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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바야흐로 제국의 수도가 미술 대전으로 떠들썩한 시기.
후원가를 자처하는 귀족들은 자신이 거느린 예술가들의 입상을 자신하며 거들먹거리고, 후원가의 기대를 등에 짊어진 예술가들은 열정을 다해 작품을 완성하고 있었다.
밖은 축제 분위기로 활기차고 떠들썩했으나 아쉴레앙 공작저의 담장 안, 특히 루이먼드의 서재는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나만 없어. 예술가…….’
후원하던 예술가가 있었는데요, 없어졌습니다. 루이먼드의 상태는 대략 이러했다.
오르카 미술 학교를 세운 공이 있지 않느냐고 에릭 시모어가 애써 편지를 보내 위로해 주었지만, 그것도 사정을 파고들면 공이 있긴 한데 없는 것과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오르카 미술 학교는 공립이었다. 비록 제안은 루이먼드가, 또 아쉴레앙 공작가에서 했지만 시행 주체는 국가, 곧 황제였다.
오르카 미술 학교가 번창할수록 칭찬받는 건 황제였다.
‘뭐, 딱히 내가 한 일이라고 자랑하고 공을 인정받고 싶은 건 아니니까.’
그래서 이 학교는 공립으로 세우면 좋겠다는 루비아나의 제안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먼드를 슬프게 하는 건, 자신이 아쉴레앙 공작저에 아무런 이익도 가져오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10년, 20년, 길게 보면 분명 오르카와 폴 네리오는 대성하여 아쉴레앙 공작가의 명예를 드높여 줄 테지만 루이먼드는 그걸 알지 못했다. 설령 알았다고 해도 기뻐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장 3년 뒤를 장담하지 못하는데, 10년 뒤가 뭐가 중요해?’
루이먼드가 원하는 건 즉각적이고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공이었다. 그래서 조만간 성공할 게 분명한 오르카와 폴 네리오에게 그렇게 집착했던 것이건만.
‘망했어.’
오르카는 학교 선생님이 되었고, 폴 네리오는 북부에서 마수 조각상이나 쪼아 대고 있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루이먼드는 처연하게 눈을 내리깔며, 에릭 시모어가 보내 온 편지 다음 장을 넘겼다.
앞 장은 루이먼드가 제국 미술 대전에 예술가를 내보내지 못한 것을 슬퍼할까 봐 위로하는 말이 잔뜩 적혀 있었다.
“이런 착한 놈 같으니라고.”
뒷장은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부탁의 말이 적혀 있었다.
혹시 내 소꿉친구의 친구 결혼식에 약간의 조언을 해 줄 수 있을까? 만약 이 부탁이 널 불쾌하게 했다면 이 편지 자체를 받은 적 없다는 듯 잊어 줘.
루이먼드와 에릭 시모어는 나이 차이는 무시하고 친구가 된 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늘 이렇게 뭔가를 부탁하는 데 조심스러웠다.
그러니 루이먼드로서는 더더욱 에릭 시모어의 부탁을 반드시 들어주고 싶어졌다.
“이게 뭐 어려운 부탁이라고.”
루이먼드는 단숨에 답장을 써 에릭에게 보냈다.
편지를 가지고 시모어 가문의 저택에 간 하인이 돌아올 시간이 되었을 즈음이었다.
“루이먼드!”
하인 말고 에릭이 서재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평소의 수줍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에릭?”
“고마워. 정말 고마워.”
에릭은 루이먼드의 손을 덥석 붙잡고 마구 흔들었다.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뭐지, 이거?’
루이먼드는 심히 당황했다.
순간, 최근에 봤던 소설의 스토리가 떠올랐다. <그 영애는 오늘도 도망칩니다> 시리즈의 화제의 신작이었다.
‘그 소꿉친구의 친구가 설마 에릭의 첫사랑인 건가? 짝사랑을 포기하며, 사랑하는 여자의 결혼식만이라도 최고로 만들어 주고 싶어서?’
이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다니. 루이먼드는 너무 놀라 숨 쉬는 것도 잠시 잊었다.
숨 쉬는 걸 잊을 정도니 말할 여유는 더더욱 없을 터. 그게 참으로 다행이었다.
착각이었으니까.
“그, 그녀가 정말로 좋아할 거야. 고마워.”
“그녀? 역시 넌 소꿉친구의 친구를!”
“으응. 이샤가 부탁했으니까 꼭 들어 주고 싶었어. 아, 이샤는 내 소꿉친구야.”
이샤. 그 이름을 입에 담은 에릭 시모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원래 누굴 좋아하는 일은, 제3자의 시선으로 볼 땐 다 보이는 법이었다. 본인의 일은 어둠 속에서 막 눈 뜬 것처럼 캄캄하지만.
‘소꿉친구를 좋아하는 거구나.’
루이먼드는 바로 알아차렸다.
“이, 이럴 게 아니라. 지금 당장 가 보자!”
루이먼드는 평소와 다르게 힘이 넘치는 에릭 시모어에게 잡혀 덜렁덜렁 끌려갔다.
그리하여 두 여인 - 에릭의 소꿉친구와 그 소꿉친구의 친구 앞에 섰을 때, 루이먼드는 에릭 시모어가 누굴 좋아하는지 착각하려야 착각할 수가 없었다.
애칭 이샤. 이름은 아이샤. 어느 자작 가문 영애.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에릭 시모어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콕 찌르면 빵 하고 터질 것 같았다.
아이샤 역시 에릭 시모어를 보자마자 뺨이 발그레해졌다.
“정말로 아쉴레앙 공작 부군님을 모시고 와 주다니, 넌 정말 최고의 친구야. 고마워 에릭.”
“고, 고맙긴. 친구 사이에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암. 나, 나는 루이랑 영혼을 나눈 친구 사이라고!”
“그렇지. 우린 아주 친한 사이니까.”
“응? 으응…… 그, 그렇지. 아주 친한 친구. 친구…….”
평소에 루이라고 편히 부르라고 해도 꼬박꼬박 루이먼드라고 불렀던 주제에. 좋아하는 여자 앞에선 루이라고 불렀다.
루이먼드는 에릭 시모어의 허세를 귀여워할 새도 없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친구? 서로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서도 친구라는 말이 나오는 건가?’
아무래도 결혼을 앞뒀다는 아이샤의 친구 역시 루이먼드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했다. 두 사람을, 특히나 친구 친구 하는 에릭 시모어를 못마땅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루이먼드와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강렬한 동지 의식을 느꼈다.
‘그쪽이 보기에도?’
‘예. 계속 저러고 있어요. 저러다 늙어 죽으려나 봐요.’
예비 새신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루이먼드는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둔해도 이렇게 둔할 수 있나? 딱 봐도 서로 사랑하는 사이건만.’
평소 시녀장이 자신과 루비아나를 볼 때 그런 심정이라는 건 깨닫지 못했다.
‘어쩔 수 없군. 내가 나설 수밖에.’
루이먼드는 예비 새신부를 위해, 또 두 번째 친구 에릭의 원활한 연애를 위해 자신이 팔을 걷어붙여야 할 때라고 직감했다.
시녀장이 알았다면 본인 연애 사정을 그렇게 좀 잘 챙겨 보라고 혀를 찼겠으나, 원래 수도사가 제 머리를 못 깎는 법.
루이먼드는 자신 말고 에릭 시모어의 연애 사업에 관심을 가졌다.
“조언 말고, 직접 돕고 싶군요. 에릭의 부탁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상냥히 미소 지으며 매너 있게 말하자, 아이샤와 예비 신부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둘 다 각각 좋아하는 남자가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루이먼드의 미모를 순수하게 감탄하고 감상한 것에 불과하건만, 에릭 시모어는 제멋대로 충격에 빠졌다.
“역시 나 같은 게 이샤를…….”
아이샤에게는 안 들리고, 루이먼드와 예비 신부에게만 들리는 혼잣말이었다.
루이먼드와 예비 신부는 세상에 이런 등신이 또 없다는 눈빛으로 에릭을 보았다.
루이먼드는 에릭의 모습이 3년 계약 결혼을 떠올리며 시름에 잠기는 제 모습과 더없이 똑같다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내가 나서서 도와줘야지 안 되겠군.’
제 머리 못 깎는 수도사가 남의 머리 깎을 때는 쓸데없이 열정적이라더니. 루이먼드의 모습이 딱 그 속담대로였다.
어쨌거나 에릭 시모어의 연애 삽질과 예비 신부의 결혼식 준비 덕분에 루이먼드는 잠시나마 제국 미술 대전과 폴 네리오에 대해 잊을 수 있었다.
아이샤의 친구, 예비 신부는 어느 남작 가문의 여식이었다.
어릴 적에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외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데, 집안에 결혼식 준비를 해 줄 수 있는 다른 어른이 없다고 했다.
“제 소원을,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예비 신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마음속으로만 계속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제 결혼식도 아쉴레앙 공작님네 같았으면 좋겠다고요.”
“……굳이?”
“네?”
예비 신부와 루이먼드는 서로를 멀뚱하게 바라보았다.
‘아니, 결혼식에서 피를 보는 게 뭐 좋다고?’
‘여, 역시 나 같은 게 공작님처럼 아름다운 결혼식을 치르는 건 불가능하겠지. 나, 나도 알아. 그냥, 꿈이었을 뿐인걸…….’
루이먼드는 난감해했고, 예비 신부는 눈물을 글썽였다. 안 그래도 결혼식 준비로 마음고생이 심했던지라 감정의 동요가 클 수밖에 없었다.
오해를 풀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난 또, 결혼식에 누가 쳐들어왔으면 좋겠다는 줄 알았지.’
루이먼드는 예비 신부의 설명을 듣고는 안심했다.
“요즘 저희들 사이에서 아쉴레앙 공작님의 결혼식이 정말 화제거든요.”
“저희라니, 누가 또 있습니까?”
“한참 결혼을 준비하는 예비 부부 모임이요!”
“……그런 게, 있었나요?”
‘난 왜 몰랐지?’
“다, 당연히 모르셨을 거예요. 공작 부군님의 결혼식 이후에 생겼거든요.”
“아…….”
“저희끼리 공작님과 공작 부군님 결혼식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그 결혼식에 참여했던 업체 연락처를 공유하고, 그러는 모임이어요.”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뒷말을 꺼내기도 전에, 예비 신부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3주 만에 그렇게 완벽하고 아름다운 결혼식을 준비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그, 그런 분께 조언을 들을 수 있다니…… 정말 기뻐요.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예비 신부는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종이와 펜을 꺼내 들었다. 앞으로 루이먼드가 말하는 건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받아 적겠다는 의지가 돋보였다.
아이샤는 물론이거니와 에릭 시모어 또한 어느새 아이샤 옆에 꼭 붙어 눈을 반짝, 귀를 쫑긋했다. 그러다 서로 눈이 마주치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허, 참.”
루이먼드는 헛웃음을 지었다. 당황스러웠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좋아요, 나만 믿어요.”
‘예비 신부의 사정이 딱해서 그래. 도움을 받을 사람이 없다잖아.’
애써 이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어깨가 들썩이는 걸 막을 순 없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구나.’
괜히 뿌듯해졌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이것이 무슨 대단한 재능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돈벌이가 될 거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았고.
예술가 후원 실패를 경험한 후,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기 전 잠깐 숨 고르기를 하며 에릭을 돕는 것일 뿐이었다. 루이먼드는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