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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먼드는 릴리 로투스를 포기했다. 그건 곧 세르딤 직물 사업의 파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 소녀를 불행에서 건진 값치고는 싸다고 생각하며 단념하였으나, 사업을 완전히 접지는 않았다.
수익성이 없으니 사업을 접겠다. 이 한마디로 끝내기에는, 사업과 연관된 사람이 너무 많았다. 특히나 님 지역의 사람들.
루이먼드가 세르딤을 사들이지 않으면, 그 지역 사람들이 줄줄이 파산하게 될 터였다.
이제 님 지역의 영주는 루이먼드였다. 루이먼드는 자신의 영지 백성의 삶을 돌봐야 할 의무가 있었다.
‘내가 벌인 일이야. 그러니 적어도, 그 사람들만이라도 내가 책임져야 해.’
루비아나에게서 책임감을 배운 그는 님 지역의 백성을 차마 외면하지 못했다.
루이먼드는 님 지역 사람들이 세르딤 생산 말고 다른 생계 방법을 찾을 때까지, 꼬박꼬박 세르딤 직물을 사들이기로 했다.
다행히도 그 규모는 아쉴레앙 공작가에서 공작 부군에게 매년 내주는 개인 예산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올 한 해, 아니 향후 3년간은 크게 사치하지 말고, 절약하면서 살자.’
루이먼드는 자신의 개인 예산 대부분을 세르딤 산업을 유지하는 비용으로 돌리며 다짐했다.
일단 루이먼드는 피먼스 상단주를 찾아가 진심으로 사과했다.
“원래 사업이란 게 확실한 아이템을 가지고도 실패할 수도 있고 그런 겁니다. 핫핫핫, 공작 부군님 덕분에 저도 오랜만에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나의 섣부른 판단 때문에 귀한 돈과 시간을 허비한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지요. 정말 미안합니다.”
“아닙니다요. 뭐, 저는 별다른 손해를 입진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이렇게 좋은 계약 조건을 제시해 주시니, 그저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다만 앞으로 뭔가 새로운 사업을 하실 땐, 저와 심사숙고해 보도록 하시지요. 저도 무턱대고 달려드는 게 아니라 열심히 고민해 보겠습니다.”
길드장 자리 방어에 성공한 피먼스 상단주는 루이먼드가 내미는 장기 창고 대여 계약서에 흔쾌히 서명했다.
피먼스 상단은 같은 규모의 다른 상단에 비해 몇 배나 많은 창고를 보유하고 있었다. 때맞춰 식량과 옷감을 사들여 모아 놨다가 북부로 올려 보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 번 창고를 털고 나면, 한동안은 텅 빈 채로 방치했다. 피먼스 상단주는 그게 아쉬워 이리저리 궁리해 보았으나, 딱히 빈 창고를 써먹을 데가 없었다.
그런데 루이먼드가 그 창고를 빌리겠다고 후한 조건의 계약서를 내민 것이다.
세르딤 사업 때문에 골치를 앓았던 게 아쉽지 않을 만큼, 피먼스 상단에 이로운 계약이었다.
그렇게 루이먼드는 세르딤 사업 때문에 고생한 피먼스 상단주에게 사과하면서, 당장 세르딤을 쌓아 둘 수 있는 장소를 얻었다.
‘나중에 적당한 곳의 땅을 사들여 창고를 짓고 세르딤을 옮기든지 하자.’
밀 수확철이 되면 창고를 비워 줘야 하지만, 그건 나중에 걱정할 일이었다.
루이먼드는 매주 한 무더기씩 불어나는 세르딤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했다.
‘내가 앞으로 평생, 죽을 때까지 세르딤으로만 옷을 지어 입으면 저 중에 얼마나 쓸 수 있을까나?’
펑펑 써 재껴도 창고에 쌓여 있는 세르딤이 줄어들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당분간 선물은 무조건 세르딤이야.’
그래도 세르딤이 쌓이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겠지.
‘아예 매주 공작저의 담벼락을 세르딤으로 칭칭 둘러 볼까? 아니면 비 오는 날마다 수도의 온 거리를 세르딤으로 덮어 버릴까?’
비가 오는데 아무도 비를 맞지 않게 되면, 수도 사람들이 아쉴레앙 공작의 은혜를 찬양하지 않을까? 잠깐 희망에 부풀었던 루이먼드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희대의 사치라고 욕먹을 거야.’
제국 역사책에 희대의 요부로 기록되리라.
아쉴레앙 공작을 유혹하여 공작 부군의 자리를 차지한 폭군의 사생아, 루이먼드.
사치를 일삼으며 쓰지도 않는 옷감을 창고가 미어터질 정도로 모으는가 하면, 비 오는 날이면 머리에 빗물이 닿는 게 싫다고 온 거리에 천막을 치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세르딤을 어떻게 써야 잘 썼다고 소문날지, 좀 더 고민해 보자.”
루이먼드는 혼자 고민하는 걸 포기하고, 피먼스 상단주와 경제학자 출신 황실 관리들에게 열심히 조언을 구하러 다녔다.
자신은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대략적으로 아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기에, 전문가들의 도움을 구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의 곳에서 세르딤 직물의 활로를 발견했다.
바로 옆에 있는, 더없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내에게서.
어느 날, 루비아나가 루이먼드가 옷을 해 입으려고 가져온 세르딤을 만지작거리다가 물어보았다.
“이게 남아돈다는 말이지요?”
“네. 돌돌 말아 화장실에 가져다 놓고 쓰게 할까 고민 중입니다.”
“빨아 쓰라고?”
“아니요, 쓰고 버리라고요.”
“정말 쓸 곳 없이 남아도는 상태군요.”
오, 루비아나가 감탄했다.
“……네, 슬프지만.”
“그럼 이걸, 내가 좀 써도 됩니까?”
“쓰다니요? 어디다가 말입니까?”
정말 화장실 휴지 대신으로 쓰려고? 루이먼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비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북부에 좀 보내 봤으면 합니다.”
“북부에요?”
루이먼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루비아나는 대답 대신, 물이 든 컵을 세르딤 위에 엎어 보았다. 물이 주르륵 흘러내려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세르딤은 젖지 않았다.
“비아?”
“역시. 마음에 드는군요.”
사실 부하에게서 보고를 받았을 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수도가 아니라 북부에 필요한 직물이란 말이야.’
루이먼드가 이 직물이 반드시 제국 수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지만.
‘수도에서 인기를 끌기는커녕 처치 곤란이라 쩔쩔매는 상황이 되었으니, 북부로 빼돌려도 되겠지?’
루비아나는 감추고 있었던 관심을 드러냈다.
“이 직물은 북부에 더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방수가 된다는 건 눈에도 강하다는 의미. 게다가 세르딤은 제법 두껍고 질겼다. 북부에서 쓰기 딱 좋은 직물이었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가 모은 세르딤 중 절반을 북부로 올려 보냈다. 물론 운송은 피먼스 상단에 맡겼다.
세르딤 사업 실패 이후 어깨를 움츠리고 다니던 피먼스 상단주는 빈 창고 대여 계약에 이어 세르딤 운반 의뢰까지 성사하고는 다시금 어깨를 활짝 폈다.
“하하하, 그 사업은 사실 실패한 게 아니야. 다아 아쉴레앙 공작저와 깊은 인연을 맺기 위한 초석이었다니까!”
이렇게 뻥뻥, 큰소리를 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러다가 아내에게 혼나고 얼른 겸손을 되찾았다.
한 건 했다고 좋아하는 피먼스 상단주와 달리, 루이먼드는 북부에 세르딤을 보내면서도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다.
“저게 과연 북부에 도움이 될까요?”
루이먼드는 루비아나가 괜히 저 때문에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고 생각해,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지만 루이먼드의 생각과 달리, 북부에서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세르딤을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북부에서 급히 연락이 왔다.
이번에 보낸 거 뭡니까? 더 보내 줄 수 있습니까? 더 보내 줄 수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당장 더 보내 주십쇼!
겨울이 오네 어쩌네 하며 루비아나에게 돌아오라고 징징대던 북부인들이, 루비아나 말고 세르딤을 더 재촉했다.
루비아나는 그럴 줄 알았다며 웃고는 루이먼드에게 편지를 보여 주었다.
“……어? 정말, 정말입니까?”
“배부르게 식사하고 나서 가짜 편지나 만들어 당신을 놀릴 만큼 제가 심심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 그렇지요. 하지만…… 정말, 세르딤을 이렇게들 좋아한다고요?”
루이먼드는 편지를 보고도 쉽게 믿지 못했다.
거친 글씨체로 휘갈겨 쓴 북부인들의 편지를 100번쯤 되풀이해 읽고 나서야 겨우 현실을 받아들였다.
루이먼드는 남은 세르딤을 닥닥 긁어모아 다시 북부에 보냈다. 얼떨떨한 건 피먼스 상단주도 마찬가지였다.
“수도에서 유행한다고 하셨잖습니까? 제가 그때 잘못 들었던 건가요? 수도가 아니라 북부였던 겁니까?”
“…….”
루이먼드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루비아나는 북부로 올라가는 2차 세르딤 행렬에 쪽지를 끼워 넣었다.
편지를 받아 읽으니, 더 보내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질 뻔했는데 내 남편이 너희를 불쌍히 여겨 더 보내 준다고 한다. 감사하며 입어라.
북부에서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대장 말고 대장 남편 만만세! 그분도 참 불쌍, 아니, 어쩌다 그런 분이 대장하고 결혼을…… 역시 수도에서는 약탈혼이 유행인 겁니까? 그런데 이 기적의 옷감 이름이 대체 뭡니까?
루비아나는 편지를 받고 잠깐 고민하다가 루이먼드에게 물었다.
“이 직물 이름이 세르딤이라고 했지요?”
“예, 님 지역의 전 영주였던 세르주 드 님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지역의 주인은 루이, 당신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그 이름이 입에 익어서요.”
‘세르딤’이라는 단어가 입에 익은 건 루이먼드뿐이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와의 짧지만 유익한 대화를 마친 뒤, 북부에 답장했다.
얼마 뒤 북부에서 편지가 도착했다.
그럼 자애로운 루이먼드 님 이름을 따서 루이딤이라고 하겠슴다. 앞으로 식량을 보내 주실 때 이것도 좀 같이 보내 주십쇼.
그 편지를 본 루이먼드가 입을 떡 벌리고 할 말을 잃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 남편이 발견한 옷감에 왜 애먼 놈의 이름을 붙인단 말입니까?”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턱을 닫아 주고, 그 입술에 쪽 입을 맞추며 말했다.
“어, 어어…….”
루이먼드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옆에 서 있던 시녀장과 하녀들은 얼른 고개를 돌려, 루이먼드가 덜 부끄러워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이후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와 피먼스 상단주를 찾아가 ‘루이딤’을 정기적으로 북부에 공급하는 장기 계약을 맺었다.
피먼스 상단주의 얼굴이 활짝 폈고, 루이먼드는 당황해 반박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그렇게 세르딤은 루이딤이 되었다.
북부에는 자애롭고 지혜로우시며 어쩌다 루비아나의 눈에 띄어 루비아나와 결혼하게 된 루이먼드를 칭송하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물론, 님 지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루이먼드를 찬양하는 노동요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소식은, 도미넨트 공작 루단테의 손을 거쳐 지고한 황제 폐하에게로 전달되었다.
“더 지체하면 안 되겠는데? 얼른 좀 만나 봐야겠어.”
칼레나는 싱긋 웃으며 루이먼드의 업적이 담긴 종이를 불태웠다.
“서둘러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폐하.”
루단테는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