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이먼드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루비아나가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황궁에서 마차가 왔다.
루이먼드는 미리 옷을 갈아입고 외출 준비를 하고 있던 차였다. 황실에서 나온 사람들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고 바로 마차에 올라탔다.
“리먼스 부인, 다녀올게요.”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이게 무슨 일이냐고 놀랄 법도 하건만, 시녀장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루이먼드를 배웅했다.
‘내가 황궁에 간다는 걸, 비아에게 말해 두라고 할까? 아니면 나보다 비아가 먼저 도착했을 때 황궁에 갔다고 말하지 말고 적당히 둘러대라고 할까?’
루이먼드는 마지막까지 고민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을 만나러 오는 걸 루비아나에게 들키지 말라는 황제의 명이 있었지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도망칠 구멍은 남겨 두고 싶었다.
혹시라도 황제가 이대로 자신을 죽이려 한다 해도, 루비아나가 알아차리고 달려와 자신을 구해 주지 않을까, 감히 그런 기대를 했다.
황금으로 장식한 화려한 마차는, 루이먼드의 고민이 우습다는 듯 달그락달그락 달려 황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황궁에 도착하기 전, 인적이 드문 거리에서 덜커덕, 멈춰 섰다.
“윽.”
마차가 급정거하자 루이먼드의 몸이 허공에 붕 떴다 가라앉았다.
‘무슨 일이지?’
루이먼드는 아픈 엉덩이를 문지르며 마부석과 연결되어 있는 창문을 열고자 손을 뻗었다.
그 손이 문을 열기 전, 옆의 문이 벌컥 열렸다.
“누구……”
“루이, 내 손자야!”
꿈에도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마차 안으로 뛰어들었다.
당연하게도, 그레이움 백작이었다.
그새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딱히 안쓰럽진 않았다.
‘아, 깜짝이야.’
루이먼드의 감상은 딱 이것뿐이었다. 그는 그런 자신에게 놀랐다.
‘정말 이젠 아무렇지 않구나.’
그래도 가족인데. 날 키워 준 사람인데. 이렇게 생각하며 질질 끌려다녔다.
그레이움 백작이 자신을 권력의 도구, 그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그레이움 백작가 사람들 아니면, 정말 어디에도 정 붙일 곳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루이먼드에겐 루비아나가 있었다. 전적으로 자신을 믿어 주고, 자신에게 웃어 주고, 매일 밤 함께 잠드는 소중한 사람. 진짜 가족.
이렇게 그레이움 백작을 보기 전까지는, 아예 그레이움 백작을 잊고 있기까지 했다.
“루, 루이야, 제발 내 말 좀 들어 보려무나. 누가 뭐래도 우리는 혈연지간이 아니더냐?”
그러니 그레이움 백작이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동정심을 구걸해도, 더는 흔들리지 않았다.
“네가 지금, 아쉴레앙 공작에게 협박을 당하는 건지, 세뇌돼서 이러는 건지는 몰라도……”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그레이움 백작이 슬쩍 눈치를 보며 루비아나를 험담하려 하자 루이먼드는 바로 그의 말을 끊어 냈다.
루이먼드가 문밖의 마부에게 눈짓하자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마부가 안으로 손을 뻗었다.
그레이움 백작은 잽싸게 그 손길을 피하곤, 마차 바닥에 무릎을 꿇고 루이먼드의 다리에 매달렸다.
“이거 놓으십……”
“아이고, 루이야. 내 손자! 살려 다오. 너마저 우리를 버리면, 우리는 다 죽는단다. 정말이다!”
그레이움 백작이 울고불고 사정했다.
“잠깐.”
루이먼드는 아예 마차 안으로 들어와 그레이움 백작을 끌어내려는 마부에게 손짓했다.
“하지만……”
“잠깐이면 되니까 부탁함세.”
루이먼드는 금화를 꺼내 마부와 시종들에게 건넸다.
이 마차가 아쉴레앙 공작가의 것이었다면, 애초에 그레이움 백작은 접근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호위 기사나 마부에게 붙잡혀 내동댕이쳐졌을 테니까.
아쉴레앙 공작가 사람들은 그렇게 철저하게 루이먼드를 보호했다. 루이먼드가 한동안 그레이움 백작을 깜빡 잊고 지낼 수 있을 정도로.
오늘 몰래 황제를 만나러 가지만 않았더라도, 어쩌면 루이먼드는 계속 그렇게 그레이움 백작을 까맣게 잊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루비아나의 그늘에서 편안하게, 안전하게.
예외는 오늘 딱 하루였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그레이움 백작이 나타났다.
‘이게 우연일까?’
아니, 그럴 리가.
‘오늘, 이 시간에 내가 황궁의 마차를 타고 이곳을 지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
루이먼드는 힐끔힐끔 눈치를 보는 그레이움 백작에게 생각이 들킬까봐 애써 태연한 척했다.
‘어떻게 안 거지? 무슨 속셈으로 오늘을 노려 나한테 달라붙은 거고?’
그레이움 백작을 내쫓는 건 답을 알아낸 뒤에 해도 늦지 않는다. 그리 생각하며 그레이움 백작을 놔뒀지만. 같은 공간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으으, 정말 싫다. 하필이면 황궁 가는 길에 뛰어들 건 또 뭐람?’
황제를 만나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불행의 예고 같아 섬뜩하기도 했다.
그래서 당장이라도 발로 뻥- 차 내쫓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무슨 속셈인지 알아내야 해.’
어쨌든 그레이움 백작은 반란 세력의 핵심이었다. 그가 작정하고 자신의 주변 경비가 허술해진 틈을 노려 달려든 이유가 뭔지 알아야 했다.
“무슨 일입니까?”
루이먼드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그게 말이다. 그런데 내가, 다 늙어 삭신이 쑤시고 특히나 무릎이 아파서 말이다. 앉아서 말해도 될까?”
“…….”
“칼칼하니 목이 아픈 게, 뭔가 시원한 걸 마시고 싶기도 하고. 으응?”
루이먼드가 자신을 바로 내치지 않자, 이 능구렁이는 그새 마음을 놓고 수작질을 했다.
“하아.”
루이먼드는 한숨을 내쉬며 문 앞에 대기하고 있는 마부에게 손짓했다. 아니, 손짓하려고 했다.
“아니다! 생각해 보니, 난 여전히 정정한 것 같구나. 목도 하나도 안 마른 것 같고. 암, 그렇고말고!”
그레이움 백작은 루이먼드의 손을 덥석 붙잡아 내리며 소리쳤다. 마차 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우렁찬 목소리를 듣노라니, 확실히 목마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무슨 일입니까?”
루이먼드가 그레이움 백작의 손을 쳐 내며 더욱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게 말이다. 그러니까…….”
그레이움 백작이 또 머뭇거리며 문밖을 넘겨다봤다.
“참 바라는 것도 많으시군요.”
“다, 다 널 위해서 그런 거 아니겠니? 괜히 말이 샜다가는 네게 안 좋을 테니 말이다.”
“……말이나 못하면.”
루이먼드는 질색하면서도, 그레이움 백작이 바라는 대로 문을 닫아 주었다.
그레이움 백작은 루이먼드가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그사이에 얼른 맞은편 의자에 올라앉아 있었다.
루이먼드가 지그시 바라보자, 주먹으로 무릎을 톡톡 치며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이고, 허리가…… 아니, 다리가…….”
여전히 진정성은 없어 보였다. 루이먼드는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얘야, 날 너무 박대하지 말려무나.”
“그럼 환대라도 해 드릴까요?”
“네, 네가 마음의 상처가 깊은 건 모르지 않지만……”
“아니요, 모르실 겁니다.”
루이먼드의 입가에 찬웃음이 어렸다. 뻔뻔하기 그지없는 그레이움 백작이 보기에도, 즐거워 짓는 미소는 아니었다.
“얘야, 변해도 너무 변했구나. 넌 원래 이렇게 야박한 애가 아니었는데…… 대체, 아쉴레앙 공작이 네게……”
그레이움 백작은 다시 우는 척하며, 눈물이 나지도 않는 눈가를 소매로 문질렀다.
“할 말 없으면 내리십시오.”
“아니, 아니다. 내 할 말이 있어서 널 찾아왔단다. 암, 그럼!”
“그럼 당장 말씀하십시오.”
루이먼드에게 눈물 공격이 통하지 않자, 그레이움 백작은 슬그머니 우는 척을 멈췄다.
그래도 약한 척하는 건 완전히 포기할 수 없겠는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루이먼드는 따분한 표정으로 듣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반란 세력에서 쫓겨났다는 말입니까?”
“그래, 너 때문에!”
그레이움 백작이 분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 질렀다. 물론, 곧바로 꼬리를 말고 불쌍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이놈들, 두고 봐라. 내 반드시, 반드시 다 갚아 줄 테니.”
자신을 쫓아낸 반란 세력에게 앙심을 품은 모습을 보자니,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그레이움 백작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순 없었다.
그냥 반란 세력 안에서 구박 좀 받은 걸 가지고 저렇게 원한을 불태우는 걸지도 모른다. 그레이움 백작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니까.
“너와 오딜 후작 영애의 결혼식이 망하니까, 그놈들이 바로 본색을 드러냈단다.”
그레이움 백작의 하소연은 계속 이어졌다.
“결혼식이 망한 게 아니라, 애초부터 그런 결혼식은 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무튼, 얘야. 중요한 건, 그쪽에서 감히 나를! 너의 조부인 나를 내쳤다는 거란다. 네가 아쉴레앙 공작과 결혼했으니 너는 물론이거니와 나마저 믿을 수 없다고, 쓸모없어졌다고 내쳤단 말이다!”
그레이움 백작이 방방 날뛰었다. 덕분에 마차가 덜컹덜컹 흔들렸다.
“괜찮으십니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아니, 괜찮네.”
루이먼드는 밖에서 묻는 말에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그레이움 백작을 쏘아보았다.
“그래서요?”
“루, 루이야? 그래서라니?”
“그쪽에서 쫓겨났다고 절 찾아오신 겁니까? 왜요?”
루이먼드는 그레이움 백작이 왜 자신을 찾아온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반란 세력으로 다시 기어들어 가고 싶으니까, 비아랑 이혼하고 이제 와서 오딜 후작 영애와 재혼이라도 하라고 설득이라도 하러 온 건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났다. 이혼? 이혼이라니? 아예 그레이움 백작가와 절연하면 했지, 그건 절대 불가능했다.
“지금까지 하신 말씀, 그렇다 치죠. 뭐, 믿기진 않지만.”
“믿기지 않는다니!”
“왜 날 찾아온 겁니까.”
“그, 그건…….”
“당장 말하세요.”
“이, 이왕 사정이 이렇게 되었으니. 내가, 네가 아쉴레앙 공작의 부군이 된 걸 받아들이고 그, 그 정도로 만족하겠다고…….”
루이먼드의 성난 눈빛을 본 그레이움 백작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만족하겠다고 말하려고 온 거란다.”
듣고 있던 루이먼드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레이움 백작은 생각 이상으로 탐욕스러운 쓰레기였다.
“당신이 뭔데 만족한다 만다야?”
“다, 당신이라니! 나는 네 외할아버지이고, 너를 키운!”
“키워? 그게 키운 거라고?”
루이먼드는 저것도 외할아버지랍시고, 애정을 갈구하고 매번 실망하여 움츠렸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절로 이가 갈렸다.
“당신은 날 키운 게 아니야. 사육한 거지.”
루비아나와 결혼하여 함께 살며, 실감했다. 그레이움 백작저에서의 자신은 잡아먹으려 키우는 돼지만도 못한 처지였다는 걸.
비단옷을 입히고 기름진 음식만 먹이면 단가?
그레이움 백작저의 누구도 그에게 애정 어린 시선 한 번 준 적이 없었다. 안아 주기는커녕, 닿는 것조차 껄끄러워했다.
말로만 왕자님, 왕이 되실 분, 사랑하는 내 손자라고 지껄였을 뿐. 정말로 귀히 여겨 주지 않았다.
차라리 마구간의 말이 나았다. 매일 직접 빗질해 주며, 편자가 닳진 않았는지 세심히 살피고 관심을 주었으니까.
루비아나가 건네는 소금 산과 다이아몬드 광산을 날름 받아먹고는 자신을 팔아 치우듯 루비아나에게 넘긴 주제에.
이제 와 키운 정을 운운하며 가족 대접을 받고자 하다니.
‘정말 나한테, 내 어머니한테, 조금도 미안하지 않은 거야? 그렇게 사는 삶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거야?’
그레이움 백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이 비아에게서 소금 산과 다이아몬드 광산을 받아 갔을 때, 우리 사이는 완전히 끝났습니다.”
목소리는 담담했다. 너무 화가 나면 오히려 차분해진다던데, 루이먼드가 딱 그 상태였다.
“끝나다니! 가족 사이에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란다, 루이야.”
“날 가르치려 들지 마십시오. 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습니다. 적어도 가족에 대한 일에 한해서는!”
아니샤. 어머니. 불쌍한 사람.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만 생각하면, 아직도 숨이 막히고 사는 게 죄스러웠다.
‘그런데 왜, 당신은. 당신은…… 반성조차 하지 않는 거야? 왜 나를, 너무 당연하게 이용할 생각만 하는 거냐고!’
루이먼드는 아직도 자신이 그레이움 백작에게 실망할 수 있다는 게 너무도 끔찍하고 참담했다.
버리고 버리고 또 버렸다고, 이제 완전히 버렸다고 생각했건만. 아직도 그레이움 백작을 향한 미련이 남아 있었던 걸까?
‘이제 나는 아쉴레앙이야.’
루이먼드는 악착같이 루비아나를 떠올렸다. 그녀의 손길과 입술의 감촉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나한테도 있어. 나를 소중히 여겨 주는 사람. 비록 3년 기한 한정이어도, 그 사람이 내게 가족이 되어 주었어.’
그러니까 더는, 혈연이랍시고 들러붙는 그레이움 백작가의 손짓에 놀아나지 않으리라.
루이먼드가 결연한 표정으로 그레이움 백작을 바라보았다.
“지난번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못 알아들었다면 얼마든지, 얼마든지 다시 말씀드리지요. 나는 더는, 당신을 내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도 소금 산과 다이아몬드 광산에 날 넘기며 그렇게 생각했을 텐데요.”
“얘야, 그건!”
“말도 안 되는 변명 따위, 듣고 싶은 생각 없습니다.”
루이먼드는 그레이움 백작의 말을 끊어 내며 단호히 말했다.
“그런 일로 나를 찾아왔다면 잘못 찾아온 겁니다. 돌아가십시오. 당신이 반란을 저지르든 반란 세력에서 쫓겨나든, 그건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일이니까.”
“억…….”
루이먼드가 강하게 나오자, 그레이움 백작은 당황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마저 날 버리면, 나는 어쩌란 말이냐!”
“내 알 바 아니지요.”
루이먼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하고 말을 이었다.
“정 저와 가족의 인연을 이어 가고 싶다면.”
“그래, 그래! 역시 루이, 너는 착한 아이지.”
그레이움 백작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루이먼드는 피식 웃었다. 그 모습은 약간 루비아나를 닮아 보였다.
“소금 산과 다이아몬드 광산을 돌려주세요. 그러면 당신의 말이 사실이고, 진짜 속마음이라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레이움 백작이 돌려줄 리 없지만. 설사, 돌려준다 해도 관계를 되돌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소금 산과 다이아몬드 광산은 본래 루비아나의 것. 그녀의 것을 그녀에게 되돌려 주고, 입을 싹 닦을 생각이었다. 이는 원래 그레이움 백작이 잘하던 짓이었다.
“그걸 왜! 내가 그걸 왜 돌려줘! 그건 이제 내 거야!”
역시나. 그레이움 백작은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혈연지간이라면서, 날 위해 그런 것 하나 포기하지 못합니까?”
루이먼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허탈히 웃었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저렇게 나오니 속이 텅 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레이움 백작은 뒤늦게 아차 싶었는지 표정을 구겼다.
“그, 그게, 그러니까 말이다, 루이.”
“그게 싫다면 어쩔 수 없군요. 우리 대화는 여기서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루이먼드는 그레이움 백작의 말을 싹둑 자르며, 마차 문을 열었다.
“루이! 루이먼드 폰 그레이움!”
그레이움 백작이 다급히 루이먼드를 붙잡으려 했다. 루이먼드는 찰싹, 소리 나게 그 손을 쳐 냈다.
“네, 네가 감히 날 거부해?”
그레이움 백작이 시뻘게진 손등을 바라보며, 눈을 부릅떴다.
“말을 똑바로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레이움 백작.”
“이, 이놈이 여자 하나 때문에 정신이 나갔구나! 내가 누군 줄 알고!”
“정신이 나간 건 그쪽이지, 그레이움 백작.”
“루이!”
“나는 루이먼드 폰 아쉴레앙, 아쉴레앙 공작의 남편이다. 당신 같은 사람이 함부로 대할 사람이 아니야.”
“……!”
말문이 막혔는지, 턱살이 부르르 떨렸다. 루이먼드는 꼴도 보기 싫어 고개를 돌렸다.
“오늘의 만남은, 매우 불쾌하군요. 그레이움 백작, 당신이 내게 무슨 추태를 부렸는지 내 잊지 않겠습니다.”
루이먼드는 잠시 숨을 가다듬은 후 문밖에 서 있는 마부에게 손짓했다.
“뭣들 하고 있는가? 당장 이 사람을 마차에서 끌어내게.”
루이먼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부가 마차 안으로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
마부는 루이먼드에게만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두툼한 손으로 그레이움 백작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자, 잠깐! 잠깐마안!”
다급해진 그레이움 백작은, 아무 말이나 입에 담았다.
“네 어미가 하늘에서 이 모습을 보면, 얼마나 슬퍼하겠느냐!”
“……뭐, 라고?”
“우리 착한 아니샤가 봤으면 분명……”
“닥쳐!”
루이먼드는 마부를 밀치고, 그레이움 백작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커흑!”
목이 졸린 그레이움 백작이 손발을 버둥댔다. 마차 밖으로 밀려나 엉덩방아를 찧은 마부마저 얼떨떨한 표정으로 루이먼드를 올려다보았다.
루이먼드를 본 사람들은 늘, 제멋대로 착각한다. 저렇게 아름다우니 비리비리하고 허약하겠지.
그 바람과 달리, 루이먼드는 루비아나가 인정하는 강골이었다. 정말 비리비리하고 허약한 중년의 백작 정도는 쉽게 들어 올릴 수 있을 만큼의.
“커, 루, 이, 이거, 놓, 놓고……”
“당신이, 당신이 어떻게 내 어머니를 입에 담을 수 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이, 당신이 어떻게!”
루이먼드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어머니가 어떻게 생겼는지, 성격은 어땠는지. 모두 남에게 전해 들어 알 뿐이었다.
그래도 루이먼드는 늘, 어머니의 불행과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런데 정작 그레이움 백작은,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당사자는, 죄책감을 가지기는커녕 어머니의 죽음마저 도구로 이용했다.
그레이움 백작에게 아니샤는 살아 있을 적엔 왕의 장인이 되기 위한 도구였고, 죽어서는 루이먼드를 고분고분하게 만들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이었다.
‘뻔뻔해도 이렇게 뻔뻔할 수가.’
그동안 나는 왜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듣고 살아왔단 말인가? 새삼 서러움이 뼛속까지 사무쳤다.
루이먼드는 그레이움 백작의 목을 움켜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루비아나가 훈련한 기사도 아닌데 제법 세다고 칭찬해 주었던 그 악력으로 목을 조르니, 그레이움 백작의 얼굴이 시퍼레졌다.
“루, 루이……. 커흑, 이, 이거, 좀, 노, 놓…… 컥.”
그레이움 백작이 발버둥 쳤다.
“다시는 내 어머니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마십시오. 당신은 그럴 자격 없으니까.”
“크, 흑! 이, 이, 노, 놓고! 놓고옥!”
“또다시 날 찾아와서 그딴 소리를 지껄인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반란 세력에 대한 정보? 그게 뭐든 다 필요 없었다. 당장, 눈앞에서 그레이움 백작만 치울 수 있다면.
한시라도 더 그레이움 백작과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황제 폐하께서 그리 한가하시지 않을 텐데, 언제까지 마차를 세워 둘 셈인가!”
“이제 용무는 다 끝나셨습니까?”
마부가 얼른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용무랄 것도 없었네. 갑자기 뛰어들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서 잠시 이야기를 들어 봤을 뿐인데, 쓸데없는 짓거리였던 것 같군.”
“루, 루이? 네가, 네가 나를-”
“당장 끌고 나가 어디에든 버리게.”
루이먼드는 그레이움 백작을 버리듯 내동댕이쳤다. 마부는 얼른 옆으로 비켜났다.
“으악!”
그레이움 백작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어린 맹수를 말뚝으로 박아 놓고 길들이면, 나중에 맹수가 커서도 제 손톱만 한 말뚝에 매인 채로 고분고분해진다. 지금까지의 루이먼드가 딱 그 상태였다.
루이먼드는 자신이 강한 줄 몰랐고, 그레이움 백작은 루이먼드가 자신을 이렇게 대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제야 그 기형적인 힘의 관계가 산산이 부서졌다.
“당장 내 눈앞에서 치우게.”
“예!”
마부는 고개를 꾸벅이고는, 그레이움 백작을 들어 올렸다.
그전까진 그래도 귀족 대접을 해 주어 적당히 말린 것이었다.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루이먼드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마부의 팔뚝에서 힘줄이 불끈 솟았다.
“루이! 루이이!”
탁. 루이먼드는 바로 마차 문을 닫았다.
“폐하의 손님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백작님.”
“네 이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놓아라, 이거 놓지 못해? 루이, 얘야!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 굴 수 있단 말이냐! 내가 네 할애비인데!”
아까의 협박이 먹힌 건지, 더는 아니샤를 들먹이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하아. 루이먼드는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지나 봐야 행복했다는 걸 알게 된다고, 그러니까 현실에 충실하라고 지도 교수님이 늘 말씀하셨지.’
지도 교수님은 그러니까 오늘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의미에서 한 말이었겠지만. 이 순간, 루이먼드는 그 어느 때보다 그 말이 절실하게 사무쳤다.
예술가 후원에 실패했다. 직물 독점 사업도 실패했다. 뭘 해도 아무튼 실패하고 말았다.
실패할 때마다 루비아나 보기가 부끄럽고, 괴로웠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때가 속 편하게 행복한 때였던 것 같았다.
오직 루비아나만 생각할 수 있었으니까. 어떻게 하면 루비아나에게 인정받고, 그녀의 곁에 좀 더 오래 머무를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방금 그레이움 백작의 난입으로 그 행복하던 시절은 끝났다. 루이먼드는 다시금 현실로 끌려 나왔다.
그레이움 백작. 반란. 오딜 후작. 리사나. 그들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계약 결혼. 3년 기한. 그리고 얼음으로 깎아 만든 뱀같이 싸늘하고 섬뜩한 황제의 초대…….
새삼, 황제의 초대가 무서웠다.
그레이움 백작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머리가 꽃밭이었다.
‘여차하면 비아가 구해 주겠지.’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이제야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루이먼드는 하필이면 왼쪽 가슴팍에 넣어 두었던 초대장을 꺼냈다.
초대장이 얼음으로 만든 뱀의 비늘처럼 느껴졌다. 잡고 있는 손마저 얼어붙게 만드는 것 같았다.
덜컹, 마차가 다시 움직였다. 밖에서 왁왁 소리치는 그레이움 백작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
그래도 루이먼드는 오랫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자신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