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131)

***

“오는 중에 일이 있었다던데?”

황제가 물었다.

“…….”

알현실 말고 내궁의 응접실.

황제의 사적인 공간으로 안내 받아 온 루이먼드는 친근하게 차를 권하는 칼레나 때문에 억지로 찻잔을 들어올리다 말고, 그 상태로 얼음이 되어 버렸다.

칼레나는 눈앞에 놓인 살아 있는 조각상을 즐거이 관람했다.

‘딱 언니 취향이긴 하네.’

칼레나는 외할머니의 신랑감 선택법을 진지하게 듣던 어린 루비아나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잘생긴 얼굴과 의외로 넓은 어깨, 탄탄한 몸의 윤곽을 어느 정도 감상하고 나니, 조각상이 다시 사람이 되었다.

“그, 그게…….”

아름다운 검은 눈이 떼굴떼굴 굴렀다.

칼레나는 재촉하지 않고 대답을 기다려주었다.

황제가 되고 보니, 자신의 앞에서 말을 더듬지 않는 남자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칼레나는 제 앞에서 말을 더듬는 남자들에게 꽤 관대했다.

멍청하고 겁 많고 순발력 없는 게 죄는 아니지 않은가? 비록 그것이 폭군의 사생아이며, 언니의 남편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어떻게 대답할지 궁금하군.’

칼레나가 너그러운 인내심을 보여주며 싱긋, 웃자 루이먼드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찻잔을 든 손이 덜덜 떨렸다.

오는 중에 무슨 일이 있었니? 루이먼드에겐 이 질문이 일종의 시험처럼 느껴졌다.

‘뭐라고 대답할래? 대답 여하에 따라 네 목을 어떻게 할지 결정하도록 하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달까.

‘책에서 주인공이 지금이랑 비슷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무슨 생각인지 말 안 하고 혼자 해결하려고 애쓰다가 괜히 의심 사고, 일이 더 커지고 그러던데…….’

책을 읽을 때마다 얼마나 답답해하며 가슴을 퍽퍽 내리쳤는지 모른다.

말하라고, 그냥 말해! 쟨 이미 널 사랑하고 있는데, 저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는데. 왜 그걸 눈치 못 채고 말을 안 하는 거야! 괜히 오해하잖아. 그냥 말하라고!

‘내가 지금 그런 상황에 놓여 있는 거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니, 책 속의 주인공들이 왜 침묵했는지 알 것 같……기는 무슨. 더더욱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오는 중에 그레이움 백작이…….”

루이먼드는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다 말했다.

“저는 절대, 절대 몰랐습니다. 그레이움 백작이 갑자기 뛰어들어 오기에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나, 들어나 보자 싶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레이움 백작이 대뜸 반란군에서 쫓겨났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호오?”

칼레나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설마 이렇게 대놓고 말할 줄이야. 딱 그런 표정이었다.

칼레나는 시종장을 돌아보았다. 시종장은 그답지 않게 얼이 나가 있었다. 하지만 곧 칼레나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표정을 관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부가 말한 대로입니다.’

짧은 신호였지만 칼레나는 바로 알아들었다.

‘재미있네.’

칼레나는 픽 웃고는 장의자의 등받이에 팔을 기댔다.

그녀는 다리를 꼬고 느슨하게 앉아, 열심히 떠들어 대는 루이먼드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

루이먼드의 길고 긴 설명이 끝나자, 칼레나는 성의 없이 대답했다.

그게 끝이었다.

“……?”

루이먼드는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장 그레이움 백작을 잡아들이지 않으실 겁니까?”

“글쎄. 그대의 증언만 믿고 그런 짓을 벌이기엔, 사안이 너무 크지 않나? 무려 반역인데.”

“반역이니까!”

당장 잡아들여야지. 시시비비는 잡아들인 다음에 가려도 되고!

루이먼드는 저도 모르게 울컥하여 소리칠 뻔했다.

‘원래 왕이나 황제는 반역의 반 자만 나와도 파르르 떨고 분노해야 하는 거 아냐?’

소설에서 보면 반역 세력의 끄트머리에 서 있던 하급 귀족이나 하인이 도망쳐 나와 밀고해도 큰일이 나던데.

어째서 이 황제는 하급 귀족도 하인도 아닌, 무려 그 반역 세력에서 제멋대로 왕으로 추대하려 하는 폭군의 사생아 왕자가 모든 걸 이실직고하는데도 이리 태연할 수 있단 말인가?

너도 이미 반란 세력에 가담한 거 아니냐, 의심을 피하려고 거짓말을 하는 거 아니냐, 요즘 나와 아쉴레앙 공작 사이가 예전 같지 않은데 역시나 네놈의 이간질 때문이구나, 등등.

이런 말을 들을 걸 각오했다. 어떻게 대답할지도 고민해 뒀건만, 칼레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내 말을 안 믿는 건가? 그레이움 백작을 신임해서?’

혹시나 싶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녹색 눈이 재미있다는 듯 빛났으니까.

루이먼드는 허탈하다 못해 소름이 돋았다.

‘잠깐, 그러고 보니…….’

문득, 타고 온 마차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마차는 크고 아름다웠다. 누가 봐도 황궁에서 나온 마차라는 티가 팍팍 났다.

그런데 마차를 끄는 인원은 마부 둘과 시종 둘이 고작이었다. 기사가 한 명도 따라붙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마부와 시종들은 그레이움 백작을 막는 데에도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레이움 백작을 마차 밖으로 내친 것도 결국 루이먼드였다.

그들은 루이먼드가 내미는 금화를 넙죽 받아 들었고, 또 루이먼드가 엄하게 말하고 나서야 그레이움 백작에게 손을 댔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그레이움 백작을 접근시키기 위해, 혹은 루이먼드의 태도를 확인하고자 그렇게 시킨 것처럼. 태도가 미적지근했다.

‘미리 지시해 둔 걸까?’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황제는 이미 다 알고 있었어.’

어쩌면 그레이움 백작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조정한 걸지도?

‘설마. 그건 아니겠지.’

생각이 너무 앞서 나갔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루이먼드는 겁에 질린 눈을 들어 황제를 바라보았다.

“음?”

황제는 무엇이든 할 말이 있으면 또 해 보라고, 하지만 들어주지는 않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루이먼드는 그런 황제가 솔직히, 아주 많이 무서웠다.

‘어떻게 이런 황제를 매일같이 보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루이먼드는 반란 세력이, 정확히는 오딜 후작과 그레이움 백작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차를 좀 더 들게. 말을 많이 해서 목이 마를 텐데.”

“예? 예, 예.”

루이먼드는 파드득 놀랐다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배,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루이먼드는 자신이 목마른지 아닌지 분간하지 못했다. 차가 뜨거운지 차가운지, 무슨 향이 나는지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저 칼레나가 시키는 대로 꿀꺽꿀꺽 찻잔을 비웠다.

교수형에 처할 때, 죄인에게 마지막으로 한 모금 마시게 해 준다는 술맛이 이러할까?

몸이 절로 떨렸다.

찻잔이 비니, 시종장이 찻물을 따라 주었다.

루이먼드는 영원히 차를 마셔야 하는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다시 찻잔을 들었다. 그러자 시종장이 루이먼드의 팔을 살짝 잡았다.

루이먼드가 흠칫 놀라니, 시종장이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너무 급하게 드시면 체하십니다. 물을 마시다 체하면 약도 없다는 옛말이 있지요.”

“으이구, 또 잔소리.”

대답은 루이먼드 말고 다른 쪽에서 나왔다. 지긋지긋하다는 듯 투덜대나, 그런데도 애정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애정이 느껴져?’

루이먼드는 그런 인간적인 목소리가 눈앞의 저 무서운 황제에게서 나오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폐하께서는 당신 앞에서 잔뜩 긴장한 사람을 더 긴장하게 만들어 놀리는 걸 좋아하신답니다. 장난치는 걸 좋아하시는 것뿐, 절대 나쁜 분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에도 시종장이 인자한 목소리로 루이먼드를 달랬다.

‘그 황제 폐하가 저기에 있는데, 이렇게 대놓고 말해도 되는 겁니까?’

루이먼드는 시종장을 올려다보며 눈빛이 흔들렸다.

“지금 내 앞에서 날 모욕하는 건가?”

역시나. 황제가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본인이 혼나는 것도 아닌데 루이먼드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이번에도 놀라고 겁먹은 건 루이먼드뿐이었다. 시종장은 태연한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모욕이라니요, 공작 부군께서 워낙 긴장하신 듯하여 이 늙은이가 주책없이 참견한 것이지요.”

“그래, 주책 맞아. 주책이라고.”

“허허, 이 늙은이가 또 폐하의 심기를 거슬렀나 봅니다. 송구합니다, 폐하.”

시종장의 표정은 전혀 송구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말이나 못하면.”

칼레나가 투덜댔다.

똑같이 격 없는 편한 말투였지만, 루이먼드에게 말을 할 때와 시종장과 대화할 때가 전혀 달랐다.

전자는 맛있는 토끼를 앞에 둔 배부른 뱀, 아니 드래곤의 모습이었다. 후자는 시녀장과 함께 있는 루비아나와 비슷했다.

‘아, 이렇게 말하는 건 비아랑 비슷할지도…….’

루이먼드는 칼레나에게서 루비아나와 닮은 점 한 조각을 발견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겁먹어 얼어붙은 마음이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에게 그런 존재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

‘아니, 내 아내.’

루이먼드의 뺨에 옅게 홍조가 돌았다.

그걸 본 칼레나가 쯧, 혀를 찼다.

“이게 다 시종장 때문이야.”

“제가 또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아들은 요즘 뭘 하는 거야? 편지는 꼬박꼬박 보내는 것 같던데.”

“예, 지난주에도 받았지요. 기억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허허, 시종장이 웃었다.

그 웃음이 쓴 풀을 입에 문 듯 쓰게 느껴진다고, 루이먼드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생각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잊었다. 칼레나 앞에서 감히 딴생각을 할 만큼 마음이 편해진 건 아니었으니까.

“따로 휴가라도 내서 찾아와서 제 아버지가 얼마나 능글맞아졌는지 확인할 생각은 없대?”

“그러게 말입니다. 아주 고얀 녀석이지요. 제 아비가 보고 싶지도 않은가 봅니다.”

“잔소리가 듣기 싫은 걸 수도 있지.”

“역시 그런 걸까요? 허허, 이런 참.”

칼레나와 시종장 사이에 격 없는 대화가 오갔다.

루이먼드는 시종장을 존경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시종장은 루이먼드의 열렬한 눈빛을 눈치채고는 겸연쩍게 웃으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아.”

칼레나는 그제야 제 앞에 루이먼드가 있다는 걸 기억해 낸 듯했다.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걸 전혀 미안해하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루이먼드를 보았다.

‘이대로 영영 잊어 줬어도 괜찮은데. 아니, 오히려 감사했을 텐데.’

루이먼드는 슬퍼하며 다시금 바짝 긴장했다. 시종장이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지만, 그 웃음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칼레나는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쿡쿡 웃었다.

“물어볼 게 있어.”

가벼운 목소리였다. 루이먼드는 말뜻을 고민할 틈도 없이 무조건 대답했다.

“예.”

“내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이 안 나와서 말이야.”

“예. 뭐든 말씀하십시오.”

‘원하신다면 세르딤, 아니, 루이딤으로 만든 드레스를 백만 벌이라도 가져다 바치겠습니다.’

루이먼드가 절실한 마음을 담아 대답했다.

“내가 왜 널 내 언니 옆에 둬야 하는 걸까?”

“예, 얼마든지…… 예?”

“폭군의 사생아.”

“……!”

“얼굴 말고는 볼 것도 없는, 학자의 집 낙제생.”

“…….”

아, 이건 그냥 운명이려니 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다지 상처가 되진 않았다.

“게다가 그대의 말대로라면, 반란 세력의 마스코트이기까지 한 것 같은데.”

“…….”

“말해 봐, 내가 왜 그대를 내 언니 옆에 놔둬야 하는 걸까?”

녹색 눈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루비아나와 닮았지만, 루비아나와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

시종장 덕에 조금이나마 부드러워졌던 분위기는 다시 냉각되었다.

“그건…….”

루이먼드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그건?”

“……제, 제가 잘생겨서?”

오로지 생존 본능으로, 입이 알아서 열려 제멋대로 말했다.

멍청한 대답이었다.

‘뭐? 내가 지금 뭐라는 거지?’

루이먼드는 자신이 지껄이는 말을 들으며 실시간으로 놀랐다.

이 얼마나 귀한 경험이란 말인가! 다만, 굳이 황제 앞에서 경험해 보고 싶지는 않았다.

“아, 그게, 아니, 이게 아니라!”

루이먼드는 뒤늦게 자신의 멍청함을 수습하려고 했지만, 한 번 뱉은 말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목이 뎅겅 잘려 다시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루이먼드는 더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 이 미친놈. 이번엔 황제에게 목이 잘려 죽고 싶은 거야? 비아를 놔두고 죽을 셈인 거냐고! 안 돼!’

루이먼드가 혼돈, 경악, 절망에 휩싸여 얼어붙었다. 손으로 목을 감싸지도 못했다.

그런 루이먼드를 보며 칼레나가 웃었다. 재미있다는 듯이, 혹은 가소롭다는 듯이.

“폐, 하?”

겨우 쥐어 짜낸 목소리로 부르니, 칼레나가 산뜻하게 대답했다.

“맞아.”

“예?”

“그러니까 그 얼굴을 잘 갈고닦도록 해.”

“……예?”

칼레나가 웃으면서 말했다. 루이먼드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웃고 있으면 뭘 하나. 루비아나를 꼭 닮은 두 눈만은 웃지 않는데.

잠깐이나마 루비아나와 닮은 모습을 찾아내고는 마음을 내려놓았던 게, 꿈같이 느껴졌다. 꿈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멍청한 짓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칼레나의 웃음소리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머리, 어깨, 등에 마구 내리꽂히는 것 같았다.

그레이움 백작과 황제를 알현했을 때, 황제는 배부른 맹수 같아 보였다.

그런데 지금 황제는 굶주린 맹수가 되어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황제에게 허기를 가져온 걸까? 아니, 처음부터 황제가 정말 ‘배부른’ 맹수이긴 했던 걸까?

이제는 황제의 첫인상조차 긴가민가했다.

루이먼드는 아연실색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젠 칼레나를 마주 보는 것조차 버거웠다.

“멍청한데 눈치는 빠르군.”

귓가로 칼날 같은 목소리가 스쳤다.

“……!”

놀라 눈을 뜨니, 씩 웃는 칼레나의 얼굴이 보였다.

다시 눈을 감고 싶었지만, 칼레나와 눈이 마주친 이상 마음대로 그럴 수도 없었다.

“감이 좋아. 언니랑 전혀 다르네?”

“…….”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칼레나는 딱히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는 듯 기지개를 켰다.

옆에 서 있던 시종장이 손님을 앞에 두고 그러시면 안 된다고 조그만 목소리로 채근했다. 루이먼드가 들을 걸 염려해 작게 말한 배려는 고마우나, 어쨌든 루이먼드에게 고스란히 들렸다.

“알았어, 알았다고.”

칼레나는 손사래를 치며 시종장의 입을 닫아걸게 하고는, 의자에 기댄 손으로 턱을 괴고 루이먼드에게 물었다.

“요즘 남의 결혼식 준비를 그렇게 잘 도와준다면서? 그대의 손을 거치면, 이전에 듣도 보도 못한 아름다운 결혼식을 치를 수 있다고 다들 난리들이라던데.”

“예?”

원래 소문은 당사자에게 제일 늦게 도착하는 법.

루이먼드는 자신을 두고 그런 소문이 도는 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황제가 물어봐도 생전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눈을 크게 뜨기만 했다.

“재미있네. 자신과 관련한 소문엔 둔한 건가?”

“그게 무슨…….”

“그래서 말인데, 곧 있을 신년제 연회 준비를 맡아 줬으면 좋겠어.”

“예. 알겠…….”

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을 리가.

루이먼드는 기겁하며 몸을 뒤로 젖혔다. 그래 봤자 의자 등받이 때문에, 칼레나와 아주 멀어질 수도 없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한 그대로인데. 시종장, 내가 뭘 잘못 말했나?”

“조금 더 풀어서 말씀해 주시지요.”

시종장이 답했다.

“굳이?”

칼레나는 의아해했다.

주변에 너무 유능한 신하들만 있는 것도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좀 덜 똑똑한 사람과 대화할 때는 친절하게 이유를 설명해 줘야 한다는 걸 까먹게 되니까.

아아, 칼레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루이먼드는 괜히 속상했다. 학자의 집에서는 말귀를 못 알아들어도, 아무도 칼레나처럼 귀찮아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몇 번이고 설명해 주고 또 설명해 주곤 했는데.

‘스승님, 학자의 집 밖은 참 인정머리 없는 곳인 거 같아요.’

울적한 마음에 눈빛이 촉촉해졌다. 루이먼드만 한 아들이 있는 시종장마저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로 처연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칼레나는 아무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이런 사람이 훗날 오르카와 폴 네리오의 예술 작품을 알아보는 미적 안목을 가지게 될 예정이었다.

“원래 황궁에 큰 행사가 있을 땐, 재주 있는 황족들이 나서서 도와야 하는 법이야.”

“네에.”

루이먼드가 경험해 본 제국이라고는 칼레나가 세운 제국뿐이었다. 루이먼드가 경험해 본 황제 또한 칼레나뿐이었다.

그러니 루이먼드에겐 칼레나가 말하는 걸 맞다 틀리다 할 경험 자체가 없었다.

게다가 루이먼드는 내내 학자의 집에 틀어박혀 살았다. 제국이 건국된 이후로 매년 신년제를 어찌 치렀는지 알 리 없었다.

그냥 칼레나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 거겠거니, 생각할 따름이었다.

“지금까지는 수도에 황족이라고는 나 혼자였으니까, 신년제 준비를 맡길 사람이 없었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잖아?”

“그런, 가요?”

루이먼드가 떼구르르, 눈동자를 굴렸다.

‘왠지 느낌이 이상한데?’

간질간질한 불안을 느끼자마자, 칼레나가 빙긋 웃으며 다리를 꼬았다.

“수도에 또 다른 황족이 돌아왔잖아. 게다가 그 황족이 결혼해 남편까지 뒀지.”

이로써 수도엔 황제를 포함한 황족이 셋이나 되었다. 턱없이 적은 숫자이나 황제 혼자일 때보다는 분명 많아졌다.

“아…….”

설마 했건만. 역시나였다.

“게다가 그 남편은 이런 쪽으로 재주가 뛰어나다더군. 그러니 더더욱 믿고 맡길 수밖에 없겠지?”

“…….”

‘아니요.’

차마 속마음 그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루이먼드가 답을 주저하자 칼레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원래도 눈은 웃지 않고 있었는데, 입술마저 웃지 않으니 분위기는 다시 싸늘해졌다.

“대답.”

“넵.”

루이먼드는 그 분위기에 짓눌려, 저도 모르게 대답하고 말았다. 그리고 대답하자마자 후회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폐하, 저는, 제가 감히…….”

“좋아.”

칼레나가 씩 웃었다.

웃는 모습이 루비아나를 꽤 닮아 있었다. 처음 봤을 땐 하나도 안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보다 보니 계속 루비아나와 닮은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모습에 넋을 잃은 건 잠깐뿐이었다.

루이먼드는 자신이, 그리고 칼레나마저 뭔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다행히 그게 무엇인지는 금방 생각났다.

“폐하, 잠시만요!”

루이먼드는 감히 목소리를 높였다. 칼레나가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지금, 신년제 준비를 논할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황제가 당장 그레이움 백작을 잡아들이면, 기꺼이 증인석에 설 용의도 있었다. 그런데 신년제나 준비하라니?

루이먼드는 칼레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가늠할 수 없었다. 그리고 칼레나는, 루이먼드에게 굳이 제 생각을 드러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 아직 신년제를 준비하기엔 이르지.”

“아니, 그런 말이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래도, 미리 준비하는 게 낫지 않을까?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잖아.”

“신년제 준비는 나중에 해도, 얼마든…….”

루이먼드는 말을 하다 멈췄다.

방금 칼레나의 말이, 단지 신년제 준비에 대해서만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루이먼드가 멈칫하자 칼레나가 눈웃음 지었다.

“역시 눈치가 빨라.”

“그 말씀은 그럼……?”

“더 할 말이 없으니, 이만 자리를 파하도록 하지.”

칼레나가 일어섰다.

루이먼드가 엉거주춤 따라 일어서려 하자, 칼레나가 손으로 어깨를 꾹 눌렀다. 루이먼드가 주저앉자,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루비아나의 손만큼이나 굳은살과 상처로 가득한 손이었다.

격려일까, 협박일까? 루이먼드는 분간이 가지 않았다.

답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루이먼드에게 답을 알려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칼레나의 손끝이 루이먼드의 목을 스쳤다.

오싹하게 소름이 돋았다. 루이먼드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그 바람에 칼레나를 붙잡지 못했다. 아니, 감히 붙잡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머리 위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잘 부탁해.”

그렇게 알현 시간이 끝났다.

루이먼드는 칼레나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루이먼드는 그 손으로 제 목을 움켜잡았다. 아직 동강 나지 않고 제대로 붙어 있는 걸 확인하고야, 막혀 있던 숨이 터져 나왔다.

칼레나의 손끝이 스친 순간, 목이 잘리는 줄 알았다. 당연히 착각이었으나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착각이었다.

루이먼드는 자신이 여전히 목이 잘려 죽을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실감했다.

이후 어떻게 내궁을 나오고 마차에 올라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차에 앉아 있었고, 마차는 황궁의 커다란 정문을 나서고 있었다.

“하아.”

루이먼드는 일단, 무사히 황궁을 벗어났다는 것에 안도했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황제가 단 한 번도 자신을 ‘아쉴레앙 공작 부군’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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