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단한 하루를 보낸 부부가 침실에서 재회했다. 둘 다 유독 피곤해 보였다.
“…….”
“…….”
둘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껴안았다.
“루이.”
“하아, 비아.”
“오늘은 진짜 힘든 하루였습니다…….”
“저도요, 비아.”
두 사람은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침대 위로 다이빙했다. 풀썩.
푹신한 침대 위로 폭 파묻힌 두 사람은 애초부터 한 몸이었다는 양 서로를 놓지 않고 온기를 나누었다.
그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루이먼드는 루비아나의 머리에 턱을 대고, 눈을 감았다. 루비아나는 그의 품에 안겨, 쿵쿵 그의 심장 뛰는 소리를 들었다.
‘이래서 다들 결혼을 하는구나. 이렇게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나서.’
비로소 ‘살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가히 인간 포션이라 할 만했다. 자신의 남편만 이렇게 효과가 좋은 건지, 다른 집 남편들도 그런 건지는 모를 일이지만.
아무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서로를 꼭 안고만 있던 두 사람은 슬슬 밀려오는 잠기운에 몸을 내맡겼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잠들었고, 누구도 상대방을 안은 손을 풀지 않았다.
***
며칠 안 가 루이먼드는 폴 네리오의 아홉 번째 편지를 받았다.
도박장에서 너무 큰 빚을 져서, 거기에 붙잡혀 있다는 것이었다.
공작 부군님, 공작 부군님, 저 좀 살려 주세요. 딱 한 번만, 한 번만 더 살려 주시면 정말 앞으로는, 절대 도박 안 하고 조각만 하고 살겠습니다.
“으아아악! 폴 네리오오오오!”
억울하고 화나고 짜증 나서, 눈물이 다 나왔다.
“하아, 소리 지르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지네.”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히자마자, 서재 문이 벌컥 열렸다.
“무슨 일입니까!”
루비아나가 뛰어들어 왔다. 손에 장검을 쥐고 있었다. 그녀는 서재에 루이먼드 혼자이고, 그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고야 안도하며 루이먼드에게 다가왔다.
“깜짝 놀랐잖…… 뭡니까.”
“비아?”
“루이, 울었습니까?”
“아, 이건……”
“무슨 일입니까.”
루이먼드의 눈가가 촉촉해진 걸 본 루비아나의 눈이 서늘해졌다.
소리 한 번 질렀다고, 무슨 일 있냐고 달려와 주는 내 편이 있다니.
“비아!”
루이먼드는 순간 감정이 왈칵, 격해져서 루비아나를 와락 껴안았다. 루비아나의 눈빛이 얼마나 차가운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 어? 어? 잠깐, 잠깐만. 루이?”
루비아나는 그렇게 시야를 차단당했다.
곤란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눈은 보여야 하는데.
‘그러고 보면 내가 펠트하르그 공작한테 참 중요한 걸 뺏어 갔군.’
루비아나는 새삼 카드릭에게 미안해하며 루이먼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깨를 밀치고 시야를 확보하려고 한 것이었는데.
“비아.”
울먹울먹한 목소리를 들으니,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루비아나는 마음을 바꿔 그냥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아직까지 멀쩡한 걸 보면 암살자에게 공격을 받았다든가, 그런 건 아닌 것 같으니까.’
검을 잡은 손이 느슨해졌다. 루비아나는 한숨 돌리고, 손을 내려 루이먼드의 등을 쓸어내렸다.
이렇게 직접 맞닿으면 새삼 루이먼드의 체격이 꽤 크다는 걸 실감했다.
‘학자의 집 말고 북부로 왔으면, 좋은 기사가 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좋은 기사감을 놓쳤다는 아쉬움이 들 정도였다.
손을 아무리 뻗어도, 루이먼드의 넓은 어깨와 등을 반도 가리지 못했다. 맞닿은 가슴과 배가 은근히 탄탄했다. 견갑골이 넓고, 그 아래로 이어지는 등엔 잔근육이 쫀쫀하게 엮여 있었다. 역삼각형 모양으로 쏙 들어간 허리까지. 아주 그냥…….
“……비, 비아?”
머리 위에서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루비아나는 아차 싶어, 얼른 손을 원래 자리에 가져다 놨다.
“미안합니다, 많이 놀랐죠?”
“아니, 아니요. 싫은 건 아닌데…….”
놀랐냐고 물었는데 싫지 않다고 대답하는 걸 보니, 아까 비명을 지르며 놀랐던 게 가라앉지 않은 듯했다.
‘이런, 나쁜 손 같으니라고.’
루비아나는 스스로를 탓하며, 뒤늦게나마 루이먼드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그게…….”
루이먼드는 잠시 머뭇거렸다. 막상 말하려니 고자질하는 것 같아 주저하게 됐다.
‘고작 이런 일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냐고 실망하지 않을까?’
겁도 났다.
루비아나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아는 것과 겁내는 건 다른 영역의 일이니까. 아는 건 머리, 겁내는 건 가슴.
하지만 고민은 잠시였다.
“루이.”
루비아나가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루이먼드는 잘 훈련된 강아지처럼 그 부름에 절대적으로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비아, 사실은요…….”
루이먼드는 방금 온 폴 네리오의 편지를 루비아나에게 보여 주며 그간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최대한 담담히, 객관적으로 말하려고 했는데 말하다 보니 감정이 섞여 들어갔다.
나중에 가서는 흥분해, 그간 자신이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까지 다 말하고야 말았다. 느긋하게 듣고 있던 루비아나의 눈이 날카로워지는 순간이었다.
“별일 아닐 수도 있는데…….”
루이먼드는 할 말 다 하고 나서 뒤늦게 부끄러워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했지만, 루비아나에겐 통하지 않았다.
“왜 이게 별일이 아닙니까?”
루비아나가 살짝 루이먼드의 가슴을 밀고 뒤로 물러섰다.
그래 봤자 루이먼드가 팔을 풀지 않아 여전히 그의 품 안이긴 했지만 고개를 들어 루이먼드의 얼굴을 볼 수는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이 수심에 젖어 그새 반쪽이 되어 있었다. 아무튼 루비아나가 보기에는 그랬다.
“그자를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루비아나가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 그래서 루이먼드는 전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고 속마음을 그대로 털어놓았다.
“하아, 생각 같아서는 정말 본인이 원하는 대로 실컷 고생 좀 시켜 보고 싶습니다.”
그 말이 곧 현실로 이루어질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확실히, 그런 사람에겐 그게 약이고 벌이지요. 호의가 계속되면 그걸 당연한 줄 알고, 오히려 더 바라면서 남 탓이나 하는 사람들한테는.”
“예, 맞습니다. 폴 네리오란 조각가가 딱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비아, 당신 꼭 그런 사람들을 많이 경험한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많이 봤다 뿐이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제정신 차리게 만들 수 있는지도 많이 경험해 보았지요.”
루비아나가 씩 웃으며 말했다. 분명 웃고 있는데, 전혀 웃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비아?”
루이먼드가 뒤늦게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챘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앞장서세요, 루이.”
“어, 어딜요?”
“그 조각가. 감히 당신의 후원을 이딴 식으로 되갚아, 당신을 비명 지르게 만든 그놈이 있는 곳으로.”
루비아나가 팔랑, 폴 네리오가 보낸 편지를 흔들었다.
“예?”
“당장요, 어서. 구하러 가야지요.”
“아아, 네.”
루이먼드는 일단 폴 네리오를 구하러 가야 한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정말로 폴 네리오를 구하러 가는 길일지 의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