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덜컹, 마차 문이 열렸다.
루이먼드는 잠결에 그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비아?”
“아, 일어나지 말고 더 자요.”
루비아나는 얼른 문을 닫고 자리에 앉았다.
“으음…….”
잠시 뒤척이던 루이먼드는, 졸린 눈을 억지로 뜨고 꾸물꾸물 일어났다.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잠깐, 아는 사람을 본 것 같아서 확인하러 갔다 왔습니다.”
“아는…… 사람, 이요? 여기에?”
말을 하면서도 졸음을 참지 못해 꾸벅꾸벅 고개가 흔들렸다. 루비아나는 그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그런데 아니더군요. 전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모르는, 일…….”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아아…….”
루이먼드는 그 손에 기대며 숨을 폭 내쉬었다. 까칠한 손바닥 감촉이, 너무 좋았다.
“으음.”
루이먼드는 그 손에 제 뺨을 부볐다. 제국 전역에 수백 개의 학교를 세워 줘도 될 만한 가치를 가진 어리광이었다.
루비아나는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뺨을 쓸어 주었다.
그는 지금처럼 약간 제정신이 아닐 때 이런 애교를 부렸다. 호랑이가 자신이 어린 고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으나 루비아나에게는 아기 고양이로 보이니 상관없었다.
“으음, 비아.”
루이먼드는 잠결에 루비아나의 다리를 베고 누웠다.
“루이? 불편할 텐데?”
“아니요, 아니요…….”
루이먼드는 그녀의 다리에 뺨을 대고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안 불편하다면 됐어요. 더 자요.”
“…….”
‘비아, 당신은요? 안 불편한가요?’
묻고 싶었는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어깨를 쓸어 주는 손길을 따라 잠이 쏟아졌다.
루이먼드는 지금 여기가 어딘지, 무얼 하다 이렇게 된 건지 따위는 다 잊고, 다시 잠들었다.
루비아나는 그의 은발을 쓸어내리다, 몇 가닥을 손가락에 감아 입 맞추며 속삭였다.
“자고 일어나면, 원하는 대로 다 되어 있을 겁니다, 루이.”
***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는 법.
루이먼드는 한숨 푹 자고 일어나 새로운 아침, 새로운 태양을 맞이하며 다시금 의욕에 불타올랐다.
“환희의 화가는 놓쳤지만, 침묵의 조각가는 절대로 놓치지 않겠어!”
학자의 집 만년 낙제생다운 긍정적인 자세였다. 어제의 빵점 때문에 오늘을 슬퍼하지 말라. 오늘은 오늘의 빵점이 또 날 기다리고 있으리니. 아니, 혹시 모르지. 오늘은 빵점이 아닐지도?
“환희의 화가? 침묵의 조각가?”
루비아나는 힘찬 루이먼드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그 기울어진 고개는, 루이먼드의 호위를 자처하며 따라가 폴 네리오를 본 순간 더욱 기울어졌다.
“침묵의 조각가? 이게?”
“그, 그러게요. 이상하다? 이게 아닌데…….”
“뭐, 침묵? 침묵이라니. 아이고, 귀족 나으리께서 침묵하랍시면 영원히 침묵하겠습니다. 말씀만 하십쇼! 아, 물론 후원금도 듬뿍 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딸랑딸랑. 사내의 경박스러운 말과 행동에서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뭐든 말만 하세요, 후원만 받을 수 있다면 저는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과묵하고 무겁고 진중한, 침묵의 조각가……가 될 예정인, 청년 화가 폴 네리오가 두 사람 앞에서 딸랑이를 흔들어 댔다.
정말 실물 딸랑이를 흔들어 댔다는 것은 아니고, 딸랑이는 소리가 환청으로 들릴 만큼 열과 성을 다해 아부를 일삼았다는 의미로.
‘아니, 내 침묵의 조각가가 이럴 리 없어!’
루이먼드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폴 네리오는 굴러떨어지듯 의자에서 내려와 루이먼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니, 이러지 마……”
“사, 살려 주십쇼. 저에겐 토끼 같은 마누라와 여우 같은 자식들이 있습니다. 벌써 사흘째 빵도 못 먹고 굶어 죽어 가게……”
“미혼인 것 같은데.”
루비아나가 사람 한 명 살기도 버거워 보이는 좁은 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가족들은 지금 시골에서 제가 성공해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있지요. 이렇게 떨어져 산 게 벌써 몇 년째인지.”
어흐흑. 폴 네리오가 팔에 얼굴을 파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얼마나 구슬프게 우는지, 루이먼드마저도 울컥했다.
“그런 것치곤 발음이 아주 정확하군. 쭉 수도에서 나고 자란 사람처럼, 아주 세련된 말씨야.”
루비아나가 지적하기 전까지는.
“그, 그건 제가 언어의 마술사이기 때문에……”
“도박을 좋아하고, 세금도 제때 안 내고 있고.”
루비아나가 벽에 박힌 못을 가리키며 말했다. 빚 독촉장, 세금 독촉장이 수두룩하게 꿰여 있었다.
“아…….”
촉촉해졌던 루이먼드의 눈가가 다시 건조해졌다.
“젠장.”
폴 네리오는 눈물 한 방울 묻지 않은 얼굴을 들고 입을 삐쭉였다.
루비아나는 문에 기대서서 팔짱을 끼고 루이먼드에게 물었다.
“루이, 후원하고 싶다던 예술가가 연극하는 배우였습니까?”
“아니요.”
루이먼드는 힘없이 고개를 젓고는, 배신감에 젖은 눈으로 폴 네리오를 바라보았다.
“조각가입니다. 조각가.”
깨갱. 폴 네리오는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가련하기 그지없었으나, 루이먼드는 더 이상 속지 않았다.
그마저도 자신의 후원을 받기 위해, 최대한 불쌍하게 보여 동정심을 유도하려는 속셈일 게 뻔해 보였으니까.
루이먼드는 지난 생에서 그를 내심 존경했다. 그가 만들었다는 조각상을 먼발치에서 보고 감명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조각상을 만든 사람은 정말 대단한 사람일 거야.’
도박빚 때문에 혀를 잘려 말을 못 하게 되었다더라, 하는 소문 따위 믿지 않았다.
분명 사랑하는 여자가 고위 귀족이라, 그녀와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다 그녀의 아버지에게 걸려 혀를 잘리고 내쫓긴 것이리라. 그러고도 그녀를 잊지 못해 항상 그녀를 떠올리며 조각을 하는 것이리라.
그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좋아했던 조각가가, 있었는데 없어져 버렸다.
현재의 모습이 실망스럽다고 해도, 폴 네리오는 폴 네리오였다. 방 한가운데 놓여 있는 대리석은 화관을 쓴 아름다운 여인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차마 저 재능을 외면하고 돌아설 수 없었다.
‘미완성품도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후우, 루이먼드는 한숨을 내쉬며 폴 네리오에게 말했다.
“당신을 후원하겠습니다. 받아들이시……”
“평생, 평생 존경하고 따르겠습니다아앗!”
폴 네리오가 루이먼드의 다리에 매달려 깜찍하게 외쳤다.
루이먼드는 차마 좋아하던 예술가의 하찮은 모습을 더는 지켜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루비아나는 한달음에 달려와 폴 네리오의 뒷목을 잡아채 들어 올렸다.
“어어, 어어어.”
허공에서 버둥대는 폴 네리오를 보며,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에게 눈빛으로 말했다.
‘정말 이걸, 후원?’
루이먼드는 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후원.
‘곧 제국을 들었다 내려놓을 위대한 작품을 만들 테니까. 그럴 테니까. 그때까지만이라도 빚 때문에 혀가 잘리지는 않도록 도와주자.’
루이먼드는 은화 주머니를 받아 든 폴 네리오의 눈이 번들거리는 걸 보며,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이면서도 그의 후원자가 되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뒤.
두 예술가는 정말로 뒤집어 놓으셨다. 제국의 예술계 말고, 루이먼드의 복장을.
루이먼드는 두 예술가에게서 온 편지를 받아 들고 절규했다.
“왜 이렇게 되는 건데에에에에!”
편지 두 장이 팔랑, 날아올라 바닥으로 떨어졌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이거야말로 내 길이다 싶은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작 부군님께도, 또, 음, 공작님께도요. 어쩌면 두 분, 특히나 공작님을 제가 오해했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런 말을 쓰려고 편지를 쓰고 있는 게 아닌데……. 저기, 공작 부군님, 죄송하지만 저는 올해 제국 미술 대전에 못 나갈 것 같습니다. 아마 내년에도 그럴 것 같아요. 아이들 미술 교과서를 만들어야 해서요.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한 명은 아예 학교 선생님으로 전직을 해 버렸고, 다른 하나는…….
존경하옵고 존경하옵는 공작 부군님, 당신의 사랑과 후원을 받는 폴 네리오가 무거운 마음을 안고 펜을 듭니다.
제가 정말 본의 아니게, 어쩔 수 없이, 어쩌다 보니까 그만……, 나쁜 친구들의 꾐에 빠져 주신 돈을 홀랑 까먹어 버렸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래서 대리석 살 돈마저 없는 상황입니다. 하필 지금, 정말로 멋진 영감이 떠올랐는데! 그래서 이걸 딱! 조각해서 후원자님께 바치고 싶어 미치겠는데…… 어쩌면 좋을까요?
제가 나름 방법을 고민해 봤는데 말입니다. 역시 제게는 공작 부군님! 사랑하고 존경하는 후원자님밖에 믿을 사람이 없지 않겠습니까? 혹시 저의 재능을 높이 사 한 번만 더 대리석 살 돈을 좀 보내 주실 수 있으신지……? 물론, 가능하겠지요? 그것이 후원이니까.
저, 믿고 있겠습니다. 사랑과 존경을 담아, 공작 부군님만을 위한 조각가 폴 네리오 올림.
돈 먹는 하마가 되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돈을 도박장에 가져다 바치는 하마.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고는 끄덕, 고갯짓하는 능글맞은 얼굴이 떠오르는 건 어째서일까?
참고로 폴 네리오가 돈이 없다고 징징대는 편지를 보내온 건 이번 달에만 벌써 일곱 번째였다.
그간 보내 준 돈이면 황궁의 가장 큰 회랑을 최고급 조각상으로 바르고도 남았을 텐데. 폴 네리오는 여지껏 단 하나의 조각도 완성하지 못했다.
‘손에 돈이 들어오는 족족 도박장에 달려가니, 시간이든 돈이든 남아날 리가 없지.’
침묵의 조각가를 향한 존경심은 산산이 조각나고 불타 재마저 남지 않은 지 오래였다.
매번, 더는 실망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도, 폴 네리오는 어떻게 해서든 다시 실망시키고 또 실망시켰다.
정말 바닥이 없는 남자였다.
그가 가진 진정한 재능은 배우 뺨치는 연기력이나 대리석을 진흙처럼 자유자재로 다루는 손재주가 아니었다. 바로 이 염치없는 성격. 썩어 빠진 근성이었다.
루이먼드는 바닥에 떨어진 편지를 줍다 말고, 와그작, 구겨 버렸다.
오르카는 그렇다 치더라도, 폴 네리오 이놈은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레이움 백작 말고 나를 이만큼 화나게 만들 수 있는 인간이 세상에 또 있었다니.’
참 오래 살고 볼 일, 아니, 여러 번 살고 볼 일이었다.
“다 부숴 버리겠어!”
대리석 조각상 말고. 폴 네리어의 썩어 빠진 정신머리를!
루이먼드는 하인을 불러 마차를 준비시키고는 저택을 뛰쳐나갔다.
물론, 루비아나에게 쪽지를 남기는 건 잊지 않았다. 루비아나는 한창 손님과 대화 중이었기에 찾아가진 않았다.
잠깐 후원하는 예술가들에게 다녀오겠습니다. 별일 아니니 금방 돌아올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