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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 로투스는 천재 의상 디자이너이기 이전, 빨래의 천재였다. 그녀는 기어이 어마어마한 양의 빨래를 해치웠다.
물론, 시간은 많이 걸렸다. 다 끝났을 즈음엔 하늘에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루비아나와 루이먼드가 아침 식사를 하고 나왔으니, 반나절 이상이 걸린 셈이었다.
그녀가 비로소 허리를 펴고 일어나 다리를 절뚝이며 빨랫감을 챙길 때, 우물가에 남은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왔다 갔다 하고, 식사도 하고 오고 그러던데 릴리 로투스는 같은 자리에 앉아 점심 식사까지 굶어 가며 빨래만 했다.
어마어마한 양의 빨래를 여러 번 나누어 옮기는데도, 도와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릴리 로투스가 젖은 빨랫감을 가득 안고 걷다 비틀댈 때마다, 루이먼드는 저도 모르게 뛰쳐나가 빨랫감을 대신 옮겨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걸 꾹 참아야 했다.
다행히, 우물가에서 크라터 의상실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다행인 점은 딱 그것뿐이었다.
“빨래 하나 하는 걸 가지고 뭘 이리 꾸물대는 거니?”
릴리 로투스가 마지막 빨래를 들고 왔을 때 누군가 가게 문 앞을 막아섰다. 마담 크라터였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눈에 쌍심지를 켜고는 릴리 로투스를 노려보았다.
“마담, 저는……”
“남의 돈 벌어먹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아? 아주 입만 열면 변명이지, 변명. 게으른 것! 감히 누굴 등쳐 먹으려는 거야!”
마담 크라터는 지친 릴리 로투스가 뭐라 변명하기도 전에, 벌컥 화를 내며 릴리를 밀쳤다.
릴리는 비명 한마디 지르지 못하고 풀썩 쓰러졌다. 종일 힘겹게 한 빨래가 길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칠칠맞기는. 당장 다시 빨아 와! 빨래가 끝난 뒤엔 2층을 청소하고!”
흥. 마담 크라터는 바닥에 나뒹구는 릴리를 비웃고는 휙 돌아섰다.
안쪽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구경하던 다른 직인들이 킥킥대며 릴리를 손가락질했다.
“다들 뭐 하는 거야? 얼른 일들 안 해?”
마담 크라터가 소리쳤다. 하지만 방금 전 릴리에게 윽박질렀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직인들 역시 웃는 얼굴로 꺄아악 소리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쾅!
문이 닫혔다.
어둑한 거리에 릴리가 혼자 남았다.
“하아.”
릴리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비척비척 일어났다.
그녀는 제 옷과 팔다리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는 대신, 찌그러진 대야에 흙투성이가 된 빨랫감을 하나하나 주워 담았다. 그리고는 비틀비틀, 다시 우물가로 향했다.
길가의 가게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에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지독히 피곤해 보였다.
이후 릴리는 흙투성이 옷감을 다시 빨래하고, 가게로 돌아가 자신의 빨랫감은 물론 다른 직인들이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빨랫감을 모두 탈탈 털어 널었다.
그러고는 2층, 의상 제작실로 올라가 다른 직인들이 옷감을 자르고 꿰매고 옷을 만들 동안, 바닥에 떨어진 조각과 실을 줍고 쓸었다.
그녀가 힐끔힐끔, 옷본을 쳐다볼라치면 직인들이 짜증을 내며 그녀를 밀쳤다.
릴리가 좀 큼지막한 옷감을 주울라치면, 도둑이라고 몰아세우며 뺨을 때리거나 팔을 꼬집었다. 그러면 어김없이 1층에 있던 마담 크라터가 올라와 그녀에게 심한 벌을 주었다.
그녀의 손톱은 뾰족했고, 구두 굽은 날카로웠다. 무엇으로도 릴리를 상처 입힐 수 있었다.
반박하거나 반항하거나, 하다못해 다 내던지고 뛰쳐나가야 할 상황이건만, 릴리는 반항하지 않았다.
자신을 변호하지도 않았다. 그저 지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제게 쏟아지는 비난과 체벌을 받아들였다.
그녀의 얼굴엔 그저 체념의 빛이 흘렀다.
루이먼드는 루비아나의 도움을 받아 가게 안을 들여다보며 경악했다. 창백해진 그의 얼굴이 지상의 달처럼 하얗게 빛났다.
그는 지난 생에 변태 귀족에게 팔려 가 허드렛일을 하는 하인으로 살았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밑바닥 삶을 제법 안다고 자부했다.
그런 그가 보기에도, 크라터 의상실의 상황은 처참했다.
“어, 어떻게 이럴 수 있죠?”
루비아나의 옷소매를 붙잡은 루이먼드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루비아나는 그의 손을 잡아 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희생자를 만들어 내부 결속을 다지는 행태일 겁니다. 계획적으로 희생자를 만드는 건지, 의식 없이 그냥 마음에 안 드는 한 명을 찍어 괴롭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군대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다.
만만한 한 명을 찍어 괴롭히면서 죽음의 두려움을 외면하고, 자기들끼리 공범 의식을 다지는 짓거리.
현재의 괴로움이 바로 저 사람 때문이라는 듯 괴롭히다가, 그 사람이 없어지면 또 다른 누구를 지목하여 몰아세우는 괴롭힘.
이유가 어쨌든, 범죄였다. 모든 사람이, 모든 힘든 상황에서 그런 짓거리를 하는 건 아니니까.
상황이 힘들수록 서로를 위로해 주고, 힘을 합쳐 누군가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상황을 좀 더 좋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힘든 상황을 변명 삼아 누군가를 괴롭히는 행위는 결코 공감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루비아나는 군에서 그런 일이 발생할 때마다 가해자들을 엄벌에 처했다. 피해자가 입은 피해를 확인하여, 심하면 가해자들의 목을 베기도 했다.
힘들다고 동지를 따돌리는 행위는 곧, 군의 기강을 갉아먹는 죄니까. 군법에 의거해 사형에 처할 만한 중죄였다.
그 같은 거지 같은 상황이 크라터 의상실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크라터 의상실은 밤이 깊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
괴롭힘당하는 릴리 로투스도, 마담 크라터에게 동조해 릴리를 괴롭히며 낄낄대는 직인들도, 달이 뜬 지 한참 되었는데도 퇴근하지 못했다.
밤인지 새벽인지 분간이 안 갈 때가 되어서야, 더러는 창고에 쌓아 둔 옷감을 침대 삼아 잠들고, 더러는 얼굴이 누렇게 떠 가게를 떠났다.
릴리 로투스도 길을 나섰다.
루이먼드는 종일 그녀를 따라다녔고 함께 밤을 새우다시피 하였건만, 피곤한 줄 모르고 그녀를 뒤쫓았다. 루비아나 역시 조용히 뒤를 따랐다.
루비아나야 어두운 밤거리의 일부인 듯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루이먼드는 제 발소리도 숨기지 못했다.
그런데도 릴리 로투스는 누가 자신을 뒤쫓고 있는 줄도 몰랐다.
물먹은 솜처럼 지치고 지친 그녀는, 차라리 이 밤거리의 어둠이 자신을 집어삼켜 주길 바라면서 비틀비틀 길을 걸었다.
한참을 걸어, 골목을 굽이굽이 걸어 들어가 도착한 곳은 다 쓰러져 가는 낡은 집이었다. 문은 잠겨 있지도 않았다.
삐걱. 릴리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위험하니까 문 잠그고 자랬지.”
문 안에서 지친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잠든 동생들을 혼내는 릴리마저, 문을 잠그는 걸 잊었다.
한 뼘 정도 열린 문을 통해 안의 소리가 들렸다.
릴리는 바로 잠들지 않았다.
동생들이 어질러 놓은 집을 치우고, 자신을 기다리다 울며 잠든 어린 동생들을 하나하나 안아 이불 위에 눕혔다.
동생들이 종일 뭘 먹었는지 확인하는 듯하더니, 자신은 말라비틀어진 빵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천천히, 오래오래 씹었다. 그러고는 물을 한 대접 들이켰다. 아마도 그게, 그녀가 오늘 먹는 첫 끼인 듯했다.
“……너무 힘들어. 엄마, 아빠, 왜 그렇게…… 떠나 버리신 거예요?”
희미한 흐느낌이 들렸다.
“…….”
루이먼드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한 뼘 열린 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눈은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보일 정도로 붉게 충혈해 있었다. 한 번만 눈을 깜빡여도, 겹겹이 쌓여 있던 눈물이 펑펑 쏟아질 듯했다.
“루이.”
루비아나가 루이먼드의 어깨를 토닥였다. 루이먼드는 그 손을 꽉 움켜잡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기어이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렸다.
‘……난, 쓰레기야.’
루이먼드는 자신의 미지근한 눈물을 저주했다.
이 순간, 그는 당장 릴리 로투스를 도울 수 있는 재력과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감히 나서길 주저했다.
오르카를, 폴 네리오를 망쳤듯 천재 의상 디자이너 릴리 로투스의 미래마저 망쳐 버릴까 봐 무서워서.
루이먼드는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려 바닥에 부딪치더니 산산이 부서졌다.
새벽이 너무 금방 찾아왔다.
해가 뜨기 전, 릴리 로투스가 집을 나섰다. 어린 동생들은 눈을 뜨지도 못하면서 릴리 로투스에게 매달렸다.
“언니, 가지 마.”
“누나 안 가면 안 돼?”
“언니, 배고파.”
“응, 응. 언니가 오늘은 꼭 일찍 올게. 어디 나가지 말고, 문단속 잘하고 집에만 있어. 배고프면 저 단지 안에 든 빵을 나눠 먹고. 혹시 어딜 가더라도 꼭 셋이서 함께 다녀야 해. 알았지?”
“꼭 일찍 와야 해애-.”
“밥 안 먹고 기다리고 있을 거야.”
“가지 마아.”
릴리 로투스는 오늘도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며, 동생들을 달래고 집 문을 닫았다.
문 앞에 잠깐 서서 동생들이 문을 잘 잠그는지, 걸쇠 거는 소리를 듣고야 돌아섰다.
밤새 근처에서 한숨도 못 자고 서 있었던 두 사람이 그녀를 쫓아 걸었다.
루이먼드의 눈은 비틀거리는 릴리 로투스의 뒷모습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
루비아나는 그런 루이먼드를 보며 톡톡, 손끝으로 허리춤에 찬 칼 손잡이를 두드렸다. 뭔가 생각할 때의 버릇이었다.
‘일단 루이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보고, 그다음에 움직여도 늦지 않겠지.’
루비아나의 시선 끝에 릴리 로투스가 걸렸다. 그녀는 이미 릴리 로투스를 돕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일찌감치 마음을 정한 루비아나와 달리, 루이먼드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릴리 로투스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걸어가 크라터 의상실의 뒷문을 열고 들어가기까지.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행동하는 게 옳은 거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 속이 끓었다. 고작 열다섯.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아이가 저런 핍박을 받으면서, 고된 일에 시달리다니?
오르카 미술 학교에서 활짝 웃으며 그림을 그리던 아이들 중에는 릴리 로투스 또래도 몇 있었다. 그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던 게 바로 어제 같건만.
‘릴리 로투스만의 문제가 아니야. 수도의 뒷골목, 어느 곳에 들어가도 저 정도 힘든 아이는 널리고 널렸어.’
루이먼드는 애써 참담한 마음을 외면하려고도 해 봤다.
‘불쌍해? 불쌍하면 어쩔 건데? 도와줄 거야? 왜? 후원이라도 하게? 또 제국의 역사책에 기록될 만한 천재를 망쳐 버리려고?’
마음속 목소리는 잔인하게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푹푹 헤집었다.
틀린 말이 아니기에, 루이먼드는 반박할 수 없었다.
오르카도, 폴 네리오도, 결국엔 제국 미술 대전에 작품 한 점 못 내지 않았던가?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힘들면 돼. 조금만 더 버티면, 곧 천재 의상 디자이너로 성공할 수 있을 거야.’
루이먼드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크라터 의상실로 들어가는 릴리 로투스를 외면했다.
그런 루이먼드를 바라보는 루비아나의 녹색 눈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톡. 검 손잡이를 두드리던 손이 멈춰 섰다.
‘지금은 많이 힘들고 괴로워도, 버티면 나중엔 성공할 테니까. 지금 아픈 것을, 그 이상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 테니…….’
루이먼드가 이렇게 애써 합리화하며 돌아서려 할 때였다.
“루이.”
“릴리이이이이!”
루비아나가 그를 불렀다. 동시에 귀청을 쥐어뜯는 듯한 고함 소리가 거리에 웅웅 울려 퍼졌다. 순간, 귀가 먹먹해져서 눈앞이 어질할 정도였다.
“어휴, 또 저러네. 또 저래.”
“저러다 애 잡지. 아니, 왜 쟤만 가지고 난리야? 일도 빠릿빠릿하게 잘하더만.”
“저 여편네 속을 누가 알아? 부모도 없고 만만하니까 장난감처럼 손에 쥐고 흔드는 거지, 뭐.”
주변 가게에서 수군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컥, 크라터 의상실 뒷문이 열리며, 방금 걸어 들어갔던 릴리 로투스가 데굴데굴 굴러 나왔다.
“……!”
돌아서던 루이먼드가 돌처럼 굳었다.
“이 계집애,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그 귀한 공단 자투리 모아 놓은 걸 통째로 훔쳐 가?”
“아, 아니에요. 전 진짜 아니에요!”
릴리 로투스가 겨우 고개를 들고 쿨럭쿨럭, 기침하며 말했다.
목소리가 당장 끊어질 듯 가느다랬다. 먹은 거라고는 어젯밤에 먹은 딱딱한 빵 한 조각이 전부이니, 힘이 달려 그런 것이건만.
마담 크라터에게는 도둑이 제 발 저린 목소리로 들리는 듯했다
“제대로 대답 못 하는 걸 보니, 역시 네 짓이구나. 이 도둑고양이 같으니라고. 이런 걸 내가 거둬서 일을 시키고 월급을 줬다니!”
마담 크라터가 릴리 로투스를 발로 찼다. 살집이 두툼한 중년 여성의 발길질에, 짚단처럼 비쩍 마른 릴리 로투스는 버티지 못하고 나동그라졌다.
릴리는 비명조차 내뱉지 못했다.
‘저 조그만 아일, 때릴 때가 어디 있다고!’
루이먼드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만……”
그대로 뛰쳐나갈 뻔하였으나, 그 발을 붙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왜? 또 망쳐 버리려고? 오르카, 폴 네리오처럼?’
앞으로 나서려던 발이 움찔, 굳어 버렸다.
‘뒷골목 빈민가 아이들이 저렇게 사는 거 몰랐어? 아니잖아. 어디 저런 애들이 한둘인 줄 알아? 걔들을 다 구할 수 있어? 그것도 아니면서 고작 저 애 하나만 보고 가슴 아파하는 거, 위선 아냐?’
루이먼드가 이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마담 크라터가 버럭 소리 질렀다.
“너 같은 것을 고용해 줬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저 뒷골목에 너 같은 애, 아니 너보다 나은 애가 널리고 널렸어. 알아? 그런데도 널 고용해 줬으면, 그 은혜를 알고 죽어라 일해야지, 어디서 도둑질이야, 도둑질이!”
“전 훔치지 않았어요!”
릴리 로투스가 목 놓아 외쳤다.
그녀가 결백하다는 걸 루이먼드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어젯밤, 빈손으로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가는 릴리를 뒤쫓아 갔으니까.
‘그래서 뭐? 다들 저렇게 크는 거야. 억울하겠지. 그러니까 다시는 저런 취급 당하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일하게 되겠지. 그래서 실력이 늘어, 공모전에 당선했던 거 아니겠어? 내가 나서서 도우면 천재 의상 디자이너 릴리 로투스의 화려한 미래는 없어질지도 몰라.’
마음속 경고가 백번 옳았다. 머리로는 납득했다. 하지만. 하지만 심장이, 그건 아니라고 두근두근 뛰었다.
“비아.”
“네, 루이.”
“이 수도에는…… 아니, 당장 이 거리에만도 저런 사람이 많이 있겠지요?”
루이먼드는 릴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제대로 대접도 못 받고, 제대로 돈도 못 받고, 혹사당하는 사람. 그나마 이런 일이라도 할 수 있어 굶지 않고, 가족들을 먹일 수 있는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고 참고 견뎌야 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수두룩하고, 릴리 로투스는 그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니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아니, 그럴 수 없어. 그러기 싫어.’
루이먼드는 주먹을 움켜쥐고, 고개를 돌려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물기 진 검은 눈이 촉촉하게 빛났다. 하지만 평소처럼 처연해 보이지 않았다. 새벽이슬을 머금은 백합처럼 단단하고 강해 보였다.
루비아나는 그 강한 결심에 경의를 표하며, 검 손잡이에 대고 있던 손을 내렸다.
“세상 모든 불행한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힘이 없다고 해서, 당장 내 눈앞에 있는 불행한 사람을 구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까?”
“……아니요.”
“눈에 보이는 사람만이라도, 내 힘이 닿는 만큼이라도 할 수 있다면 하면 됩니다.”
제국을 보살피는 건 황제의 몫. 당장 눈앞의 사람을 보살피는 건 인간의 몫.
인간이 인간다운 일을 하겠다는데, 문제 될 게 뭐가 있단 말인가? 하물며 그 인간이 그냥 인간이 아니라 아쉴레앙 공작의 부군인데.
“구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구하십시오. 뒷일은 당신 아내가 책임질 겁니다.”
루비아나는 방금 전까지 검 손잡이를 두드리던 그 손으로 루이먼드의 등을 살짝 밀었다.
그 손길에, 루이먼드는 비로소 확신을 얻었다.
‘그깟 천재 디자이너가 뭐가 중요해?’
눈앞에서 사람이,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아이가 저런 일을 당하고 있는데.
“멈춰!”
루이먼드가 달려 나가 릴리 로투스를 밟으려 발을 높이 든 마담 크라터 앞을 막아섰다.
뒤따른 루비아나는 여유롭게, 바닥에 쓰러진 릴리 로투스를 일으켜 세웠다.
“……!”
릴리는 갑자기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실감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안녕, 아가씨.”
“……저, 저요?”
“그래. 이제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예?”
“내 남편이 너를 구해 주러 왔거든.”
“예에에?”
루비아나가 저길 보라는 듯 루이먼드를 턱짓했다.
릴리는 멍하니 제 앞을 막아선 널찍한 등을 바라보다가, 도로 고개를 돌려 절 일으켜 세운 사람을 다시 보았다.
릴리와 눈이 마주치자, 루비아나가 씩, 웃어 보였다. 후드 속에서 언뜻 보이는 녹색 눈과 여유로운 웃음.
“…….”
릴리는 넋이 나가 버렸다.
‘이런.’
루비아나는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딱히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또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