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131)

***

두 사람은 오르카를 뒤쫓았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얼굴을 까만 후드로 꼭꼭 가리는 걸 잊지 않았다.

그리곤 자신도 적당히 뒤집어썼다. 둘 다 꼭꼭 가리면 남들 보기에 너무 수상쩍어 보일 테니까, 적당히.

다행히도 붉은 머리만 가려도, 사람들은 거의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타오르는 횃불 같은 붉은 머리카락이 그렇게 인상적이었다. 루비아나를 직접 본 적 있는 사람에게든, 소문으로만 들어본 사람들에게도.

자기 몸통만 한 화구 가방을 들고 바삐 걷는 오르카를 뒤쫓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루비아나가 지금보다 조금만 더 의욕 있었더라면, 오르카가 전혀 눈치 못 채게 기척을 숨기고 뒤쫓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옆에 달고 있는 루이먼드 때문에, 그 정도로 의욕을 가지진 않았다.

루이먼드는 혹시나 루비아나와 헤어질까 봐, 그녀의 로브 자락을 꼭 붙잡고 종종 뒤따랐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가 뒤쫓아오는데도, 루비아나는 위압감은커녕 약간의 경계심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제대로 따라오고 있는지 걱정되어 몇 번 뒤를 돌아봐야 했다.

차라리 토끼나 다람쥐가 뒤쫓아오는 게 더 위협적으로 느껴질 것도 같았다. 걔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면, 손이 활이나 검을 잡기라도 하지.

‘어떤 의미로, 암살자 재능이 충분한 것 같기도 하고.’

외모가 너무 눈에 띄지만 않았어도, 어쩌면 일찌감치 그쪽 세계에 납치되어 최고가 되었을지도.

루비아나는 루이먼드도 모르는 그의 숨겨진 재능에 대해 생각하며, 더없이 편하게 터벅터벅 걸었다.

그랬기에 오르카가 갑자기 멈춰서 휙- 뒤를 돌아보아도 놀라지 않았다.

“헉, 수, 숨어야!”

놀란 건 루이먼드뿐이었다. 그는 얼른 옆으로 빗겨나 길가에 쌓인 나무 상자 뒤에 숨으려다가, 오히려 후드가 반쯤 벗겨져 그 찬란한 은발을 내보였다.

“뭐지?”

“빛나!”

“어떤 물감을 쓰면 저런 색이 나오는 거지?”

길 걷던 주변 사람들이 눈부셔하며 그를 우러러보았다. 덕분에 안 숨느니만 못한 상태가 되었다.

‘암살자 재능 있다는 거 취소.’

누가 누굴 암살한단 말인가. 본인이나 납치당하지나 않으면 용하지.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후드를 다시 내려주며, 고개를 돌리고 잠깐 큭큭 댔다.

“……뭣들 하시는 건가요?”

오르카가 기가 차다는 듯 둘을 바라보았다.

“그, 그게…….”

후드를 두 손으로 붙잡고 푹 내려쓰던 루이먼드가 머뭇거렸다. 루비아나가 앞으로 슥- 나섰다.

“길을 걷고 있는데.”

“……이 길을요?”

“문제 될 게 있나?”

“굳이, 이 길을 말인가요?”

“그래, 굳이 이 길을.”

“……저를 따라온 게 아니구요?”

“어쩌다 보니 가는 방향이 같나 보네.”

“하, 말도 안 돼…….”

당연한 말이지만 오르카는 믿지 않았다. 그렇다고 감히, 루비아나에게 거짓말하지 말라고 소리치지도 못했다.

“보다시피 한가롭게 데이트 중이었는데, 우연히 다시 마주치게 됐군. 어딜 가는 중이었지?”

“…….”

오르카가 아랫입술을 세차게 깨물었다.

대답하고 싶어 하지 않다는 티가 팍팍 났으나, 루비아나는 배려해주지 않았다. 그저 오르카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답을 기다리는 귀족 앞에서, 오르카는 오래 침묵할 수 없었다.

“……저 앞, 폴짝의 광장으로 갑니다.”

루비아나의 눈썹이 꿈틀, 했다.

‘폴짝?’

그 단어 때문에, 별 관심도 없는 오르카의 얼굴을 한 번 더 들여다보았다.

‘폴짝의 광장이라니. 설마 그 폴짝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이 귀족혐오자 화가가 기어이 선을 넘어 자신을 놀리나 싶어 확인한 것이건만.

오르카의 얼굴엔 비웃음이나 냉소 같은 게 걸려 있지 않았다. 대신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수치심? 모욕감? 그런 감정들이 묻어났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 말고 다른 사람의 표정엔 딱히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루비아나에게도 선명히 느껴질 만큼, 오르카의 감정은 강렬했다.

‘나에게 어딜 가는지 말해준 걸, 굴욕으로 여기는 건가?’

루비아나는 금방 오르카의 감정선을 짚어냈다. 그녀가 북부의 영주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북부의 산맥에 숨어들던 범죄자 중에는 귀족을 혐오하다 못해 증오하는 이들이 꽤 많았다. 오르카의 태도와 표정은 그들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귀여운 수준이지만.

‘루이가 그랬지. 이 화가는 귀족이 찾아오면 아예 문도 열어주지 않는다고.’

아마도 이런 상황 자체를 맞닥뜨리고 싶지 않아서 그리 행동한 것이었으리라.

귀족을 싫어하지만, 현실적으로 귀족에게 맞설 수는 없으니 피할 수밖에.

‘어지간히 귀족이 싫은가 보군.’

무슨 사연이 있는 듯했으나,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오르카는 루이먼드가 아니었으니까.

나중에 루이먼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모를까.

“그래? 정말 방향이 같군.”

“……두 분께서도, 폴짝의 광장으로 가십니까?”

어쩐지 이가는 소리가 함께 들린 것도 같았으나, 루비아나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방향이 같은 거 같은데 동행하겠나?”

“아니요, 절대 사양할게요. 공작님 말씀처럼, 두 분께서 모처럼의 데.이.트.를 하시는데 제가 끼어 들어서야 쓰나요.”

오르카는 찐득한 슬라임 마수가 제게 달라붙을까 봐 놀란 사람처럼 후다닥 돌아서 뛰듯 걸어가 버렸다.

그녀가 어디로 갈지 목적지를 안 이상, 굳이 서둘러 따라갈 필요는 없었다. 그 폴짝의 광장 말고 다른 곳으로 도망간다 해도, 상관없었다. 아직 맨눈으로 확인 가능한 사정거리 안이었으니까.

루비아나는 오르카의 뒷모습을 곁눈질로 확인한 뒤, 옆에 멍하니 서 있는 루이먼드를 보았다.

“당신이 후원하고 싶어 하는 화가가 아주, 배려심이 넓은 것 같습니다. 굳이 우리의 데이트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네요.”

“……우리가 자기를 뒤쫓은 것 때문에 더 화난 것 같은데요.”

“루이가 보기엔 그렇습니까?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루비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까 저 화가의 방에서 쫓겨날 때부터 저 화가는 화나 있는 상태였으니까, 거기서 좀 더 화를 낸들 거기서 거기 아니겠습니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화가는 여전히 화나 있고. 이쪽은 여전히 그 화가를 후원하고 싶고.

“……아니요, 비아. 아무래도 망한 거 같아요.”

“나약한 말 말아요, 루이.”

종일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며 둘이서만 놀 기회를 저버리고 나온 것 아닌가. 아까 문밖으로 쫓겨날 때만 해도 저택으로 돌아가자는 선택지가 살아있었으나, 그걸 저버린 것 역시 루이먼드였다.

그랬으면서 고작 이 정도에서 낙담해서야 쓰나.

“아직 포기하기엔 일러요.”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그거참, 위로되는 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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