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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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시모어 쟁탈전은 한 달이 지나자 점차 시들해졌다.

그사이에 월례 회의가 있어 다녀온 루비아나는 칼레나에게 실컷 놀림을 당하고 돌아와 루이먼드의 개인 예산을 두 배로 늘렸다.

아무리 애써도 에릭 시모어의 머리카락 한 올 손에 넣지 못한 일부의 몰지각한 귀족들은 지쳐 갔다.

황실 관리들 역시 자꾸만 이기니 재미없다며, 다시금 자신들이 처리해야 하는 과중한 업무로 눈을 돌렸다.

귀족과 그 수하들을 실컷 때려 본 용병들도 이제 질렸다며, 두툼한 돈주머니를 들고 수도를 떠나기 시작했다.

물론 이쯤 와서도 포기하지 않고 더더욱 불타오르는 일부의 몰지각한 귀족들이 없진 않았다. 그들 때문에라도 쟁탈전은 지지부진 계속될 가능성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그래선 안 되는 막강한 이유가 등장하고야 말았다.

이쯤에서 마무리 짓길 바라는 황제의 뜻.

황제는 큰 국가사업을 앞두고 유능하고 성실한 회계국장이 꼭 필요했다. 그런데 그 회계국장은 동생을 지키는 데 정신이 팔려 도통 복귀할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어쩌랴? 황제의 불편한 심기는 가암히 회계국장이 업무에 복귀하지 못하게 상황을 질질 끄는 일부의 몰지각한 귀족들에게로 향했다.

제국은 황제의 것이었다. 제국의 수도는 더더욱 황제의 것이었다.

그 안에서 뭔가 소동이 일어나는 것도, 그 소동이 마무리되는 것도 황제의 뜻대로여야 했다.

황제가 내 인내심이 여기까지라고 눈치를 주는 순간.

에릭 시모어의 쟁탈전은 허무하리만치 간단하게 끝나 버렸다.

전쟁의 종결은 당장 바쁜 업무를 끝낸 행정국장이 나서서 양쪽의 사정을 듣고, 서로에게 화해를 주선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시모어 가문이 먼저 나서 귀족들에게 사과했다. 귀족들은 시모어 가문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시모어 가문의 피해를 배상해 주는 아량을 베푸는 태도를 취하기로 합의를 봤다.

시모어 가문의 피해란 그간 용병을 사들이고 그들을 입히고 먹이는 데 쓴 비용을 전부 갚아 주는 것이었다.

딱 쓴 만큼만 갚는 건 귀족답지 않은 행위였다. 대대로 귀족이었던 귀족의 너그러움과 여유로움을 신흥 귀족에게 보여 주기 위해, 못 해도 2배로는 갚아 줘야지.

울며 겨자 먹기로 주머니를 여는 귀족들에게, 리스 시모어는 두툼한 장부 열 권을 건넸다.

에릭 시모어의 형이자 에릭 시모어를 한 달 이상 지켜 낸 그레이트 브라더, 리스 시모어는 제국의 회계국장이었다.

그는 용병을 고용한 비용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이 싼 똥을 치운 금액까지 정확히 기록해 두었다. 영수증을 꼬박꼬박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장부를 본 귀족들은, 자신들이 단단히 잘못 걸려들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후회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체면이 있지, 위로금을 좀 깎아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귀족들은 주머니를 탈탈 털어 피해 금액의 두 배를 지불했다.

리스 시모어의 장부 열 권은 보상이 끝난 뒤, 제국의 역사책을 편찬하는 기록국에 전해졌다. 그 장부는 리스 시모어가 상대측에 보낸 사과문과 함께 제국의 역사에 길이길이 남았다.

참고로 그가 아내에게 보고 배운 대로 쓴 사과문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신묘한 남의 동생 강탈 의욕은 하늘을 꿰뚫고,

오묘한 부하 동원 능력은 제국의 수도를 뒤덮으셨습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저희의 사과를 받았으니

만족을 아신다면 이만 물러나시지요.

학자의 집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황실 관리는 리스 시모어의 사과문 아래에 이렇게 해석문을 달아 주었다

일단 내가 네 체면을 생각해서 먼저 사과하긴 하는데, 네가 먼저 우릴 건드렸어.

그리고 너흰 결국 우릴 이기지 못했지.

너희 체면을 생각해서 우리가 미안하다고 말하긴 했는데, 너희도 알 거야. 너희가 먼저 잘못했고, 그걸 온 제국 백성이 다 아는 상태에서 우리 사과를 받는 너희의 모습이 얼마나 쪽팔린 모습인지.

끝나기는 시모어 가문의 사과로 끝났지만, 국어 전공 황실 관리의 해석문대로 누구도 그들이 패배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시모어 가문의 명성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쳤다.

에릭 시모어의 살롱은 사교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들어가기 힘든, 최고의 살롱이 되었다.

그리고 아쉴레앙 공작 부군, 루이먼드는 이번 쟁탈전에 투자한 돈을 두 배로 회수했을뿐더러, 듣기에 따라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는 명성을 얻었다.

무려, 에릭 시모어 쟁탈전의 진정한 흑막!

에릭 시모어 살롱의 진정한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아보고, 에릭 시모어를 자신의 외모로 홀린 것도 모자라, 그간 자신을 무시했던 귀족들에게 복수한 보이지 않는 손!

“……예? 제가요?”

시녀장을 통해 그 소문을 접한 루이먼드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번 일에 루이먼드 님께서 너무 열을 올려 돈을 쏟아붓는 바람에 시모어 가문은 진정한 승리를 얻었지만, 아쉴레앙 공작가는 엄청난 재정적인 손해를 얻었다는 소문도 떠돌고 있다고 합니다.”

“손해라니…… 정확히 두 배로 돌려받았는걸요.”

회계국장 리스 시모어는 돈 관련해서는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간 루이먼드가 보내 준 돈을 이자까지 쳐서 갚았다.

루이먼드는 돈을 받자마자 전부 아쉴레앙 공작저의 금고에 집어넣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나 아쉴레앙 공작저의 재산 형성에 조금이라도 기여한 것 같아 뿌듯했건만.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백성이 제멋대로 떠들어 대고 있는 것이었다.

“아쉴레앙 공작가가 엄청난 빚더미에 올랐다는 소문도…….”

“아니, 왜!”

“그런데 공작님께서는 그래도, 루이먼드 님의 외모에 홀딱 빠져 전혀 상관하지 않으신다며, 두 분이 얼마나 사이좋은지……”

“사이좋은 게 아니잖습니까, 리먼스 부인!”

루이먼드가 벌떡 일어나 포효했다.

장의자에 길게 누워 포도를 따 먹고 있던 루비아나가 그 광경을 지켜보며 키득대다가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

“어이쿠.”

한 발로 땅을 짚고 중심을 잡는데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뭐지 싶어 고개를 드니,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는 루이먼드의 얼굴이 보였다.

“루이?”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남편이 괴소문에 시달리고 있는데!”

“아니, 가문이 빚더미에 올라도 여전히 부부 사이가 좋다는 말은 리먼스 부인의 말처럼 칭찬……”

“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루이먼드가 고함을 내질렀다.

루비아나와 시녀장은 얼른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다가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그때 레나가 이런 기분이었겠어.’

‘제가 그때 그 자리에 있었는데, 확실히 비슷한 것 같습니다.’

수틀리면 인간이든 마수든 목을 잡아 비틀어 버리는 아쉴레앙 공작 소문을 듣고 키득대며 좋아하던 칼레나. 막 북부에서 돌아와 그런 칼레나를 떨떠름하게 쳐다보던 루비아나.

루비아나와 시녀장은 그때를 떠올리며 웃음 지었다.

“웃어요? 지금 웃는 겁니까, 비아? 리먼스 부인까지?”

아이코. 루비아나와 시녀장은 얼른 웃음을 지웠으나, 한발 늦은 대응책이었다.

루이먼드는 그때의 루비아나처럼 허탈해하며 나라 잃은 표정을 지었다. 아덴 왕국이 멸망했으니 그는 이미 나라를 잃은 지 오래였지만, 아무튼.

“두고 봐요.”

그리고 루이먼드는 그때의 루비아나와 달리, 진취적이었다.

“내가 반드시, 반드시 성공해서 이 아쉴레앙 공작가를 펠트하르그 공작가보다 훨씬 부유하게 만들 겁니다. 꼭이요.”

다시는, 다시는, 나 때문에 아쉴레앙 공작가가 빚더미에 올랐다는 소리가 나오지 못하게 할 테다.

루이먼드는 의욕에 불타올랐다. 루비아나 땐 볼 수 없었던 의욕적인 모습이었다.

“응원합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아요.”

루비아나는 박수 치며 루이먼드를 응원했다.

루이먼드는 영혼 없는 목소리,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응원이라고 구박했다.

“좀 더 진심을 담아 응원해 주세요, 비아. 전 정말로 해낼 수 있단 말입니다!”

“오오. 역시 루이! 오! 완전 제국의 경제를 뒤집어 놓았다. 진짜! 최고의 투자꾼! 파이팅!”

“더 더 영혼이 없잖습니까!”

“하하하.”

루비아나는 구박을 받으면서도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루이먼드가 알면 섭섭하겠지만, 루비아나는 딱히 루이먼드의 결심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아쉴레앙 공작가가 소문처럼 파산 위기 상태인 것도 아니고, 굳이 루이먼드가 돈을 벌어 와야 할 필요도 없었다.

루비아나는 그냥, 루이먼드가 편안하게 놀고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택에만 있으면 심심하니, 소일거리로 상단에 투자하거나 예술가를 후원하는 거야 하고 싶은 대로 얼마든지 해도 좋지만.

가문에 도움이 되겠다는 과도한 부담감을 가지지 않았으면 했다.

그는 이미 충분히, 아쉴레앙 공작가에 기여하고 있으니까.

‘이렇게 웃어 본 게 얼마 만이지?’

시녀장 또한 평소의 차분하고 단정한 자세를 잃고, 어깨를 들썩이며 웃고 있었다.

지난 한 달 동안, 공작저는 또 얼마나 들썩거리고 활기찼단 말인가?

루이먼드가 의욕적으로 나서니 저택의 고용인들도 덩달아 신이 나 날뛰었다.

루이먼드는 이번 쟁탈전에서 얻은 의외의 수익을 전부 공작저의 금고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루비아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시녀장과 의논하여 그 절반의 금액을 고용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지난 한 달간 수고했다는 의미에서 주는 추가 봉급이었다.

그 바람에 지금, 저택의 하인 하녀들의 충성심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이제 하녀들은 루비아나를 봐도 식겁하며 도망치거나 돌처럼 굳지 않았다. 싱글벙글 웃으며 공손히 인사하고, 까르르 웃으며 지나쳤다.

이렇듯 아쉴레앙 공작저는 뒤늦게 불어온 봄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그 봄바람이 지금은 잠깐 흥분하여 발을 쿵쿵 구르고 있지마는 곧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살랑살랑, 저택 곳곳을 돌아다니며 웃음을 뿌려 댈 터.

루비아나는 굳이 그 봄바람에게 돈을 벌어 오는 것까지 바라고 싶지 않았다. 그냥 계속 이렇게, 여기에 머물며 보드라운 봄기운을 뿜어내 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누군가 펠트하르그 공작가의 전 재산을 훔쳐 와서 이 봄바람과 바꾸자고 해도 절대 바꾸지 않으리라.

이런 마음인데, 루이먼드가 밖에 나가 돈을 잔뜩 벌어 오겠다는 말을 진심으로 응원할 수 있을 리가.

“비아!”

“네에, 네에. 루이. 너무나 기대됩니다.”

“두고 봐요, 지금 내 말을 믿지 못한 걸 후회할 겁니다.”

“와우.”

“영혼 없이 그런 소리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야.”

“비아!”

“하하하.”

루비아나는 정말로, 정말로 즐거웠다. 손에 든 두 장의 보고서를 잠깐 잊을 만큼.

겨울이 오기 전에는 와 주시기를 희망함. 마수들의 움직임이 정말로 심상치 않음. 대장, 우릴 버리는 건 아니지요?

이번 일로 황제가 아쉴레앙 공작과 부군에게 크게 노했다는 소문을 퍼트릴 예정. 알아서 대응하기 바람. 루비 누나, 당분간 더 바람 잡아야 하니 수도에 꼭 붙어 있어야 해.

이 저택을 한 발자국만 벗어나도, 세상은 아직 싸늘했다.

루이먼드가 있는 아쉴레앙 공작저는, 루비아나에게 그 찬바람을 피해 잠시 쉴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정말로, 정말로 오랜만에 가져 보는 편안한 내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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