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신년제
‘미래를 알고 있다고 해서 뭐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었어.’
예술가 후원에 이어 직물 독점 사업까지 실패한 후, 루이먼드는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미래에 뭐가 유행할지 알고, 그걸 독점하거나 후원하여 성공하던데. 그건 어디까지나 소설 속 주인공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 내가 부족한 탓이야. 책 속 주인공들처럼 기억력도 좋고 똑똑하고, 운도 따라 주고, 주변에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분명 다 성공했을 텐데.’
루이먼드는 더는 사업을 하겠다고 나대지 않았다.
에릭의 살롱을 다녀오는 것 외에는 외출도 자제했다. 대신 공작저를 꾸려 나가는 일에 집중했다.
루이먼드는 직접 저택을 돌아다니며, 곧 다가올 유행에 맞춰 새 커튼을 달고, 벽지를 갈았다.
하는 김에 식기도 싹 갈아치웠다.
‘비아의 손길이, 입술이 닿는 건데 아무거나 쓸 순 없지.’
루이먼드는 직접 최고의 장인을 찾아가 최고급 식기를 의뢰했다.
그 장인은 내년쯤부터 갑자기 유명해질 예정이었다. 귀족이라면 누구나 장인이 만든 식기를 가지길 원했기에, 주문을 넣으면 못해도 2년은 대기해야 했다.
천하의 도미넨트 공작도 제 아버지 생신 선물로 찻잔을 의뢰했다가 3년을 기다리라는 말을 들었다는 소문이 돌며, 장인은 더더욱 유명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기술을 갈고 닦으며 식기를 만들어 파는 평범한 장인일 뿐이었다. 루이먼드는 대기 없이 바로 식기를 주문할 수 있었다.
루이먼드는 아쉴레앙 공작저에서 쓸 식기를 주문하며, 에릭과 아이샤, 그리고 둘의 신부인 예비 신부에게 선물할 식기 세트도 샀다. 그러면서 값을 깎기는커녕 몇 배의 돈을 더 얹어주었다.
“일단 이 날짜에 맞추고자 노력하겠지만, 늦어질 수도 있습니다. 구워낸 자기가 마음에 안 들면, 깨버리고 다시 만들게 될 테니 말입니다.”
“미리 공작저로 사람을 보내 알려줘요, 기다리지요.”
“뭐, 저 같은 것한테까지 말을 높이십니까.”
“이런 것을 만드는 장인에게, 내가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성의지.”
루이먼드는 견본품으로 내놓은 그릇을 들어 보이며 생긋, 웃었다.
순간, 어두침침한 공방 안이 환해졌다. 장인은 눈부심을 감당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는 바람에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루이먼드가 그릇을 면장갑 낀 손으로 조심조심 받쳐 들고 있었다는 것을.
“…….”
다시 고개를 돌린 장인은 루이먼드의 빛나는 얼굴 말고, 그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생각보다 더 늦어질 수도 있습니다.”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역시, 대단해. 왜 이런 실력이 진작 알려지지 않은 걸까?’
루이먼드는 그릇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어 장인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응? 아, 괜찮아요. 일부러 늦장 부리는 게 아니니까.”
“……?”
‘날 언제 봤다고 저렇게 믿어주는 거지?’
장인은 얼떨떨해했다.
“얼마든 기다릴 수 있으니 그건 걱정 말고.”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고맙긴. 내가 고마워해야지요.”
“……네?”
“아쉬운 걸 보내주지 않겠다는 거 아닙니까. 시간을 들여, 몇 번이든 다시 만들어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보내준다는데. 내가 고마워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야. 어쩜 이렇게 만들 수 있지?’
루이먼드는 조그만 찻잔을 들어 보았다. 손잡이 안쪽, 사람들이 잘 보지 않는 곳까지 세밀한 무늬가 들어가 있었다.
‘정말 대단해. 최고야!’
감탄해 마지않으며, 별 생각 없이 말한 건데.
“…….”
장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뭐지? 나한테 이런 식으로 나온 귀족은, 당신이 처음이야.’
난데없이 뺨이라도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자고로 귀족이란, 참을성 없고 제 잘난 맛에 사는 족속들 아닌가.
‘내가 네가 만든 그릇 따위를 마음에 들어 한다. 그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워 죽겠지?’
‘내가 써주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지? 그러니 돈 받을 생각은 하지 말거라.’
‘아, 그리고 내일까지 똑같은 걸 100개 만들어 가져오고. 내 특별히, 수고비는 주도록 하지.’
그간 장인을 찾아온 귀족들의 태도는 하나같이 이러했다.
돈이 넘쳐나는 주제에 제값 치르는 걸 아까워하며, 어떻게든 후려쳐 값을 깎으려고만 했다.
하나하나, 얼마나 정성 들여 만드는지 알아주지 않고, 이게 뭐 별거냐는 식으로 무시했고.
똑같은 걸 다시 만들어오라며 주문하기도 했다. 똑같은 거라니? 하나하나 손으로 빚어 만드는 것인데, 어떻게 이 세상에 똑같은 걸 또 낼 수 있단 말인가. 하나하나가 유일한 것을.
그런 귀족들에게 시달려 지긋지긋하지만, 그런 귀족들에게 물건을 안 팔 수도 없었다.
그녀가 만드는 식기를 사 줄 수 있는 건 아주 부유한 상인, 아니면 귀족뿐이었으니까.
귀족들이 물건의 품질을, 가격을, 그녀의 자존심을 후려칠 때마다 공방 따위 때려치고 싶었지만.
식기를 만드는 것 말고는, 다른 기술이 없어 그만두지도 못했다. 그래서 계속 식기를 만들었다.
그렇게 몇십 년. 저도 모르게 기죽고 의기소침해진 그녀는, 이제밖에도 잘 나가지 않았다. 공방에만 틀어박혀 식기나 만들었다. 사람을 잘 만나지도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루이먼드가 찾아왔다.
공방을 열고 식기를 만든 이후로, 이런 고객은 처음이었다.
‘……꿈은, 아니겠지?’
장인은 이 현실이 믿겨지지 않아, 자신의 뺨을 세게 꼬집어 보았다.
‘아파.’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이건 뺨이 아파서 나는 눈물이었다. 절대, 감동 받아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었다.
“납품일은 얼마든 미뤄져도 상관 없으니 걱정 말고. 혹시 재료값이 부족하면, 그 역시 얼마든 내게 와서 받아가게.”
예약금으로 물건값의 절반 정도를 주고, 물건을 받은 뒤 나머지를 주는 게 보통이었다.
물건을 받고는 물건 품질이 별로라고 트집 잡으며, 물건을 돌려주지도 않고 나머지 물건값을 주지도 않는 귀족들도 꽤 있었고.
하지만 루이먼드는 그러지 않았다. 아예 처음부터 물건값을 전부 치뤘다. 물건을 만들다 돈이 더 필요할 것 같으면 와서 더 받아가라고까지 했다.
루이먼드는 그렇게 자신의 믿음을 내보였다.
믿음의 대가는, 감동 받아 눈물을 철철 흘리는 장인이었다.
“반드시, 반드시 제 이름과 목숨을 걸고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내 바치겠습니다!”
장인은 옷소매로 눈을 거칠게 문지르며 말했다. 루이먼드는 당황했다.
“어? 아, 아니.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는데. 그냥, 하던 대로만 만들어주면-”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장인은 벌떡 일어서, 몇 년 동안 한 번도 열지 않았던 창문을 활짝 열었다.
어두침침하던 공방에 밝은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햇빛 아래 선 장인이 눈을 번쩍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삼십 년 평생 흙을 만졌고 불과 싸워왔습니다. 그런데 오늘에야 저를, 제 작품을 알아주시는 분을 만났으니. 어찌 죽기를 각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공작 부군님, 공작 부군님께서 절 믿어주신 걸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작품으로!”
으아아아아아아아! 굉장한 힘이 솟구친다! 장인은 활활 불타올랐다. 오랜 시간 동안 침잠해 무너져가던 장인은 그렇게 새로운 힘을 얻었다.
그리고 장인에게 활력을 불어넣어준 루이먼드는.
“어…… 여, 열심히 해 주면, 나야 고맙긴 합니다만…….”
뭐야, 저거. 무서워.
그런 장인을 보고 심히 당황했다.
‘혹시 내가 또 잘못 찾아온 건…… 아니겠지? 난 뭐 이렇게, 되는 일이 없냐.’
이제 다시는, 다시는, 미래 일을 안다고 나대지 말자. 루이먼드는 다시 한번 소심하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