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131)

***

릴리와 동생들은 머물 곳이 준비될 때까지 아쉴레앙 공작저에 머무르기로 했다.

이후 릴리는 기숙사가 있는 기사 학교로, 동생들은 아쉴레앙 공작저에서 후원하는 가정으로 보낼 예정이었다.

루이먼드는 동생들과 떨어지는 것을 불안해하는 릴리를 안심시켰다. 일주일에 한 번씩, 자신이 직접 동생들을 찾아가 구박받지 않고 살고 있는지 확인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 다음에야 마차가 움직였다.

한 대에는 릴리와 동생들이, 다른 한 대에는 루비아나와 루이먼드가 탔다.

루이먼드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어.’

그 릴리 로투스가 기사가 되고 싶단다. 기사 학교에 입학할 예정이란다. 의상 디자이너가 아니라!

창고에 쌓인 세르딤이 우르르 무너져, 그 밑에 깔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막막해서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고생 많았습니다, 루이.”

그 속내를 알 일 없는 루비아나는 루이먼드가 피곤해한다고만 생각했다. 편히 누워 쉬라며 권하기까지 했다.

루이먼드는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나도 피곤하지 않습니다. 뭐 한 일이 있다고요?”

“큰일을 해냈지요. 고통 받던 제국의 백성을 구하지 않았습니까?”

“비아, 당신이 해결한 거지요. 저는 그저, 나서기만 했을 뿐이지요.”

루이먼드가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나서서 릴리 로투스를 지키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용기에 경의를 표합니다.”

“아니요, 제발 그렇게 말하지 말아 줘요, 비아. 날 놀리는 게 아니라면요.”

“놀린다니요, 하나뿐인 남편인데.”

루비아나의 목소리에 웃음소리가 섞였다.

“……놀리는 게 맞았군요.”

루비아나는 진심이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루이먼드는 믿지 않았다.

“솔직히 이게 잘된 일인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나선 걸 후회하지는 않지만…… 아니, 왜 릴리 로투스가 의상 디자이너가 아니라 기사가 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지만!”

끄응. 루이먼드는 머리를 감싸 쥐고 신음했다.

“릴리 로투스가 그 가게에서 계속 일했다면, 최고의 디자이너가 되었을 거라는 말입니까?”

“네. 그렇게 돼야 했는데…… 이렇게 되어 버렸네요.”

루이먼드는 미래를 아는 사람처럼 확정적으로 말했다. 충분히 의심스러운 상황이었으나 루비아나는 더는 의심하지 않았다.

루비아나가 아무렇지 않게 듣고 넘기니 루이먼드 역시 자신의 말투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가 괜한 죄책감을 가지는 걸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툭 던지듯 말을 꺼냈다.

“어떤 아이가 있었습니다.”

“비아?”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어린애인데.”

루비아나가 말을 하다 말고 쓰게 웃었다.

‘릴리 로투스 이야기인가?’

루이먼드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을 들으며, 잠시나마 가볍게 넘겨들으려 했던 걸 깊이 후회했다.

“왕의 명령을 받아 수도로 떠났던 부모님이 잔인하게 죽임당했다는 소문을 듣고는 불안해서 밤잠을 못 이뤘지요. 가문의 분위기가 어두워지고, 동생은 울기만 하고. 그런 중에 가문의 후계자랍시고 애는 쓰는데,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고. 그저 버티고, 버티기만 했습니다.”

“비아.”

“그런 내게 누군가 와서, 네가 이 힘겨운 시기를 잘 버텨내면 공작이 될 거고 네 동생은 제국을 세우는 초대 황제가 될 거라는 말을 지껄였다면.”

“…….”

“나는 반드시 그자를 죽여 버렸을 겁니다.”

담담한 목소리. 그 속에 묻힌 슬픔의 무게에, 루이먼드는 숨이 막혔다.

녹색 눈이 위험하게 빛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저 섬뜩함만을 느꼈을 터이나, 루이먼드는 그 속에 담긴 진짜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루이먼드 역시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아니샤.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

몸에 흐르는 피의 반은 폭군의 것이었기에, 어머니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혹여나 그녀의 안식을 방해할까 봐.

그토록 소중한 사람을 잃은 상처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는다.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피를 철철 흘리며, 자신의 존재를 주장한다.

그러니 성인식을 치르지 않은 아이는 보호받아야 하며, 성인식을 치르지 않은 아이의 부모가 반드시 오래오래 살아야 한다. 아이가 적어도 부모만큼 자랄 때까지만이라도.

“비아, 나는…….”

루이먼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잘했습니다, 루이.”

이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고 있는 건 루비아나였다.

“만약 내 이야기 속의 소녀가 미래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그 소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부모님이 죽지 않고, 동생을 혼자 남겨 두고 떠나지 않아도 되는 미래를 선택했을 겁니다.”

동생이 황제가 되지 않아도 좋으니까, 자신이 공작이 되어 대륙 최고의 영광과 부를 얻지 않아도 좋으니까.

“불행 후에 오는 행복과 영광 따위, 단 한 번도 원한 적 없었으니까 말입니다.”

새삼 슬퍼하지 않았다. 그때도 흘리지 않은 눈물을 이제 와 흘릴 생각 따윈 없었다.

어차피 지나간 일. 되돌릴 수 없는 과거니까. 그 모든 걸 받아들인 사람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러니 릴리 로투스, 저 아이가 나와 당신의 방해로 미래에 최고의 의상 디자이너가 되지 못해도, 그럭저럭 밥벌이나 겨우 하는 하급 기사가 되어 박봉에 시달리게 된다 해도, 절대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미래를 보고 온 사람처럼 말하는 건 루이먼드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죄책감 같은 건……”

“비아.”

루이먼드가 와락, 루비아나를 끌어안았다. 아니, 루비아나의 품에 안겼다. 체격이 커서 그렇게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루비아나는 굳이 루이먼드의 목덜미를 꺾어 제압하지 않았다. 은빛 털을 가진 커다란 곰을 끌어안는다 생각하며 그대로 받아 주었다.

“루이, 숨 막힙니다.”

약간 불편한 것만 시정 요청할 따름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숨 쉬는 게 불편했다. 마수의 꼬리에 칭칭 감겨 갈비뼈가 부러졌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목을 간지럽히는 은발의 감촉은 마음에 들었다.

“아, 미안해요.”

루이먼드는 얼른 팔의 힘을 풀었다. 하지만 루비아나를 놓지는 않았다.

루이먼드는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입술을 달싹였다.

“저도 한 소년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조그만 목소리였다. 덜컹이는 마차 소리에 묻힐 뻔도 하였지만, 루비아나만큼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루이.”

“불행의 별 아래에서 태어난 것 같은 소년이었지요. 축복받지 못한 탄생이었습니다. 사생아. 아비라 부르고 싶지도 않은 자도 원하지 않은 아이였습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어머니를 불행하게 만들었지요.”

“…….”

루이먼드의 어깨를 다독이던 손길이 멈칫했다. 루이먼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끝내는 두 살도 되기 전, 어머니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어머니가 죽고 한참 뒤, 적당히 자라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부정한 존재인지 알았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늘 후회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습니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이 세상에 내던져져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태어났다 해도, 죽음만큼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지 않은가? 어머니께 속죄하는 마음으로 뒤늦게라도 어머니를 따라 죽으면 될 텐데, 그럴 용기도 없었다.

불행하기만 한 삶. 그딴 게 뭐라고 살고 싶었다.

남들이 다 가지는 행복,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함께 늙어 가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서, 허무하게 죽고 싶지 않아서 발버둥 쳤다. 그래서 죽고 죽고 또 죽었다.

회귀할 때마다 생각했다.

왜 하필 그때로 되돌아가는 걸까? 일렝시아 백작 부인에게, 루비아나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처음 덮쳐졌던 그때로.

차라리 더 오래전으로 회귀할 수 있다면, 아니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과거로 돌아가 어머니 곁에 있는 사람 중 누군가에게 빙의할 수 있다면. 이를테면 하인이나 기사, 하다못해 정원사에게라도.

그러면 어머니를 구하고, 자신을 낳지 못하도록 했을 텐데.

그럴 수만 있다면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 목이 잘려도 무서워하지 않고 과거로 빙의하고 또 빙의했을 것이다. 그리고 매번 어머니에게 말했을 것이다.

‘도망쳐요. 당신이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 정말로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거 아닙니다. 그들을 버리고 도망가요. 그래서…… 날 낳지 말아요. 나 때문에 죽지 말아요, 제발.’

어머니. 지금의 나보다 어린 당신. 왜 당신은 그렇게 불행해야 했고, 그렇게 죽어야만 했나?

나는 왜 어머니를 죽이고 살아남은 주제에, 한 번 행복하게 살아 보고 싶노라고 이렇게 발버둥 치고 있나? 주제도 모르고.

“사람은 태어난 이상 누구나 마땅히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하던데, 아…… 그것도 신께 사랑받는 자녀들뿐이겠지요. 신성한 결혼식을 치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만.”

하하, 루이먼드가 싱겁게 웃었다.

“그래서 이렇게 번번이 다 실패하는 걸까요?”

어머니를 죽여 살아남은 폭군의 사생아 따위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릴 자격이 없으니까.

‘3년 동안, 그저 쥐 죽은 듯이 비아의 곁을 지키고만 있다가 얌전히 이혼당하라는 신의 뜻인 걸까? 내 주제에,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고?’

힘없이 웃던 루이먼드가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바닥 없는 절망으로 빠지려는 루이먼드의 목덜미를 낚아채는 목소리가 있었다.

“뭘 실패했다는 말입니까?”

언제나 그랬듯, 루비아나였다.

“그 소년은 훌륭하게 자라서, 저 소녀를 구해 주었습니다.”

루비아나가 담담히 현실을 일깨웠다. 내가 한 말 뭐로 들었어? 당신은 방금 릴리 로투스를 구한 거라니까.

신기한 일이었다. 늘 루비아나는, 아무렇지 않게 루이먼드를 지옥에서 건져 내 주었다.

폭군의 사생아란 출신에 너무 연연하지 마라. 그런 것과 상관없이 너 자신의 인생을 아끼고 사랑해라. 그런 입에 발린 말 따위는 하지도 않으면서.

“……그리고 당신과 결혼할 수 있었고요?”

“신께 한 맹세를 지키지 못할 뻔했던 날 도와주기도 했지요.”

“그럼 그 소년은…… 포기하지 않고 살아 있길, 정말 잘한 거군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릴리 로투스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는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리고.”

루비아나는 잠깐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내 이야기 속의 소녀도 아마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

루이먼드는 숨 막힌다고 타일렀던 루비아나의 말을 까맣게 잊고, 다시금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러지 않으면 터질 듯 뛰는 심장을 견뎌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머니, 제발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 사람을 나한테 주세요. 죽을 때까지 이 사람 옆에 있을 수 있게 해 주세요.’

루이먼드는 감히, 간절히 바랐다.

신께 버림받은 사생아였기에 감히 신께 바라지도 못했다. 그가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어머니뿐이었다.

‘당신은 분명 지옥이 아니라 천국, 신의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실 테니까. 신께서는 당신의 순결한 영혼을 기꺼이 사랑하고 아끼시겠지요. 부디 절 한 번만 불쌍히 여기셔서, 신께 청해 주세요. 제발 이 사람을 나한테 주라고.’

이 사람이,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의 만분의 1만이라도 날 마음에 담게 해 달라고.

“루이?”

당황한 듯, 하지만 결국에는 부드러워지는 목소리. 이 목소리의 주인을, 루이먼드는 더없이 간절히 원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에게 버림받는다면, 난 반드시 죽고 말 거야.’

목이 잘리지 않더라도 심장이 터져 죽으리라.

그래도 삶이 다시 시작될까?

그렇게 아홉 번째 삶을 살게 된다면, 그때에도 또 멍청하게 계약 결혼을 제안하게 될 것이다. 이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달리 알지 못하니까.

여덟 번 만에 겨우 찾게 된 구원의 길은 참 어설프고 험난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3년 기한의 결혼을 제안해야 한다니.

루이먼드는 제 등을 쓸어내리는 거칠지만 다정한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비아, 당신의 생각은 틀렸어요.’

릴리 로투스를 구원한 건 소년이 아니었다. 릴리 로투스도, 루이먼드의 이야기 속 소년도, 단 한 사람에게 이끌려 구원을 얻었다.

루비아나의 이야기 속 소녀에게.

그 소녀는 자신이 누굴 구원했는지 딱히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래 남을 구해 준 사람은 자신이 뭘 했는지 쉽게 잊는 법이었다. 구원받은 사람만 안달하며, 날 책임져 달라고 달라붙을 따름이지.

지금까지 봐 온 모든 소설에서 다 그랬다.

여기까지는 문제 될 게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루이먼드에겐 이 구원의 사람을 붙잡을 수 있는 길이 없었다. 루이먼드 본인이 생각하기에 그러했다.

‘……미래를 알면 후원이든 사업이든 다 성공해서 비아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소설 속 주인공들은 척척 잘해 내던데. 루이먼드는 - 본인이 생각하기에 - 다 실패했다.

‘어쩌지?’

뭘 어떻게 노력해야 루비아나의 남자가 될 수 있을까? 루이먼드는 너무 막막하고 답답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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