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이먼드는 어느 남작가 여식의 결혼 도우미가 되기로 한 뒤, 대단하게 일을 벌이진 않았다. 그저 엄마처럼, 아빠처럼 결혼 준비를 도왔다.
예비 신부를 직접 만나지는 않았다. 젊은 공작 부군과 미혼의 남작 영애가 둘이서만 만나면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호사가들이 이상한 소문을 떠들어 댈지도 모른다는 변명을 내세워, 에릭 시모어를 실컷 부려 먹었다.
에릭 시모어는 하인처럼 이용당하면서도 매번 헤벌쭉하게 웃으며 루이먼드가 시키는 일을 성실하게 해냈다.
“오늘은, 오늘은 뭘 하면 되나?”
먼저 찾아와 일거리를 내놓으라고 조르기도 했다.
“좋아?”
“너무 좋…… 응? 아, 아니. 좋, 좋을 게 뭐가 있겠어? 그냥, 남을 도우니까 선행을 할 수 있게 되어 조, 좋고……”
“좋아 죽겠다는 거 잘 알았으니까 그만 말해도 돼.”
“주, 죽을 정도는 아니야! 이샤를 놔두고 죽을 수는 없, 헙!”
“내 앞에서 실수하는 거 딱 한 번만 그 자작 영애 앞에서 해 보지 그래? 그럼 모든 게 다 해결될 것 같은데.”
“이, 이샤는! 영혼을 나눈 친구예요. 어, 어떻게 그런 이샤한테!”
“보통 친구는 영혼을 나누거나 하지는 않지 않나?”
친구라고는 둘밖에 없는 루이먼드도 아는 걸, 에릭은 모르는 듯했다.
“이샤만큼 루이먼드, 너도 내 소중한 친구야. 나는 네게도 내 영혼을……”
“거절하지. 네 영혼 필요 없어.”
루이먼드는 차게 웃고는, 그날도 에릭 시모어에게 일거리를 잔뜩 내주었다.
“그, 그럼 다녀올게!”
에릭은 기꺼이 영혼도 나누어 줄 수 있다던 친구를 등지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나갔다.
그리고 예비 신부 대신 나온 아이샤와 함께, 루이먼드가 시키는 대로 꽃 가게, 케이크 가게를 돌아다녔다.
예비 신부의 결혼식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에릭 시모어와 아이샤는 어느새 손을 꼭 잡고 다니는 사이가 되었다.
“좋을 때다.”
루이먼드는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며 혼자 흐뭇해졌다. 예술가 후원 사업 실패로 꾸깃해졌던 마음이 살짝, 아주 살짝 펴지는 것도 같았다.
***
“내 남편이 웨딩 플래너 사업을 하려는 건가?”
루비아나는 오늘 아침, 마법으로 만든 새가 너울너울 날아와 전해 주고 간 편지를 펴 보며 물었다.
제국 수도로 사람들이 몰리며, 각기 다른 왕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결혼을 하다 보니, 결혼식 준비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평민들 사이에서 웨딩 플래너 사업이 꽤 호황이라고 했다.
귀족들은 아직 결혼을 가문의 일이라 생각해 가문 밖 사람, 설령 전문가라 하더라도 남에게 맡기는 걸 수치스러워한다지만, 일하느라 바쁜 황실 관리들 사이에선 의외로 인기였다.
특히나 내무국장과 회계국장이 웨딩 플래너를 끼고 후다닥 결혼식을 올린 이후로는 황실 관리들이 하나둘 따라 하는 추세라고.
어디서 주워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하니, 하녀장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최근 어느 남작 영애의 결혼식 준비를 돕느라 조금 바쁘신 것 같기는 합니다만.”
“나한테는 그런 말 안 했는데.”
“소소한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니다. 제가 여쭤보아도 뭐 이런 작은 일까지 신경 쓰냐며 손사래를 치시더군요.”
“흠, 작은 일. 작은 일이라…….”
루비아나는 들고 있던 편지를 시녀장에게 건넸다.
시녀장은 두 손으로 받아 들고는 제일 먼저, 편지 하단에 적힌 이름부터 확인했다.
“디토 남작가?”
시녀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 정말 작은 일이지. 그 디토 남작가로부터 감사 편지를 받게 됐으니 말이야.”
루비아나가 편지와 함께 온 황금패를 던졌다 받으며 말했다.
예비 신부의 외할아버지가 손녀딸을 도와줘서 감사하다며 아쉴레앙 공작저에 편지를 보냈다. 봉투에 ‘존경하는 아쉴레앙 공작님 귀하’라고 적혀 있었으니, 루이먼드가 아니라 루비아나 손에 먼저 들어온 건 당연한 일이었다.
덕분에 루비아나는 요즘 루이먼드가 뭘 하느라 바쁜지 알게 되었다.
또한 그 남편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랍시고 가볍게 해치운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조차도.
아덴 왕국의 폭군은 저의 딸과 사위를 죽였고, 그날 이후로 제 눈에선 눈물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제국은 제게 새로운 웃음을 선물해 주시는군요.
제 삶의 유일한 희망이자 빛, 제 손녀가 아쉴레앙 공작 부군 덕에 활짝 웃고 있습니다. 제 어미를 꼭 닮은 그 아이가 그리 행복하게 웃는 걸 본 게 얼마 만인지…… 비로소 제 얼굴에도 웃음이 돌아왔습니다.
존경하는 아쉴레앙 공작님, 저와 마탑은 언제까지나 제국에 충성할 것입니다. 이 늙은 몸을 갈아, 폐하와 제국의 미래를 위한 반석이 될 것을 맹세합니다.
중요한 건 편지의 마지막 줄이었다.
황금패는 마탑의 주인인 디토 남작의 충성 맹세 증표였다. 이 황금패를 가진 자는 마탑과 마탑주를 제 수족 부리듯 부릴 수 있다.
한때 아덴 왕국의 폭군이 이 황금패를 가지고 있었다.
폭군은 그걸 써 볼 틈 없이 죽어 버렸고, 칼레나는 폭군의 피에 흠뻑 젖은 그것을 디토 남작에게 돌려주었다. 그것이 이제 루비아나의 손에 들어왔다.
학자의 집과 쌍벽을 이루는 폐쇄적인 집단, 마탑.
대륙의 마법사 대부분이 속해 있으며, 아덴 왕국의 영토 내 위치했으나 치외 법권을 인정받은 곳이었다.
디토 남작은 그곳의 주인이었다.
그는 폭군이 막 즉위했을 때, 그의 총명함에 반해 그가 성군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고 충성을 맹세했다.
마탑주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황금패가 폭군의 손에 들어갔고, 폭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폭군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폭군은 디토 남작의 딸과 사위를 죽였다. 디토 남작은 황금패를 가진 폭군에게 반란을 일으키기는커녕 덤빌 수조차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어린 손녀를 지키기 위해 폭군에게 엎드려 자비를 구하고, 저택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었다.
폭군이 죽고, 아덴 왕국이 멸망하고 새로운 제국이 들어서도, 디토 남작은 저택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칼레나는 그를 존중해 저택에서 강제로 끌어내지 않았지만, 잊지 않고 가끔 언급하곤 했다.
‘이번에도 마법사들을 동원하면 동부 치수 사업을 좀 더 빨리 진행할 수 있을 거라고 아쉬워했지.’
하지만 학자의 집과 달리 마탑은 함부로 부술 수 없기에 아쉬워만 하고 있었는데.
‘일이 이렇게 풀릴 줄이야.’
루비아나는 편지와 황금패를 봉투에 넣어 봉한 후 시녀장에게 건넸다.
“폐하께 올려.”
“예.”
“다른 사람 시키지 말고 리먼스 부인이 직접 다녀와. 편지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래도 강조하는 의미에서 루이 덕분이라고 한 번 더 말씀드리고.”
“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시녀장은 공손히 받들었다.
‘뭐 어쨌든, 이 일로 레나가 루이를 좀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네.’
루비아나는 펠트하르그 공작가를 꺾어 버리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던 루이먼드를 떠올리며 웃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