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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아나는 곧바로 서재로 올라가 화로에 불을 피우고, 편지를 그을려 보았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던 뒷면에 글씨가 드러났다.
루비아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고는 하인을 시켜 루이먼드가 가지고 있는 폴 네리오의 편지를 가져오도록 했다.
그 편지들의 뒷면 역시, 화로에 노릇하게 구우니 숨겨 놓았던 글씨를 토해 냈다.
북부의 부하들이 왜 착한 척하며 폴 네리오의 쓸데없는 편지를 꼬박꼬박 수도로 부쳐 주나 싶었건만. 이런 용도인 듯 했다.
하지만 루비아나는 그동안 루이먼드에게 온 편지라 생각해 손대지 않았다. 북부에서는 답장이 오지 않자 조급해하다 이번에 조각상까지 보내 온 것이고.
“그러게 누가 이렇게 안 하던 짓을 하래?”
루비아나는 괜히 타박하면서도, 내심 흐뭇해했다.
‘제법 머리를 굴렸는데.’
돌대가리들이 드디어 머리를 맞대고 부딪쳐 불이라도 피울 수 있게 됐나 보다. 혹시나 수도에 있는 루비아나가 곤란해질까 봐 이런 수까지 쓰고.
기특한 마음과 별개로,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좀 짜증이 났다.
막 북부에 도착했을 때.
북부인들은 루비아나를 만만하게 보고, 바로 이 방법으로 루비아나를 따돌리고 자기들끼리 정보를 공유했다.
그걸 알아차린 루비아나는 발각하는 족족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패곤 했더랬다.
루비아나는 그때를 떠올리곤, 혀를 차며 편지들의 뒷면을 빠르게 읽어 내렸다.
갑자기 외지인들이 스며들어 북부의 정세를 살피고, 아쉴레앙 공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다.
아랫놈들은 ‘아쉴레앙 공작’이 누구인지 몰라 - 대장은 대장이니까 - 그냥 수도 귀족인 줄 알고 욕을 한 바가지씩 걸쭉하게 내뱉기도 했다.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마지막에는 늘 비슷한 말이 적혀 있었다.
곧 겨울이 오고 있수다. 식량만 보내지 말고, 이딴 놈이나 괜히 올려보내지 말고, 대장이 돌아오길 바람. 간절히 바람.
북부인들은 루비아나가 오기 전, 자신들이 얼마나 처절하고 구차했는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루비아나 없는 겨울을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루비아나는 편지 더미를 화로에 내던졌다. 화르륵, 폴 네리오의 편지 꾸러미가 금세 불타 버렸다.
루비아나는 부지깽이로 잿더미까지 헤집어 편지 조각이 남지 않은 걸 확인하며, 폴 네리오의 편지를 모조리 태워 버린 걸 루이먼드에게 뭐라 변명할까 고민했다.
그 뒤, 북부에 편지를 보냈다. 별다를 것 없는 당부의 말이었다.
제발 수도로 좀 돌아가라고 사정할 땐 언제고? 엄살은.
너희들 꼴 보기 싫어도 우리 왕눈이 걱정돼서라도 내가 돌아갈 테니, 조각가는 잘 데리고 있어. 왕눈이한테 상한 거 아무거나 먹이려고 하지 말고. 배탈 날지도 모르니까.
물론, 편지 뒷면은 하얬다.
***
먼 훗날의 일이지만, 폴 네리오는 평생 북부를 떠나지 못했다.
북부에서의 삶은 그를 새로운 경지로 안내했다.
초반 몇 년간은 정말 힘들었다.
왕눈이와 복슬이는 그를 볼 때마다 침을 질질 흘렸다. 그들에겐 폴 네리오가 맛난 간식으로 보이는 듯했다.
그걸 본 북부인들은 심심하면 폴 네리오를 장대에 대롱대롱 매달아 왕눈이와 복슬이 앞에서 흔들었다.
“좋은 건 알아 가지고. 분명, 수도에서 온 줄 알고 살이 더 연할 거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해.”
“팔 하나만 먹여 보면 안 되나? 복슬이가 저렇게 먹고 싶어 하는데.”
절 들고 뛰어다니며 하하하 해맑게 웃는 북부인들. 뒤쫓아 오며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 왁왁, 발을 깨물려 하는 와이번과 다이어울프 성체.
그 짜릿함은 도박에 비할 게 아니었다.
“사, 살려 줘어어어어어!”
그는 그렇게 장대에 매달려 새로운 작품 세계를 깨쳤다.
북부에서 돌은 화강암뿐이었다. 대리석? 루이먼드에게 후원을 받고 편히 살 때는 주문만 하면 손에 들어왔던 질 좋은 대리석은 꿈도 못 꿨다.
매일 밤, 폴 네리오는 울면서 굴러다니는 화강암 하나를 골라잡아 땅땅 두드렸다. 손이 찢어져 피가 나도 멈추지 않았다.
폴 네리오는 자신의 경험을 그대로 조각에 담았다.
와이번에게 죽을 뻔했던 일. 다이어울프 아가리에 목까지 들어갔다가 겨우 빠져나온 일. 장벽에 거꾸로 매달려 절 향해 달려오는 마수를 보다 오줌을 지린 일, 등등.
그때 느꼈던 두려움과 절망감, 공포를 고스란히 돌에 쏟아부었다.
공포와 절망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의 얼굴은 늘, 루이먼드였다.
“두고 봐, 날 이런 곳에 두고 너라고 무사할 줄 알아? 나의 필사의 원한을 받아라! 널 저주한다! 아쉴레앙 공작 부구우우우우운!”
폴 네리오는 혼신의 힘을 다해 루이먼드의 얼굴을 조각했다.
그는 한시도 쉬지 않고 조각하고 또 조각했다.
북부인들은 어느샌가부터 그런 그를 슬슬 피하기 시작했다. 누구도 그를 더 이상 장대에 매달지 않았다.
“뭐야, 미쳤나 봐. 수도에서 온 조각가 놈.”
“벌써? 너무 빠른데. 젠장. 졌다. 좀 더 버틸 줄 알고 그쪽에 걸었는데.”
“눈이 아주 돌아 버렸던데?”
폴 네리오의 귀엔 북부인들의 수군거림 따윈 들리지 않았다.
“언젠간 반드시 너도 똑같은 일을 당하게 될 거야! 그럴 거라고! 크헤헤헤헤.”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그의 작업장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리하여 북부는 금방 그의 작품들로 가득 찼다.
루비아나의 성을 가득 채우고도 남아도니,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하나둘씩 조각상을 들고 가 자신의 집 앞에 세웠다.
폴 네리오는 일단 작품을 완성하면, 완성품에 관심을 끊었다. 누가 들고 가든, 부숴 먹든 신경 쓰지 않았다. 다시금 루이먼드를 향한 증오를 불태우며 새 조각에 몰두할 따름이었다.
북부인들은 마수를 조각한 것만 건드렸다. 나중에 루비아나에게 혼날까 봐, 루이먼드의 얼굴을 조각한 건 손도 대지 않았다.
가져간 것 중 조금 큰 건 광장 중앙에 뒀다. 특히 흉측하게 생긴 건 장벽 위로 올렸다.
루비아나는 북부로 돌아올 때마다 그중 몇 개, 특히 완성도 높은 걸 수도로 가져가 황제에게 바쳤다.
대부분 마수의 상이었으나, 루이먼드의 얼굴을 조각한 것도 몇 개 가져갔다. 단, 옷을 제대로 입고 있는 것들 위주로.
황제는 마음에 든다며 조각을 황궁 곳곳에 전시했다. 공이 많은 귀족에게는 특별히 한두 개의 조각을 상으로 내리기도 했다.
마수를 산 채로 굳혔다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역동적인 조각은 사람들을 매혹했다.
북부에선 길가에 굴러다닐 정도로 차고 넘치는 조각상이었으나, 북부 밖에서는 같은 무게의 황금으로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귀한 작품이었다.
당연히 조각가 폴 네리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높아져만 갔다.
폴 네리오는 죽을 때까지 북부를 떠나지 않았다. 때문에 수도의 사람들은 폴 네리오를 실제로 보지 못했다.
찌질했던 폴 네리오를 알고 있는 에릭 시모어나 오르카마저도 그 폴 네리오가 그때의 그 폴 네리오라는 걸 믿지 못했다.
“이번에도 아쉴레앙 공작 부군을 모델로 삼았다더군.”
“루이먼드 님의 미모에 매혹된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섬세하게 표현해 냈을 리 없잖아?”
“저건, 사랑이 아니라면 불가능해.”
세간에서는 폴 네리오가 루이먼드를 사랑해, 북부까지 쫓아가 오직 그만을 모델로 하여 조각을 하는 거라고 소문이 나돌았다.
순정의 조각가 폴 네리오.
그리고 그의 영원한 뮤즈, 아쉴레앙 공작 부군 루이먼드.
둘의 이름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리하여 황제 칼레나의 치세에 가장 훌륭한 예술가 둘을 꼽으라 하면, 민속화가 오르카와 함께 순정의 조각가 폴 네리오가 손꼽히는 건 당연한 일이 되었다.
……문제는, 이게 먼먼 훗날의 일이라는 것이었다.
오르카가 제국 최고의 민속화가가 되는 것도, 폴 네리오가 순정의 조각가가 되어 제국 전역에 이름을 떨치는 것도.
현재의 시점에서 두 조각가를 후원한 루이먼드는,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타인이 보기에도, 예술가 후원에 실패한 대표적인 후원가였다.
에릭 시모어 쟁탈전 때 번 돈을 모두 써 버렸건만 그의 손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폴 네리오가 보낸 조각상이 있지 않느냐고 누군가 물을지 모르나 그것은 루이먼드의 손에 들어온 적도 없었다. 루비아나가 낼름 들고 가 버렸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