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131)

***

리사나는 정말로 에릭을 데리고 왔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아니, 리사나는 도미넨트 공작은 물론이거니와 루이먼드까지 없어진 걸 보고 놀랐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따라 나온 귀족들은 영문을 몰랐다.

도미넨트 공작의 빈자리를 채워 준 건 아쉴레앙 공작이었다. 본인은 자신이 그런 역할을 하게 됐다는 걸 꿈에도 몰랐지만.

하인이 달려와 아쉴레앙 공작이 왔다고 알리자, 사람들은 얼른 공작이 기다리고 있다는 곳으로 갔다.

“도미넨트 공작님이 아니라 아쉴레앙 공작님이 오신 거였습니까?”

“아니,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분명 도미넨트 공작님이……”

“아아, 그렇죠. 아쉴레앙 공작님이라면 모를까, 도미넨트 공작님께서 오실 리가 없지요. 정말 다행입니다.”

“아니, 아닌데? 분명 도미넨트 공작님께서 오셨었다고요!”

“어서 아쉴레앙 공작님을 뵈러 가시죠.”

리사나는 졸지에 아쉴레앙 공작과 도미넨트 공작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냐, 분명 도미넨트 공작이었다고. 루이는 어디로 간 거야?’

리사나는 손톱을 깨물며 루이먼드를 찾았다. 분명 같이 도미넨트 공작을 봤으니까 증언해 주리라.

하지만 막상 루이먼드를 만났을 때는, 도미넨트 공작의 도 자도 꺼내지 못했다.

루이먼드는 아쉴레앙 공작과 함께 있었다.

에릭이나 다른 사람들은 부부인 둘이 함께 있는 걸 당연하게 바라보았으나, 리사나는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서지 않았습니까? 피곤할 텐데, 먼저 집에 들어가 쉬시지 그러셨어요?”

“별로. 돌아오는 길에 들른 거니까, 너무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들렀다기엔 시모어 가문의 저택과 피먼스 상단은 동과 서, 정반대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루비아나는 입술에 침 한 번 바르지 않고 꿋꿋하게 거짓말했다.

‘아, 오는 길에 그냥 들른 거구나. 난 또…….’

루이먼드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알아듣고는 씁쓸히 웃었다.

루이먼드의 속내가 어쨌건, 남들이 보기에 두 사람은 한시도 떨어져 있기 싫어하는 신혼부부의 모습 그 자체였다.

리사나를 따라온 귀족들은 두 사람의 정다운 모습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루, 루이먼드 님을 데리러 오신 거군요.”

제일 거리낄 것이 없는 에릭이 나서서 루비아나를 맞이했다.

“에릭 시모어 경,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 저야말로 영광, 영광입니다, 공작님. 형님께 마,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요? 그닥 좋은 이야기일 것 같지 않은데.”

“……아주 나쁜 이야기만은 아, 아니었습니다.”

에릭이 땀을 삐질 흘리며 대답했다. 루비아나는 피식, 웃었다.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적당히 입에 발린 말도 못 하는 게 아주 똑같았다.

에릭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루비아나는 하인에게 손짓해 뒤꽁무니에 달고 온 마차 문을 열게 했다.

그러다가 문득, 에릭의 뒤에 우르르 몰려선 귀족들에게까지 눈이 닿았다.

그 살롱의 회원들이겠거니 싶어 가볍게 훑어보는데, 어쩐지 하나같이 낯이 익었다.

‘왜 익숙하지?’

분명 에릭 시모어의 살롱은 가난한 무명 예술가들의 모임이라고 했는데.

의아했던 것도 잠시.

루비아나의 눈이 어느 한 명에게 꽂혔다.

가만히 서 있어도 저절로 눈에 띄는 화려한 미인, 리사나.

“…….”

녹색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오딜 후작의 여식이 화가나 음악가로 데뷔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없었다.

아무리 사교계 소식에 관심이 없다 하나, 그 정도의 소식까지 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오딜 후작 영애가 예술가는 아니라는 말인데.’

그냥 예술가도 아니니 무명의 예술가는 더더욱 아닐 터.

루비아나는 에릭의 뒤에 죽 늘어선 이들을 다시 훑어보았다. 루이먼드와 결혼하기 이전, 열심히 참석했던 여러 모임들에서 봤던 얼굴들이었다.

루비아나는 금방 어떤 상황인지 알아차렸다.

‘이런.’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어렸다.

‘오랜만의 외출이라 기대했을 텐데, 많이 실망했겠어.’

루비아나는 루이먼드를 걱정했다.

아닌 게 아니라 루이먼드는 어쩐지 풀이 죽어 있었다. 가는 길에 들렀다는 말을 듣고 시무룩해진 것이었으나, 루비아나는 다르게 생각했다.

“괜찮습니까?”

위로를 해 주고 싶은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누군가를 위로해 보는 게 너무 오랜만이었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말한 건데 루이먼드는 처연히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다는 건지, 괜찮지 않다는 건지. 어느 쪽으로든 해석할 수 있는 모습인지라, 루비아나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그런데 저것들은 다 무엇인가요?”

루이먼드는 뒤에 선 커다란 짐마차를 돌아보며 물었다.

마차에 딸려 온 하인들 서넛이 마차에 가득 실려 있던 것을 열심히 내리고 있었다.

“아, 선물입니다.”

“선물이요?”

“네.”

“누구한테 받으신 건가요?”

그런데 왜 공작저가 아니라 여기다 내리는 거지?

루이먼드는 의아했다. 설마 루비아나가 그의 결혼 후 첫 사교 모임 참가를 응원하기 위해 일부러 바리바리 싸 들고 온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누구한테 받은 건 아니고.”

“그럼요?”

“제가 사 온 겁니다.”

“아아, 네, 사 온…… 사 온 거?”

루이먼드가 눈을 깜빡였다.

루비아나는 그의 긴 속눈썹을 열심히 구경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직접.”

목소리에 은근히 자랑이 묻어났으나, 루이먼드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니 왜……?”

루이먼드의 눈썹이 팔자로 늘어졌다. 살짝 기죽어 보이던 미인은 순식간에 세상 근심을 다 품어 안은 미인이 되었다.

피먼스 상단주가 말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기뻐서 자신을 덥석 안고 뽀뽀해 줄 정도는 아니더라도, 활짝 웃으며 기뻐해 줄 줄 알았건만.

‘뭐지? 이게 아닌데.’

루비아나는 당황했다.

‘분명, 엄청 좋아할 거라고 했는데. 뭐가 잘못된 거지?’

리사나와 그녀의 추종자들이 모임을 훼방 놓은 것 같은데 그건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아내가 데리러 오고 보란 듯이 선물까지 바리바리 사 들고 왔는데 그걸 기뻐하거나 저기 멍청하게 서 있는 사람들에게 뻐기듯 자랑하기는커녕, 불안해하며 한숨을 폭폭 내쉬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기에, 루비아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러면 좋아할 거라고? 더는 각방을 쓰지 않게 될 거라고?’

괜히 이 자리에 없는 피먼스 상단주에게로 불똥이 튀었다.

“저, 비아?”

루이먼드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네, 말씀하세요.”

루비아나는 피먼스 상단주를 향한 원한을 잠시 내려놓고 루이먼드에게 집중했다.

루이먼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숙여 루비아나에게 속삭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회계국장님께 선물을 줘도 괜찮은 겁니까?”

“……?”

여기서 회계국장이 왜 나와?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루비아나가 바로 답하지 않자, 루이먼드는 좀 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물론 저는 비아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선의로 선물을 준비한 거겠지만, 저 사람들이…… 제게 그리 호의적인 사람들이 아니라서요.”

루이먼드가 리사나와 그녀의 추종자들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

그제야 루비아나는 루이먼드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내가 저것들을 회계국장인 리스 시모어 경에게 주려고 가져왔다는 겁니까?”

“네.”

루이먼드가 일말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꽤 단호했다.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

루비아나는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럴 때, 이런 생각을 할 때는 이런 표정을 짓는구나, 기억해 두기 위해서.

해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회계국장을 위한 선물이 아니니까.”

“아니라고요?”

루이먼드는 의아했다.

아쉴레앙 공작이 시모어 가문에 선물을 가져올 이유가 그것 말고 또 뭐가 있단 말인가? 루이먼드는 다른 이유를 쉽사리 찾지 못했다.

루비아나는 그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하인들이 착착 쌓아 올린 상자 중 하나의 뚜껑을 열어 보였다.

“이건…….”

루이먼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물감, 이네요. 아주 귀한…….”

“네. 회계국장에게 줄 만한 물건은 아니지요.”

그런 오해를 하다니. 귀엽긴.

“그럼 이건, 설마……?”

“이번에 생각한 게 정답이 맞을 겁니다.”

루비아나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

루이먼드의 뺨이 붉어졌다.

부끄러운 걸까, 기쁜 걸까? 루비아나는 그가 지금 느끼고 있을 감정이 무얼지 생각해 보았다.

“그렇게, 보지 마십시오.”

아직 답을 찾지 못했는데, 루이먼드가 고개를 돌려 버렸다.

루비아나는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시고는, 에릭 시모어를 바라보았다.

둘만의 대화가 길어지는 바람에 에릭 시모어와 리사나, 그 밖의 사람들을 본의 아니게 무시해 버린 모양새가 되었다.

리사나나 그녀의 추종자들이야 얼마든지 무시하고 싶지만, 에릭 시모어한테까지 무례하게 군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는 루이먼드가 친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이니까.

루비아나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까딱이자, 에릭 시모어는 날고 싶어 하는 닭처럼 두 팔을 파닥였다. 영문 모를 몸짓이었으나 루비아나는 대충 흘려 보았다.

“에릭 시모어 경.”

“예? 예. 예!”

“이건, 내가 경의 살롱 회원들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약소한 선물이다, 마음만 봐 달라. 그런 인사치레는 입에 담지 않았다.

절대 약소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엘몽 상단을 이기고야 말겠다며 의욕을 불태우는 피먼스 상단주를 탈탈 털어 가져온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선물 받을 당사자들이 오늘은 이 자리에 서지 못한 것 같으니, 모두 경에게 맡기고자 합니다.”

짐을 다 옮긴 하인이 공손히 내민 목록을 그대로 에릭에게 건넸다.

에릭은 별생각 없이 목록을 들여다보고는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이, 이렇게 귀한 것들을!”

비로소 루비아나가 원했던 반응이 튀어나왔다.

루비아나는 만족하며 눈짓으로 루이먼드를 가리켰다. 내 남편이랑 잘 놀라고 주는 거야. 내 마음 알지?

에릭은 소심하고 겁이 많은 사내였다. 그렇기에 남의 눈치를 잘 봤다. 그는 루비아나의 속내를 금방 알아차리고는 열심히 고개를 끄떡였다.

안 그래도 오늘 일이 무사히 지나면 용기를 내어 루이먼드에게 편지를 보낼 생각이었다. 그는 루이먼드에게 홀딱 반해 있었다.

거기다 이런 선물이 더해지니,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루비아나가 준 선물은 자존심을 세우며 이런 것 따위 필요 없다고 거절하기엔 너무도 귀한 것들이었다.

에릭은 살롱의 원래 회원들이 이것들을 받아 들고 좋아할 걸 생각하고는, 흥분해 콧김을 씩씩 내뿜었다.

“뭐, 뭐기에?”

“뭐야, 우리한테는 안 주는 건가?”

에릭의 반응을 보고 솔깃해진 귀족들이 고개를 기웃거렸다. 에릭 근처에 선 몇몇은 기어이 목록을 훔쳐보고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흐리멍덩하던 눈가에 탐욕이 어렸다.

“우, 우리도 이 살롱에 온 건데…….”

“어흠, 흠흠. 우리한테는 뭐 없나?”

“저런 귀한 건 거기에 걸맞은 품위를 가진 사람이 써야 하는 법인데 말이야.”

“오늘 공작 부군과 친분을 나눈 건 우리지 않나 말이야.”

그들은 돼먹지 않은 욕심을 내보이며 루비아나와 에릭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루비아나는 살롱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를 테니, 저 귀한 것들을 자신들에게도 나눠 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이었다.

혹시나 에릭이 괜한 말을 할까 봐, 그의 옆에 선 귀족 영식이 에릭의 발을 꾹 밟으며 눈을 부라리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본 루이먼드는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벌렸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루비아나가 예의를 차리고자 그들에게 선물을 나눠 주지 않을까 싶어 불안한 눈빛으로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의 체면을 살려 주려고 선물을 마차 가득히 사 들고 와 준 것이 고맙고, 감격스러웠다.

하지만 그 마음과는 별개로, 자신을 무시하고 괴롭힌 사람들한테까지 그것들을 나눠 주며 자신과 친하게 지내라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 이 자리에서, 저 사람들이 사실 날 무시하고 당신까지 모욕했다고 고자질하고 싶지도 않았고.

루이먼드는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차마 할 수 없었다.

“루이.”

루비아나는 그런 루이먼드의 눈빛을 알아채고는, 제 팔을 잡은 그의 손등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다 안다는 듯이.

“에릭 시모어 경.”

“예, 옛! 공작님.”

“나는 내가 가져온 선물이, 내가 선물 주길 원하는 사람들 외에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는 걸 원치 않습니다. 내 말, 알아듣겠습니까?”

“…….”

에릭이 입을 꾹 다물고 눈만 데굴 굴렸다.

루비아나는 그의 주변에 몰려들어 목록을 힐끔거리며 보는 귀족들을 무표정한 얼굴로 훑었다. 나는 너희가 조금 전 내 남편에게 했던 일을 짐작하고 있다.

그들은 알아서 겁먹고 뒤로 물러섰다. 에릭은 떨리는 한숨을 내쉬며 얼른 목록을 접어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겁먹지도, 물러서지도 않은 사람은 단 하나, 리사나뿐이었다.

루비아나는 경고하듯 그녀에게 한 번 더 눈길을 주고는 돌아섰다.

‘계속 이렇게 이 사람 주변을 맴돌 생각인가? 결혼식을 치르고 나면 제풀에 나가떨어질 줄 알았는데.’

루이먼드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

‘어떻게 처리해야 잘 처리했다고 두고두고 소문이 나려나?’

루비아나는 머릿속으로 나름 궁리를 하며 마차에 올랐다. 짐을 바리바리 실었던 짐마차 말고, 따로 불러 대기시켰던 마차로.

마차엔 아쉴레앙 공작가의 문장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루이먼드는 에릭 시모어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함께 마차에 올랐다.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남은 사람들의 경악과 놀라움, 두려움을 뒤로한 채 슬슬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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