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131)

***

루이먼드는 자신의 등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당장 눈앞에 놓인 적 - 마담 크라터를 상대하느라 정신없었다.

“넌 또 뭐야? 말 뼉다구 같은 게 굴러들어 와서는 왜 남의 가게 일에 끼어들고 지랄이야, 지랄이!”

마담 크라터가 방방 날뛰었다.

“성년식도 치르지 않은 아이를 고용해선, 밤늦게까지 부려 먹고, 훔치지도 않은 걸 훔쳤다고 누명을 뒤집어씌워 사람을 핍박하고 때린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큰소리지?”

루이먼드는 조곤조곤 따져 물었다.

마담 크라터가 방방 날뛸수록 루이먼드는 더욱 차분해졌다.

‘정말 별것 아닌 사람이구나.’

마담 크라터가 하찮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 잘난 가게 하나 있는 걸로 저렇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뛸 수도 있구나, 신기하기까지 했다.

“뭐? 하- 이건 또 뭐야? 내가 저 불쌍한 거 거둬들여 주고 일 시키고 돈까지 주는 데 한 푼 도와준 적 있어? 길 지나가던 중이었으면 얌전히 지나갈 것이지, 뭐 잘났다고 참견질이야, 참견질은!”

“참견할 만하니까 참견하는 거네만.”

“니가 뭔데!”

“나?”

“그래!”

“아쉴레앙 공작의 부군인데.”

말하는데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문득, 절 구하기 위해 그레이움 백작저에 쳐들어온 루비아나가 생각났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비아를 조금이라도 닮았을까?’

부디 그렇기를. 부부는 닮는다지 않는가? 그러니까, 부부인 비아를 닮아 조금이라도 더 당당해질 수 있기를.

“뭐? 하, 니가 아쉴레앙 공작 부군이면 나는 이 제국의 황제다, 황제! 어디서, 정신 나간 게 굴러들어 와서는 행패야, 행패가!”

순간, 마담 크라터의 얼굴 위로 일렝시아 백작 부인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루이먼드는 주먹을 꾹 움켜쥐고, 당당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는 거겠지?”

“너나 책임져라, 너나!”

“물론, 기꺼이.”

루이먼드는 푹 눌러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찬란한 은발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은발의 미인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건 둘째였다.

마담 크라터는, 그리고 어느새 주변에 몰려들어 구경하던 거리 사람들이 일제히 숨 쉬는 걸 멈췄다.

루이먼드는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거리 한가운데 서서, 뒤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비아. 여기, 황제 폐하시라는데요.”

그제야 마담 크라터는 릴리 로투스를 부축하고 있는 루비아나를 발견했다.

“너, 넌 또 뭐야!”

루이먼드의 미모에 놀랐으면서 안 놀란 척, 마담 로투스가 버럭 소리쳤다.

‘서,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어.’

불안한 예감이 몰려들었기에, 더더욱 흥분해 나댄 감이 없지 않았다.

겁먹어 한풀 기세가 꺾인 주제에 아닌 척 몸을 부풀리고 으르렁대는 모습이라니. 루비아나 앞에 선 북부의 마수들이 흔하게 보이는 행동이었다.

루비아나는 가소로워하며 후드를 벗었다.

루비아나는 늘 루이먼드의 은발이 눈에 잘 띈다고 걱정하고 염려했다. 하지만 루이먼드가 보기엔 그녀의 적발 역시 만만치 않았다.

타오르는 횃불 같은 붉은 머리카락. 그리고 강인한 녹색 눈.

누구든 그녀를 단번에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아, 아쉴레앙 공작?”

마담 크라터가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정답.”

루비아나는 씩, 웃어 보였다.

“감히 내 앞에서 황제 폐하를 사칭하다니!”

“그, 그게…… 그런 게 아니라!”

“내 남편에게 대뜸 소리를 지르던데.”

“아니, 그건…… 모, 모르고…… 모르고 그랬……”

“목숨이 여러 개인가?”

궁금해서 물어보았을 뿐인데.

사아악.

마담 크라터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위험에 처했는지 깨닫고는 바로 무릎을 꿇었다. 쾅. 돌바닥에 무릎 부딪치는 소리가 굉장했다.

“사, 살려 주십시오. 그러려던 게 아니었습니다요!”

마담 크라터가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몰려든 구경꾼들도 혹시나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봐 후다닥 달아났다.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밖을 내다보던 마담 크라터의 다른 직인들도 서둘러 가게 안으로 피신했다.

거리는 금세 썰렁해졌다.

마담 크라터는 무릎 아픈 줄 모르고 손바닥이 닳도록 빌고 또 빌었다.

“잘못, 잘못했습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그녀가 용서를 구하는 대상은 분명했다. 아쉴레앙 공작, 루비아나.

‘태도가 바로 바뀌는군.’

루이먼드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

릴리는 마담 크라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릴리에게 마담 크라터는 거대한 벽이었다. 무찌를 수 없는 마수였고, 벗어날 수 없는 지옥이었다.

그런데 마담 크라터가, 고작 아쉴레앙 공작의 등장에 저렇게 벌벌 떨며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그 광경은 릴리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루비아나가 릴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릴리가 흠칫, 놀라며 겁먹은 얼굴로 루비아나를 올려다보았다.

‘마담 크라터를 말 한마디로 저렇게 만들었어. 이 사람은 얼마나 더 무서운 사람일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어깨를 감싼 손은 분명 온기를 띠고 있는데, 그 온기가 릴리에게 닿지 않았다.

릴리는 당장이라도 이 손이 제 머리를 쥐어박고 제 어깨를 부러뜨릴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루비아나가 어깨를 놓고 손을 들었을 때.

‘그럴 줄 알았어.’

지레짐작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로브를 벗어 주려고 했던 루비아나가 우뚝 멈췄다.

“……!”

루이먼드는 단번에 릴리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렸다. 그 역시 첫 번째 삶에서 일렝시아 백작 부인에게 당한 후 한동안 누가 옆에 다가오기만 해도 깜짝깜짝 놀랐으니까.

그는 눈가가 붉어져서는 마담 크라터를 노려보았다.

루비아나는 원래 하려던 대로, 로브를 벗어 릴리를 덮어 주었다.

각오했던 매질이나 폭력적인 욕설 말고 다른 게 자신을 감쌌다. 마치 보호해 주려는 듯이. 릴리는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두려워하지 마. 더 이상 이유 없이 맞을 일은 없을 테니까. 이유가 있다 해도 맞으면 안 되겠지만.”

“…….”

“고개를 똑바로 들고, 저쪽을 제대로 보렴.”

루비아나는 마담 크라터가 쓰러져 있는 쪽으로 릴리의 뺨을 살짝 밀었다.

“저렇게 나약하고 별 볼일 없는 인간이 널 괴롭히고 있었던 거란다.”

“…….”

“지금 이 자리에서 너에게 사과하라고 내가 명령한다면 저 사람은 손이 발이 되도록 네게 빌 거란다. 잘못했다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말하겠지. 그리고 너에게 용서를 구할 거야.”

“……!”

릴리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듯 떨렸다. 루비아나는 한 손으로 릴리의 어깨를 지그시 눌러 주었다.

“하지만 그건 진심으로 뉘우치는 게 아니야. 그저 내 권위에 눌려 억지로 네게 굽힐 뿐인 거지. 너는 그걸 바라니? 그렇게라도 사과받고 싶다면, 그렇게 해 줄게.”

루비아나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내일 아침에는 사과를 저며 넣은 빵을 먹을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릴리는 루비아나의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한 박자 말고, 두 박자 늦게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눈을 크게 떴다.

“왜……?”

“왜 이런 말을 하느냐고? 아니면 왜 이렇게까지 해 주느냐고?”

“…….”

둘 다 묻고 싶었기에 릴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일단 내 질문에 먼저 대답해 봐.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니?”

“저는…….”

“그래, 너는.”

“……아니요. 아니에요!”

고민하던 릴리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쪽을 대놓고 힐끔대던 마담 크라터의 얼굴이 대번 환해졌다.

“네가 아주 배은망덕하지는 않구나. 그래, 은혜를 원수로 갚으면 쓰니! 나만 아니었어도 너랑 네 동생들은 길바닥에 나앉아서 굶어 죽었을……”

“지금, 이렇게는 아니에요.”

“뭐? 너 지금 내가 말하는데……”

“지금 이렇게 사과를 받으면, 저 사람은 다 잊을 거잖아요. 나는 사과를 받고 용서해야 하고. 그건 싫어요.”

“배은망덕하긴! 감히 내게 뭐라고 지껄이는……”

“나는 당신을, 평생 용서하지 않을 거야.”

릴리가 루비아나를 등지고 서서 마담 크라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너무 일찍 철이 들어 버려서일까? 릴리는 눈치가 빨랐다. 루비아나와 루이먼드가 자신의 편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의지할 사람이 생긴 소녀는, 그간 자신을 짓누르던 거대한 벽과 당당히 맞섰다.

릴리는 마담 크라터를 바라보며, 심장을 씹어 삼키듯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이 나한테 한 짓, 절대 잊지 않을 거예요. 다 기억하고, 반드시 복수할 거야.”

그 독기 품은 눈빛은 마담 크라터를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네, 네가 감히!”

마담 크라터가 발끈하자, 루이먼드가 얼른 릴리의 앞을 막아섰다. 마담 크라터는 움찔하며 얼른 입을 닫아걸었다.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겐 약한 모습이 여실히 드러났다. 릴리는 경멸을 숨기지 않았다.

루비아나는 릴리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복수심은 자기 자신을 망치는 양날의 칼이다. 복수해 봤자 소용없다, 허무할 뿐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많이 말하던데.”

“……이제 와서, 복수할 생각 따윈 하지 말라는 건가요?”

“아니, 난 그렇게 생각 안 한다고 말하려고 했단다.”

루비아나는 릴리의 양어깨를 손으로 잡고, 마담 크라터를 똑바로 바라보도록 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릴리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네 안의 칼을 벼리렴. 절대 그 칼을 버리면 안 돼. 대신, 저 사람을 파멸시키는 걸 목표로 삼지 마.”

“그럼요?”

“저 사람이 파멸시키려고 했던 너 자신을 최고로 만들어. 그리고 시간이 남으면 심심풀이 삼아 저 사람을 눌러 버려. 하지만 그때쯤 되면, 저 사람은 이미 난도질되어 네 앞에 동동 떠내려와 있을 거란다.”

“……결국, 복수하지 말란 말 아닌가요?”

“아니. 때를 기다리라는 거지.”

“때, 요?”

“그래. 완벽한 복수를 위한 준비는 10년도 부족하단다. 원래 못된 인간이 오래 사는 법이니까, 시간은 충분해. 차근차근 준비해도 늦지 않아.”

복수란 가장 달콤한 열매가 익을 때까지, 그 열매를 딸 준비를 해 나가면 된다.

복수라는 열매를 딸 때의 희열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

릴리 로투스는 루비아나의 말을 들으며 마담 크라터를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그리고 제 몸을 덮은 로브 자락을 꽉 움켜잡았다.

벅찬 삶에 짓눌려 죽어 있던 눈동자에 다시 빛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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