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131)

***

루이먼드가 막대한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괴로움, 폴 네리오를 향한 분노로 몸부림치고 있을 때. 루비아나는 큰 곤경에 빠져 있었다.

“아쉴레앙 공자아아아악!”

존칭마저 생략한 우렁찬 고함이 서재를 뒤흔들었다. 이 목소리의 주인은 내무국장이었다.

한번 행정관으로 출근하면 언제 퇴근하는지 아무도 보지 못한다는 행정관의 붙박이. 살아 있는 건지 살아 있는 척하는 건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힘없이 흐물거리는, 행정관의 해파리.

그녀가 정시에 퇴근하는 건 제국 멸망의 날에나 가능할지 모른다는 말까지 나도는, 그 내무국장이 무려 오후 반차까지 써 가며 아쉴레앙 공작저에 행차한 것이었다.

그녀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두려운 것이 없었다.

눈앞에 서서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안녕?” 하고 손을 흔드는 저 붉은 머리 인간?

저게 황제의 하나뿐인 혈육이요, 제국의 세 기둥 중 하나인 아쉴레앙 공작이자, 괴물 공작이라 불리는 북부의 지배자라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저 붉은 머리 인간이 기어이 일을 벌였다는 것이었다.

폴짝의 광장에 예술 학교를 세우자고? 예술가들의 거리에 사는 아이들에게 삼시 세끼 무상 제공? 예술가들을 선생으로 고용해 굶어 죽는 걸 방지해?

어느 것 하나 주옥같지 않은 게 없었다.

예산은 아쉴레앙 공작가의 기부금으로 충당한다고 하지만, 결국 일하는 건 황실 관리들이었다. 이미 동부 치수 사업으로 죽어 가고 있는 그 불쌍하고 가련한 황실 관리들.

그렇게 하고 싶으면 아쉴레앙 공작가에서 개인적으로 하면 될 것을.

이 충성스러운 척하는 붉은 머리 인간은, 이런 일을 개인이 시작하면 안 된다고 나불거리며 기어이 이 일을 국가사업으로 돌렸다.

국가. 공립.

일단 이 단어가 들어간다는 건 행정 관리 서른 명쯤을 갈갈 갈아 넣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황제가 속히 시행하라고 도장을 콱 찍어 주신 바람에, 얼결에 떠맡아 단기간에 뚝딱뚝딱 학교 건물을 짓고 학교를 열긴 했는데.

원래 나랏일이라는 게 그렇게 끝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당연히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학교 운영을 관리, 감독하고 결과를 확인하고, 이 사업을 언제 어떻게 다른 지역에 이식할 수 있는지까지.

황실 관리 서른 명은 계속 갈갈 갈려야 했다. 그냥 서른 명으로 끝나면 다행이지.

공립 학교 사업은 황제가 오래전부터 관심 가지고 있었던 일이기에, 반드시 전국적으로 시행할 게 분명했다.

어쩌면 동부 치수 사업 다음에,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면 동부 치수 사업과 함께 진행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 물꼬를, 이 붉은 머리 인간이 텄다. 그러니 이 붉은 머리 인간은 내무국장의 원수였다.

내무국장은 크아앙 울부짖었다.

“그래, 학교 좋지. 좋은 걸 누가 모릅니까? 난 제국이 건립되자마자 행정관으로 끌려와 강제로 내무국장이 되었을 때부터 온 제국에 학교를 세우고 싶었어! 그런데 여태 못 세우고 있지. 왜 그랬을 것 같습니까? 어?”

“음, 다른 일이 너무 많아서?”

“정답을 아는 사람이 일을 저질러? 누구 보고 일하라고! 어?”

내무국장이 와락 달려들어 루비아나의 목을 짤짤 흔들었다. 지은 죄가 너무 컸기에, 루비아나는 피하지 않았다.

“어어어, 내무국장이 공작을 암살하려 한다아아아-.”

나름 겁먹은 척 엄살도 부리고, 흔드는 대로 얌전히 흔들려도 주었건만. 내무국장은 오히려 더 화를 냈다.

“이럴 거면 그냥, 어디 가서 학자의 집 하나 더 부숴 와! 못해도 300명은 더 데리고 오란 말이야아아아아아아!”

“그건 불가느으으응한 데에에-.”

학자의 집은 이 대륙에 하나뿐이었으니까. 이제는 부서져 없어졌고.

“없는 걸 만들어서라도 일할 사람을 데리고 오란 말입니다아아아! 그럴 수 없으면, 일거리를 만들지 말았어야지이이이이!”

내무국장의 고함이 저택을 넘어 온 저택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뭐지? 공작님께서 북부에서 마수를 데려 오신 건가?”

“지진?”

“루이먼드 님도 없는 이때에? 루, 루이먼드 님은 어디 가신 거야!”

하인, 하녀들은 저택이 흔들리는 진동을 느끼며 두려움에 떨었다.

이 진동의 원인이 내무국장이라는 걸 알게 된 하인, 하녀들은 비틀비틀, 저택을 걸어 나가는 내무국장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렇게 힘없는 분이?”

“저런 분을 그만큼 화나게 만든 우리 공작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신 것 같아.”

“역시 루이먼드 님이 없으면 안 돼, 우리 공작님은.”

루이먼드를 향한 충성심이 하늘을 찌를 듯한 아쉴레앙 공작저의 하인과 하녀들 누구도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았건만, 어찌 된 영문인지 소문은 날개가 돋친 듯 퍼져 나갔다.

“아니 그때 같이 싸웠던 시모어 가문, 거기 시모어 부인하고 아쉴레앙 공작이 대판 싸웠대.”

“내무국장씩이나 되는 고급 관리가 공작저까지 쫓아가 마구마구 화냈다고? 대체 왜?”

“그 이유가 뭐가 중요해? 아무튼, 두 가문의 관계가 쫑 났다는 게 중요한 거지.”

“황제 폐하께서 내무국장을 좀 아끼시나? 이번에 크게 화를 내셨다는군. 물론, 아쉴레앙 공작에게.”

“이번에도 또? 어째 아쉴레앙 공작은 요즘 계속 폐하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만 벌이시네, 그려.”

“그러게 말이야. 그러고 보니 그러네.”

귀족들은 일이 요상하게 돌아간다며 수군댔다.

***

아쉴레앙 공작저에서 새로운 소문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을 때. 루이먼드는 폴 네리오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고 있었다.

“이 인간아, 언제 조각할 건데! 조각가잖아! 재능이 있고, 아낌없는 후원자가 돈도 펑펑 대 주는데! 뭐가 아쉬워서 도박이나 하러 다니는 거야!”

루이먼드가 크아앙 울부짖었다.

짜증 나는 건, 폴 네리오가 지점토를 쪼물닥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대리석 살 돈이 없어, 지점토나 뭉쳐 모처럼 찾아온 영감을 표현해 내고 있었다나 뭐라나? 진짜인지 이마저도 연기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궁상맞음이 루이먼드를 더 열 받게 했다.

‘성공할 미래가 준비되어 있어. 집 안에 황금이 흐르는 분수대가 있을 예정이란 말이야. 그때까지 내가 후원해 주겠다고. 혀가 잘리지 않게 해 주겠다고! 그런데,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답답할 따름이었다.

“아니, 당신이 돈이 없어 후원자가 없어? 후원자인 내가 빵빵하게 밀어 준다는데 왜 이러고 있는 건데!”

“흑, 흐윽. 저, 저도 제가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습니다요. 분에 넘치는 은혜를 입어서, 몸과 마음이 너무 편해져서 그런지…….”

폴 네리오는 그래도 정신 못 차리고 이런 말이나 꿍얼댔다.

더 고생해 보고, 빚 때문에 혀가 잘려 봐야 정신을 차릴 텐데. 루이먼드가 자신을 너무 일찍 알아봐 후원해 줘서, 자신이 이렇게 나태해지고 찌질해졌다는 것이었다.

‘뭐 임마?’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왔다. 하하?

문득, 폴 네리오의 후원자가 되겠다고 하자 에릭 시모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 음. 굳이?

착한 에릭 시모어. 차마 대놓고 ‘도망쳐! 걘 아니야!’라고 말하진 못하고 은근히 신호를 보냈던 거였는데.

그걸 그때는 몰랐다. 이제 와 깨닫고 복장이 터질 뿐이었다.

알고 보니, 폴 네리오가 한동안 에릭의 살롱에 나오지 않았던 이유도 오르카의 패기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찌질했다.

‘오딜 후작 영애와 귀족들이 몰려왔을 때 뒤로 몰래 그들에게 접근해 후원해 달라고 구걸하다가 크게 망신을 당했다고 했지. 그걸 에릭과 다른 예술가들에게 들켜서, 쪽팔려서 살롱에 다시 가지 못한 거였고.’

그때 가장 격렬하게 폴 네리오를 비난하고 경멸했던 사람이 바로 오르카였다고 했다.

에릭 시모어는 그런 사람인데도 괜찮겠냐고 조심조심 물어보았다. 역시나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신호를 보낸 거였다.

그가 그렇게까지 말했는데도, 그저 침묵의 조각가를 손에 넣었다는 사실에 눈이 멀어 덥석 후원자를 자처한 건 루이먼드 본인이었다.

그 어리석음의 대가가 이것이었다.

‘내가 본 소설 속 주인공들은 안 이랬는데, 난 왜 이런 거지?’

아직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는 위대한 예술가들을 찾아내 후원해 주면, 다들 알아서 쑥쑥 자라 성공하고 그 모든 영광을 주인공들에게 돌리던데. 루이먼드의 예술가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루이먼드는 그게 너무 속상했다. 아무리 세상 일이 책 속 내용과 같을 수 없다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냐?’

루이먼드는 더더욱 격렬하게, 폴 네리오의 멱살을 흔들었다.

그나마 오르카가 있어 다행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오르카와 비교하면 발끝의 때만도 못한 폴 네리오에게 화가 났다.

루이먼드는 그에게 들르기 전, 오르카에게 다녀왔다. 제국 미술 대전에 작품을 출품하라고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폴짝의 광장에 들어선 오르카 미술 학교. 돈의 힘으로 순식간에 지은 새 건물은 루이먼드가 방문했을 때 한창 수업 중이었다.

오르카는 아이들을 광장으로 데리고 나와 나무 그늘에 앉히고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그리고 틈틈이 자신도 그림을 그렸다.

새 옷을 입고 배부르게 빵을 먹은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그림을 그리고, 지점토를 조물거렸다.

광장의 예술가들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흐뭇하게 웃었다. 온통 말 그림, 말 조형물로 가득했던 폴짝의 광장에 아이들이 그린 그림과 뭘 만든 건지 알 수 없는 작품들이 전시됐다.

오르카가 긴 빨랫줄을 커다란 말 조형 두 개 사이에 걸어 그림들을 매달았다. 아이들의 그림 사이사이, 오르카의 그림이 내걸렸다.

값싼 파란색 물감으로 칠한 바다. 웃는 아이들의 얼굴. 에릭의 살롱에서 추천을 받아 학교 선생님이 된 예술가들의 얼굴. 밥 먹는 아이들, 커다란 말 조형물에 찰싹 붙어 웃고 떠드는 아이들.

오르카의 그림은 그녀의 일상을 따뜻한 빛깔로 담아내고 있었다. 하나같이 환희의 화가라 불리게 될 오르카답지 않은 그림이었다. 환희의 화가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그림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환희의 화가는 뻑뻑한 물감을 덧바르고 덧발라 캔버스 위에 색을 쌓아 올리면서도 기어이 투명하고 영롱한 빛을 완성하곤 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신의 빛에 감싸인 듯한 환희를 느끼게 하는 그림을 그렸고, 황제마저 만족시켰다.

하지만 지금 폴짝의 광장에 나부끼는 그림들은 투명하지도 영롱하지도 않았다.

황제의 회랑에 걸기보다는 관리들의 보고서에 첨부할 만한 그림들이었다. 요즘 백성은 이렇게 산다고 설명할 때 쓸 만한 자료.

이래서야 올해 제국 미술 대전에 작품을 낸다 해도 입상은커녕 예선 통과도 어려워 보였다. 기법이나 화법, 기교를 따지자면 그랬다.

그런데 루이먼드는 오르카의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걸작도 대작도 아닌데, 그저 소박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가볍게 담은 그림일 뿐인데.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따뜻해졌다.

위대한 예술가의 재능이 학교 선생이라는 고된 겸업 때문에 꺾인 걸지도 모른다고 불안했던 마음.

반드시 오르카를 환희의 화가로 키워 내고 말리라던 조급했던 마음.

그 마음이 사르륵 녹아내렸다.

‘그래, 뭐. 본인이 좋다는데. 그림을 아주 안 그리는 것도 아니고, 이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느긋해졌다. 오르카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니, 그냥 모든 게 이해됐다.

이미 그림을 보고 있는데 더더욱 그림을 보고 싶어졌다. 도무지 그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루이먼드는 빨랫줄에 걸린 그림들을 실컷 구경하고 난 뒤, 커다란 말 조형물에 몸을 숨기고 저쪽의 나무 그늘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나비를 그릴 거예요. 선생님도 그릴 거고, 여러분도 그리고. 누가 이 종이 안에 제일 큰 나비를 그릴 수 있는지, 해 볼까요?”

아이들에게 종이와 연필, 물감을 나눠 주며 활짝 웃는 오르카가 보였다. 그녀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오르카 주변에 둘러앉아 하얀 종이 위에 엄청 큰 나비를 그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끊어지지 않았다.

루이먼드는 오르카가 자신을 발견하기 전 얼른 광장을 떠났다. 입가엔 어느새 흐뭇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훗날, 40대에 접어든 오르카가 제국 최초, 최고의 민속 화가로 칭송받게 될 거라는 걸, 지금의 루이먼드는 알지 못했다.

그녀가 소박한 색채로 그린 그림이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제국민들의 일상에 스며들게 되리란 것도. 귀족, 평민을 막론하고 제국민이라면 누구든 그녀의 그림을 사랑하게 되리란 것도.

황제 칼레나가 그녀를 제국 최고의 보물이라 일컬으며, 새로운 드래곤이 나타나 보물을 요구한들 제국 절반을 내줄망정 그녀는 내주지 않을 거라고 즐겨 말하게 될 거라는 것도.

그녀의 그림이 그녀가 꿈꿨던 것처럼 제국 곳곳마다 걸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리라는 것도.

지금의 루이먼드는 알지 못했다.

‘후원하자마자 바로 환희의 화가가 될 거라고 기대한 것도 아니었잖아? 올해 좀 바빠서 미술 대전에 참가 안 한들, 뭐 어때? 내년도 있고 내후년도 있는데. 저렇게 그림을 잘 그리는데, 언젠가 반드시 환희의 화가가 될 거야.’

자신이 어느새 오르카의 그림에 폭 빠져 그녀에 대한 실망을 거두고 말랑말랑해졌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이렇게 생각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오르카의 웃음, 오르카의 그림을 보고 온 건 폴 네리오를 상대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당신만 후원하고 있는 줄 알아? 내가 후원하고 있는 다른 예술가는, 벌써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나가며 멋진 예술 작품을 매일매일 그리고 있다고!”

루이먼드는 오히려 절 원망하는 폴 네리오에게 이렇게 반박할 수 있었다.

똑같이 후원을 해 주었다. 후원 방식은 전적으로 본인들이 원하는 대로 해 줬다. 학교를 지어 달라기에 지어 줬고, 돈을 왕창 달라기에 왕창 줬다.

그리고 둘 다 루이먼드의 기대를 저버렸다. 하지만 오르카는 폴 네리오와 달랐다.

그녀는 루이먼드가 기대했던 방향은 아니지만, 자신 나름의 길을 찾아가며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행복해하고 있었다. 자신의 그림으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고 있었다.

지금 당장 환희의 화가가 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후원한 것을 후회하진 않았다. 오히려 기대됐다.

‘앞으로 어떤 그림을 그릴까? 끝내 환희의 화가가 될까? 아니면 지금처럼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리게 될까?’

어쩌면 환희의 화가, 그 이상의 무언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설렘. 혹은 굳이 환희의 화가가 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안도감.

어쩌면 그녀는 루이먼드가 지난 생에서 소문으로 들었던 것처럼 일찍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귀족에 대한 증오에 끌려다니지 않고, 저렇게 아이들과 즐겁게 그림을 그리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지도 모른다는 바람.

오르카는 후원금 이상의 것을 루이먼드에게 주었다.

그렇게 후원을 받아 그렇게 자신의 삶을 멋지게 만들어 나가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이 황금 같은 기회를 거머쥐고도 오히려 자신을 더 망가뜨리는 사람도 있었다. 폴 네리오, 이 망할 놈의 조각가.

‘그럼 후원을 끊을까? 계속 돈 없는 무명 화가로 살면서, 약간의 돈이 생기는 족족 도박하고 술 먹고, 그러다가 기어이 빚을 못 갚아서 혀를 잘린 뒤에야 정신 차리고 살래? 어?’

하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차마 이 말까진 할 수 없었다.

“저기, 방금 한 말은 제가 한 말이긴 한데 제가 한 게 아닙니다. 제가 아직 술이 덜 깨서,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면, 제가 진짜 도박도 끊고 술도 끊고, 정말 조각에만 집중해서 위대한 걸작을 만들어 보이고야 말겠습니다요.”

루이먼드가 침묵하자, 금세 눈치를 보며 후원금이 끊길까 안달하는 모습이라니.

‘왜 이렇게 다른 거지? 아니, 왜 이렇게 된 걸까? 내 후원 방식이 뭔가 잘못된 걸까?’

폴 네리오의 투정을 마음에 담아 둘 생각은 없지만, 그와 별개로 일말의 책임감은 들었다.

침묵의 조각가까지는 못 만들어도 사람답게라도 살 수 있도록 만들어 놓고 싶은데. 돈을 주고 작품 활동을 후원하는 것 말고 어떤 방법을 써야 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어휴. 루이먼드가 한숨을 내쉬자 폴 네리오는 사색이 되어 무릎부터 꿇었다. 비굴한 표정으로 루이먼드를 올려다보며 싹싹 빌기까지 했다.

“저, 절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후원자니이이이임!”

“……이번이 정말, 정말 마지막입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 위대한 걸작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걸작까지는 바라지 않으니까, 일단 뭐라도 하나 완성이라도 해 봐요. 지금의 당신에게 바라는 건, 그뿐입니다.”

“네엡!”

“대답은 어떻게 이렇게 잘하는지…….”

“헤헤, 대답이라도 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루이먼드는 이 대답만 잘하는 떠벌이 조각가를 데리고 직접, 대리석을 파는 가게를 찾아갔다. 그다음에는 식료품 가게에, 그다음에는 옷가게로 갔다.

그가 작품 활동에 쓸 대리석과 그동안 먹고 마실 음식, 갈아입을 새 옷. 루이먼드는 돈 대신 그것들을 폴 네리오에게 안겨 주었다.

“어…….”

설마 루이먼드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폴 네리오는 심히 당황했다.

“왜요, 뭐 문제 있습니까?”

“아, 아니요. 그저 감사,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평생 충성하겠습니다.”

“……말이나 못하면.”

루이먼드는 한숨읖 푹 내쉬고는 돌아섰다.

“감싸합니다! 충성충성! 영원히 충성하겠습니다!”

폴 네리오는 루이먼드의 뒤통수에 대고 꾸벅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루이먼드가 눈앞에서 사라지자마자 후다닥, 지나온 가게로 달려들었다.

“잠깐! 다들 동작 그만! 다 환불, 환불합니다아! 돈 내놔! 환불한 돈 내놓으라고!”

폴 네리오는 대리석과 음식과 새 옷을 모두 환불했다. 그러고는 묵직한 돈 주머니를 들고서는 도박장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두고 보자, 내가 어? 이번에 크게 한번 따면, 후원자? 흥, 개나 주라지. 그동안 유세 떨면서 준 돈을 전부 다 갚아 버리고 나만의 자유를 찾아 떠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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