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능력을 꽃피운다는 건
에릭 시모어 쟁탈전이 얼추 마무리되고, 수도가 다시 이전의 평온함을 되찾은 이후에도 루이먼드는 에릭 시모어와 꾸준히 교류했다.
초대를 받아 그의 살롱에도 여러 번 참가했으며, 바랐던 대로 훗날 대성할 예정인 예술가들과 친해졌다.
처음에 걱정했던 것과 달리 에릭 시모어의 살롱에 성공적으로 입성한 건 다행스러운 일이나.
루이먼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왜, 왜 그 두 명이 보이지 않는 거지?’
에릭 시모어의 살롱에서 가장 대박 난 두 예술가가,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매번 살롱에 참가하는 게 아니라 띄엄띄엄 나오는 건가 싶어, 불안한 마음을 꾹 참고 계속 살롱에 참가했다.
살롱 참가 횟수가 다섯 번이 넘어가고 나서야 루이먼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리사나가 살롱에 난입했을 때, 혹은 에릭 시모어의 쟁탈전 때, 그 두 예술가가 이 살롱에서 이탈해 버린 것 같다는 걸.
환희의 화가, 오르카.
침묵의 조각가, 폴 네리오.
비록 지금은 이름 모를 가난한 예술가로 살고 있지만, 몇 년 안에 제국을 뒤집어 놓을 만한 대작을 발표하며 일약 최고의 예술가로 거듭나는 두 사람이었다.
이전 일곱 번의 삶에서 그들과 직접 교류한 적도, 가까이에서 얼굴을 본 적도 없었다.
그저 멀찍이서 보고, 소문을 주워들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옆집에 산 사람처럼 그들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만큼 곧 다가올 미래에, 제국 백성에게 사랑과 관심을 듬뿍 받았던 예술가들이었다.
오르카와 관련한 가장 유명한 일화는, 그가 황제가 내려 주는 작위를 거절했다는 이야기였다.
오르카의 작품에 반한 황제는 그 뛰어난 재능을 높이 사 작위를 내려 주고 황실 전속 화가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귀족 따윈 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고 했다.
황제의 부름을 받고도 황궁에 들어오려 하지 않았는데, 그로 인해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정다운 후원자인 에릭 시모어가 곤란해하자 그를 위해 입궁했던 것이었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죽임당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살아남았다.
황제가 그녀의 배포를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이었다.
작위가 싫다면, 편히 그림 그릴 수 있도록 금이라도 받으라고 황제는 황금을 자루 세 개에 가득 채워 내려 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황궁에서 나오자마자 빈민가로 가서 황금 세 자루를 모두 흩뿌렸다.
그녀는 오직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판 돈으로 먹고살았다.
유명해져서 그림값이 비싸져도, 유명해지기 전에 받았던 금액만 받았고, 반드시 평민에게만 팔았다.
귀족들이 평민들을 시켜 그림을 사 오게 하는 걸 알면서도 누구든 평민이 찾아와 그림을 사겠다고 하면, 얼마든지 내주었다. 그러곤 꼭 이 말을 덧붙였다고 한다.
“나는 당신에게 은화 한 닢을 받지만, 당신은 반드시 이걸 황금 한 자루 이상 값을 받고 팔아야 합니다. 단지 누가 시켰다고 약간의 수고비만 받고 끝내지 말아요. 이건, 당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니까요.”
그리고 한 번 그림을 사 간 사람에게는 다시 또 그림을 팔지 않았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단 한 번의 기회였다.
그렇게 팔린 그녀의 그림은 팔리고 팔려서, 결국엔 황제에게로 갔다.
황제는 그녀의 그림을 매우 마음에 들어 해서, 그녀가 새 그림을 팔았다는 소문이 들리면 어떻게 해서든 그 그림을 손에 넣었다.
그쯤 되자 귀족들은 앞다퉈 자신이 가진 오르카의 그림을 바쳤고.
황궁의 가장 긴 회랑은 오르카의 그림으로만 빼곡히 장식됐다.
오르카는 작위를 거절한 이후 죽을 때까지 다시는 황궁에 발을 들이지 않았기에, 그녀는 한번 판 자신의 그림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오르카는 자신의 그림이 황궁에 갇혀 황제와 귀족들만 즐기는 걸 불만스러워했다.
그녀는 늘, 자신이 그린 그림이 일반 미술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에 걸리길 원했다. 그래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을 봐 주길 바랐다.
그 소원은 그녀가 죽은 뒤에야 이루어졌다.
그녀는 이른 나이에 병사했는데, 마지막 그림을 완성하고 그 그림 앞에서 절명하였다.
마지막 그림은 ‘오르카의 영혼’이라 불리는 최고의 역작이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기 전, 에릭 시모어에게 이 그림만큼은 황제가 가져가지 못하게 할 거라고 말했다고 한다. 에릭 시모어는 그녀가 농담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죽음과 함께 드러난 마지막 그림을 보고는 그녀의 말이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수도 서쪽 변두리에 위치한 낡은 고아원 건물의 창고 벽에 그림을 그렸다.
먼지가 한 뼘 높이만큼 쌓이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습한 그곳에서, 자는 것도 먹는 것도 잊고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는 벽화를 그린 것이었다.
그 벽화는 온 세상을 감싸는 신의 날개였다. 그 날개 아래에서, 오르카는 웅크려 누운 자세로 차게 식어 있었다.
그 모습을 최초로 발견한 건 에릭 시모어였다.
에릭 시모어는 그녀의 장례식을 치르기 전, 황제를 찾아가 오르카의 평생소원을 말하며 그녀의 그림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달라고 말했다.
황제는 자신이 함부로 사람의 목을 자르는 폭군이 아님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에릭 시모어에게 회랑에 가득 걸린 오르카의 그림을 모두 내주었을 뿐 아니라, 오르카의 마지막 그림이 그려진 고아원을 국립 미술관으로 꾸며 오르카의 그림을 전시하도록 했다. 오르카가 바랐던 것처럼, 누구든 원한다면 언제든 무료로 입장하여 오르카의 그림을 볼 수 있도록.
오르카의 무덤은 국립 미술관의 입구 옆에 만들어졌다. 소원이 이루어진 걸 죽어서라도 지켜보라는 의미로.
짧은 삶을 불꽃처럼 태운 예술가였다, 오르카는.
그녀와 함께 최고로 손꼽힌 예술가가 침묵의 조각가 폴 네리오였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침묵의 조각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가 왜 입을 열지 않는지 온갖 추측과 억측이 난무했다. 사람들이 사랑한 소문은, 그가 젊은 시절 방탕하게 살다 도박 빚을 갚지 못해 혀가 잘렸다는 소문이었다.
그는 그런 소문을 듣고도 묵묵히 조각에만 몰두했다.
그는 단 한 번도 루이먼드보다 먼저 죽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최후가 어땠는지는 알지 못했다.
루이먼드가 기억하기로, 그는 오르카보다 일찍 명성을 얻었고 이후 늘 유명 인사였다.
그는 평민에게만 그림을 팔았던 오르카 같은 괴벽은 없었다. 누구든 많은 돈을 내는 사람에게 조각을 팔았기 때문에, 그의 집 앞은 늘 귀족의 대리인들로 북적였다.
그의 집에 황금이 흐르는 분수가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조각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는 주로 여인을 조각했다. 세밀한 레이스, 흘러내리는 비단 자락, 둥글고 우아한 몸의 곡선을 돌 위에 고스란히 표현했다.
그의 조각을 못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 본 사람은 없었다. 일단 한번 보고 나면 그 섬세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헤어나지 못했다.
그의 조각을 전시한 어떤 미술관에서, 한 청년이 그의 조각에 홀려 열흘 동안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잊고 앉아 있다가 죽었다는 일화가 나돌 정도였다.
황제는 매년 신년제 때마다 에릭 시모어에게 부탁해 그의 새 작품을 연회장에 장식해 두곤 했다.
오르카만큼은 아니나, 황제는 폴 네리오의 재능 역시 매우 아꼈다.
그 둘은 에릭 시모어의 살롱이 배출한 최고의 예술가이자, 제국의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거라 칭송받는 거장이었다.
그런 예술가들이 에릭 시모어의 살롱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나 때문인가? 내가 멋대로 개입하는 바람에, 그 둘이 에릭의 살롱에 실망하고 떠나간 걸까?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뛰어난 예술가 둘을 놓쳤다는 아쉬움은 둘째 치고라도, 성공할 게 분명한 두 예술가의 미래를 망쳐 버렸다는 죄책감이 앞섰다.
‘오랫동안 가난하고 힘든 시간을 보냈을 텐데. 조금만 더 버티면 성공해서 모두가 알아주는 예술가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이 둘이 어디 있는지 알 수만 있다면, 어르고 달래 다시 에릭 시모어의 살롱에 데려다 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 혼자 고민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어? 일단 에릭에게 물어보자.”
루이먼드는 고민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에릭에게 편지를 보냈다. 혹시 두 예술가의 근황을 알고 있는지 물었다.
딱히 큰 기대는 없었는데, 에릭 시모어는 다시 한번 루이먼드를 감동시켰다.
루이먼드, 너도 그 두 사람의 작품을 봤구나! 지금은 세상이 그들을 알아주지 않지만, 언젠가 반드시 그들의 작품이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키리라 나는 믿고 있어.
그래서 나는 그 둘이 우리 살롱을 떠난 것이 매우 가슴 아파. 그래서 간간이 사는 집을 찾아가 근황을 묻고 다시 살롱에 참석해 주길 권하고 있긴 한데…… 마음을 돌리기가 쉽지 않네. 특히나 오르카는 말이야.
왜 살롱의 예술가들이 성공하고도 에릭 시모어를 배신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갔다.
“이렇게 다정하고 세심한 사람이 있다니.”
루이먼드는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끼며, 에릭이 편지 하단에 적어 준 두 사람의 주소를 여러 번 확인했다.
이렇게 다정한 사람에게서 위대한 예술가 둘을 떠나게 만든 것도 모자라, 그 둘을 직접 후원하자고 마음먹는 자신은 얼마나 못된 사람이란 말인가?
루이먼드는 콕콕 찌르는 양심의 가책을 외면하며, 루비아나가 있는 서쪽 서재로 급히 달려갔다.
“아, 루이. 어서 와요. 마침 시녀장이 같이 차를 마시라고……”
“저 좀 나갔다 오겠습니다!”
“…….”
웃으며 반기던 루비아나의 얼굴에 빠직, 금이 갔다.
시녀장에게 전해 들은바, 오늘 루이먼드는 별다른 일정이 없었다. 루이먼드 역시 아침 식사 때 자신은 오늘 내내 공작저에만 있을 거라고 말하며, 슬그머니 루비아나의 손을 깍지 껴 잡았더랬다.
그래서 오전 중에 급한 일을 끝내 놓고 오후부터 루이먼드와 놀려고 했건만. 모처럼 의욕적으로 일거리를 해치웠건만.
루이먼드가 변심했다.
‘내가 왜 오전부터 열심히 일했는데!’
루비아나는 억울했다. 너무 억울해서 서류를 든 손이 파르르 떨렸다.
“어? 바람이 부나요? 바람이 찬데 창문을 닫……혀 있군요.”
루이먼드는 루비아나가 감기에 걸릴까 걱정했다가, 창문이 꽉 닫혀 있는 걸 보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루비아나가 들고 있는 종이가 바람 때문에 떨리는지 다른 이유로 떨리는지도 분간하지 못할 만큼 흥분해 있었다.
안 그래도 예쁜 얼굴에 빨간 홍조가 돌았다. 검은 눈은 기대감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루비아나의 일이 다 끝나 오후에 느긋이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기쁨 때문이 아니라, 루비아나를 놔두고 밖에 나갈 생각에 기뻐서.
루비아나는 그 점이 매우, 매우 마음에 안 들었다.
호위 기사만 동행하면 어디든 외출해도 상관없다고 말한 건 루비아나, 본인이었다.
그 마음은 변함없는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기분이 안 좋았다. 저 반짝반짝 빛나는 눈이 문제였다.
‘요즘 꼬박꼬박 가던 에릭 시모어의 살롱에 가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어딜 말입니까?”
“아, 그것이…….”
루이먼드는 바로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뭐라고 말한단 말인가? 에릭 시모어의 살롱에서 떨어져 나간, 나중에 대성할 게 분명한 예술가 둘을 주우러 간다고?
양심 없는 행동을 하러 가는 걸 루비아나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뭐라고 하지?’
왜 이걸 미리 생각해 오지 못했던가? 루이먼드는 자신의 단순함을 한탄하며 열심히 고민했다.
루비아나는 그가 변명거리를 생각해 낼 때 짓는 표정이 어떤 것인가 습득한 지 이미 오래였다.
“내게 말할 수 없는 곳에 가는 겁니까?”
변명거리를 생각할 만큼?
문득, 루이먼드가 제게 청혼했을 때가 떠올랐다. 루비아나는 그때 듣고 제 귀를 의심했던 그 희대의 명언을 입에 담았다.
“아니면 이번에도 비밀입니까?”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퉁명스러워졌다.
‘왜 화를 내지?’
루이먼드는 의아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비밀은 아닌데, 알려 드리기 좀 부끄러워서요.”
놀라는 바람에 적당한 변명거리를 찾지 못해, 순순히 진실을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뭡니까?”
루비아나의 목소리는 여전히 딱딱했다.
“……후원하고 싶은 예술가들을 찾으러 가 보려 합니다.”
“……?”
이번엔 루비아나가 의아할 차례였다.
‘그게 뭐라고 왜 숨기려고 해?’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음, 아무래도 좀 더 대화가 필요할 것 같군요. 바쁘지 않다면 잠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습니까?”
루비아나가 앞에 놓인 의자를 권했다.
루이먼드가 외출한다고 했다고 대뜸 짜증 냈던 조금 전 자신이 민망해, 그 민망함을 참으려 입 안쪽 살을 꽉 씹으며.
마주 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고 뭔가 극적으로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저 더욱 서로를 이해 못 해 어리둥절할 뿐.
루이먼드는 그답지 않게 루비아나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문 쪽만 힐끔힐끔 내다보았다. 빨리 산책하러 나가고 싶어 하는 강아지 같았다.
‘이를 어쩌나, 나는 산책하러 나가게 해주고 싶지 않은데.’
루비아나는 입꼬리만 비틀며 한 번 웃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상태로 루이먼드만 지그시 바라보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저기, 비아. 우리 이야기를 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루이먼드가 이 어색한 자리를 얼른 마무리 짓고자 애썼으나, 루비아나가 전혀 협조해주지 않았다.
나가고 싶어 하는 자와 보내고 싶어 하지 않는 자. 두 사람의 끝없는 평행선을 강제로 연결해준 건, 제삼자였다. 티 트레이를 끌고 들어온 시녀장.
“루이먼드 님께서 오후에 외출하신다고요? 공작님께서 오후엔 루이먼드님과 함께할 거라고 하셨는데, 그럼 두 분이 함께 외출하시는 건가요?”
루비아나는 시녀장의 오해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루이, 제가 동행해도 될까요?”
딱히 오후에 혼자 있기 싫고 심심할 거 같아서 냉큼 물어본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남편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밖에서 뭐 하고 지내는지 궁금해서. 그래서였다.
“네? 당연히-”
머리를 거치지 않은 말이 툭 튀어나왔다.
뒤늦게 생각이란 걸 하고 입을 꾹 다물었으나, 루비아나의 눈이 짙어지는 걸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저야 좋죠.”
‘뭐, 내가 이상한데 가는 것도 아니니까. 능력 있는 예술가를 찾아가 후원하겠다고 제안하는 것뿐이잖아. 이상한 일 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같이 못 갈 것도 없지.’
생각해보니 별일 아니었다. 루이먼드는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시도하고는, 뒤늦게 설레했다.
‘그럼 비아와 같이 나가는 건가?’
그러고 보면 같이 외출했던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게 첫 데이트라는 건데.
‘데이트라니!’
소파에 앉아 있는 동안 흥분이 좀 가라앉는 듯했건만. 다 허사였다. 루이먼드는 아까 서재 문을 박차고 들어올 때보다 더 흥분했다.
‘옷을 갈아입어야겠지? 뭘 입고 나가야 할까? 머리는? 묶는 게 나으려나? 나가서 어딜 가야 하지?’
어딜 가긴 당연히 오르카네 집과 폴 네리오의 집에 가야지. 목적지를 까먹은 건 아닌데, 루비아나와 함께 나간다니 괜히 마음이 설렜다.
흠흠. 루이먼드는 헛기침하며 벌떡 일어섰다.
“그럼, 그런 거로 알고 외출 준비를 하겠습니다.”
“저도 준비하고 내려가겠습니다.”
루비아나는 너그러이 루이먼드를 보내줬다.
같이 가자는 말에 루이먼드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마자, 시녀장이 루비아나를 바라봤다.
그새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치챈 듯했다. 루비아나는 쪽팔렸다.
“고개 돌려, 리먼스 부인.”
“어머, 왜 그러시는지.”
리먼스 부인이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 웃는 것만이라도 멈춰. 아니, 그냥 눈 감아.”
“모처럼 함께 외출하시는데, 좋은 시간이 되시길 바랄 따름입니다.”
“그렇게 말 안 해도 좋은 시간 보낼거거든?”
“어떻게요?”
“……잘?”
“설마 루이먼드님의 볼일이 끝나면 바로 저택으로 돌아올 생각은 아니시겠죠?”
“…….”
그럴 생각이었다. 얼른 갔다 와서, 침실에서 놀려고 했는데.
어휴. 시녀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왜.”
“모처럼 함께 외출하시면서 어떻게 그런…….”
시녀장은 루비아나의 무심함에 질려 하며 고개를 저었다.
보고 있자니, 루비아나는 자신이 아주 큰 잘못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일이라면 그러든 말든 무시했겠지만 이번엔 그럴 수 없었다. 루이먼드와 관련된 일이니까.
루비아나는 폭포처럼 쏟아지는 잔소리를 묵묵히 들었다. 나간 김에 좋은 것도 보고 맛난 것도 좀 먹고 들어오라. 같이 쇼핑도 좀 하고, 바람도 쐬고 그러면 좀 좋냐.
잔소리가 아주 시종장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
루비아나는 시녀장의 잔소리를 들으며 외출 준비를 했다.
무난하게 흰색 리넨 셔츠와 검은 바지를 고르자, 그마저도 성의 없다며 한 소리를 들었다. 루비아나는 영혼 없는 표정으로 시녀장이 골라주는 대로 옷을 갈아입었다.
하지만 자신이 고른 것과 시녀장이 골라준 옷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똑같은 리넨 셔츠에 검정 바지건만.
검을 챙기고, 짙은 색의 로브를 뒤집어쓰니 준비가 끝났다. 시녀장은 그마저도 못마땅해했다.
루비아나는 또 뭔가 말하려는 하녀장에게 손짓하여 그녀의 입을 봉한 뒤, 1층으로 내려갔다.
현관 앞에 서서 루이먼드를 기다리는데. 오래지 않아 동쪽 계단에서 무언가 힘차게 뛰어 내려왔다.
“……?”
“…….”
그걸 본 루비아나와 시녀장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벌써 노안이 오다니…….”
하녀장은 우울히 중얼거리고는 두 눈을 비볐다.
“나도, 북부에 쌓인 눈만 보다 수도로 내려왔더니, 눈이 적응을 못 하나 본데.”
벌써 수도에 온 지 몇 달이 지났건만. 루비아나는 뒤늦게 말썽인 제 눈을 탓하며 눈을 깜빡였다.
그렇게 두 사람이 자신의 시력을 의심하게 만든 그 무언가가 그들 앞에 섰다.
“급하게, 준비한다고 준비했는데 늦었군요.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비아.”
그가 루이먼드의 목소리와 똑같은 목소리를 내며 활짝 웃었다.
“……기다린 건, 문제 될 게 아닌데.”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네? 비아?”
“……당신의 모습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만.”
“저도 공작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리먼스 부인까지?”
루이먼드가 영문을 몰라했다. 루비아나와 시녀장은 그런 루이먼드를 보며 더더욱 영문을 몰라했다.
난감해하는 루비아나와 오랜만에 루비아나 편에 선 시녀장.
그걸 가능하게 해준 건, 루이먼드의 얼굴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진흙인지 뭔지인지 알 수 없는 것들.
뺨이나 코에 조금 묻고 말았으면 실수로 묻은 건가 싶었을 텐데. 군에서 야습을 준비하는 병사처럼 얼굴이 덕지덕지 칠해져 있으니,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행한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뭐지? 단순한 외출이 아니라, 어디에 침투해 누군가를 암살하려는 생각인 건가? 후방을 맡기기 위해 나의 동행을 받아들인 거고?’
말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의 생각을 뒷받침해주듯 루이먼드의 복장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얼굴에 진흙을 묻힌 것과 한 세트인 듯 아주 허름했는데. 옅게 말똥 냄새가 났다. 아마도 마구간 하인의 옷인 듯했다.
굳이 하인의 옷을 빌려와 가져 입는 성의까지 보이다니. 노력이 가상했다.
그래서 루비아나는 더욱 착잡했다.
‘이런다고 가려질 미모가 아닌데.’
다이아몬드에 진흙이 묻었다고 돌이 되나? 진흙 묻은 다이아몬드가 되지. 지금 루이먼드의 모습이 딱 그 상태였다.
루비아나는 손수건을 꺼내 루이먼드의 뺨을 쓱- 문질러보았다. 손수건에 묻은 걸 확인해보니 진흙이 맞았다. 루비아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힘들게 변장한 건데 왜!”
“왜 이런 짓을…….”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말을 꺼냈다.
“왜 힘들게 변장을 했습니까?”
“그래야 제가 귀족인 걸 들키지 않을 테니까요.”
황제의 언니, 황족인 루비아나와 결혼했으니까 엄밀히 따지자면 귀족보다는 황족에 가까웠지만. 어쨌건.
“왜 들키면 안 되는 겁니까?”
“지금 찾아갈 예술가가 귀족을 끔찍하게 싫어하거든요.”
“아아.”
그제야 루이먼드의 기행이 이해되었다.
물론, 그와 별개로 루이먼드의 변장이 이해되는 건 아니었다.
‘귀족처럼 안 보이긴. 딱 귀족처럼 안 보이려고 애쓴 귀족처럼 보이는데.’
얼굴에 흙칠을 하며 거울을 한 번이라도 보긴 했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아니, 그보다 루이먼드의 얼굴에 묻은 걸 닦아내는 게 먼저였다.
루비아나는 손수건을 접어 깨끗한 면으로 루이먼드의 얼굴을 뽀득뽀득 닦았다.
“비아, 잠깐, 읍. 으푸푸, 잠, 흡, 깐만요. 어, 흡, 어떻게, 칠한, 건데! 푸, 푸, 입에 흙이, 푸헙.”
루이먼드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루비아나의 손수건을 피하려 애썼다.
“가만히 있어요, 루이.”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멱살을 잡다시피 해서 쑥 잡아당겼다.
“어어, 읍. 푸푸.”
루이먼드는 어정쩡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 상태로는 팔을 허우적대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하필 목이 잡혀 버린 게 문제였다. 거긴 루이먼드의 몸 중 가장 예민한 곳이자, 치명적인 급소였다.
“목, 흡. 목은 잡지-”
“반항하지 말아요.”
“아니, 목은-”
“가만히 있으라니까요. 루이.”
“흡…….”
루이먼드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슬프게도, 루비아나는 그 눈물마저도 손수건을 적셔 얼굴을 더 잘 닦아낼 수 있는 아이템으로 써먹었다.
“그 예술가가 얼마나 귀족을 싫어합니까?”
“흡, 읍…. 귀족, 어흡, 한테는, 돈을, 퉤, 퉤,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푸흐, 작품을 안 팔, 정도, 읍.”
“그렇다면 더더욱, 이렇게 하고 가면 안 될 겁니다. 루이.”
“읍, 왜, 아니, 그걸 어떻게-”
“내 말을 믿어요, 내 말대로일 겁니다.”
겨우 루이먼드의 얼굴이 멀끔해졌다. 루비아나는 만족스러워하며, 루이먼드를 놓아주었다.
허억. 헉. 루이먼드는 얼른 뒤로 물러서 제 목부터 붙잡았다. 목이 제 자리에 잘 붙어 있는 걸 확인하고는, 뒤늦게 얼굴을 두 손으로 더듬었다.
“오, 내 얼굴! 내 얼굴이!”
이렇게 깨끗해지다니.
막 세수를 끝낸 듯 말끔했다. 손끝에 흙 알갱이 하나 걸리지 않았다. 루이먼드는 절망했다.
“후우, 쉽지 않은 작업이었지만 난 해냈어.”
루비아나는 뿌듯함과 보람을 느꼈다.
“어때?”
시녀장을 돌아보니, 시녀장 역시 밝게 웃음 지었다.
“리먼스 부인, 갈아입을 옷을.”
“예, 공작님.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시녀장은 뒤도 안 돌아보고 동쪽 계단으로 올라갔다.
“비아. 어째서입니까? 왜 이러고 가면 안 된다는 거죠?”
루이먼드는 억울하고 섭섭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울망울망한 눈을 들어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어떻게 준비한 건데, 이걸 한 번에 닦아내다니.’
루이먼드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일단 허름한 모습으로 오르카를 찾아가, 그림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으며 예술가들과 친해질 생각이었다. 그러다 나중에 친해지면, 정체를 쨘! 밝히려고 했다.
귀족을 그렇게 싫어하면서, 에릭 시모어가 곤란해질까 봐 황궁에 입궁했던 오르카니까. 아주 친해지면, 자신이 귀족이자 몰락한 왕족이자 황족의 부군이어도 받아 들여주리라.
‘이번엔 성공할 거야.’
얼굴에 꼼꼼히 진흙을 바르며, 이번에야말로 이 방법을 제대로 써먹을 수 있겠구나 흐뭇해했다.
비록 예전에 두 번이나 이 방법을 써먹고도 여지없이 펠트하르그 공작에게 걸려 목이 뎅겅 잘리기는 했지만. 그런데도 루이먼드는 이 방법을 쉽사리 버릴 수 없었다. <그 영애는 오늘도 도망칩니다.>에서 봤던 게 너무 인상 깊어서였다.
'그래, 도망갈 때는 써먹지 못하겠지만. 귀족을 싫어하는 예술가를 찾아갈 때는 써먹을 수 있겠지.'
루이먼드는 저보다 키는 작아도 체격이 비슷한 마구간 하인의 옷을 빌리고, 은화를 동전으로 바꾸는 치밀함도 잊지 않았다.
그랬건만.
루비아나가 모든 노력을 송두리째 부정했다. 루이먼드는 정말 서러웠다.
“음…….”
루비아나는 잠깐 숨을 골랐다.
대놓고 당신의 변장은 실패작이고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말하려니, 루이먼드가 상처 입을까 봐 망설여졌다.
이 말도 안 되는 분장을 하고선 자신만만하게 계단을 뛰어 내려오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내가 남의 마음 다치는 걸 고려해 말을 고르는 사람이었던가?’
문득 든 생각에 실소가 나왔지만, 마음이 바뀌진 않았다. 루이먼드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되도록 부드럽게 말해주고 싶었다.
“루이, 오늘 찾아가는 예술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싶은 겁니까?”
“예? 어떤 관계라니요?”
루이먼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후원가는 재능을 인정해주고 후원해주고, 그러는 거 아닌가?’
그 대가로 예술가는 그 후원을 받고 재능을 꽃피워 위대한 작품을 완성하고, 그 영광을 후원가에게 돌린다.
루이먼드가 바라는 것도 딱 그 정도였다.
“다른 게 필요한 겁니까. 설사 다른 게 필요하다 해도, 그게 지금 저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든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건가요?”
“루이, 후원가와 예술가는, 신뢰로 맺어지는 관계이지 않습니까.”
“그렇, 겠지요?”
너무 당연한 말이기에 오히려 수긍하는데 망설여졌다.
‘세상일이 그렇게 순진하게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루이먼드의 표정을 읽은 루비아나가 말을 이었다.
“물론, 예외도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예, 비아.”
많아요, 진짜 많아요. 내가 알고 있는 것만 해도 얼마나 많은데요. 루이먼드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먼드는 지금까지 한 번도 예술가를 후원해본 적이 없었다. 일곱 번을 살았지만, 매번 제 목 지키기에 급급했고 매번 실패했으니까. 한가롭게 예술가를 후원할 수 있는 여유 따위, 가져 본 적 없었다.
하지만 다른 귀족들이 허영심에, 혹은 다른 저급한 욕망에 빠져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건 숱하게 지켜봤다.
여덟 번째 삶을 사는 사람으로서 감히 장담하건대, 에릭 시모어 같은 사람은 에릭 시모어뿐이었다.
후원가와 예술가의 사이는 루비아나의 말처럼 신뢰와 믿음, 우정 같은 아기자기한 감정으로만 엮어지지 않았다.
대개는 아주 지저분하고 더러운 거래와 계약, 강압이 오가곤 했다.
그런 의미에서, 루이먼드는 자신이 오르카를 '잠깐' 속이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오르카를 골방에 가두고 하루에 열 장씩 그림만 그리라고 몰아세울 것도 아니고, 그냥 마음껏 그림 그릴 수 있도록 지원만 해줄 건데. 환희의 화가에게 좋으면 좋은 일이지 나쁜 일은 아니잖아?’
후원한다는 핑계로 예술가들을 착취하는 다른 귀족들에 비하면야, 천사였다. 천사.
“그러니까 더더욱, 당신은 이런 편법조차 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루이.”
“…….”
끄덕이던 목이 굳었다.
“난 예술이랑 거리가 먼 사람이라, 확실히 당신보다 예술이나 예술가를 후원하는 방법을 모르긴 합니다.”
“아니요, 비아. 저도 잘 모릅니다.”
“그래도 예술가를 후원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당신 나름의 방법을 존중합니다. 나무라거나 하지 말라고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루비아나는 손을 들어 루이먼드의 어깨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루이먼드는 그 손길을 따라 성급하게 변명하고 싶어지는 마음을 내리눌렀다.
“옛 아덴 왕국에서는 후원자와 예술가들이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경우가 많았지요. 나 또한 아덴의 귀족이었기에 모르지 않습니다.”
정부를 얻고 싶거든 예술가를 후원하라는 저급한 말이 호색한 귀족들 사이에서 농담인 듯 진담처럼 떠돌곤 했다.
그때는 종이가 사치품이었기에, 웬만한 재산가가 아니면 그림을 그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가난한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선 귀족들의 후원이 절실했다.
부유한 귀족들은 자신의 부를 자랑하기 위해 예술가들을 후원했고, 착취했다.
“그 악습이 현재, 우리 제국에까지 은근히 이어지고 있지요. 내가 예술에 관심이 없다고 하여, 그런 사정까지 모르고 있진 않습니다.”
종이가 대량 생산되고 값이 싸졌다고 해서, 예술가들의 예술 활동이 쉬워진 건 아니었으니까.
“그런 경우와 비교하면 루이, 당신이 하려 했던 건 선의의 거짓말 정도겠지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나의 남편인 당신이 예술가 후원 방식의 모범을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속이지 말고, 깔보지 말고. 깎아내리지 말고, 무시하지 말고.
“모범, 말입니까?”
“예. 루이. 당신이 말입니다.”“…….”
“당신이 오늘 만나러 가는 예술가가 누구인지, 나는 잘 모릅니다. 당신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그 예술가들을 후원해줄 수 없고, 그로 인해 당신이 곤란해질지 모른다는 걱정도 듭니다. 그렇다 해도 나는, 당신이 처음부터 신뢰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당신이 얼굴에 진흙을 바르든, 옷을 허름하게 입든, 당신이 고귀한 신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돈을 싸 들고 가도 귀족에겐 자신의 작품을 팔지 않을 정도로 귀족을 싫어하는 예술가가 당신의 변장에 속을 것 같지도 않은데. 당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길 가던 길고양이도 루이먼드를 알아볼 것 같다고 해야겠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루이.”
루비아나가 루이먼드의 팔을 놓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비록, 차마 두고 볼 수 없어 얼굴을 닦아버리긴 했지만. 최종 선택은 루이먼드에게 맡기겠다는 의미였다.
루이먼드는 고개를 숙였다. 도저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비아의 말대로야.’
잘 차려입고 귀족다운 티를 팍팍 내고 가면, 오르카는 분명 집 문을 열어주지도 않을 것이다.
‘후원은커녕 얼굴도 못 보고 돌아오게 되겠지.’
그러니 정말 오르카의 후원자가 되고 싶다면, 오르카를 속여서라도 친분을 먼저 쌓아야 했다. 나중에 오르카가 배신감을 느낀다 해도, 오르카가 성공한 다음에 절교당하면 될 일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건만. 루비아나의 말을 들으니 그런 생각을 한 것 자체가 못내 부끄러워졌다.
루이먼드는 몸에 걸친 하인의 옷, 손목까지도 내려오지 않는 짧은 옷 소매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이렇게 입고 가서 뭐라고 말하려고? 우연히 당신 그림을 보고 반해버렸다고? 그래서 친구가 되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내 전 재산을 털어 당신의 그림을 하나 사고 싶다고?’
그런 말을 오르카가 믿을까?
‘그럴 리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신을 살펴보니, 참 하찮았다.
이게 무슨 꼴인지. 마치 두 번째 삶에서 첫째 왕자의 광대를 자처했을 때 같았다. 우스꽝스럽고 천박했다.
오르카의 후원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잔뜩 흥분해서 앞뒤 안 가리고 날뛰었던 조금 전의 자신이 창피해 견딜 수 없었다.
얼굴이 다 화끈했다. 아니, 얼굴만 화끈하면 다행이었다. 온몸이 수치심으로 불타올랐다.
루이먼드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루이?”
루비아나가 손을 들어 루이먼드의 손을 치우려 했다. 루이먼드는 손에 힘을 꽉 주어 버티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비아,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당신 생각이 짧았다는 게 아니라-”
“아니요. 비아의 말이 맞아요. 당신 말대로 하겠습니다. 절, 이 저택을 나서기 전에 말려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루이먼드는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로 허리를 굽혀 루비아나에게 기댔다. 이마가 톡, 그녀의 어깨에 닿았다.
“그러니까 지금 제가 멍청한 저 자신이 부끄러워 당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걸 조금만, 봐주십시오.”
목소리에서도 열이 묻어났다.
루이먼드는 애써, 애써 창피한 부끄러움을 꾹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말한 것처럼 당당하게, 정공법으로 두 예술가의 마음을 얻어 보겠습니다.”
그게 아쉴레앙 공작부군다운 걸 테니까.
“고맙습니다. 내 부탁을 들어줘서.”
“아니요. 그런 말 하지 말아 주세요. 지금,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 없으니까요. 이러고 있는 거 안 보이십니까?”
루이먼드가 우는 소리를 냈다.
손으로 가린 얼굴은 틀림없이 울상 짓고 있으리라. 루비아나는 문득, 루이먼드의 울상인 얼굴이 궁금해졌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는 걸 알면 루이먼드가 배신감을 느낄지도. 그걸 알면서도 못내 궁금해졌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모든 표정을 다 알고 싶었다. 나중에 가서는 그의 얼굴만 봐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도록.
그러기 위해선 지금의 얼굴을 꼭 확인해야 했다. 루비아나는 모처럼 학구열에 불탔다.
하지만 학구열에 빠져 루이먼드를 함부로 다루진 않았다. 억지로, 강압적으로 고개를 들게 하지 않았다.
모든 표정을 외우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소중한 사람이니까.
“왜 부끄럽습니까. 아주 훌륭합니다. 과연 내 남편답군요.”
루비아나는 달래듯 속삭이며 루이먼드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얼른 고개 들어.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나한테 보여줘. 나한텐 무엇도 숨기지 마. 어서.
나름 상냥하게 구슬렸다고 생각했건만.
“아, 비아. 제발요.”
루이먼드는 몸서리치며 부끄러워했다.
토끼 굴에 손을 넣으니 손끝에 하얀 토끼의 복슬복슬한 귀가 잡힐 것 같았는데. 막상 잡으려 하니 후다닥 도망가버렸다.
그런다고 포기할 리 없다는 걸 모르고.
“나는 진심입니다. 루이.”
“비아!”
“듣기 싫으면 얼굴을 보여줘요.”
“…….”
“당신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형편없을 텐데요.”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을 겁니다.”
“…….”
“설령 당신 눈에 형편없어 보인다 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거예요.”
“…….”
“약속해요, 루이. 아니, 맹세합니다.”
“…….”
“내 두 이름을 걸고 맹세하죠. 속명 루비아나, 그리고 신명 크리스틸.”
루비아나가 루이먼드의 머리에 뺨을 대며 말했다.
참 서툰 목소리였다. 작정하고 꼬시려는 듯 달콤하지도 않았고, 녹아내릴 듯 뜨겁지도, 유혹적이지도 않았다.
무뚝뚝하게 들릴 정도로 담담하고 단조로울 뿐이었다.
그런데도 루이먼드는 몸이 오싹, 떨렸다. 심장이 잠깐 움직이는 걸 까먹을 만큼 짜릿해서,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손끝이 움찔, 했다. 지금 이 손으로 감싸 안아야 할 건 다른 게 아니라 그녀의 얼굴, 그녀의 몸이라고. 뱀의 머리처럼 고개를 쳐든 욕망이 속삭였다.
루이먼드는 그 욕망에 취해 답했다.
“입으로만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말뿐인 맹세 따위, 필요 없다는 투정이었다.
“그럼 어떻게?”
큰마음 먹고 자신의 두 이름까지 걸고 맹세했건만. 말뿐이라 부족하다는 소릴 듣다니. 루비아나는 자신의 남편이 자신의 황제보다 더 욕심쟁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욕심쟁이가 고개를 들었다. 아직 뺨에 울긋한 부끄러움이 남은 얼굴이 드디어 드러났다.
루비아나는 새삼 그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본격적으로 넋을 잃고 구경하려는데, 그 얼굴이 바짝 가까워졌다.
너무 가까워서, ‘뭐지?’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쪽-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선물도 주셔야지요.”
“아.”
루비아나는 비로소 제 욕심쟁이 남편이 뭘 원하는지 깨달았다.
“이것도 결국 입으로만 하는 것 아닙니까?”
“입은 말과 선물을 동시에 줄 수 있는 신의 축복이 내린 곳이지요.”루이먼드가 살며시 루비아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루비아나는 그의 목을 두 팔로 감싸며 그의 얼굴을 끌어내렸다. 순순히 고개를 숙이는 루이먼드에게 그가 말한 대로, 칭찬과 선물을 함께 주었다.
“고맙습니다. 내 의견을 따라줘서.”
쪽.
“그리고 지금 얼굴, 하나도 안 이상합니다.”
또 쪽.
황제보다 욕심쟁이인 줄 알았던 남편이 고작 뽀뽀 두 번에 흐물흐물하게 풀어져 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루비아나의 얼굴에도 웃음이 어렸다.
“답례를, 해도 되겠습니까? 너무 과분한 선물을, 한 번에 많이 받은 거 같아서요.”
“얼마든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입술이 맞닿았다. 숨 막힐 듯 거칠고 집요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루비아나는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루이먼드를 달래기 위해, 그의 어깨와 등을 어르듯 쓸어내렸다.
“어머!”
서둘러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 내려오던 시녀장이 계단 중간에 서서 그 모습을 발견하고는 얼른 돌아섰다.
루이먼드가 옷을 갈아입은 건 그 뒤로 한참 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