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1/131)

***

디토 남작 영애의 결혼식 날.

두 사람은 루텔 수도원의 수도사들이나 입을 법한 짙은 회색 로브를 뒤집어쓰고 공작가를 나섰다.

아쉴레앙 공작 부부가 결혼식에 참석한 게 알려지면, 자칫 신부보다 하객인 두 사람이 더 눈에 띌지도 모른다고 루이먼드가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후드를 깊게 눌러쓰니, 결혼을 축복하고 후원을 받으러 온 수도사들 같아 보였다.

물론, 두 사람의 타고난 분위기마저 완벽히 숨길 순 없었다.

루비아나에게선 서늘하고 사나운 기운이 느껴졌다. 루이먼드는 로브에 가려진 작은 손짓, 몸짓마저도 더없이 우아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가려 봤자 소용이 없는데?’

두 사람은 서로를 보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쨌든 안 가리는 것보다는 낫기에, 두 사람은 루텔 수도사인 척 꾸미고 결혼식장으로 갔다.

루이먼드의 도움으로 완성한 결혼식장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신부는 더더욱 아름다웠고, 신랑은 행복한 얼간이였다.

신부의 외할아버지는 눈시울을 붉히고 훌쩍이고 있었다. 마법의 힘을 주체 못 해 어깨 주변에서 퐁퐁, 폭죽 같은 불꽃이 튀는 걸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물론 재미를 느낀 건 루비아나뿐이었다.

“손녀의 결혼식을 이토록 신경 써 주어 정말 감사합니다. 학자의 집 출신은 다 인정머리 없는 고집불통, 책을 들이파는 것밖에 모르는 외골수인 줄만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공작 부군 같은 분께서 그런 곳에 한동안이나마 머물러 계셨다니……. 이제야 공작 부군을 알게 되어 참으로,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조금이라도 마법적 재능이 있었다면 학자의 집 따위 말고 우리 마탑으로 오시지 않고서는…….”

새신부의 외할아버지, 디토 남작은 황궁 시종장 뺨치는 말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루비아나가 질색하며 뒤로 물러서자, 디토 남작은 주름진 손을 들어 루이먼드의 팔을 더듬었다.

“어릴 적에 발견했다면 1서클을 깨치는 것까지는 가능했을 것을.”

그리고는 이렇게 안타까워했다.

참고로 마탑에서 마법사로 인정하는 기준은 2서클을 깨쳤는지였다.

1서클 마법사는 마법사라고 불리긴 하지만, 사실상 마법사로 인정받지 못했다. 혼자서 펼칠 수 있는 마법이 거의 없는 수준이니까.

그러니 1서클 마법사가 될 수 있다는 말은 칭찬이라기보단 욕에 가까웠다. 1서클 마법사가 되느니, 마법사가 안 되는 게 낫다는 말도 있으니까.

그래서 루이먼드도 학자의 집으로 도망칠 때, 마탑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마법적 재능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안 했으니까.

그런데 디토 남작은 학자의 집에 가느니 1서클 마법사가 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만큼 루이먼드를 좋게 본 것이고, 고마워하는 마음이 깊은 것이라 해석할 만도 했지만 루이먼드는 다르게 받아들였다.

‘……디토 남작? 마탑주?’

루이먼드는 그제야 자신이 도운 새신부가 디토 남작가의 영애라는 걸 알게 되었다.

루이먼드는 그날 새신부를 본 후로 다시 만나지 않았다.

아쉴레앙 공작 부군이 미혼 영애를 자주 만난다고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해서였다. 또한 에릭과 아이샤의 연애를 돕기 위해서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루이먼드와 예비 신부 사이에 낀 에릭과 아이샤는 양측의 의견을 열심히 전하며, 서로 가까워졌다.

그 바람에 예비 신부가 어느 남작가 사람인지 확인할 틈이 없었다.

‘그저 어느 한미한 남작가의 영애인 줄 알았는데. 디토 남작가의 영애였다고? 내가 내 손으로 적의 손녀 결혼식을 도운 거야? 그것도 최선을 다해서?’

루이먼드는 경악했다.

스승님이 알면, 아니, 스승님까지 가지도 않을 것이다. 피오니와 다른 학자들이 안다면 배신감에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학자의 집과 마탑은 대대로 앙숙이었으니까.

두 집단의 원한 관계는 역사책으로 정리되어 나올 만큼 오랜 역사를 자랑했다.

대대로 학자의 집 학자들이 열심히 연구해서 논문을 발표하면, 마탑의 마법사들이 뭐 그런 걸 연구한다고 그렇게 처박혀 있냐고 비웃었다.

“그거? 우리 마법으로 하면 한 방에 해결되는데. 마법이면 안 될 거 없는데.”

“자연의 이치? 법칙? 섭리? 우리 마법사들이 8서클만 이룩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다 새롭게 정립할 수도 있다니까!”

8서클은 자연의 이치를 거슬러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다는 꿈의 경지였다.

참고로, 대륙 역사상 8서클을 이룩한 마법사는 현재까지 아무도 없었다.

대마법사라 불리는 마탑주마저 4서클 마법사였다. 밑의 마법사들은 고작해야 2, 3서클 마법사에 불과했다.

그러니 현재, 대륙에서 살아 숨 쉬는 마법사들은 모두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으며, 자연의 법칙에 순응해 세상을 감싼 마나를 운용해 마법을 펼칠 뿐이었다.

그런 주제에 ‘만약 8서클을 이룩하면 말이야, 그런 법칙쯤은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지.’라고 지껄이며, 학자들의 눈물과 땀이 밴 연구 결과를 툭하면 무시하니, 어찌 미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

학자의 집 학자들에게 마탑의 마법사란 타고난 마법 재능만 믿고 노력 따윈 하지 않는 바보 멍청이들이었다.

루이먼드는 딱히 마탑에 나쁜 감정은 없었다. 논문을 쓸 정도로 공부의 깊이가 깊었던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학자의 집 분위기에 휩쓸려, 당연히 마탑을 싫어하게 되었다.

‘지도 교수님도 싫어하고, 피오니도 싫어하니까, 당연히 나도 마탑을 싫어해야지!’

그런데, 그 마탑의 주인, 디토 남작의 손녀딸 결혼식을 자신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만들어 준 것이었다.

‘지도 교수님과 피오니가 알면, 난…….’

루이먼드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 얼굴이 안 보여 다행이었다.

4서클 대마법사라 해도 상대방의 속마음을 알 수는 없었다. 디토 남작은 루이먼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 채, 저세상 팔불출이 되어 손녀의 아름다움을 찬양했다.

주변 사람들은 루텔 수도사 둘을 붙잡고 웃는 마탑주를 보며,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딸 부부가 죽은 후 비쩍 마른 해산물처럼 건조하기 이를 데 없던 사람이 저렇게 헤프게 웃다니?”

“신의 저주라도 받은 건가? 이 기쁜 날에?”

“왜 저주라고 생각해? 축복일 수도 있지.”

디토 남작은 사람들의 수군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어쩜 이렇게 건실하고 성실한 청년이, 그런 학자의 집 따위에 들어가 고생을 하셨단 말입니까?”

너무 행복하니 모든 게 다 아름다워 보이는 듯했다. 루이먼드는 원래 아름답지만.

“언제든 마탑에 놀러 오십시오. 뭔가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 역시 언제 어느 때든 좋습니다. 마탑에 찾아와 제 이름을 대십시오. 마탑은 문을 활짝 열어 두 분을 반갑게 맞이할 겁니다.”

“어, 어어…… 어…….”

루이먼드는 굳은 채로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 모습도 참으로 학자의 집 출신답지 않으십니다그려. 무슨 말 한마디만 해도, 또박또박 말대꾸하며 지지 않던 작자들 틈에서, 이 순한 성격으로 어찌 사셨습니까?”

쯧쯧, 디토 남작이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 그 소리를 듣고야 루이먼드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자, 잘 지냈습니다. 저희 학자의 집 선생님, 동기들은 남작께서 말씀하시는 그런……”

“아이고, 동료들을 애써 두둔하는 이 착한 모습이라니. 공작님, 어쩜 이런 참한 남편을 두셨단 말입니까!”

허허허. 디토 남작은 허리 아래까지 오는 긴 수염을 쓸어 넘기며 루비아나에게 말을 걸었다.

“다 외할머니의 가르침 덕분이지요.”

루비아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뵙지는 못했으나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었겠군요. 어떤 가르침이었는지,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그려. 진작 좀 제 하나뿐인 손녀에게도 그분의 가르침을 전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디토 남작은 좋아 죽으려 하는 새신랑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소중한 손녀딸과 결혼하는 손자사위 놈이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잠깐, 잠깐만 제 말 좀…….”

루이먼드는 학자의 집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상한 곳이 아니라고 반박하려 했지만, 계속 실패했다.

“너무 부끄러워하지 말아요, 루이.”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학자의 집 출신으로서……”

“거참 보기 드문 청년인 것 같습니다. 어디서 이런 분을, 학자의 집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콕 찍어 남편으로 두셨는지. 공작님의 안목에 그저 감탄할 따름입니다.”

“잠깐, 내 말 좀……”

“디토 남작 손녀분의 남편도 충분히 훌륭하신 것 같습니다.”

“에잉, 어디 먹다 만 빵같이 생긴 놈을 공작 부군에 비한단 말입니까?”

“비아? 디토 남작? 잠깐만!”

“그건 그렇지요.”

그렇게 화기애애한 대화 속에서, 루비아나는 디토 남작과 악수하며, 넓은 소매에 숨겨 놓았던 쪽지를 그에게 전했다.

“……!”

디토 남작의 털이 풍성한 눈썹이 꿈틀했다. 루비아나는 그의 손을 힘 있게 쥐었다.

“손녀분의 결혼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폐하께서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뒷말은 작게 속삭였다.

“그렇군요. 요즘 사이가 안 좋아 황궁에 자주 들어가지도 못하신다는 분께서, 폐하의 뜻을 이리 전하시다니. 역시 소문이란 믿을 게 못 되는군요.”

루비아나는 빙긋 웃으며 답을 대신했다. 디토 남작은 티 내지 않고 쪽지를 받아 챙겼다.

이후 루비아나는 결혼식장이 한눈에 잘 보이는 구석진 자리를 찾아내 루이먼드와 나란히 섰다. 누구도 구석에 선 루텔 수도사 둘에게 관심을 쏟지 않았다.

결혼식은 화려하고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하객들은 아름다운 결혼식장을 보고 감탄했다가 독특한 디자인의 드레스를 입은 신부의 아름다운 자태에 두 번 감탄했다.

“정말 행복해 보이네요. 다행입니다.”

마탑주의 손녀를 도왔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던 게 언제였냐는 듯, 루이먼드는 뿌듯해졌다.

또한 학자의 탑과 마탑의 불편한 관계를 떠나, 디토 남작 영애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랐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식이란, 누구에게든 축복받아 마땅한 것이니까.

신부가 입장할 때. 루이먼드는 저도 모르게 루비아나를 보았다.

수염이 흠뻑 젖을 때까지 엉엉 우는 디토 남작을 보며, 그가 마탑주라는 걸 잠시 잊고 덩달아 코를 훌쩍이기도 했다.

행복한 신부와 신랑, 순수하게 축하해 주는 하객, 그들을 둘러싼 아름다운 결혼식장.

행복만이 가득한 세상이었다. 루이먼드는 이 아름다운 풍경을 자신이 만들어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결혼식을 앞두고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몰라 막막해서 안절부절못하던 모습을 본 게 엊그제 같건만.

‘내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도 있구나.’

멍하니 디토 남작 영애를 바라보고 있는데, 눈이 마주쳤다.

‘설마.’

여기서 신부, 신랑이 있는 곳까지는 거리가 꽤 멀었다. 이쪽과 저쪽 사이에는 하객들도 가득했고.

진짜 눈이 마주친 것일 리 없다고, 착각한 거라고 생각하고 고개를 돌리려는데.

‘감사해요.’

디토 남작 영애가 입술을 벙긋거렸다.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그녀가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

“…….”

루이먼드는 대답해야 한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뭐라 말로 감히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쳤다.

루이먼드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 디토 남작 영애를 보다 말고, 고개를 푹 숙였다.

‘……착각이나 오만이 아니고, 정말로 내가? 내 목숨 하나도 제대로 건사 못 하는 내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줬다고? 정말로?’

그럴 리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려는데, 누군가 슬그머니 손을 잡았다. 당연히 루비아나였다.

“비아?”

“보기 좋군요. 고생 많았습니다, 루이.”

“제가 뭘 한 게 있다고요.”

“그런가요?”

루비아나는 루이먼드를 보지 않았다. 단상 위 신부와 신랑을 보며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루이먼드는 그녀의 웃음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내가 만약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다른 누구보다도 당신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데.’

루이먼드는 루비아나의 손을 꼭 붙잡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