트하르그 공작과 함께 황제의 부군 후보로 손꼽히는 남자. 그리고 황제의 눈과 귀라 불리는 정보기관의 수장.’

루이먼드는 자신이 알고 있는 루단테에 관한 정보를 되뇌었다.

그를 피해 서둘러 자리를 뜬 리사나의 선택은 전적으로 옳은 것이었다.

정보기관이란 무릇 비밀과 은신이 생명인 법. 그렇다면 그 기관의 수장이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는 게 보통일 텐데.

놀랍게도 루단테는 자신을 드러내는 걸 꺼리지 않았다. 은신하고 비밀리에 움직이는 건 부하들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서 그는 더욱 뭇 귀족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때론 실체가 없는 것보다 실체가 분명한 게 더 무서운 법이니까. 벽장 속의 귀신보다 내 침대 밑에 엎드린 칼 든 강도가 더 두렵듯이.

루이먼드는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을 다 믿지 않았다. 특히나 결혼 축하 어쩌고 하는 말들은 더더욱.

루이먼드가 경계를 풀지 않자, 루단테는 걸음 속도를 늦춰 기어이 루이먼드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루이먼드는 더더욱 걷는 속도를 늦춰 그와 다시 떨어지고 싶었지만, 싱글싱글 웃는 얼굴을 보니 기어이 거북이처럼 걸어서라도 저와 속도를 맞출 생각이 만만인 듯하여 포기했다.

‘난 그저, 천재 예술가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는 살롱에 참석하고 싶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된 거지?’

리사나에 이어 뜬금없이 도미넨트 공작까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루비 누나의 부군이면 나한테도 가족과 다름없으니까, 날 편하게 불러요.”

“예, 공작님.”

“아니, 그렇게 말고. 이름으로.”

“…….”

“싫어요? 그럼 애칭을 허락하지요.”

“아닙니다, 루단테 님. 영광입니다.”

“늦었어요, 루이먼드 경. 편하게 애칭으로 불러요.”

“…….”

루이먼드의 눈가가 부르르 떨렸다.

‘너라면, 네 모가지를 세 번이나 자른 놈을 애칭으로 부르고 싶겠냐?’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을 간지럽혔다.

루이먼드가 원통하든 말든, 루단테는 신이 나 주절주절 제 애칭의 역사에 대해 늘어놓았다.

구구절절했지만 별말 아니었다. 루디라는 애칭은 아버지만 부를 수 있는 거니 안 된다. 단테라고 불러라.

루비아나와 카드릭, 둘에게도 그렇게 부르라고 했는데 친해 보이는 것 같아 싫다고 굳이 루단테라고 꼬박꼬박 불러 서운하다. 황제 폐하는 가끔 기분이 좋을 때면 단테라고 불러 준다, 등등.

“그러니까 단테라고 불러요.”

“아니오, 공작님.”

“이름으로 부르라니까?”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공작님.”

“쳇, 그새 루비 누나한테 물들었군. 누가 부부 아니랄까 봐.”

혀를 차며 투덜대는 말 때문에 살짝, 긴장을 풀 뻔했다. 정말로 자신과 루비아나의 결혼을 인정해 주는 것 같아서.

‘정신 차려. 네 목을 세 번이나 자른 놈이야!’

하지만 목을 세 번이나 잘린 원한은 그리 쉽게 옅어지지 않았다. 루이먼드는 무너질 뻔했던 마음의 벽을 다시 높였다.

‘보면 볼수록 재미있네. 제법이야. 이래서 루비 누나가 선택한 건가?’

안보는 척하면서 곁눈질로 루이먼드의 표정을 살펴본 루단테는 내심 감탄했다. 많이는 말고 살짝.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어쨌든 걸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덕에 - 루단테가 일방적으로 말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에릭 시모어 경을 보러 오신 게 아니라 하셨는데…….”

그렇다면 그의 형을 만나러 왔다는 건데, 그러려면 이곳이 아니라 황궁 안 행정관으로 가는 게 옳았다. 회계국장이 하루 24시간 중 20시간을 행정관에서 머문다는 건 널리 알려져 있으니.

“시모어 형제를 만나러 온 건 아닙니다.”

루단테가 루이먼드의 표정을 읽고 정정해 주었다.

“그럼……”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루이먼드 경.”

“……나를, 말입니까?”

잠깐, 아주 살짝 느슨해졌던 긴장이 다시 팽팽해졌다.

루이먼드가 긴장하는 사이, 루단테는 품 안에서 손바닥만 한 봉투를 꺼내 루이먼드에게 내밀었다.

“받으시지요.”

“이게 뭔…… 헉.”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두툼한 크림색 편지 봉투에는 황제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얼결에 받아 들었던 루이먼드는 뒤늦게 그걸 보고는 하마터면 봉투를 놓칠 뻔했다.

“떨어뜨리면 불경죄로 목이 달아날지도 모릅니다.”

“……!”

루단테가 가볍게 농담을 건넸으나, 루이먼드에겐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루이먼드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두 손으로 편지 봉투를 받들었다. 감히 열어 볼 생각도 못 하고, 루단테를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이걸 왜, 왜 저한테 주시는 겁니까?”

“폐하의 뜻이니까요.”

대답 한번 참 간단하고 산뜻했다.

“폐하께서 경을 궁금해하십니다.”

“저를, 말입니까?”

“루비 누나, 아쉴레앙 공작이 싸고돌아서 황궁에도 데리고 오지 않으니, 동생 되는 입장에서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루단테는 황제의 대변인이라도 된 것처럼 말했다.

‘황제가 날 보고 싶어 한다고? 왜?’

루이먼드는 봉투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루단테는 루이먼드가 충분히 고민할 틈을 주지 않았다.

“곧 폐하께서 적당한 때를 봐서 경을 부르실 겁니다. 그때 입궁하며 이걸 내보이면 됩니다. 아, 되도록 루비 누나에겐 말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게 폐하의 뜻이십니다.”

“비아에게 비밀로 하라고요?”

당연히 루비아나에게 말하고 의논할 생각이었던 루이먼드는 살짝 당황했다.

“비아?”

루단테가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보고받고도 설마 했는데, 정말 루비 누나를 비아라고 부르는군요.”

“…….”

그 정보기관은 할 일이 없어 남의 집 부부 사이의 애칭까지 조사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일단 참았다.

“아, 이런.”

앞을 보고 걷던 루단테가 낭패한 기색을 보였다.

루이먼드가 무슨 일이냐고 물을 새도 없이, 회랑 밖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읏차, 나는 오늘 여기에 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기 없었습니다.”

루단테는 뜬금없는 말만 남기고는 정원 속으로 쑥 사라졌다.

“도미넨트 공작님?”

루이먼드가 그를 불렀지만, 정원은 고요했다. 바스락 소리 한 번 들리지 않았다.

대신, 회랑 저편에서 다른 소리가 들렸다.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 루이먼드의 귀가 쫑긋했다. 루이먼드는 제 귀를 의심하며 자연스럽게 편지를 품속에 밀어 넣었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럴수록 루이먼드는 의아해졌다.

낯선 장소.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의 발소리였다. 루이먼드는 착각일까 고민했으나, 곧 저편에서 드러난 사람을 확인하고는 활짝 웃었다.

“비아!”

“루이.”

루비아나, 그의 아내였다. 그녀가 저편에서 씩,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비아, 여기는 어쩐 일로!”

루이먼드는 리사나나 루단테 따위는 단번에 잊고, 보폭을 크게 하여 루비아나에게로 걷듯 뛰어갔다.

“일이 일찍 끝나서 와 봤습니다.”

상냥하게 대답하던 루비아나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비아?”

“뭔가, 더러운 냄새가 나는데. 혹시 누가 왔었습니까?”

“…….”

루이먼드는 말문이 막혔다.

‘미리 초대장을 챙기길 잘했네.’

루이먼드는 안심하며 고개를 붕붕 흔들었다.

“아니요,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상한 일이군요. 이 더러운 기분, 도미넨트 공작과 같은 공간에 있을 때 느꼈던 기분인데.”

루비아나는 고개를 갸웃했으나, 설마 루이먼드가 제게 거짓말을 하리라 생각지 못하고 넘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