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131)

***

한참 동안 마차 안은 조용했다.

루비아나는 리사나를 루이먼드 주변에서 치울 생각에 골몰했고, 루이먼드는 뒤늦게나마 루비아나가 자신을 위해 선물을 들고 와 준 것을 고마워하며 그녀에게 말을 걸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덜컹. 마차가 둔덕을 넘으며 심하게 흔들렸다. 그 바람에 루비아나가 고개를 들자 루이먼드는 얼른 말을 걸었다.

“고마워요, 비아.”

말을 하자마자 바로 후회했지만.

대뜸 고맙다는 말부터 하다니, 멋있어 보이기는커녕 유치하게 보이지나 않을까? 루이먼드는 손으로 이마를 싸맸다.

그의 걱정과 달리 루비아나는 만족했다.

“그럼 이제 각방 쓰는 건 끝입니까?”

“…….”

루이먼드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런,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막, 하고 그러시면.”

“싫습니까?”

“……싫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루이먼드가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봤자였다. 목이 벌겋게 익어 있었으니까.

얼굴을 보지 않아도 그가 어떤 기분일지 짐작이 갔다. 루비아나는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마차 안 분위기가 제법 훈훈해졌다. 루이먼드는 그 분위기를 유지하고 싶어 이것저것 계속 말을 꺼냈다.

아까 시모어가 저택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욕을 당하고 남의 멱살을 움켜잡았던 일은 슬그머니 뒤로 빼고, 적당히 뭉뚱그려 말했다.

말하면서 혹시나 고자질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을까 고민하며 수시로 루비아나의 얼굴을 확인했다.

루이먼드의 걱정과 달리 루비아나는 그를 딱하다는 듯 쳐다보거나 한심해하지 않았다. 그저 집중하며 듣고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그레이움 백작가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그곳에선 루이먼드가 밖에서 당한 일을 딱히 입에 올리지 않아도, 알아서 소문을 주워듣고 와선 루이먼드를 앉혀 두고 자기들 멋대로 떠들어 댔다.

위신이 손상되게 그게 무슨 짓거리냐는 둥, 부끄러운 줄 알라는 둥, 너 때문에 쪽팔려서 밖에 나가질 못하겠다는 둥.

그러면서 충고랍시고 꼭 한마디를 덧붙였다. 널 걱정해서 하는 말이다.

우리 아니면 누가 네게 이렇게 말해 주겠니? 너는 고귀한 피를 이었으니, 네가 잘되길 바라서 이러는 거란다.

그가 잘되길 바라고, 그를 위해 애쓴다고 말하던 그 사람들은 다음 날 밖으로 나가면, 루이먼드를 비웃고 욕하던 사람들이랑 아무렇지 않게 어울렸다.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루이먼드를 화젯거리로 삼기도 했다.

누구도 그를 대신해 화내 주고, 그의 말에 이렇게 귀 기울여 주지 않았다.

루비아나가 처음이었다. 유일했다.

그래서일까? 자꾸만 말이 길어졌다.

‘고자질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아야 할 텐데.’

그리 걱정하며 최대한 담백하게 말하고, 안 좋은 내용을 빼놓고 말하려 했던 건 초반 잠시뿐이었다.

루이먼드는 저도 모르게 아까 있었던 일을 술술 다 말했다.

“그랬군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루비아나가 중간중간에 슬쩍 이렇게 물으며 이야기가 깊어지도록 유도한 탓도 있었다.

끝까지 말하지 못한 건, 루비아나를 보고 괴물 공작이라 부른 놈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었다는 것뿐이었다.

다 말하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처음 느껴 보는 그 기분을 만끽하기도 전에,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괜히 말했나?’

루이먼드는 갑자기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졌다.

그가 뒤늦게 수치심을 느끼며 입을 닫아걸자, 이번엔 루비아나가 말을 꺼냈다.

루이먼드가 후회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오늘 참 희귀한 경험을 했군요.”

“……희귀한 경험일까요?”

루이먼드가 씁쓸히 웃자, 루비아나가 다리를 꼬며 느긋하게 말했다.

“그럼요. 그들이 다신 에릭 시모어의 살롱에 참석할 수 없게 될 테니 말입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건 에릭 시모어 경에게 달린 일이지요.”

루비아나의 말대로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그럴 거라고 기대하기엔, 에릭 시모어는 너무 약한 사내였다.

루이먼드가 또 그의 살롱에 참가하겠다고 한다면, 리사나의 무리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교계 인사들이 얼마든 또 그의 살롱에 쳐들어올 터였다. 유약하고 겁 많은 에릭은 그들을 차마 물리치지 못할 테고.

그렇게 에릭 시모어의 작고 연약한 살롱은 영영 망가지고 말리라.

‘내가 괜히 찾아와서, 망쳐 버렸어.’

루이먼는 죄책감을 느꼈다.

‘상황이 더 악화하기 전에 이 살롱을 포기하고, 다른 모임을 다시 찾아봐야 할까?’

미래의 예술가 거장들과 미리 친분을 쌓고 싶었건만. 아무래도 이번 계획은 포기해야 할 성싶었다.

첫 계획부터 이렇게 틀어지다니. 성공한 공작 부군이 되기 위한 길이 새삼 막막해졌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잘 알고 있으니,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아니었다.

으으. 속이 쓰려 끙끙대는데, 그런 그에게 단비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요, 다시는 오늘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예상이 아니라 확신. 그렇게 만들고야 말리라. 오만함마저 느껴지는 말이었다.

루이먼드는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루비아나가 배부른 맹수처럼 늘어져 있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느긋한 모습이지만 다른 게 하나 있었다. 녹색 눈. 숨 쉬는 것도 귀찮아하는 것 같아 보이던 그 눈이 다른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딱히 배고프진 않지만, 모처럼 먹이가 손에 들어왔으니 장난삼아 손안에 쥐고 가지고 놀겠다는 맹수의 눈빛 같달까?

그 눈빛이 절 노리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괜히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렇, 군요.”

“네, 그러니 걱정 말고 다음번에도 가고 싶다면, 편히 가요.”

“설마, 죽이거나 하지는……”

“폐하가 계시는 수도에서 피를 보는 건 불법입니다, 루이.”

불법이니까 어쩔 수 없이 참겠다는 말로 들렸다.

“아, 네.”

오늘처럼 제국 신법이 고마운 적이 또 없었다.

루이먼드는 잠시 묵념하며, 오늘 에릭 시모어의 살롱에 찾아온 리사나와 그녀의 추종자들에게 심심한 애도를 표했다.

그저 자신에게 집착하거나 질투해서 심술을 부리러 왔을 뿐인데 차라리 생명이 위험한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괴로워지리라. 그들의 미래에 치얼스.

‘그래도 그놈은, 내가 반드시 손봐 주겠어.’

루비아나를 괴물 공작이라 불렀던 키 작은 남자에 대한 원한은 잊지 않았다.

그러자니 더더욱, 성공한 공작 부군이 되기 위한 계획의 성공이 절실해졌다. 루비아나의 능력에 기대서가 아니라, 스스로 힘을 길러 그놈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 주고 싶었다.

‘집에 가서 나머지 계획들을 다시 잘 정리해 봐야겠어. 오늘 같은 실수는 다시 하지 말아야지.’

루이먼드는 자신이 너무 당연하게 아쉴레앙 공작저를 자기 집이라 생각하는 걸 깨닫지 못했다.

“오늘 다녀온 일은 잘 해결하셨습니까? 너무 제 이야기만 한 것 같네요. 비아, 당신은 오늘 하루 어떻게 보냈는지 궁금합니다.”

루비아나가 장담하니, 어쨌든 에릭 시모어의 살롱에 대한 시름은 한 짐 덜게 되었다.

마음의 여유가 생긴 루이먼드는 오늘 루비아나가 어찌 지냈는지 궁금해졌다.

루비아나는 피먼스 상단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말해 주었다. 물론 펠트하르그 공작저에 들른 일은 말하지 않았다.

‘피먼스 상단. 피먼스 상단.’

루이먼드는 상단의 이름을 여러 번 되뇌며 기억하려고 애썼다.

루비아나가 에릭 시모어에게 건넨 물품은 하나같이 최고급품이었다. 엘몽 상단급으로 질 좋은 사치품을 보유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앞으로는 엘몽 상단 말고 그곳을 이용해야겠어.’

저택을 관리하며 질 좋은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엘몽 상단을 이용하곤 했다. 그때마다 펠트하르그 공작의 주머니를 불리는 것 같아 괴로워했건만. 드디어 대체 상단을 찾았다.

피먼스 상단주와 잘 아는 사이일뿐더러, 꽤 오랫동안 거래를 트고 지냈으면서 진작 피먼스 상단에서도 사치 품목을 다룬다고 알려 주지 않은 루비아나가 살짝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 마음일랑 얼른 털어 냈다.

일부러 안 알려 준 게 아닐 테니까. 그간 겪어 본 바로, 루비아나는 이런 쪽으로 세심함이 부족했다. 아니, 굳이 신경 쓸 필요를 못 느낀다고 말해야 옳을지도.

북부의 유지. 제국의 안녕. 그런 굵직한 일에 신경 쓰느라 자잘한 걸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것이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그녀의 일상을 챙기고 채우는 게 루이먼드의 몫이었다. 이전에는 시녀장이 그 일을 도맡았을 터이나 이젠 전적으로 루이먼드의 의무이자 권리였다.

루이먼드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당연하고 사소한 일상부터, 아주 작은 것부터 하나씩 하나씩 챙겨 주고 돌보고 보살펴 주고. 그렇게 루비아나의 삶에 스며들 생각이었다.

어느 순간 문득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돌아봤을 때는 이미, 스며든 부분을 잘라낼 수 없을 만큼 익숙해지도록.

‘나 없인 셔츠 하나 제대로 챙겨 입지 못했으면 좋겠어.’

자신이 없으면 일상의 작은 부분에서마저 불편함을 느끼고, 어색해하는 루비아나라니.

아랫배에 불덩이가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그 열기 때문에 입안이 바짝 말랐다. 여덟 번의 삶 만에 처음 느껴 보는 갈증이었다.

루이먼드는 루비아나의 입술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저 안은 촉촉할 텐데. 이 목마름 따위, 짧은 입맞춤만으로도 단숨에 해소될 텐데.

미치도록 입 맞추고 싶어졌다. 그래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건만 고맙게도 루비아나가 그런 루이먼드를 알아봐 줬다.

“……왜 그런 눈으로 봅니까?”

“제 눈이 어때서요?”

“음…… 뭔지 모르겠어서 물었습니다만.”

“그럼 저도 모르겠네요. 비아가 보는 제 모습이 어떤지, 지금의 저는 알 수 없으니까요.”

루이먼드는 루비아나의 질문을 변명 삼아,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눈동자에 맺힌 자신의 모습을 자세히 봐야겠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눈동자를 거울삼겠다고 다가와서는, 조심스럽게 허락을 구했다.

“입 맞춰도 될까요?”

열망이 그득 담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루비아나는 픽 웃으며 루이먼드의 목을 껴안았다. 그렇게 답을 대신했다.

입 맞추는 순간, 루이먼드는 잠시 잊고 있었던 걸 떠올렸다. 도미넨트 공작, 황제의 초대, 금박 인장이 찍힌 서신.

하필 왼쪽 품에 넣어 두어서, 그 도톰한 묵직함이 심장 위를 지그시 눌렀다.

황제의 편지를 받았다고 루비아나에게 말해야 할까 말까? 그 짧은 순간에 그런 고민이 들었다.

그리고 입술이 맞붙자마자, 그 고민을 다시 말끔히 잊어버렸다.

황제의 편지가 아니라 황제 본인이 왔어도, 지금 당장은 루비아나와의 입맞춤이 더 우선이었으니까.

마차 안은 처음처럼 조용해졌다. 간간히 벅찬 숨소리만 오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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