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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아나는 루이먼드를 여기저기 끌고 다녔다. 가는 곳마다 하필이면 오르카가 있었는데, 참 기막힌 우연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게 당신이 아까 말한 우연 같은 필연 아니겠습니까?”
루비아나는 좌판에 늘어져 있는 말 조각상 기념품을 고르며 말했다. 참고로 그 좌판은 오르카의 이젤 옆에 놓여 있었다.
‘하나 사 가서 레나한테 줄까? 레나는 이곳을 알고 있으려나? 당연히 알고 있을 것 같긴 한데.’
루비아나는 고민하다 조각상 두 개를 들었다.
“이 중에 뭐가 더 낫습니까?”
황제에게 바칠 진상품이니만큼, 좀 더 칠이 잘된 걸 고르고 싶은 마음에 조언을 구했건만.
“비아, 이러다가 우리…….”
루이먼드가 고르라는 말 조각상은 안 고르고 루비아나의 옷소매만 잡아당겼다. 얼른, 당장,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고 신호를 보냈다.
“아, 저기 가 보고 싶다고요? 이걸 산 다음……”
“비아, 제발!”
루이먼드는 이쪽을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는 오르카를 피해, 루비아나를 끌고 도망치다시피 자리를 벗어났다.
루비아나는 끌려가는 와중에도 잡화상에게 동전을 던지고, 잘 칠한 말 조각상을 건네받아 품속에 넣었다.
‘나중에 레나한테 보여 줘야지.’
이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루이먼드는 알아서 오해하고는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됐어요. 더는 저 화가를 후원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본인이 저렇게 싫어하는데…… 나중에 에릭에게 말이나 한번 더 해 보죠. 그러니까 비아, 우린 그냥 우리만의 데이트를 즐겨요.”
그렇게 우울한 표정으로 말하는데 어떻게 그러냐고, 알겠다는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루비아나는 그걸 해내고야 말았다.
루비아나는 산뜻이 물러났다. 후우. 루이먼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바람에 루비아나가 슬쩍 뒤를 돌아보며, 또 자신들을 피해 자리를 이동하는 오르카의 동선을 확인하는 걸 보지 못했다.
***
환희의 화가 오르카를 눈앞에 두고, 다른 것에 집중하고 데이트를 즐긴다.
자신이 말하고도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게 가능하긴 했다.
처음엔 그저 루비아나를 오르카에게서 떼어 놓을 생각으로 광장을 마구 헤집고 다녔는데 걷다 보니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구경거리들이 많았다.
그의 인생에서 이렇게 마음 편히 어디 놀러 나와 본 것 자체가 처음이었건만, 하필 온 곳이 평민들의 데이트 코스 명소인 폴짝의 광장이었다.
루이먼드는 어느새 오르카도 잊고, 광장의 매력에 푹 빠져 버렸다.
루비아나는 적절히 루이먼드를 즐겁게 해 준 예술가들의 구멍 뚫린 모자에 동전을 튕겨 주었다.
죽 늘어진 가판에서 파는 간식 중 먹을 만한 것을 골라, 넋을 놓고 있는 루이먼드의 입에 넣어 주기도 했고.
‘이거 재미있는데!’
하다 보니 재미가 들려, 자신은 먹지도 않고 루이먼드의 입에 음식을 쏙쏙 집어넣었다.
왜 루이먼드가 침실에서 식사를 할 때마다 먹여 주려고 안달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루이먼드는 입에 들어오는 게 뭔지 보지도 않고 냠냠 잘 받아먹었다. 루비아나가 먹여 주는 건 독이어도 받아먹겠다는 태도였다.
그렇게 루이먼드를 잘 먹이고 잘 구경시키고 나니, 하늘이 붉어졌다.
“이제 그만 갈까요?”
“예, 그래요.”
루이먼드는 아쉬워하면서도 순순히 따라왔다. 루이먼드의 양손엔 폴짝이 기념품이 잔뜩 들려 있었다.
‘나중에 진짜 폴짝이를 보여 줘야지.’
루비아나는 루이먼드가 폴짝이를 영접할 기회를 조만간 만들어 보자고 생각하며, 루이먼드를 마차에 태웠다.
루이먼드는 마차에 앉자마자 스르륵 쓰러지듯 누워 잠들었다. 종일 걸어 다녔으니 피곤할 법도 했다.
루비아나는 그가 곤히 잠든 걸 확인한 후 다시 마차에서 내렸다.
“내가 올 때까지 잘 지키고 있도록.”
“예, 공작님.”
늘 루이먼드의 호위를 맡았던 부하가 오늘은 마부가 되었다. 그는 마차 문 앞을 지키고 섰다.
루비아나는 다시 폴짝의 광장 안으로 들어갔다.
광장은 한산했다. 놀러 온 사람들은 떠나고, 돈벌이하러 나온 예술가들은 주섬주섬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목조 건물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그림을 그리던 오르카도 자리를 접고 있었다.
루비아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오르카는 루비아나를 알아보고는 인상부터 찡그렸다.
“또 무슨 용건으로 찾아온 건지는……”
“후원을 해 볼까 해서.”
“…….”
“의견을 듣고 싶군. 얼마든지.”
“당장, 그냥 떠나세요.”
오르카가 진절머리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 난 후원 따위 안 받겠다고……”
“아니, 그쪽 말고. 저쪽.”
루비아나가 턱으로 옆을 가리켰다.
꼬부라진 나무 아래, 아이들이 네다섯 모여 있었다.
일고여덟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아이들은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바닥에, 또 찢어진 종이 쪼가리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아, 안 돼.”
오르카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안 좋은 생각을 한 게 분명했다.
‘설마 내가 어린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퍼진 건 아니겠지?’
루비아나는 턱을 문지르며, 자신에 대한 소문이 또 뭐가 있었나 기억해 보려 했다.
그사이 오르카는 얼른 아이들을 가리고 섰다. 아이들은 그녀가 자신들과 놀아 주려는 건 줄 알고 우와아아- 소리 지르며 달려와 매달렸다.
“언니?”
“오르카 언니!”
“이거 봐 봐, 언니가 말한 대로 그렸어!”
“어, 그러니? 그래, 아주 잘 그렸네. 얘들아 잠깐, 언니 뒤에 꼭 붙어 있어.”
오르카는 포도송이처럼 아이들을 주렁주렁 끌어안고, 경계 어린 눈초리로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무,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지만, 이 아이들은……”
“그 아이들을 위해 이곳에 학교를 만들까 하는데.”
“뭐라고요?”
“위치는 저쯤이 좋겠어. 아까부터 살펴봤는데, 저 건물은 쓰지 않는 것 같아. 사람이 드나들지도 않던데.”
“그, 거긴 너무 낡아서 얼마 전에 사람들이 크게 다친 뒤로 안 쓰…… 아니, 이게 아니라!”
“성량이 좋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기에 딱 좋은 것 같은데?”
계속 지켜봤다. 종일, 오르카가 뭘 하는지.
손님이 이젤 앞에 앉아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하면 그려 주고, 남은 시간에는 광장 여기저기에서 웅크려 있는 아이들을 돌봤다.
제 빵을 쪼개 아이들의 입에 넣어 주고, 종이를 찢어 그림 그리는 법을 알려 주었다.
아이들은 그녀에게 보살핌을 받는 게 익숙해 보였다. 언니, 누나, 하고 따르며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이거군.’
루비아나는 금방 그녀의 약점을 찾아냈다.
하지만 그다지 기쁘진 않았다. 그보다는 좀, 입맛이 썼다.
오르카의 약점은 제국의 약점이기도 했으니까.
이 예술가들의 거리엔, 그리고 폴짝의 광장엔 어른 없이 자기들끼리 뭉쳐 돌아다니는 아이들이 많았다.
루비아나는 실컷 놀고 피곤해하는 루이먼드를 마차에 데려다주며, 거리 골목골목마다 숨어 있는 어린아이들을 보았다.
부모가 예술가이거나 이 집값 싼 거리에 살며 아이를 돌보지 못하고 일하러 나가야 할 만큼 바쁘거나, 그래서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냥 굶주린 배를 움켜잡고 골목골목마다 뭉쳐 있는 아이들.
비단 이 거리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화려하고 날로 발전해 가는 것 같은 수도의 화려한 거리. 그 뒷면의 가난하고 굶주린 그림자는 도통 옅어지지 않았다. 빈민과 빈곤은 제국의 큰 숙제였다.
칼레나가 동부 치수 사업에 집중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동부의 밀 생산량을 늘려, 그 대량의 밀을 수도로 들여와 거리의 빈민들을 먹이겠다는 계획.
그 계획엔 거리 곳곳에 학교를 지어 아이들에게 빵을 주고, 간단한 기술이라도 가르치자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현재로선 도무지 실행할 여력이 없어, 일단 동부 치수 사업이 끝난 뒤로 논의 자체를 미루긴 했지만.
루비아나는 칼레나가 떠맡긴 서류에 끼어 있던 그 내용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여기서 시범 사업을 한번 해 봐도 되겠지.’
실무야 내무국장이 알아서 해 주리라. 루비아나는 그녀의 유능함을 믿었기에 막 내질렀다.
“그쪽이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나는 이 아이들을 후원할 생각이야. 이 아이들뿐 아니라, 이 거리에서 제멋대로 굴러다니는 다른 아이들도 모두 그 학교에 쓸어 넣으려고 하는데.”
오르카의 표정이 급변했다. 무슨 생각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가 솔깃한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내가 그 아이들을 어떻게 할지 걱정된다면, 그 학교의 선생으로 일해 보는 건 어떤가? 시간이 나면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는 재료를 조금 덜어다 그림을 그려도, 누가 뭐라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은데.”
“……이 거리의 아이들을 인질로 날 협박하는 건가요?”
가만히 듣고 있던 오르카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본인이 그 정도로 가치 있다 생각하나 보지?”
“그, 그건……”
“그렇게 생각했다면, 정답이야.”
“……!”
“언니이이.”
“누나, 왜 그래?”
아이들이 오르카의 바지를 잡고 흔들었다.
“응, 아무것도 아니야. 언니 지금, 그냥 저분이랑 이야기 나누고 있는 거야.”
“그럼 우리 학교 갈 수 있어?”
“학교에서 막 빵도 주고 그래?”
“…….”
아이들을 붙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느라, 자신의 값어치를 알아주는 진정한 후원자를 놓치지 마. 나중에 반드시 후회할 테니까.”
“진정한 후원자라니, 공작님이요?”
하, 오르카가 숨을 토해 냈다.
“아니, 나 말고 내 남편.”
이쪽은 예술에 대해선 문외한이라. 루비아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공작, 부군님이요?”
“그래. 그쪽이 나중에 제국 제일가는 예술가라도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더군.”
“……제가?”
“그러게. 솔직히 난 잘 모르겠지만.”
루비아나는 오르카가 물감을 말리려 펼쳐 놓은 그림들을 훑어보았다.
실력이 좋은 거 같긴 한데, 딱히? 칼레나에게 들고 가고 싶을 만큼 대단해 보이는 건 없었다. 차라리, 잡화상이 칼로 슥슥 깎아 색칠한 말 조각상을 더 흥미로워하리라, 칼레나는.
“뭐, 내 남편이 그렇다니까.”
그런 줄 알고,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배부른 돼지가 싫다고 했나? 그럼 일하는 돼지가 돼 보는 건 어때? 거기 있는 아기 돼지들을 위해서 말이야.”
힘이 없고 약할 때,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건 힘든 일이다.
기어이, 기어이 지키고 싶다면 그것 말고 다른 걸 기꺼이 포기해야 했다. 예를 들면 자존심 같은 것.
루비아나는 오르카의 다리 뒤에 숨어 고개만 빼꼼히 내민 아이들을 내려다보았다. 그 아이들이 자신을 올려다보기 전, 얼른 시선을 돌리긴 했지만.
“어떤가?”
“…….”
오르카는 침묵했다. 루비아나는 그것을 승낙으로 받아들였다.
“조만간 내 남편에게 정중히, 본인의 의사를 밝히길 기다리고 있겠네. 아, 내가 이런 말 했다고 솔직하게 말하지는 말고. 그 정도 눈치는 있다고 믿어도 되겠지?”
“…….”
역시나 침묵. 루비아나는 픽, 웃으며 돌아섰다.
그렇게 루비아나는 루이먼드가 원하는 걸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