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131)

***

“역시 예술가 후원은 안 되겠어.”

예비 신부의 결혼식 준비를 도와주며 조금 마음의 여유를 되찾은 루이먼드는 이렇게 생각했다.

‘비록 오르카는 지금 삶에 만족하고 있고, 폴 네리오는…… 어쨌든 도박에서 손을 떼고 조각에 집중하고 있으니 다행이긴 한데…….’

사람에게 투자하는 건 아무래도 변수가 너무 많았다.

‘나 때문에 제국 역사에서 위대한 예술가 두 명이 사라져 버렸어.’

친구 따라 동부 간다고, 피오니를 쫓아 역사 수업을 몇 번 들어 본 적 있기 때문에 - 역시나 낙제점을 받았다 - 미래를 망쳤다는 부채감을 안고 있었다.

이 부채감은 먼 훗날, 피오니와 폴 네리오가 이전에 경험했던 미래보다 더 크게 성공한 걸 본 다음에야 사라질 터였다.

지금의 루이먼드는 바뀐 미래를 알지 못하고, 예술가 후원을 아예 포기했다.

‘에릭의 살롱에는 참석만 하자. 딱 거기까지야. 더는 나대지 않겠어.’

루이먼드는 ‘성공적인 공작 부군이 되는 방법’을 꺼내 리스트의 제일 윗줄, 예술가를 후원한다는 항목에 지이익, 선을 그었다.

그 바로 밑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미래에 유행할 직물을 미리 사재기한다.

(펠트하르그 공작 상단의 성공을 가로챌 수 있는 기회! 세르딤만은 반드시!)

“이거야!”

루이먼드는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하리라. 루이먼드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비아, 비아!”

이 기쁜 성공의 예감을 함께 나누기 위해, 루이먼드는 루비아나에게 달려갔다.

“오, 루이.”

루비아나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루이먼드를 두 팔 벌려 맞이했다.

“저, 하고 싶은 일이 생겼습니다!”

루이먼드가 의욕에 차 말했다.

루비아나는 네가 원하면 뭔들 못 주겠냐, 황제 폐하와 제국만 빼고, 라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루이먼드는 신나서 앞뒤 가리지 않고 줄줄이 말했다.

“곧 제국엔 세르딤이라는 직물이 대유행할 겁니다. 그걸 제가 싼값에 미리 사들여 놓았다가 비싸지면 팔면 어떨까요? 이를테면 독점이죠.”

“세르딤? 처음 들어 보는 직물인데요. 그런 게 존재했습니까?”

“지금은 비아, 당신뿐 아니라 제국 누구도 모를 거예요. 폴딘 왕국의 ‘님’이라는 지역에서 조금씩 생산하고 있는 직물이니까요. 유명해진 다음에 그 지역의 귀족인 세르주 드 님의 이름을 따서 세르딤이라고 이름을 지으니까요.”

“오, 그렇군요.”

루비아나는 미래의 일을, 마치 경험한 사람처럼 술술 늘어놓는 제 남편을 아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입술은 웃고 있었지만, 녹색 눈은 묘하게 서늘했다. 미래의 성공에 취해 흥분한 루이먼드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그건 분명히, 제국에서 엄청나게 유행해요. 제국의 황…….”

아무리 흥분해 눈치 없이 떠들던 루이먼드라 할지라도, 이 순간만큼은 멈칫하고 말았다. 루비아나의 눈빛도 꽤 매서워졌다.

“…….”

“…….”

루이먼드가 일방적으로 띄워 놓았던 뜨거운 분위기는 단번에 사그라들었다. 루이먼드가 입을 딱 다무니, 서재 안은 금세 조용해졌다.

“황?”

루비아나가 되물었다.

달래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평소라면 그것만으로 헤벌쭉해서 루비아나를 꼭 끌어안고 속엣말을 죄다 술술 말했을 것이나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루이먼드는 입을 꾹 다물고 눈만 데굴, 굴렸다.

“루이?”

“……그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음…….”

“음?”

“…….”

“루이.”

루비아나는 차분히, 하지만 가차 없이 루이먼드에게 답을 강요했다. 상황상 ‘황’ 다음에 나올 말이 ‘황제 폐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황제’.

그건 잠든 사자 루비아나를 깨우는 가장 강력한 주문이었다.

그걸 루이먼드 역시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섣불리 대답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술술 떠들어 댄 거야? 왜, 아주 일곱 번 죽고 여덟 번째 살고 있다고도 말하지? 응? 다른 두 공작에게 사이좋게 세 번, 네 번씩 목 베여 죽었다고. 응?’

루이먼드는 스스로를 탓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눈가에 눈물이 살짝 맺혔다. 늘 루비아나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던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루비아나의 날 선 기세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는 루이먼드를 밀어내고 느긋하게 서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은은히 웃고 있었지만 한쪽 손은 어느새 허리춤에 찬 검 손잡이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바짝 신경 쓸 일이 있을 때의 버릇 같은 거였고, 루이먼드를 공격할 생각은 없었다.

루이먼드 역시 설마 루비아나가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을 슥삭-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겁이 나는 건 겁이 나는 거였다.

나른해 보일 정도로 편히 서 있는 루비아나의 모습은, 맹수가 먹잇감의 목덜미를 물어뜯기 전에 마지막으로 숨 고르기를 하는 모습과 같았다.

루이먼드는 맹수를 마주친 토끼처럼 놀란 눈을 하고 굳어 버렸다. 깡총깡총 도망갈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했다.

“그, 그게…….”

“그게?”

“읏…….”

“루이?”

“……화, 황궁에서 훗날 연회가 열리면 귀족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그 직물로 만든 드레스와 연미복을 입을 게 분명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학자의 집에서 발표할 때처럼 말해 버리고 말았지만, 아무튼 대답할 말을 생각해 냈다. 떨거나 더듬지 말고 한 번에 말했다.

“황‘궁’에서, 귀족들도 즐겨 입게 된다는 겁니까?”

“예. 예. 네.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 유행 자체는 백성 속에서 먼저 시작될 겁니다, 아마.”

‘절대, 황제가 그 직물로 만든 예복을 즐겨 입는 바람에 더더욱 제국에서 유행하게 됐다고는 말하면 안 돼.’

루이먼드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흠, 그렇군요.”

“예. 예. 예.”

루이먼드가 열심히 고개를 흔들었다.

‘레나를 입에 담으려 했군. 황궁이 아니라 황제. 그렇다는 건, ‘미래에 황제도 즐겨 입는 직물을 지금 미리 알고 사재기 하고 싶다’는 건데.’

루비아나는 루이먼드를 올려다보며 빙긋, 웃어 보였다.

“참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저, 정말요?”

“듣다 보니 나도 투자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백성 사이에서 유행할 예정이고, 곧 황궁 연회에서마저 귀족들이 앞다퉈 몸에 두르게 될 직물이라니.”

“예, 비아! 꼭 그렇게 될 겁니다!”

“내가 무얼 도와주면 됩니까?”

“아니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초기 지출은 제 개인 예산을 사용할 겁니다. 그 이후엔 직물이 불티나게 팔려서 큰돈을 벌 테니까 그 돈으로 재투자를 하면 됩니다.”

듣도 보도 못한 직물. 제국도 아니고, 인근 왕국의 작은 지역에서 조금씩 생산하고 있다는 그 직물이 곧 제국 전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모을 거라 확신하는 루이먼드.

루비아나는 기시감을 느꼈다.

‘또 이런 식으로 말하는군.’

자신에게 청혼하며 사랑 없는 결혼을 운운하던 루이먼드는 그녀가 신께 바친 피의 맹세를 어설프게나마 알고 있었다.

그는 그레이움 백작에게 주워들어 알게 되었다고 말했지만, 루비아나가 알아본바, 그레이움 백작은 피의 맹세에 대해 모르는 눈치였다.

‘그레이움 백작이 명연기를 펼친 건지도 모르겠지만.’

어디서부터 알아봐야 할지 감을 잡히지도 않을뿐더러, 결혼 후 이러저러한 일들이 많다 보니. 또 루이먼드에 대한 마음이 깊어져 그 사실을 잠시 뒷전으로 미뤄 두고 있었다.

루이먼드를 제 옆에 꼭 붙여 놓고 있으니, 설사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자신이 막을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

똬리를 말고 납작 엎드려 있던 의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었다.

‘마침 잘됐군. 확인해 봐야겠어. 미래의 일을 한 번 경험해 본 사람처럼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부터.’

루이먼드를 아낀다. 3년뿐 아니라 평생 데리고 살고 싶을 정도로.

그렇기에 더더욱, 확인해 봐야 했다.

‘일단, 세르딤? 그 직물의 성공부터 확인해 볼까?’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루이먼드가 직물은커녕 길가의 먼지를 사재기한다고 해도 말렸을 것이다.

예술가를 후원할 때 뭇 귀족들의 모범이 되길 바랐던 것처럼. 다른 투자에서도 모범이 되길 바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럼 어디 한번 마음껏 해 보십시오.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고.”

루비아나는 루이먼드를 자유롭게 풀어놔 보기로 했다. 고삐 풀린 토끼가 어디로 뜀박질할지 확인해 보기 위해.

사실 고삐가 풀린 게 아니라는 걸, 토끼는 끝끝내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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