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5/131)

***

루이먼드가 고난을 겪는 동안, 루비아나는 펠트하르그 공작저에 가 있었다.

카드릭과 둘이서만 만나는 줄 알았는데 가 보니 루단테도 와 있었다.

워낙 제멋대로인 녀석이라, 루비아나는 그러려니 했다.

루비아나는 루단테에게 ‘넌 여기 왜 와 있냐?’ 하고 묻는 대신, 카드릭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질문은 제대로 된 답변을 들을 수 있는 쪽에게 해야 하는 법.

“무슨 일이긴, 내가 보고 싶어서 모이자고 했지.”

하지만 루비아나는 제대로 된 답을 들을 수 없었다. 카드릭이 뭐라고 말하기 전, 루단테가 냉큼 대답했기 때문이었다.

루단테는 멋대로 카드릭의 집무실 책상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불량스럽게 앉아서는 신을 벗지도 않고 발을 책상 위에 올리고 있었다.

루비아나도 카드릭도 그 모습을 보고 뭐라 하진 않았다. 오히려 저 정도면 얌전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저놈은 원래 그런 놈이니까.’

그런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루비아나와 카드릭, 두 사람은 루단테와 달리 예의를 아는 정상인이었기에 얌전히 소파에 마주 앉았다.

뭘 마실지 정할 때 약간의 의견 충돌이 있긴 했다.

“난 포도주. 아무거나 줘도 잘 먹으니까, 적당한 걸로 줘.”

“대낮부터 낮술이라니. 몸에 안 좋으니까 차 마셔. 좋은 찻잎이 있으니까.”

“왜? 나한테 주려니까 술이 아깝냐?”

“아깝기는, 줄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것도…….”

카드릭이 말을 하다말고 입술을 깨물었다.

“……포도주 따위보다 훨씬 비싼 찻잎이다.”

대신 무뚝뚝하게 말했다.

“뭐야, 술 아까워하는 게 맞네.”

루비아나는 찻잎이 술보다 비쌀 리 없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기호를 포기하지 않았다.

루단테는 그런 둘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 정도면 고의적으로 저러는 거야.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파괴적으로 둔할 수 있겠어?”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뭘 마실지에 대한 토론에 참전했다.

“나는 동부 레비앙 생수. 고향 물맛이 그렇게 좋더라고. 누나랑 형도 마셔 봐.”

술을 마시면 긴장이 풀리고, 차를 마시면 소변을 자주 보게 된다. 그러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지 못할 확률이 높아진다. 루단테는 이렇게 생각해서 술도 차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아예 안 마시는 건 아니었다. 황제가 권할 때, 루비아나가 억지로 먹일 때는 먹을 수밖에 없으니까.

“자꾸 유난 떨지. 그냥 아무 물이나 마셔.”

“주는 대로 마셔, 너는!”

루단테가 우아하게 손짓하며 생수를 주문하자, 루비아나와 카드릭이 동시에 쏘아붙였다.

“아, 왜 나한테 화풀이야?”

루단테가 입을 삐죽였다.

“아무튼 나는 포도주.”

“몸에 안 좋으니까 차 마시라니까.”

“차는 몸에 좋나?”

“술보다는 좋겠지.”

“글쎄, 북부에서는 차를 우리자마자 얼어붙던데. 술은 안 얼어붙고, 오히려 몸을 따뜻하게 해 주고.”

추운 북부에서 온 공작이 술 예찬론을 펼쳤다.

“여긴 수도다. 찻물이 얼어붙지 않아.”

카드릭은 그리 말하면서도, 집사에게는 도수 낮은 포도주를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루비아나는 소파에 기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문밖으로 나가는 집사에게 눈짓했다.

‘도수 높은 걸로 부탁해.’

카드릭의 심복이 주인의 말을 어기고 제 말을 들어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단 부탁은 해 봤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집사가 주인보다 똑똑해서, 손님의 부탁을 들어줄지.

하지만 그건 루비아나만의 소망이었다. 집사는 못 볼 걸 봤다는 듯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래 봤자 소용없어.”

카드릭이 픽, 웃으며 말했다.

“젠장.”

루비아나는 바로 희망을 버렸다.

과연. 집사는 차와 아주 낮은 도수의 포도주를 내왔다. 안 먹느니만 못한 도수였다.

‘차라리 차를 마시고 말지.’

루비아나는 자신이 이렇게 생각할 줄 알고 카드릭이 저 포도주를 일부러 준비해 둔 거라고 확신했다.

그나마 위안인 건, 레비앙 생수도 내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 왜? 생수 살 돈도 없어? 펠트하르그 공작 거지야?”

루단테가 인상을 팍 썼다.

“그냥 마셔.”

카드릭은 루비아나와 루단테, 두 사람의 찻잔에 손수 차를 따르며 말했다.

루단테는 미간을 찡그린 채로, 마시지도 않을 차에 각설탕을 집어넣었다. 과연 몇 개나 녹일 수 있을지 실험이라도 하려는 듯했다.

루비아나는 그냥 주는 대로 마셨다. 포도주를 좀 더 먹고 싶을 뿐이지, 차를 못 마시는 건 아니었으니까.

후르륵, 호로록, 퐁당.

겨우 세 사람 사이에서 편안한 침묵이 흘렀다.

비록 한 사람만 차향의 깊은 풍미를 음미할 뿐이고 다른 한 사람은 더운물 마시듯 후후 불어 꿀꺽꿀꺽 마시고, 또 다른 한 사람은 각설탕이나 퐁당퐁당 집어넣고 있지만 아무도 어색해하지 않았다.

제국을 지탱하는 세 기둥이 사적으로 만날 땐 보통 이랬으니까.

“그래서 왜 부른 건데?”

루비아나는 예의상 차를 한 잔 비우고, 자신이 아직 이런 예법을 잊지 않은 걸 기특해하며 물었다.

“왜? 우리가 꼭 일이 있어야 만나는 사인가?”

“응. 우린 그런 사이야.”

“누나, 북부에 몇 년 처박혀 있더니 많이 삭막해졌네.”

“그러게, 그 몇 년이 생각보다 긴 시간이었나 보다. 네 간이 배 밖으로 나올 만큼. 응?”

루비아나가 예쁜 티스푼을 엄지와 검지로 집어 들고 흔들었다.

티스푼은 은으로 만들어 약했지만, 누구의 손에 들리느냐에 따라 사람 하나 죽이고도 남을 무기가 될 수도 있었다.

“아이고, 무서워라.”

제국 최고의 기사는 엄살 부리며 슬금슬금 카드릭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형, 누나가 나 괴롭혀. 혼내 줘.

카드릭은 비죽 웃으며, 루단테가 그렇게 좋아하는 각설탕을 들어 보였다. 고작 설탕을 뭉친 것에 불과하지만, 누구 손에 들리느냐에 따라 훌륭한 암살 무기가 될 수도 있었다.

“다들 나한테 왜 그래?”

루단테가 투덜댔다.

언뜻 보면 애교 많은 막내와 그 막내를 귀여워해 주지 않는 매정한 누나, 형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실상은 달랐다.

이건 막내의 애교라기보다는, 차라리 절대자의 오만이었다. 너무 강하기 때문에 설마 니들이 날 죽이랴 싶어 개기는 것이었다.

어휴, 미운 놈 설탕이나 하나 더 주지. 루비아나는 그런 심정으로 루단테의 찻잔을 티스푼으로 휘휘 저어 주었다.

카드릭도 비슷한 생각을 하며 들고 있던 각설탕을 루단테의 잔에 퐁당 넣어 주었다.

“넌 또 왜 얘 장난에 맞장구를 쳐 주고?”

이제 화살은 카드릭을 향했다.

“쟤한테 뭐 약점 잡혔어?”

“그런 건 아니야.”

“그럼?”

“…….”

카드릭은 묵비권을 행사했다.

‘루비 누나가 요즘 우리한테 너무 소홀한 거 같지 않아? 아무리 황궁 출입이 금지됐어도 이건 아니지. 우리랑 만나는 것까지 금지된 건 아니잖아? 어떻게 먼저 연락 한 번을 안 해? 너무 빠져 있는 거 같아, 그 사생아 놈한테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우리 셋이서만 한 번 모이자. 오랜만에 루비 누나 얼굴도 좀 보고 그 폭군의 사생아 놈이랑 떼어 놓고. 어때?’

이렇게 말하는 루단테의 꾐에 홀라당 넘어가 버렸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으니까.

‘아아.’

루비아나는 카드릭의 침묵에서 대충 상황을 짐작해냈다.

‘저게 또 저 요사스러운 주둥이로 꾀어냈겠지.’

루비아나는 루단테의 주둥이를 노려보았다.

실력이 좋으면 잘생기지나 말 것이지. 루단테는 입술도 아주 예뻤다. 웬만한 사교계의 미인들 못지않달까. 물론, 루이먼드만은 못했지만.

흠흠. 루비아나는 오늘 아침에도 몇 번이나 쪽쪽거렸던 루이먼드의 입술을 생각하다 말고 헛기침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들켰으면 꽤 쪽팔릴 뻔했는데, 다행히 총각 둘은 알아채지 못했다. 둘이 괜히 황제의 부군 후보로 손꼽히는 게 아니었다.

천하의 루단테마저도 눈치채지 못하다니. 아무리 국가 단위로 움직이는 정보기관의 수장이면 뭘 하나?

‘인생은 실전이란다.’

훗. 루비아나가 미소 지었다.

“뭐야, 그 웃음? 기분 나빠. 왠지 날 무시하는 것 같잖아. 그렇게 웃지 마.”

“넌 언제나 나한테 무시당했어.”

“누가? 내가? 카드릭 형이 아니라?”

루단테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카드릭을 돌아봤다.

카드릭은 형 보기를 돌같이 하는 것도 모자라 그 돌을 툭하면 툭툭 차 대는 루단테를 보며 한쪽 눈을 부라렸다.

루비아나는 두 사람의 말다툼을 지켜보다가 으아아- 기지개를 켰다.

딱히 뭔가 대단한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온 건 아니지만. 정말 이렇게 농담 따먹기나 하고 앉아 있게 될 줄이야.

‘심심하네. 루이는 잘 있으려나.’

집에 두고 온 참하고 실한 남편이 생각나는 따분한 티타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