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131)

***

흔들리는 마차 안. 루비아나와 루이먼드는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루이먼드는 다시 말끔하고 깔끔한 귀족으로 돌아와 있었다. 진흙 묻은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잘 닦여 빛나는 다이아몬드로.

그 다이아몬드는 걱정근심이 가득했다.

‘비아의 말이 옳아. 그녀의 말대로 하는 게 맞아. 하지만…….’

그를 지켜보던 루비아나가 손을 잡아주었다. 루이먼드는 고마운 마음을 담아 미소 지었다.

‘도대체 어떤 예술가들이기에, 이 사람이 이렇게 신경 쓰는 걸까.’

루비아나는 턱을 괴고 창밖을 내다보며, 나중에 시간이 되면 에릭 시모어의 살롱을 조사해 보자고 다짐했다.

‘거기서 무슨 소리를 들었기에 이렇게 전전긍긍하는 거지? 누가 보면 미래에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 천재 화가를 영접하러 가는 줄 알겠어.’

마차는 열심히 달려 백성들이 모여 사는 구역, 특히나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것으로 유명한 거리에 들어섰다.

거리 곳곳에 늘어선 허름한 화방에서 종이를 쌓아놓고 팔고 있었다. 낡은 옷을 입은, 화가인 것 같은 사람들은 종이를 한 꾸러미씩 옆구리에 끼고 걸어 다녔다.

마차는 루이먼드가 알려준 주소지 근처에서 멈춰 섰다. 마부는 더는 마차로 들어갈 수 없다고 우는 소리를 냈다.

루비아나와 루이먼드는 로브를 써 얼굴을 간단히 가리고 마차 밖으로 나왔다.

아쉴레앙 공작가 인장이 새겨져 있지는 않으나 충분히 고급스러운 마차. 돈 많은 귀족티가 팍팍 나는 두 남녀.

충분히 튀었으나 길가의 사람들은 크게 관심 가지지 않았다. 부유한 귀족들이 후원할 예술가를 찾으려고 이곳에 드나드는 건 흔한 일이었으니까. 길거리의 예술가들은 자신을 후원자가 될 리 없는 귀족들의 방문엔 무관심했다.

“우리에게 딱히 관심이 없네요.”

그런 그들을 신기해하며 힐끔거리는 건 오히려, 이쪽이었다. 루이먼드는 별천지에 온 사람처럼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루비아나는 그를 끌고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에릭 시모어가 알려준 주소는 5층짜리 낡은 빌라의 꼭대기 층이었다. 두 사람은 밟을 때마다 끼익 끼익 울부짖는 낡은 목조 계단을 올라가 5층 끝방에 섰다,

방문 앞에 대충 찢은 종이가 못 박혀 있었다.

오르카, 방에 있어도 없는 것과 다름없으니 귀찮게 굴지 말 것.

“여기군요.”

“…….”

“루이?”

“아, 예. 예.”

루이먼드는 문 앞에서 얼음이 되어버렸다.

루비아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서 팔짱을 꼈다. 그리곤 루이먼드가 알아서 녹을 때까지 얼어붙은 루이먼드를 구경했다.

아쉽게도 루이먼드는 금방 해동됐다.

“하, 하아. 할 수 있다. 안 되면 어쩔 수 없다. 괜찮아. 괜찮아. 떨지 말자.”

루이먼드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똑똑.

안쪽에서 누구냐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숨이나 한 번 더 몰아쉬고 마음의 준비를 하려고 했건만.

“아우, 이번 달 방세, 이번 주까진 내겠다고 했잖아요. 한번 말했으면 그런 줄 알아야지!”

바로 문이 벌컥 열렸다. 기러기발에서 머리가 참새 둥지 수준으로 엉켜 있는 사람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헉.”

“헉은 무슨, 화장실이나 고쳐 줘요. 세수도 못 하고 있거…… 어?”

물감이 덕지덕지 묻은 손이 참새 둥지를 쓸어 넘겼다. 감춰져 있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어라? 웬 귀족 나으리들?”

“흡.”

루이먼드는 또 숨 쉬는 걸 까먹어버렸다.

***

“와하하하, 어서들 들어오세요. 어서요! 아쉴레앙 공작님과 그 부군께서 날 다 찾아오시다니. 이런 신기한 일이 다 있나!”

참새 둥지가, 아니, 아직 성공하지 않은 천재 화가 오르카가 활짝 웃으며 두 사람을 반겼다.

“……어?”

이상하다. 이게 아닌데?

루이먼드는 당황했다.

“루이, 일단 들어가죠.”

루비아나가 루이먼드를 데리고 들어갔다.

“실례하지.”

“얼마든 실례하셔도 됩니다. 두 분만큼은 절대적으로, 반드시, 영원히 환영합니다.”

오르카가 푸하하 웃으며 두 손을 활짝 벌렸다.

“어서들 오세요, 저의 초라한 아틀리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확실히 초라하긴 했다. 아틀리에란 단어를 이런 곳에 써도 되나 싶을 정도로.

방은 좁고 낡았다. 부엌과 침실과 응접실이 구분되지 않은 원룸 형태였고, 화장실은 아예 없었다. 한 층마다 공용 화장실이 있다고 했다.

그 작은 방이 그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닥부터 천장에 이르기까지, 벽에마저. 온통 그림 그린 종이가 빼곡히 붙어 있었다.

손바닥만 한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 아래 서서 웃고 있는 젊은 화가는, 루이먼드가 알고 있는 그 오르카가 아니었다.

문전박대를 각오했건만 환영받았다. 매우 기쁘고 감사한 일이건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피곤하고, 허탈했다.

‘지금까지 내가 고민했던 건 다 뭐였지?’

고작 몇 년 전인데, 이렇게 해맑고 귀족을 안 싫어할 수 있는 건가?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오르카가 말했다.

“전 솔직히 귀족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

루이먼드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희망 고문인가? 이렇게 한 발 들여놓게 한다면 쫓아낼 생각?’

새로운 가설에 새로운 힘이 솟구쳤건만.

“하지만 두 분만큼은 예외입니다.”

“왜죠?”

머리를 거치지 않은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두 분, 아쉴레앙 공작님과 그 부군이신 두 분이시기 때문이죠.”

오르카는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말투로 대답하고는, 바닥에 쌓인 종이를 한 아름 껴안아 옆으로 휙, 던져버렸다.

종이에 싸여 있던 테이블과 의자가 드러났다. 그것들을 덮고 있던 채색된 종이들은 다른 쪽에 산더미같이 쌓였다.

팔랑팔랑, 종이 한 장이 흩날려 루비아나의 발치에 떨어졌다.

“일단, 여기 앉으시죠. 귀한 분들을 오래 세워놓는 것도 예의는 아니지요?”

오르카가 자리를 권했다.

루이먼드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루비아나는 발치의 종이를 들어 그려진 그림을 보았다. 알록달록하게 채색되어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기괴하게 보일 법한 채색 방식이었으나 묘하게 마음을 끌어당겼다.

전혀 닮지 않았지만, 루비아나는 그게 오르카의 얼굴 같다고 생각했다. 화가의 자화상.

“앗, 그건 습작이라!”

오르카가 바닥에 깔린 종이들을 밟고 달려와 루비아나가 손에 든 종이 끝을 붙잡았다.

루비아나는 순순히 종이를 돌려주었다. 오르카의 것이었으니까.

대신 벽에 붙어 있는 다른 그림들을 둘러보았다.

‘실력이 좋은 화가군.’

그림에 그다지 큰 흥미가 없는 루비아나가 보기에도, 남달라 보였다. 루이먼드가 얼굴에 진흙을 묻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루비아나가 그림을 구경하는 동안, 루이먼드와 오르카는 테이블을 두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오, 두상이 정말 잘나셨네요.”

색다른 칭찬이었다.

“아, 감사, 아니, 고마워요.”

루이먼드는 명랑하게 자신의 두상을 칭찬하는 오르카를 보며, 정신이 다 아득해졌다.

‘뭐지? 진짜 환희의 화가, 오르카가 맞나?’

분명 오르카는 귀족을 싫어한다고 했는데. 설마 헛소문이었나. 나는 그 헛소문에 휘둘려 허튼짓했던 건가.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 나돌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오르카에게 고스란히 읽혔다.

사람을, 사물을, 세상을 관찰하여 그 모습을 화폭에 담아내는 화가 앞에서 표정 관리를 하지 않는다는 건, 속마음을 읽어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 거리에 사는 오르카를 찾아온 거라면 제대로 찾아오신 게 맞아요. 저밖에 없거든요.”

“아, 나는-”

“그것도 맞아요, 에릭 시모어 님께 들으셨겠지만, 전 귀족이란 족속을 정말 싫어해요. 솔직히 얼마 전까지 공작 부군님도 정말, 끔찍하게 싫어했어요.”

오르카가 해실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두 분은 이제 예외예요. 아쉴레앙 공작님과 그분의 부군이신 루이먼드님. 두 분이 이번에 세습 귀족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준 건, 정말 최고였거든요. 크으!”

“아…….”

루이먼드는 눈을 크게 떴다.

“두 분은 이 거리의 영웅이에요. 어딜 가든, 저보다 더 좋아하면 좋아했지 덜 좋아하지는 않을 거예요. 아마 불쑥 어느 카페든 들어가도 커피는 무조건 공짜일 거예요, 장담하죠.”

오르카는 테이블 위에 빈 종이를 올리고, 몽당연필을 들어 쓱싹쓱싹 스케치하며 말했다.

“시모어 가문의 승리는 자신의 능력으로 새로운 귀족이 된 황실 관리들의 승리이지만, 우리 평민들의 승리이기도 해요.”

“아,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고맙, 고맙네.”

‘그래서 나를, 내치지 않았구나.’

루이먼드는 비로소, 오르카가 왜 자신을 환대했는지 이해했다. 어깨에서 힘이 빠지며 긴장이 풀리려는데.

“이렇게 평범하게 찾아와주신 건 진짜 고마워요. 아무리 아쉴레앙 공작님과 그 부군님이라 하더라도, 만약 절 속이려고 하인을 미리 보냈다던가, 두 분이 직접 평민인 척 변장하고 왔다든가 하면, 저는 정말이지 두 분께 완전히 실망해서, 문 앞에서 내쫓아 버렸을 거니까요.”

“……!”

심장이 다 섬뜩했다.

‘비아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려, 오르카란 화가를 영영 잃어버렸으리라.

루이먼드는 루비아나를 돌아봤다. 그녀는 루이먼드와 눈을 마주치며 씩, 웃어 보였다.

루이먼드는 그 미소를 보며 다시 한번 마음먹었다.

‘앞으로 비아가 하는 말은 진흙으로 빵을 만든다고 해도 믿어야지.’

“그나저나 절 왜 찾아오신 건가요?”

“그전에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뭐든 말씀하세요. 제가 왜 귀족이란 족속들을 싫어하는지, 그 이유만 빼고 뭐든 다 말씀해드리죠.”

“…….”

그걸 물어보고 싶었던 거였다.

루이먼드가 입을 꾹 다물자 오르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푸하하, 웃었다. 푼수 같은 웃음인데, 이상하게도 사람이 쉬워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에릭의 살롱에 나오지 않는 거지? 에릭이 당신을 계속 걱정하고 있는데.”

루이먼드는 그다음으로 궁금했던 걸 물었다.

“아, 이런.”

오르카가 새 둥지 같은 머리를 연필로 긁적였다.

그녀가 에릭의 살롱에 오지 않는 이유는, 루이먼드가 짐작했던 대로 리사나와 그녀의 추종자들 때문이었다.

살롱에 떼거리로 쳐들어와선, 먼저 와 있던 예술가들을 개떼 몰아내듯 몰아냈다고 했다. 오르카는 그때 정이 뚝 떨어졌다.

‘아, 여기도 귀족들로부터 안전한 곳은 아니구나. 내가 있을 곳은 못 되는 것 같네.’

지극히 그녀다운 이유였다.

루이먼드는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설득했으나, 오르카는 요지부동이었다.

“싫어요, 다시는 안 갑니다.”

“절대 안 가요.”

“절 죽이면 죽였지, 그 살롱으로 다시 끌고 갈 수는 없을 겁니다.”

오르카는 단호했다. 헤실헤실 웃던 서글서글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에릭 시모어의 편지로 이 정도 상황은 대략 알고 있었던 루이먼드는 바로 제안했다.

“그럼 내가 당신을 후원하고 싶-”

“아, 거절하겠어요.”

오르카는 말을 다 듣지도 않고 거절했다.

“당신들이 키우는 살찐 돼지가 되느니, 내 그림을 끌어안고 굶어 죽어버리겠어요. 제 말이 너무 거칠었다면, 알아서 용서해줘요. 워낙 배운 거 없고 못돼먹은 계집이라서.”

픽, 웃는 얼굴은 면도칼 같았다. 섬뜩했다.

루이먼드는 당황했다.

‘이런 식으로 거절당할 줄은 몰랐는데.’

문전박대당하지 않은 건 다행이나, 이래서야 문전박대당한 것보다 나을 게 없었다.

그때 불쑥, 루비아나가 끼어들었다.

“이 돈이면 한 2년 정도는, 질 좋은 도화지와 라피스라줄리를 갈아 만든 물감을 마음껏 쓰며 그림 그릴 수 있을 텐데, 그래도 거절하겠다는 건가?”

루비아나가 벽에 붙은 그림 하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 그림은 바다를 그린 것이었는데, 다른 곳은 연하게라도 채색이 되어 있었는데 종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바다는 연필 자국뿐이었다.

“그, 그건…….”

엄청난 금액을 들어도 전혀 현실적이지 않았는데. 구체적인 예시를 들으니 현실감이 훅- 들어왔다.

오르카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루비아나는 여전히 벽을 보고 있어 몰랐지만, 루이먼드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이건가? 환희의 화가를 후원할 방법이?’

예술가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는, 좋은 재료에 대한 욕망. 그걸 자극한다면 후원가가 되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일지도?

루이먼드는 오르카의 후원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젖어, 아무 말이나 막 늘어놓았다.

이 세상 모든 최고의 미술 재료를 다 쓸어다 주겠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싶은 걸 마음껏 그려라. 이곳보다 안전하고 편안한 집을 제공해주고, 작업실도 따로 만들어주겠다!

효과는 놀라웠다.

“나를, 나를…… 고작 돈으로 매수하려고 하다니!”

오르카는 분노했으니까.

“역시 귀족 놈들은, 다 똑같아. 이런 걸 내가, 혹시라도 예외일 줄 알고 기대했다니.”

두 눈에 스치고 지나간 건 분명, 해묵은 증오였다.

“그, 그런 게 아니라!”

루이먼드는 아차 싶었다. 뒤늦게라도 변명하려 했지만, 오르카는 들어주지 않았다.

“나가. 다 나가십시오!”

오르카가 버럭 소리 지르며 두 사람을 내쫓았다.

종일 골방에 틀어박혀 그림이나 그리고, 붓과 물통 외에 무거운 것을 들어본 적 없을 비리비리한 화가가 어찌 두 사람을 몰아낼 수 있을까 싶겠지마는. 두 사람은 어어- 하는 사이에 문밖으로 쫓겨났다.

루이먼드는 종잇장처럼 훨훨 밀려났고, 루비아나는 오르카가 제 몸에 손을 대기 전 손을 들어 알아서 제 발로 걸어 나왔다.

“아니, 버텨야죠. 비아!”

먼저 문밖으로 밀려 나간 루이먼드는 루비아나의 우아한 퇴장 장면을 보며 세상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주거침입죄입니다.”

“아니, 지금 그런 법을 따질 때가!”

쾅. 두 사람의 눈앞에서 문이 닫혔다.

“…….”

“…….”

루비아나와 루이먼드,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음, 아무래도.”

“망한 거 같아요, 비아.”

우아아. 루이먼드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저런.”

루비아나는 참 안타깝게 됐다는 마음으로 루이먼드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위로해줘서 고맙긴 한데, 지금 혹시 남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남편 일인데 어떻게 남 일입니까. 님 일이지.”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도대체 그런 말은 어디에서 배운 겁니까?”

“아마 군대에서? 또 북부에서?”

“……꼬박꼬박 대답해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

“……흑.”

루이먼드는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아 고개를 파묻었다.

딱히 눈에서 눈물이 나오진 않았지만, 루이먼드는 지금 격하게 울고 싶었다.

“이런.”

남편이 쪼그려 앉아 있는데, 부인이 멀뚱히 서서 내려다보는 건 옳지 못한 일이겠지. 부부는 한 몸이라는데. 루비아나는 루이먼드 옆에 나란히 쭈그려 앉았다.

“그렇게 실망스럽습니까?”

“첫 단추 끼울 때부터 어째 불안했었는데…… 기어코 일을 망치고 말았어요. 저 자신이 이렇게 한심할 수가 없네요.”

‘멍청한 루이먼드. 니가 그러면 그렇지.’

루이먼드는 마구 자학했다.

첫 번째 삶에서 글자도 모르던 자신이, 두 번째 삶에서 첫째 왕자의 딸랑이로 살던 자신이, 이번 생에서조차 학자의 집에서 만년 낙제생 꼴을 못 면했던 자신이. 그저 멍청한 자신이 한스러웠다.

‘내 주제에 무얼 한다고. 그럼 그렇지.’

루이먼드는 주먹 쥔 손으로 제 머리를 퍽퍽 때렸다.

이 머리는 아무래도 장식이 분명했다. 모처럼 루비아나 덕분에 좋은 기회를 얻었는데. 그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리다니. 루이먼드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지 말아요, 루이.”

루비아나가 다급히 그의 팔을 붙들었다. 기어이 또 자기 머리를 쥐어박으려는 루이먼드의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비아, 잠깐. 잠깐만 나를 못 본 척해줘요. 아니면 그냥 날 여기에 놔두고 가줘요.”

“……미안합니다. 거기서 돈 이야기를 꺼내는 게 아니었는데.”

루비아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루이먼드는 그녀의 말을 듣곤 몸이 휘청일 정도로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비아는 잘못이 없습니다! 그때 비아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도, 내가 바로 후원금 이야기를 꺼냈을 거예요. 당신보다 훨씬 세련되지 못한 말로요.”

그나마 루비아나 덕분에 오르카의 방에 들어가 보기라도 하지 않았던가.

‘그동안 내 노력과 고민은 다 헛짓거리였어. 왜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던 걸까. 이런 상황에서 멋들어지게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말해야 했는데. ……그런데 그게 뭔지 아직도 모르겠어.’

일곱 번 죽고 여덟 번째 사는 삶. 횟수만 많으면 뭘 하나, 실속이 없는데.

루이먼드는 그렇게 자기 자신만 탓했다. 자책하는 마음이 땅을 파고 들어갈 때였다.

벌컥, 다시 문이 열렸다.

“……!”

루이먼드는 희망에 차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곤 저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지나치는 오르카를 목격했다.

“어딜, 가는, 아, 혹시 에릭의 살롱에?”

“…….”

오르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쌩-하니 가버렸다.

루이먼드는 그새 퀭해진 눈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설마 날 피해 이사 가는 걸까?’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들었다. 옆에 함께 쭈그려 앉아 있던 루비아나가 그의 정신을 붙들어주었다.

“따라가 보죠.”

“예? 하, 하지만…….”

“들고 있는 게 화판과 화구 같던데, 어디 그림을 그리러 가는 거겠지요. 그때 한 번 더 말을 걸어보면 어떻겠습니까.”

“……!”

“아니면, 이대로 포기하고 돌아가겠습니까? 난 뭐, 그래도 좋-”

“아니요!”

“음…….”

폭신폭신한 침실이 딱 그리워지던 참이었는데.

루비아나는 망설임 없이 아니라고 대답하는 남편을 보며 착잡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섭섭한 마음은 바로 털어냈다.

제 머리를 쥐어박던 루이먼드의 모습이 눈에 콱 박혀 사라지질 않았다.

‘그렇게 가지고 싶다고? 그럼 가지게 해줘야지.’

루비아나는 오르카가 사라진 복도를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몰래 뒤쫓는 건 제국 신법에 금지되어 있지 않습니까?”

“뒤쫓다니요?”

루비아나는 뭐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하냐는 듯 쳐다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가는 방향이 같을 뿐입니다. 뭐, 우연히 도착지까지 같을 수도 있고.”

아직 쭈그려 앉아 있는 루이먼드에게 손을 내밀며 씩, 웃어 보였다.

“당연히 당신도 같은 방향이겠지요?”

“…….”

어휴. 루이먼드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 손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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