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0/131)

***

식기를 만드는 공방을 나온 루이먼드는 터덜터덜, 근처의 어느 가죽 공방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이왕 나왔는데…… 딴 건 몰라도, 비아의 신은 맞추고 들어가자.’

멀쩡한 장인이 자신과 잠깐 대화를 나누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고 미쳐 날뛰는 모습을 본 터라. 다른 장인을 만나는 게 무서웠다.

그럼에도 루비아나에게 아름답고 편하기까지 한 신발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더욱 말조심하고, 가만히 있고, 무조건 조심하면 되겠지.’

루이먼드는 놀란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허름한 가죽 공방으로 들어갔다.

이 공방의 주인은 내후년쯤부터 황궁으로 들어가 황제의 구두를 만들게 될 터였다.

이 공방의 장인이 무두질한 가죽은 잠자리 날개처럼 가볍고 얇으면서도, 쇠그물처럼 질기고 튼튼했다.

또 굽을 달지 않고, 끈을 엮어 묶는 독특한 디자인으로 신을 만들었는데. 신어 본 사람들마다 편하다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장인이 황궁으로 들어간 이후 그의 제자들이 비슷한 물건을 만들었는데, 없어서 못 사는 수준으로 잘 팔렸다.

무거운 드레스를 걸치고 오래 서 있어야 하는 귀족 영애들과 마찬가지로 무거운 갑옷을 걸치고 훈련 받는 기사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이 공방 역시 아직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상태.

루이먼드는 한가로운 공방에 자리 잡고 앉아 마음껏 루비아나의 신발을 의뢰했다.

장인은 오랜만에 큰 손 고객을 맞아 신이 났고, 루이먼드는 장인이 만든 신발 컬렉션을 보고 신이 났다.

“한 켤레씩, 아니, 색상별로 세 켤례식 사겠습니다.”

“오오,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그리고, 아직 이런 디자인은 없는 거 같은데. 혹시 이런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어 볼 생각은 없습니까? 만들 수만 있다면, 이건 색 별로 열두 켤례씩 사고 싶은데.”

나대지 말고 얌전히 있자고 다짐했던 게 무색하게도, 루이먼드는 자신이 기억하는, 이 공방 최고의 인기 디자인을 종이 위에 삐뚤빼뚤하게 그려 보였다.

눈썰미 좋은 장인은 그 그림이 말하고자 하는 디자인 방향을 단번에 알아챘고, 전율했다!

“이런, 이런 디자인을! 당연히 가능합니다. 오오, 공작 부군님. 공작 부군님!”

“흠흠, 어차피 얼마 안 있으면 당신도 충분히 생각해낼 수 있었을 겁니다. 일단 내게 먼저 만들어준다면 이후 이 디자인으로 신발을 만들어 팔아도 나는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루이먼드는 뒤늦게 아차, 싶어 디자인을 무상으로 넘겼다.

‘원래 당신의 것이니까.’

하지만 디자인을 받는 장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겉보기에는 우아하고 활기차 보이는 공방 거리. 하지만 뒤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짙고 어두웠다.

자신만의 디자인을 지키기 위해, 또는 인기 있는 디자인을 빼돌리기기 위해, 어떤 잔혹한 일이든 벌어졌다.

장인은 그 거리에서 몇십 년째 아등바등 발버둥치고 있는 생존자였다. 그는 루이먼드가 아무렇지 않게 건네는 이 디자인의 가치를 모르지 않았다.

“오오, 신이시여! 어찌 제게 이런 천사를 보내주셨단 말입니까!”

장인은 무릎을 꿇고 눈물로 신께 기도 드렸다. 그리고는 루이먼드가 알려준 디자인에 루이먼드의 이름을 붙여도 되냐고 물었다.

루이먼드는 놀라 고개를 푸드득 흔들었다. 이름을 딴 건, 루이딤 하나로 족했으니까.

“절대, 절대 그러지 마시오. 아니, 아예 내가 이걸 알려줬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이건 원래 당신 것입니다.”

“어쩜 이렇게 선하시단 말입니까. 어흐흑, 이 못난 몸. 앞으로 평생, 아쉴레앙 공작님과 공작 부군님의 신발만 만들며 살고 싶습니다. 제발 받아주십시오!”

“아니, 그게 뭐라고 그렇게까지-”

“진심입니다!”

“…….”

뭐야, 여기도 무서워. 루이먼드는 눈을 데굴 굴리다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되겠어, 일단 여기에서 벗어나자.’

루이먼드는 뒷일을 따라온 하인들에게 맡기고, 호위 기사들과 함께 호다닥 공방을 뛰쳐나왔다.

“공작 부군님!”

“이봐, 우리 공작 부군님이 얼마나 바쁘신 분인데. 우릴 책임지시는 것만으로도 바쁘단 말이야. 어딜 들이대!”

딱 공방 두 군데 들렀을 뿐인데. 루이먼드는 지쳐버렸다.

더는 다른 공방에 들를 용기도 나지 않았다. 루이먼드는 하인들에게 시켜 나머지 일을 처리했다.

올해 겨울은 특히 추울 테니, 실력 좋은 공방을 찾아가 하인들에게 입힐 털옷을 넉넉히 샀다. 털 신발도 하인, 하녀들의 발 치수에 맞춰 주문했다.

돌아오는 길에 화원에 들러 앞으로 유행하게 될 관상목과 꽃도 주문했다. 물론 화원에 직접 들어가지 않고, 말 잘하는 하인을 보냈다.

하인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머릿속으로 내년에 정원을 어떻게 갈아엎을지 계획을 세웠다.

마지막으로, 내년 신년제 때 펠트하르그 공작이 하고 나와 유행하게 될 에메랄드 장식을 미리 사들였다.

‘펠트하르그 공작 주제에 루비아나의 눈동자 색과 같은 보석을 달고 다닐 생각을 하다니.’

절대 가만 두고 볼 수 없었다.

남자의 질투는 무서웠다. 루이먼드는 앞서 두 공방에서 겪었던 무서운 경험에도 불구하고, 상단에 직접 찾아가 상단주와 에메랄드 장식 매입을 의논했다.

아직 펠트하르그 공작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으나, 들어갈 예정인 에메랄드 장식을 두 배 값으로 사들였다.

에메랄드를 가지고 있던 상단은 엘몽 상단과 경쟁 중이었다. 상단주는 기꺼이, 펠트하르그 공작보다 돈을 많이 내겠다는 루이먼드에게 에메랄드를 팔았다.

루이먼드는 에메랄드 장식을 사는 김에, 앞으로 수도에 들어오는 상등품의 에메랄드를 엘몽 상단보다 먼저 사들이든가 가로채 아쉴레앙 공작가에 보내도록 계약을 맺었다.

에메랄드 가격은 시가의 2배 이상 쳐 주기로 약속했다.

그러고야 긴 하루가 끝났다. 루이먼드는 마차에 올라타 공작저로 돌아가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미래에 대해 알고 있으면 뭐 해?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데…….’

***

그렇게 루이딤 직물 사업 실패에 낙담하여 지내던 중. 디토 남작 영애의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공작 부군인 내가 한미한 남작가의 결혼식에 가면, 분명 이상한 소문이 돌 거야. 그러니까 참석하지 말자.’

자신이 곤란해지는 건 둘째 치고, 막 결혼하는 새신부를 걱정해서였다.

그렇게 마음을 정했건만, 루비아나가 대뜸 결혼식에 참석하자고 말했다.

“어? 어떻게 알았습니까? 제가 그 남작 영애의 결혼식 준비를 돕는다는 걸요.”

“내 남편이 하는 일을 왜 내가 몰라야 합니까?”

루비아나는 두툼한 스테이크를 썰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태도였다.

‘내가 아무 말도 안 했으니까요.’

루이먼드는 슬쩍 시녀장을 보았다. 시녀장은 자신은 결백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결백하긴 했다. 자신의 입으로 말하진 않았으니까. 그저 디토 남작가에서 온 편지를 루비아나에게 가져다줬을 뿐이니까.

“싫습니까? 싫으면……”

“아니요, 좋습니다. 같이요, 비아.”

루이먼드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포크로 샐러드를 콕콕 찍어 루비아나의 입에 쏙 넣어 주었다.

두툼하게 썬 스테이크를 먹으려 입을 벌렸던 루비아나는 난데없이 들어온 채소 쪼가리에 놀라 입을 꾹 다물었고, 루이먼드는 루비아나의 입술에 묻은 샐러드 소스를 자신의 입술로 닦아 주며 웃음 지었다.

시녀장과 하녀들은 루이먼드가 샐러드를 집을 때부터 이미, 낌새를 느끼고 돌아선 후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주변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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