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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아아아, 사, 살려 주세요. 저, 절, 절 어디로 팔아넘기시려는 겁니까? 제, 제국! 이 제국에서 인신매매! 노예는 금지! 절대 금지란 말입니다!”
돼지나 소를 옮길 때 쓰는 수레에 갇힌 폴 네리오가 울부짖었다.
“그런가? 제국에선 도박도 불법인데, 그건 몰랐나 보지?”
루비아나가 피 묻은 장갑을 벗으며 물었다.
“히이이이익.”
폴 네리오는 기겁하며 수레 반대편으로 엉금엉금 기어가 몸을 웅크렸다. 벌벌 떨며 루비아나의 시선을 외면하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루이먼드를 필사적으로 바라보았다.
“공작 부군님! 공작 부군님! 살려 주십쇼. 저, 저 폴 네리오입니다요. 공작 부군님께서 더없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랑하는. 그 단어에 루비아나의 눈썹이 삐죽 솟았다. 실수로라도 루비아나 쪽을 바라보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 폴 네리오는 알지 못했다.
“하하, 하하하.”
루이먼드는 웃으며, 폴 네리오를 외면했다. 그가 대리석과 음식과 옷 등을 환불해 받은 돈으로 또 도박장에 발을 들였다는 걸 알게 된 뒤였다. 더 이상 그를 향한 아무런 연민도, 안쓰러움도, 기대도 느낄 수 없었다.
“공작부군니이이이임!”
폴 네리오의 애절한 외침과 함께, 이 뒷골목 최고의 불법 도박장 건물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자욱한 먼지를 내뿜으며 무너지는 건물 앞에는 도박장을 운영하는 패거리들과 손님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인간을 열다섯 명씩 쌓아 올려도 맨 아래 인간이 깔려 죽지 않는다는 걸 어디선가 배워 온 루비아나의 솜씨였다.
“저쪽은 곧 수도 경비대가 출동하여 알아서 할 겁니다. 우린 이자만 해치우면 됩니다.”
루비아나가 수레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끄아아아악. 폴 네리오가 비명을 질렀다.
“차, 차라리 노예로 팔아 주세요. 서, 성실한 노예가 되겠습니다. 죽을 때까지 노예로 살면서 아쉴레앙 공작님과 공작 부군님이 절 팔아 치웠다는 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깨닫자, 수레 안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싹싹 빌며 엉엉 울었다. 그동안 루이먼드에게 한 번만 더 도와 달라고 빌 때보다 더 절박하고 진실해 보였다.
하지만 그건 루이먼드만의 생각인 듯했다. 루비아나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노예?”
루비아나가 픽 웃으며 수레의 한 귀퉁이를 움켜쥐었다.
“그런 쉬운 길로 보내 줄 순 없지.”
“히이이이익!”
노예보다 어려운 길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겁에 질린 폴 네리오는 곧바로 두 손으로 제 목을 감싸 쥐었다.
‘그 마음 알지, 알지.’
그 순간만큼은 루이먼드도 그를 동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세요. 다시는, 다시는 도박 따윈 하지 않고 집에 콱 틀어박혀서 열심히 조각만 하겠습니다. 죽을 때까지 조각만 해서 모든 작품을 공작 부군님께 바치겠습니다.”
“내 남편이 지금까지 여러 번 기회를 줬을 텐데. 그때 잘했어야지.”
“이, 이제부터라도!”
“늦었어.”
“아, 안 돼!”
“돼.”
루비아나가 수레를 발로 찼다.
“예예, 갑니다요. 가.”
마부가 루비아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는 말을 몰았다. 삐그덕, 수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옥에서 평생 고생하고 살아 봐라. 네가 발로 차 버린 기회가 얼마나 달콤했는지 후회하면서.”
“끄아아아아아악!”
“하하하!”
폴 네리오의 비명과 루비아나의 웃음. 덜커덩덜커덩 길을 떠나는 낡은 수레. 루이먼드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오들오들 떨었다.
와르르 무너진 도박장 건물 앞에서 기분 좋게 웃고 있는 루비아나의 모습은, 마치 진짜 광기란 이런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몸 좀 풀었더니 개운하군.”
루비아나는 더없이 상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무국장에게 시달리며 알게 모르게 받아 왔던 스트레스가 싹 풀리는 기분이었다.
“어, 어디로 보내는 건가요?”
루이먼드가 슬금슬금 다가와 물었다. 루비아나가 말한 지옥이 대체 어디란 말인가? 이 와중에도 그게 궁금했다.
‘내가 학자의 집 출신이긴 하구나.’
루이먼드는 새삼 자신의 출신을 마음속에 되새겼다.
“북부로 보내는 겁니다.”
“북부요?”
“내가 보내는 선물이라고 하면 알아서 잘 예뻐해 줄 겁니다.”
루비아나는 덜컹덜컹 멀어지는 수레를 보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
“아마도 오늘쯤이면 도착했을 겁니다.”
“네? 뭐가요?”
“그 도박에 미친 조각가 말입니다.”
“아, 폴 네리오!”
“네, 그자. 오늘쯤이면 북부에 도착했을 겁니다.”
어느날 아침, 식사 도중 루비아나가 툭 말을 건넸다. 루이먼드는 그제서야 폴 네리오를 떠올렸다.
아쉴레앙 공작이 이유 없이 수도 뒷골목에서 제일 크게 운영하고 있던 불법 도박장을 때려잡아 수도가 한바탕 떠들썩해진 뒤로, 아쉴레앙 공작 부부에겐 별다른 일이 없었다. 그야말로 평화로운 한때였다.
함께 식사했고, 각자의 일에 몰두했다. 해가 지면 침대로 뛰어들어 알콩달콩 지냈다.
때론 해가 지지 않아도, 침실이 아니어도, 알콩달콩해졌다.
그동안 루이먼드는 폴 네리오를 깜빡 잊고 있었다. 루비아나가 말해 주고 나서야 ‘아, 그런 사람이 있었지. 내가 후원을 실패한…….’하고 떠올렸다.
제국의 역사에서 침묵의 조각가라 불리게 될 위대한 조각가 한 명을 지워 버렸다는 죄책감을 느끼기 무섭게, 폴 네리오가 다시 루이먼드의 인생에 끼어들었다.
북부에서 이삼일에 한 번씩 편지가 날아왔다. 당연히 루비아나에게 온 거라고 생각했던 건 제일 처음 딱 한 번뿐이었다. 루이먼드는 편지 봉투에 휘갈겨 쓴 제 이름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편지를 뜯어보았다.
살려 주세요. 절 아끼셨잖아요. 제발, 제발요!
그건 폴 네리오의 편지였다.
그는 무슨 수를 어떻게 쓴 건지 이삼일에 한 번씩 편지를 보내왔다.
제발 살려 달라고, 한 번만 봐 달라고, 여기서 나갈 수만 있게 해 달라고, 성안에 와이번이 있어 자길 보기만 하면 잡아먹으려 든다고, 애원해 왔다.
내가 여기서 죽으면 당신이라고 무사할 줄 알아? 천만에! 내가 저 와이번한테 먹혀 죽게 되면, 내가 죽기 직전에 내 피로 땅바닥에 당신 이름을 적을 거야. 당신이 범인임을 황제 폐하께서 반드시 알게 할 거라고!
정말 정신이 나갔는지 협박도 일삼았다. 물론 협박 편지 다음번에 도착한 편지는 늘 눈물에 젖어 있었다.
제가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공작 부군님. 혹시 제가 전에 보낸 편지를 읽어 보신 건 아니시죠? 위대한 공작 부군님께서는 바쁜 분이시니까, 아마 깜빡하고 안 읽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전에 보낸 편지는 그냥 불쏘시개로 삼아 주세요. 이것만, 이것만 읽어 주시면 됩니다. 사랑합니다, 공작 부군님. 살려 주세요. 제발 저 좀 다시 수도로 갈 수 있게 해 주세요. 당신의 개가 되겠습니다. 발바닥을 핥으래도 기쁘게, 매일 아침저녁으로 핥아 드리겠습니다.
“윽, 더럽게.”
루이먼드는 그의 편지를 읽으며 진저리 쳤다.
눈물에 젖은 편지를 볼 때마다, 루이먼드는 북부가 어떤 곳인지 점점 더 궁금해졌다.
“도대체 폴 네리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요?”
“아, 아직 살아 있습니까?”
“예?”
“아, 아닙니다. 그냥, 잘 살아 있구나 감탄했습니다.”
“네?”
루비아나에게 폴 네리오의 편지를 보여 주면, 그녀는 늘 놀랐다.
루비아나는 폴 네리오의 편지를 그저, 그의 생존 확인용으로만 생각하는 듯했다.
“북부는 아주 춥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살 만한 곳입니다. 그 조각가, 엄살이 아주 심하군요.”
그때 지옥 어쩌고 말하긴 했지만, 북부 도착할 때까지 겁먹으라고 한 농담이었을 뿐인데. 루비아나는 이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세상 사람들은 비아를 보고 괴물 공작이라고들 말했지. 하지만 비아는 괴물 공작 같은 게 아니었어. 그러니까 북부도 소문처럼 그렇게 무시무시한 곳은 아닐지 몰라.’
루이먼드는 루비아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며 북부에 대한 편견을 버리려고 애썼다.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얼마 안 있어 루이먼드의 편견을 더욱 강화할 만한 일이 생겼다.
북부에서 수레가 돌아왔다. 폴 네리오를 실어 보냈던 그 수레가.
수레는 비어 있지 않았다. 2m는 훌쩍 넘을 만한 큰 무언가를 싣고 있었다.
루비아나와 루이먼드는 식사 도중에 소식을 듣고 밖으로 나와, 수레를 덮고 있는 천을 걷어 보았다.
천에 싸여 있던 건!
“조각, 이네요. 조각상.”
루이먼드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조각이군요.”
루비아나가 루이먼드를 등 뒤에 두고 수레로 다가갔다. 혹시나 싶어서였다. 조각상에 독이 묻어 있거나, 그 안에 숨어 있던 마수가 튀어나온다거나 할까 봐.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루비아나는 안전을 확인한 후 수레에 실린 조각상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대단하군요, 화강암으로 이렇게까지 조각을 할 수 있다니.”
조각상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북부에 대리석 같은 게 굴러다닐 리 없다. 있어 봤자 장벽을 쌓고 남은 화강암이나 나뒹굴고 있겠지. 그래서 화강암으로 조각한 것 같았다.
“보통 화강암으로는 조각을 잘 안 하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그렇죠. 너무 단단해서, 작품이 투박하고 단순해질 수밖에 없다고 하던데요.”
루이먼드는 에릭의 살롱에서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주워들었던 지식을 떠올렸다.
눈앞의 조각상은 그 지식을 산산이 조각내기에 충분했다. 조각상은 대리석, 아니 진흙을 이겨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만큼 완성도가 높았으니까.
헐벗은 남자가 누워 있고, 거대한 와이번이 남자를 집어삼키려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남자는 두 손과 발로 와이번을 밀어내고는 있으나 당장이라도 잡아먹힐 듯 위태로워 보였다.
웅장하고 역동적인 조각상이었다.
따라 나온 하녀, 하인들도 입을 쩍 벌리고 구경하기 바빴다.
“……아무래도 그 사람이겠지요? 폴 네리오 말입니다, 비아.”
“제가 아는 한, 북부에서 이런 손재주를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만.”
두 사람은 와이번에게 잡아먹힐락 말락 한 조각상 사내의 얼굴을 보았다.
고통과 절망으로 일그러진 조각상 사내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매일 보고 사는 그 얼굴 같달까?
“……아무래도 저, 같지요?”
“음.”
루비아나는 말을 아꼈다. 뒤에 서 있던 하녀, 하인들이 대신 대답했다.
“루이먼드 님과 똑같아요!”
“루이먼드 님이 모델이신 건가요?”
사람 보는 눈은 다 똑같나 보다.
루비아나는 와이번의 발톱에 감겨 있는 쪽지를 발견하곤 풀어 내용을 확인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이가 된다.
평소 대장님 지론에 따라, 왕눈이한테 특식으로 주려고 했는데, 자기도 할 줄 아는 게 있다고 골방에 틀어박혀서는 죄 이런 것만 만들어 내고 있수다.
장벽 보수용으로 모아 놓은 돌을 죄다 이렇게 쪼아 놓는데 어쩌죠? 일단 아무거나 하나 보내 봐요.
얜 이제 어쩔까요? 왕눈이 먹이로 줘도 됨?
루비아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루이먼드를 돌아보았다.
“죽일까요?”
“예?”
“아, 음, 당신이 원한다면 이 조각가가 조만간 북부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마음 여린 남편이 충격 받을까 봐 나름 순화해서 말했건만.
“……네?”
어째서인지 루이먼드는 더 충격을 받은 듯했다.
“아, 안 됩니다. 안 돼요!”
루이먼드는 서둘러 정신을 차리곤 루비아나를 말렸다.
‘왜지? 왜 죽이면 안 된다는 거지?’
답은 정해져 있었는데. 남편은 그냥 네, 라고만 말하면 됐는데.
“감히 당신을 희롱했습니다.”
루비아나가 다시 조각상을 훑어보았다. 정확하게는 누워 있는 남자의 형상을.
상체는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아서 팔의 뒤틀린 근육과 복근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체는 와이번의 발톱에 갈가리 찢긴 바지를 입고 있어, 중요 부위만 겨우 가리고 있었다. 의외로 두꺼운 허벅지와 움푹 파인 아킬레스건까지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폴 네리오가 감히 루이먼드의 맨몸을 훔쳐봤을 리는 없고, 자기가 생각하기에 가장 이상적이고 완벽한 남자의 몸을 조각한 게 분명했다.
문제는 그 조각이 실제 루이먼드의 몸과 매우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루이먼드는 더없이 이상적이고 완벽한 몸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때문에 루비아나는 이 조각상이 마음에 들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들 그만 봐.”
바닥에 떨어진 천을 주워 확 다시 조각상에 뒤집어씌워 버렸다.
사방에서 아쉬워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아? 더 보고 싶어?”
루비아나가 눈을 번뜩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꺄아악! 으악! 하녀, 하인들이 얼른 사방으로 흩어졌다.
도망치긴 하는데, 이전처럼 정말 무서워서 도망치는 건 아니었다.
“아무튼 공작님, 질투가 심하시다니까.”
“분명 우리가 루이먼드 님 닮은 조각상을 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거야.”
꺄아아. 하녀들은 키득댔다.
적어도 이 저택 안에서, 루비아나는 더 이상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다 루이먼드와 알콩달콩한 모습을 너무 많이 보여 줬기 때문이었다.
“허, 참.”
이걸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루비아나는 기가 차 한숨을 내쉬면서도, 천으로 꼼꼼히 조각상을 감쌌다.
‘숨겨 두고, 혼자만 봐야지. 조만간 북부에 사람을 보내 나머지 조각상들도 다 이런 얼굴인지 확인하고 가져오게 하…… 아니, 그냥 북부의 성에 콱 박아 놓자. 나만 볼 수 있게.’
방금 전까지 폴 네리오를 죽이려고 했으면서, 이젠 그의 조각상을 독점할 생각을 했다. 평생 북부에 붙들어 놓고 조각만 하게 만들리라.
그러고 보니, 루이먼드가 너무 조용했다. 루비아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루이?”
“비아…….”
루이먼드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루비아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철퍼덕 주저앉았다.
“루이!”
놀란 루비아나는 얼른 다가가 루이먼드를 부축했다.
루이먼드는 괜찮다며 고개를 흔들다 눈물을 뚝, 떨어뜨렸다. 결국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난…… 틀리지 않았어. 내가 위대한 예술가를 망친 게 아니야.’
어찌 됐건 폴 네리오가 다시 조각칼을 들었다. 그거면 됐다.
“루이…….”
루비아나가 그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루이, 고생을 해 봐야 정신을 차리는 놈도 있습니다. 폴 네리오라는 조각가는 그런 인간이었던 겁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당신의 안목도, 그를 후원한 당신의 방법도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비아, 고마워요. 다 당신 덕분입니다. 폴 네리오를 북부로 보내 주셨잖아요.”
루이먼드가 고개를 들고 루비아나를 올려다보았다. 까만 눈이 촉촉했다. 눈을 내리깔자 맺힌 눈물이 또르륵, 뺨을 타고 내렸다.
“…….”
루비아나는 저도 모르게 그 눈물 자국을 집요하게 좇으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루이먼드를 모델로 삼아 조각상을 만든 폴 네리오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다.
원망하는 마음도 있겠으나, 자신이 본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남자를 조각하고 싶은 마음도 분명 있었으리라.
폴 네리오가 이런 거칠고 역동적인 조각상을 만들어 다행이었다.;
만약 섬세하고 관능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조각상을 만들어 왔다면, 그 자리에서 조각상을 산산이 부숴 버렸으리라.
루이먼드는 루비아나가 이런 생각을 하는 줄 꿈에도 모른 채, 뒤늦게 이질감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침묵의 조각가는…… 원래 섬세하고 관능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조각을 했었는데?’
고만은 길지 않았다.
‘뭐, 나중에 바뀌겠지. 지금은 나를 향한 증오와 북부에서의 힘든 생활 때문에 저런 역동적인 느낌의 조각을 하게 된 거겠지.’
조각된 와이번은 그게 조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섬뜩할 정도로 무서웠다.
루이먼드는 새삼, 북부가 그런 무시무시한 마수로 가득 찬 곳이라는 걸 기억해 냈다.
‘비아가 항상 평화롭고 한적한 남부를 이야기하듯 북부를 언급해서, 나도 모르게 까먹고 있었어.’
마수와 죄인들로 득실득실한 척박한 땅. 1년의 대부분이 눈으로 덮인 곳.
‘……그런 곳으로 비아가 돌아가야 하는 건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루이먼드는 다급히 루비아나를 끌어 안았다. 루이먼드가 틈만 나면 치대는 게 하루이틀도 아니니, 루비아나는 별 생각 없이 루이먼드의 팔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루이먼드는 그녀의 허리를 두 손으로 단단히 감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댔다.
‘꼭 따라간다고 해야지.’
털옷을 스무 겹 껴입고서라도 따라가고야 말리라.
‘그나저나 이렇게라도 왕눈이를 보니 반갑네.’
루비아나는 조각된 와이번이 왕눈이라는 걸 알아보고는 흐뭇하게 웃었다.
“동쪽 계단 위 서재 옆방에 옮겨 놓도록. 화강암이니 단단하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옮길 때 조심하고.”
루비아나는 멀찌감치 도망가 있던 하인들을 손짓으로 불러들여 명령했다. 그리고는 절 꼭 껴안고 있는 루이먼드도 한 번 토닥여 준 뒤 들고 있던 편지를 뒤집었다.
뒷면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어떤 표시도 없었다. 루비아나는 그 빈 면을 손끝으로 문질러 보았다.
“…….”
루비아나의 입가에 삐딱한 미소가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