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131)

***

‘비아가 기대된다고 했어. 이건, 성공할 게 분명해!’

루비아나에게 허락을 받았다. 그냥 허락만 받은 게 아니라 인정받기까지 했다.

잠깐 함부로 ‘황’이란 한 음을 입에 담아 분위기가 어색해질 뻔했지만, 어쨌든 대화는 훈훈하게 마무리하지 않았는가?

루이먼드는 그 어색했던 분위기는 까맣게 잊고, 다시 흥분에 차올랐다.

‘성공해 아쉴레앙 공작저의 금고를 황금으로 가득 채워야지. 내게 세르딤을 빼앗긴 펠트하르그 공작가의 상단은 쫄딱 망해 버릴 거야!’

그 정도로 망해 버릴 상단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루이먼드는 무한히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이 미래의 성공을 확신한 낙천주의자는 행동마저도 재빨랐다. 하루라도 더 빨리 성공하기 위해, 조력자를 찾아 나섰다.

‘나와 함께 성공할 상단, 너로 정했다. 피먼스 상단!’

루이먼드는 피먼스 상단의 건물 앞에 서서 음하하하, 크게 웃었다.

루비아나와 오랫동안 거래해 온 상단. 게다가 펠트하르그 공작가 소속이 아닌 상단. 그것으로 충분했다.

루이먼드는 절 반갑게 맞이하는 피먼스 상단주에게 대뜸 말했다.

“내년에 전 제국에서 선풍적으로 유행할 직물을 미리 사들입시다.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아, 아닛! 그, 그 귀한 정보를 어떻게!”

어떤 놈이 찾아와 대뜸 이딴 허튼소리를 했다면, 그가 누구든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두들겨 패고 쫓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 우아하게 앉아 있는 남자는 ‘어떤 놈’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존재였다. 무려 아쉴레앙 공작 부군이 아닌가!

피먼스 상단주는 루비아나가 요즘 남편에게 잡혀 산다고 엄살떨던 걸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대놓고 펠트하르그 공작가와 맞서지는 않지만, 펠트하르그 공작가 소속 상단들을 견제하기 위해 자신에게 적절히 힘을 실어 주고 있다는 것 또한 이 상황을 오해하게 만들었다.

‘남편을 통해 내게 귀한 정보를 넘기려는 거구나!’

피먼스 상단주는 전율했다.

“당장, 저희 길드 소속 모든 상단을 불러들……”

“쉿! 그러다 펠트하르그 공작가의 상단들이 눈치채면 곤란합니다.”

“아앗!”

“이건 전적으로 비밀스럽게, 은밀히 움직여야 합니다.”

“그, 그렇군요. 학자의 집 출신이시라더니. 과연 영명하십니다, 공작 부군!”

아쉴레앙 공작 부군이 학자의 집 출신이라는 것만 소문나고, 그곳에서 만년 낙제아였다는 건 아직 알려지지 않은 듯했다.

“내가 말해 주는 지역에 사람을 보내, 그곳에서만 만드는 직물을 모두 사들이고, 그 직물을 만들 줄 아는 기술자들을 빼내세요. 그래서 이 수도 근방에 커다란 공장과 기숙사를 짓고, 직물을 생산하도록 하세요. 아, 물론 벌써 펠트하르그 공작가 상단들이 움직였을지도 모르니까, 기술자들이 미적거리면 값을 두 배 세 배 치러도 좋습니다.”

“당장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 재산 절반, 아니, 전부를 털어서라도 반드시 사재기하겠습니다!”

“아니, 그러지 마세요. 예산은 충분합니다.”

루이먼드는 자신의 올해분 개인 예산을 전부 내놓았다.

폴 네리오만 아니었다면 1.5배 정도는 더 내놓을 수 있었을 텐데. 새삼 속이 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피먼스 상단주는 깜짝 놀랐다.

“오오, 이 정도 돈이면! 아마 그 지역을 통째로 살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면 아예, 그 지역을 통째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역시 아쉴레앙 공작님의 배우자다우십니다. 통이 크시군요!”

“비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하긴, 공작님의 배포야말로 제국 제일이 아니겠습니까!”

“제 부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공작 부군님의 말씀을 듣다 보니, 문득 제 아내가 떠오르는군요. 제가 이렇게 큰 상단을 거느릴 수 있었던 것도 사실, 제 아내가 저보고 장사를 해 보라고 떠밀어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아내 자랑 배틀이 시작되었다.

누구 아내가 더 지혜롭고 위대하며 대단한지. 그건 곧 그 지혜롭고 위대하며 대단한 아내와 결혼한 자신이 이 제국에서 제일 행복한 남자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한참 아내 자랑을 한 두 유부남은 서로를 마주 보며 활짝 웃었다. 하하하.

이번 거래로 대박을 내어 부인에게 돈벼락을 안겨 주리라. 두 유부남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세르딤 사재기 사업은 기대와 달리 망해 버리고 말았다.

“반드시 성공한다고! 황제 폐하께서도 이 직물로 옷을 해 입으실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전에, 평민들 사이에서 유행한다고…… 아. 내가 다 사들였는데 유행할 리가 없잖아!”

이렇게 멍청할 수가.

“으아아아악!”

피먼스 상단주는 절규했고.

“아, 이상하다? 왜? 어째서?”

루이먼드는 머리를 움켜잡고 괴로워했다.

루이먼드의 직물 독점 사업이 시작하기도 전에 망해 버렸다는 소식을 들은 루비아나는 고개를 삐끗했다.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했는데?”

소식을 전한 부하가 성공은 무슨,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

루이먼드를 뭔가 이상한 쪽으로 의심하며, 부하를 시켜 감시까지 했던 루비아나는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내가 뭔가 잘못 생각한 건가?’

피의 맹세에다가 오르카 미술 학교, 디토 남작의 충성 맹세, 거기에 세르딤이라는 난생 처음 들어 보는 직물까지.

오르카 미술 학교와 디토 남작은 얻어 걸린 거라고 하더라도, 세르딤의 성공을 확신하는 모습은 그냥 웃어넘기기 어려웠다.

‘분명 뭔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처참히 망하다니?

“정말이야?”

루비아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을 부라리며 부하를 노려보았다.

뭐, 그런 일이 종종 있지 않은가? 감시해야 하는 인물의 미모와 인품에 반해 이쪽을 배신하고 허튼 말을 하는 부하 같은 거.

“분명합니다.”

부하는 자신은 그런 줏대 없는 놈이 아니라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믿음이 가긴 했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얼마나 망했기에 저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거지?’

루비아나는 부하가 내민 보고서를 훑어보았다.

보고서의 내용대로라면 아직 완전히 망한 건 아니었다. 손쓸 수 없게 망해 가는 중이지.

사람들이 원하는 물건을 남들보다 일찍 찾아내고, 최대한 싼 값에 많이 사들여 독점하고, 가격이 천장을 찍을 때 내다 판다.

이것이 사재기의 기본 법칙이건만.

루이먼드의 세르딤 사업은 이 법칙을 완전히 엇나갔다.

일단 제국민들은 루비아나처럼 세르딤이라는 직물을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하니, 사고 싶어 할 리 없었다.

그런데 루이먼드는 이게 무조건 제국에서 대유행할 거라며 마구 사들였다. 아니, 단지 직물을 사들인 게 아니라 직물을 생산하는 땅을 통째로 샀다.

제국의 서쪽 끝에 위치한 폴딘 왕국, 그곳의 ‘님’이라는 이름을 가진 영지를 싼값에 사들이고는, 그곳의 주민들에게 세르딤이라는 직물을 만들도록 했다.

완성품은 모두 사들여 제국 수도로까지 가져와 피먼스 상단의 창고에 가득가득 쌓아 놓았다.

그러고는 피먼스 상단이 가진 포목점, 옷가게에 세르딤을 늘어놓고 팔았으나, 제국민들은 듣도 보도 못한 외국의 직물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세르딤이란 두꺼운 면직물의 일종으로, 표면에 님 지역에서 흔히 자라는 나무의 수액을 물로 희석한 것을 발라 방수 효과도 있는 천이었다.

가격도 비싸지 않고, 잘 해어지거나 찢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 뻣뻣하고 거칠었다.

딱히 수도 사람들에게 필요한 직물이 아니었다.

수도는 날씨가 온화하고 비가 잘 내리지 않았으며, 내구성 좋은 천을 입어야 할 만큼 거친 일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세르딤은 광산이나 공사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작업복으로 만들어 입기 좋은 직물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세르딤을 주로 생산하는 님 지역엔 예전에 꽤 큰 철광석 광산이 있었다고 했다.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루이는 왜 이런 직물이 제국에서, 그것도 황궁과 수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 거라고 장담했던 거지?’

루비아나는 보고서에 붙어 있는 세르딤 조각을 손으로 문질러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쪽으로 문외한인 루비아나가 보기에도, 이건 좋은 사업 아이템이 아니었다.

‘루이야 잘 모르니 그렇다 쳐도, 피먼스 상단주는 왜? 그 사람, 고위 귀족이 와서 이래라 저래라 한다고 촐싹대고 움직여 실속 없는 사업에 발을 담글 만한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참으로 불가사의한 사업이었다. 실패하려고 작정하고 사업을 벌이면 이렇게도 실패할 수 있구나, 싶달까.

“피먼스 상단의 피해는 어느 정도지?”

“사업 초기 자금은 모두 공작 부군께서 치르셨다고 합니다. 피먼스 상단의 창고를 이용하는 대금도 적정선에서 지불하셨고요. 그래서 딱히 금전적으로 크게 피해 입은 건 없다고 합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다만…….”

“다만?”

“워낙 멍청한 실패라…… 아, 이 말은 제 생각이 아니고 상업 길드 쪽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 내부에서 피먼스 상단주가 길드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지 않느냐고, 뭐 그런 논의가 오가는 듯합니다.”

“저런.”

루비아나가 혀를 찼다.

“어떻게 할까요? 개입해서 막을까요?”

“누가?”

“아마 공작님의 명령을 받은 제가요?”

“왜?”

“아마…… 공작님께서 명령을 내리셔서요?”

“내가?”

“……아마요?”

“저런.”

루비아나는 조금 전보다 더 진하게 혀를 찼다.

“공작님?”

“여러 해 동안 내 옆에 붙어 있었어도 이렇게 내 마음을 모르다니.”

“아니었다면 죄송합니다.”

“그래, 죄송해해. 결혼한 지 1년도 안 된 내 남편보다도 내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으니까.”

“…….”

부하의 눈가가 부르르 떨렸다. 할 말이 많아 보이는데, 내일이 월급날이어서 그런지 용케 입을 꾹 잘 다물고 있었다.

루비아나는 픽 웃으며 보고서를 촛불에 태웠다.

부하는 그간의 고생이 한순간에 타 버리는데 서운해하지 않았다. 당연하게 바라보고는 고개를 조아렸다.

“어떻게 할까요?”

“그냥 놔둬. 어차피 크게 기대한 것도 아니었고, 피먼스 상단의 피해가 큰 것도 아니라니까.”

“하지만 상인 길드에서……”

“그 정도는 피먼스 상단주가 알아서 처리할 거야. 이 정도 일을 벌여 실패해놓고선 그 정도 반발도 못 누르면, 그들 말마따나 자리에서 내려와야지.”

상인 길드의 길드장 자리는 수도의 상권을 안정시킬뿐더러, 펠트하르그 공작가 소속 상단들까지 견제해야 하는 자리다. 그런데 그 자리에 앉은 자가 고작 이 정도 위기도 스스로 헤쳐 나가지 못한다면 곤란했다.

차라리 이참에 물러나는 게 제국을 위해서도, 길드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었다.

피먼스 상단주가 알았다면 꽤 억울하고 서운했겠지만, 그런다고 해도 루비아나의 결정이 변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자가 고작 이런 일로 순순히 물러날 리도 없고.’

루비아나는 손을 내저어 부하를 내보내고는 보다 만 서류에 다시 눈을 돌렸다.

그게 끝이었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세르딤 사재기, 아니 독점 사업이 망해 가는 것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너무 예민하게 생각했던 모양이야.’

그럼 그렇지. 피식 웃으며 그간의 의심을 털어 낼 뿐이었다.

‘예지 능력? 아무리 현실이 소설보다 더 어처구니없다고 말해도, 이건 아니지. 그렇다고 루이가 즐겨 보는 소설처럼 회귀해서 미래 일을 아는 것도 아닐 테고. 사업을 핑계로 반란 세력과 짜고 돈을 빼돌리는 건 더더욱 아닐 테고.’

세르딤 사업 실패는 루비아나에게 오히려 믿음을 주었다. 루이먼드가 절대 예언자거나 첩자일 리 없다는 믿음.

‘피의 맹세는 루이가 말한 것처럼 그레이움 백작에게서 전해 들었겠지. 그 늙은 너구리 같은 백작이 내 앞에서는 시치미 뗀 걸 테고.’

의심을 거둬 내니, 루이먼드의 세르딤 사업이 어떻게 될지 더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건 어디까지나 루이먼드가 자신의 개인 예산을 써 가며 즐기는 작은 사업이었으니까.

개인 예산으로 뭘 하든, 그건 루이먼드의 자유였다. 저택에만 있기 심심해 사업에 손댔다가 망했다?

개인 예산을 다 썼다면 다시 채워 주면 될 일이고, 혹시나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면 나서서 도와주면 될 일이었다.

루이먼드는 아쉴레앙 공작가를 펠트하르그 공작가보다 더 부유하게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으나 루비아나는 딱히 기대하지 않았다.

루이먼드가 예술가를 후원하든, 직물 독점 사업을 벌이든, 아쉴레앙 공작가의 재산에 비하면 귀여운 소꿉장난 수준이었으니까.

“망했다고 너무 우울해하지나 않았으면 좋겠는데.”

루비아나는 펜대 끝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의심이 걷힌 뒤 루비아나의 감상은 딱 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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