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131)

***

릴리 로투스가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르자, 루비아나가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휘파람 소리가 끝나기 전, 여기저기 골목에서 부하들이 걸어 나왔다. 열 명 남짓했다.

루비아나는 그들에게 뒷정리를 맡기고 루이먼드와 릴리 로투스만 챙겨 자리를 떴다.

바로 아쉴레앙 공작저로 갈 생각이었지만, 릴리가 동생들을 걱정했기 때문에 일단 그녀의 집으로 돌아갔다.

루비아나는 부하에게 빵과 우유를 사 오도록 해 릴리와 그녀의 동생들을 배불리 먹였다.

눈치만 보며 릴리에게 다닥다닥 붙어 있던 어린 동생들은 부드러운 빵을 배불리 먹고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릴리가 동생들을 챙기려고 하자, 루이먼드가 일어섰다. 루이먼드는 익숙하게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안아 들어 침대에 눕혀 주었다.

루비아나와 릴리가 아까 못다 한 이야기를 마저 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건만, 그 배려는 안 하느니만 못한 것이 되었다.

루비아나가 잠시 릴리를 잊고, 아이를 안아 드는 루이먼드를 흐뭇하게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애를 낳으면, 잘 돌보겠어.’

자신이 낳은 아이를 안고 우쭈쭈하는 루이먼드를 상상해 보노라니, 괜히 흐뭇했다.

루이먼드가 아이들을 다 안아 옮기고 자리로 돌아오자, 루비아나는 릴리에게 제안했다.

“후원을 약속하지. 동생들 걱정도 하지 말렴. 네가 자리 잡고, 네 동생들이 자립할 때까지 돌봐 줄 테니.”

“아…….”

기뻐할 줄 알았건만 릴리는 떨떠름해 보였다.

“절 도와주시고, 절 동정해 주신 것은 감사드려요.”

올 게 왔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고 말하는데, 목소리가 담담하고 표정이 무던했다. 동정받는 걸 부끄러워하는 건 아닌 듯했다.

문제는 릴리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상처였다. 꽤 부유한 상인이었던 부모님은 어느 귀족의 말뿐인 후원을 믿고 일을 크게 벌였다가 파산하고, 어려운 생활을 이어 가던 중 사고로 죽었다고 했다.

귀족에게, 귀족의 후원에 거부감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당장 마담 크라터의 가게에서 일할 수 없게 되었는데도, 릴리는 루비아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니 감사하지만, 대가 없는 후원은……”

“말을 정정하지.”

“네?”

“이건 대가 없는 후원이 아니야. 보상이지.”

“보상이요?”

릴리가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넌 그런 취급을 받으면 안 됐어. 그리고 제국은, 네가 그런 상황에 부닥쳤을 때 널 구했어야 했어. 하지만 그러지 못했지. 제국의 주인이신 황제 폐하와 폐하의 명을 받들어 나랏일을 하는 모든 황실 관리, 귀족들을 대신하여 네게 사과하마. 미안하다.”

“……미안, 하다고요?”

설마 귀족에게, 그것도 제국에 단 셋뿐인 공작 중 하나에게 사과받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터. 릴리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오늘 절 도와주신 걸 감사해야……”

“아니, 그건 당연한 거였어. 고마워할 필요 없어.”

“…….”

릴리가 눈을 깜빡였다. 지금 눈앞에서 사과를 운운하는 사람이 정말 아쉴레앙 공작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듯했다.

루비아나는 칼 손잡이에 새겨져 있는 은장 백합 문양을 가리켜, 자신이 정말 아쉴레앙 공작임을 확인해 주었다.

“아직 체계가 안 잡혔다는 말로 변명할 순 없겠지. 그리고 앞으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도 없고. 분명 황제 폐하의 눈과 귀가 미치지 않는 골목 어디에서든,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이런 일이 계속될 테니까.”

루비아나의 태평한 말에, 릴리의 눈빛에서 원망의 기색이 스쳤다. 루비아나는 그 눈빛을 받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나는, 우리는 눈에 띄는 대로 너를, 너와 같은 처지에 처한 아이들을 구할 거야.”

“……구한, 다고요?”

릴리가 멈칫했다.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루이먼드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폐하의 제국은 반드시 그럴 거란다.”

폭군이라 불렸던 폐왕의 왕국과 달리.

루비아나는 탁자 아래 숨어 있던 릴리의 손을 붙잡았다. 무릎 위에서, 주먹 쥔 채로 파르르 떨고 있던 그 손을 제 손으로 감싸 주었다.

“고생했다. 힘들었지?”

이는 눈앞의 릴리 로투스에게 하는 말이었으며, 제국의 어디에도 있을 또 다른 릴리 로투스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무표정하던 릴리 로투스의 얼굴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아니, 이게 왜…… 내, 내가 왜…….”

당황하여 옷소매로 눈가를 문지르던 것도 잠깐뿐이었다. 결국 릴리는 울음을 터뜨렸다. 아니, 절규했다.

마담 크라터에게 핍박당하면서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었다. 남의 힘을 빌려 마담 크라터에게 사과받을 수 있고, 복수할 수 있었던 순간에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래, 세상의 그 어떤 어른도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 힘들지 않느냐고, 고생했다고 다정히 말해 주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루비아나가.

릴리는 참지 못하고 루비아나에게 달려들었다.

루비아나는 기꺼이 두 팔을 벌려 그녀를 안아 주었다. 제게 매달려 오열하는 릴리를 끌어안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

루이먼드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울음을 삼켰다. 눈시울이 붉어진 지 이미 오래였다.

“언니? 우는 거야?”

“누나, 누나아아.”

“으아아아앙.”

잠들어 있던 아이들이 하나둘 깨어나 릴리에게 달려들었다.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집은 금세 아이들의 울음으로 가득 찼다.

루비아나는 우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녹색 눈은, 여러 감정이 뒤섞여 복잡해 보였다.

***

아이들이 울다 지쳐 나가떨어지고 릴리마저 지쳐 흐물거리자, 루비아나는 릴리를 다시 의자에 앉혔다.

루이먼드는 얼른 아이들을 받아 들어 짚으로 만든 침대에 눕혔다. 그러고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뒤척이며 칭얼대는 아이들을 토닥여 주었다.

루비아나는 그 모습에 넋을 잃는 대신 릴리에게 물었다.

“앞으로 뭘 하고 싶지? 계속 의상실에서 일하고 싶다면, 좋은 곳에 추천서를 써 주지.”

릴리를 마담 루르에게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릴리는 루비아나의 제안을 듣자마자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뭐? 어째서?”

되묻는 말은 앞이 아니라 옆에서 들렸다. 범인은 루이먼드였다.

“저는…….”

릴리는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의상실에서 일했던 건, 그저 먹고살기 위해서였을 뿐이에요. 저를 받아 주는 곳은 그곳뿐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럼, 하고 싶은 일이 따로 있는 건가?”

루이먼드와 루비아나가 동시에 말했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와 눈을 한 번 마주치고는 다시 릴리를 바라보았다.

“아니면, 하고 싶은 공부가 있다든가.”

“저, 저는 기사가 되고 싶어요!”

릴리가 재빨리 대답했다. 조금 전 머뭇거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얼마나 간절한지 알 수 있었다.

“기사?”

“네. 공작님을 지키는 기사가 되고 싶어요. 저, 저 같은 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요.”

이번엔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푹 숙이기까지 했다.

이제야 열다섯,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아이로 보였다. 처음 보는 풋풋한 모습이었다.

릴리 로투스는 의상 디자이너가 되어 죽어 가는 세르딤 직물 산업을 살려야 한다. 오직 이 바람 하나로 여기까지 달려왔던 루이먼드로서는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릴리에게 의상 디자이너로서 성공한 삶이 얼마나 화려하고 풍족하고 끝내주게 멋있을지 설명하며, 릴리의 마음을 바꿔 보려고 애썼다.

“반드시 성공할 거야. 너 정도 실력이면 수년 내에 제국 최고의 의상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 거야!”

“제가 만든 옷을 본 적도 없으신데 어떻게…….”

릴리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이상하다 싶은 건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 그게 뭐가 중요해! 천재는 딱 보면 알 수 있는 거 아니겠어?”

루이먼드는 대충,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려고 했고.

“천재요? 제가, 요?”

“내가 보증할게. 넌 반드시 제국 최고의 의상 디자이너가 될 거야!”

”저의 뭘 보시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감사합니다. 하지만…….“

릴리는 루이먼드의 말을 경청하면서도 힐끔힐끔,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안, 될까요?”

릴리가 루비아나에게 물어보았다.

“으허어어…….”

루이먼드는 두 손으로 뺨을 움켜잡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눈앞에 릴리 로투스가 있는데, 그 릴리 로투스가 의상 디자이너가 아니라 기사가 되고 싶다고 하고 있어.’

역시 일곱 번 죽고 여덟 번째 살고 있다고 생각해 왔던 건 착각이었던 걸까?

루이먼드는 아직도 섬뜩한, 목을 잘렸던 지난 일곱 번의 죽음을 떠올리며 동공 지진했다.

그는 구원을 바라며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루이먼드와 릴리 두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루비아나는 뭐가 문제냐는 듯 대답했다.

“글쎄. 될지 안 될지는 해 봐야 알겠지.”

“…….”

“…….”

그녀의 대답은 두 사람 중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너라면 분명 할 수 있을 거다. 비쩍 말랐지만 골격이 좋아 보이는구나. 남들은 몰라봤지만 아쉴레앙 공작인 나는 알아볼 수 있는 선천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어.

내심 이런 말을 기대했던 릴리는 실망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데 머리 위로 루비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해 보렴. 재능이 있고, 노력한다면 되겠지.”

“네? 저, 정말요?”

“안 되면 다시 하고 싶은 걸 찾으면 되겠지. 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아. 네 마음이 바뀌지 않는 한.”

듣기 바랐던 말은 아니었지만, 릴리의 오랜 꿈에 날개를 달아 주기엔 충분한 말이었다.

‘아아.’

루이먼드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탄식했다.

릴리 로투스는 갔습니다. 아아, 세르딤으로 드레스를 만들어야 하는 릴리 로투스가 떠나갔습니다. 기사의 길로.

릴리가 마담 크라터에게 괴롭힘당하는 걸 두고 보지 못하고 나섰을 때부터 단념하긴 했지만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그 희망이 잘근잘근 밟혔다.

밟은 사람이 루비아나라서, 루이먼드는 원망하지도 못했다.

‘내 세르딤 사업은 완전히 망했구나. 망했어.’

피먼스 상단주 얼굴은 어떻게 봐야 하나?

루이먼드가 절망하는 만큼, 릴리는 기뻐했다.

“공작님! 감사해요,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네가 꿈을 이룬다면.”

“네, 바로 아쉴레앙 공작저를 찾아가 공작님께 충성 맹세를 하겠어요!”

릴리는 당장이라도 검을 빼 들어 루비아나에게 바칠 듯한 기세로 외쳤다.

“아니, 그땐 나를 지키는 게 아니라 내가 지키는 분을 같이 지켜 줬으면 좋겠는데.”

“공작님께서 지키는 분이요?”

“그래.”

“설마……?”

“음, 그 설마.”

루비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는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했다.

“내가 지키는 분은 이 제국 그 자체이신 분이다. 지금은 내가 무척 재수 없다고 생각하는 놈이 그분을 지키고 있는데, 네가 훌륭한 기사가 되어 그놈을 밀어내고 폐하를 지켜 드렸으면 좋겠어.”

언제까지나 루단테가 제국 최고의 기사 자리를 차지하란 법은 없지 않은가?

‘슬슬 그 자식에게도 라이벌이 생길 때가 됐어.’

그 라이벌이 열다섯, 아직 검을 제대로 쥐어 본 적도 없는 기사 꿈나무긴 하지만.

루단테가 알았더라면 어디 이런 비쩍 곯은 꼬맹이를 자신에게 갖다 붙이냐고 길길이 날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엔 루단테가 없으니까. 루비아나는 마음껏 루단테를 욕하고, 릴리 로투스의 투지를 북돋웠다.

릴리 로투스는 시작이었다. 앞으로 루비아나는 기사 재능이 있는 새싹을 볼 때마다 ‘타도 루단테’라는 소박한 꿈을 심어 줄 생각이었다.

황제의 기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두고 봐야 알 일이지만, 일단은 마음에 들어.’

루비아나는 릴리를 훑어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째서인지 루이먼드는 이 소녀가 반드시 의상 디자이너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루비아나의 소견은 달랐다.

제대로 못 먹어서 비쩍 말라 있지만, 그리고 손은 바느질하며 생긴 굳은살로 덮여 있어 검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그런데도 빨래 방망이질로 다져진 튼실한 팔뚝과 단단한 하체는 눈여겨볼 만했다.

험난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버텼던 끈기. 끝까지 동생들을 챙겼던 성실함과 책임감. 가히 황제의 곁을 보필할 재목의 재능이라 할 만했다.

무엇보다 살아난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루비아나는 릴리에게 기사 학교 입학을 위한 추천장을 써 줄 것을 약속했다. 릴리와 동생들에 대한 경제적 후원은 당연히 뒤따랐다.

“감사합니다. 절대,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어요.”

릴리가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릴리 로투스 폰 알레이.

백합에 둘러싸인 연꽃 문장을 가문의 표식으로 삼은 초대 알레이.

루단테를 밀어내고 제국 최고의 기사로 손꼽히며, 죽는 날까지 황제 칼레나에게 충성하고 그 곁을 지킨 제국 제일검.

그 탄생의 서막이었다.

이 자리에 있던 누구도, 본인마저도 몰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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