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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에 단 셋뿐인 공작이 사적으로 모였다고 해서, 뭔가 대단한 이야기가 오가지는 않았다.
모임을 주도한 루단테부터가 별생각이 없어 보이니, 가벼운 대화만 오갔다.
그러다 보니 당연하게 루이먼드가 대화의 소재가 되었다. 먼저 말을 꺼낸 건 루단테였다.
“근데 님 지역 특산물은 왜 그렇게 사들인 거래?”
“다 깊은 뜻이 있었단다.”
“예술가들의 거리에 학교를 세운 건?”
“다 깊은 뜻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니겠니.”
“어쩌다 얻어걸린 건 아니고?”
“그게 너와 내 남편의 차이지.”
“뭐야, 그게?”
루단테가 인상을 찌푸리며 카드릭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카드릭은 루이먼드를 대화의 소재로 꺼낸 루단테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편들어 주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루비를 그 사생아 놈한테서 떼어 놓자더니, 기껏 나누는 대화가 사생아 놈 근황인가?’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났단 말이야. 사업 좀 크게 벌여 보려고 건드렸는데 망해 버린 걸, 루비 누나가 겨우겨우 숨통은 틔워 준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아무튼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로 합쳐지지 않으니, 루비아나를 당해 낼 수 없었다.
루비아나는 본격적으로 남편 자랑을 늘어놓았다.
피먼스 상단주 정도 되는 유부남이라면 능글맞게 받아넘기며, 제 아내 자랑도 마구마구 늘어놓았을 것을. 이 불쌍한 총각 두 사람은 마냥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부하들이 해 지면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그럴 때마다 딱히 마음에 와닿지 않았는데 요즘엔 그게 무슨 기분인지 알 것 같아.”
루비아나는 루이먼드가 온 이후로 아쉴레앙 공작저가 얼마나 사람 사는 집 같아졌는지 ‘자세하게’ 설명했다.
딱히 자랑하려고 말한 건 아니었다.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한 것뿐이었는데, 카드릭과 루단테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카드릭의 얼굴이 좀 더 많이 썩어 있었다.
“뭐야, 누나? 좀 이상해.”
“뭐가?”
“남편 말고 꼭 애완동물 자랑하는 거 같잖아.”
“뭐 인마?”
루비아나가 다시 티스푼을 들자, 루단테가 얼른 변명하듯 말했다.
“저번에 왕눈인지 개눈인지 자랑할 때도 이랬거든?”
“어?”
루비아나가 움찔했다.
그걸 본 카드릭의 눈이 가늘어졌다. 절망에 빠져 죽어 있던 푸른 눈에 설풋, 희망이 한 가닥 어리는 듯했다.
이후 잠깐 더 시답잖은 대화가 오갔다. 루단테는 열심히 두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평소에도 까불대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루단테가 슬쩍 시계를 확인하는 게 눈에 들어오니, 의심은 확인으로 굳어졌다.
‘무슨 꿍꿍이지?’
루비아나가 루단테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하, 하하. 누나, 그렇게 뜨겁게 쳐다보지 마. 내 몸과 마음은 다 황제 폐하 거니까.”
“폐하께서 받아 주신다면 그렇겠지. 아무튼 그때까지 잘 간수하고는 있어라.”
“하. 누누이 말하지만 폐하의 옆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은 나뿐이야.”
“그래, 본인은 그렇게 착각할 수 있지.”
“착각? 아냐.”
루단테가 오만하게 웃어 보였다.
“만약 누군가 폐하의 옆자리에 서고자 한다면, 나부터 쓰러뜨려야 하니까.”
자신을 이기지 못하면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루단테는 상상 속 그 얼간이를 머릿속에서 이미 수백 번쯤 죽여 본 듯한 표정을 지었다.
쯧쯧. 루비아나는 혀를 찼다. 안 본 새 더 상태가 안 좋아진 것 같았다. 힐끗, 카드릭을 보니 그는 딴생각 중인지 얼이 나가 있었다.
“이런 것들이 폐하의 부군 후보라니.”
루비아나는 대놓고 한탄했다.
“이런 것들이라니? 이런 것이라고 해 줘, 누나. 나 그런 거에 예민해.”
“그래, 그래. 이런 것들.”
“이런 것이라니까!”
“그래, 이런 것들.”
“아, 좀!”
***
원하는 만큼 시간을 끈 걸까? 루단테가 어느 시점에서 벌떡 일어나 작별을 고했다.
루비아나는 물론이거니와 카드릭도 루단테가 자신들을 붙잡아 두려고 했다는 걸 대충 눈치챘던 터라 굳이 붙잡지 않았다.
루단테가 훌쩍 먼저 떠난 뒤.
루비아나 역시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보자. 웬만하면 포도주 좋은 걸로다가 좀 사 놓고.”
가볍게 인사하고 돌아서려는데, 카드릭이 루비아나의 손을 잡았다. 아니, 잡으려 했으나 루비아나가 알아채고 잽싸게 피했다. 루이먼드는 남편이라 봐주는 거고, 카드릭은 딱히 봐줄 이유가 없었다.
카드릭의 손이 허무하게 허공을 휘저었다.
“잠깐만.”
카드릭은 다시 루비아나의 손을 잡아채려 했다. 루비아나는 한 발 물러서는 것으로 그의 손길을 피했다.
“왜?”
루비아나가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이유가 없으면 너한테 말도 못 거는 건가?”
“이유가 없다면 내 손을 제압하려고 들면 안 되지.”
루비아나는 피한 손으로 허리춤에 찬 검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그런 뜻으로 한 게 아냐.”
카드릭은 울컥했으나 곧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말을 말자, 말을 말아. 혼잣말로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일어서서 그녀를 마주 보았다.
잘 단련한 몸은 갑옷을 입지 않아도 크고 단단했다. 루비아나의 눈이 그의 다부진 턱에 닿았다. 루비아나는 살짝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하나뿐인 푸른 눈이 격정적인 감정을 담고 뜨겁게 일렁였다.
“행복해?”
“뭐가?”
“……결혼, 생활 말이야.”
본인이 말하면서도 듣기 싫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행복해.”
카드릭이 어렵게 물어봤지만, 루비아나는 쉽게 답했다.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기에, 카드릭은 입가를 굳혔다. 작게 신음하더니, 불쑥 말했다.
“꼭 아이를, 남편과의 사이에서만 얻을 필요가 있을까?”
“……뭐?”
루비아나가 눈을 깜빡였다.
“지난번 네가 한 말을 듣고 계속 고민했어.”
“뭘?”
“네가 그자에게서 얻으려고 하는 것. 널 사랑하지 않겠다는 그자를 굳이 네 곁에 두는 이유.”
루비아나의 남편이 된 주제에 루비아나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했다니. 당장이라도 찾아가 목을 잘라 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리고 고민했다.
그래서 루이먼드가 한동안 암살 위협에 시달리지 않은 것이었다.
카드릭은 고민 끝에 나름의 답을 찾아냈다.
“굳이 아이 때문에 널 사랑하지 않는다는 남편을 곁에 둔 거라면 널 사랑하는 정부를 곁에 둬서 아이를 가져도 되잖아.”
“오.”
루비아나는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감탄하고 말았다.
새로운 관점이었다.
루이먼드와 결혼한 상태에서 정부를 두라니.
그녀는 아직 루텔 수도원에 적을 두고 있었다. 때문에 간음하지 말라는 계율을 지켜야 했다.
하지만 루비아나는 그 계율을 읊으며 카드릭의 말을 헛소리로 치부하지 않았다. 신께 피의 맹세를 바친 것과는 별개로, 그녀는 여전히 신을 향한 믿음이 깊지 않았으니까.
‘3년 후를 고민했지, 지금 당장 다른 남자를 또 건드리는 건 염두에 두지 않았는데.’
루비아나는 카드릭의 개소리를 잠깐 음미해 보고는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글쎄.”
카드릭의 조언은 현실성이 없었다.
이미 루이먼드 때문에 눈이 한없이 높아졌다. 그를 떠나보낸 뒤라면 모를까, 그를 옆에 두고 어떻게 딴 남자를 눈에 담을 수 있을까?
‘아무리 고르고 골라도 루이보다 못생겼을 텐데 굳이?’
정부를 둘 만큼 시간이 남아돌지도 않았다. 루이먼드와 뼈와 살이 불타는 낮과 밤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
“내가 피의 맹세를 못 지킬까 봐 걱정해 주는 건 고마운데, 괜찮아. 지금은 루이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루비아나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사두 마차를 탄 채로 지나가면서 봐도, 루이먼드와의 결혼 생활을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누가 그런 걸 걱정하는 걸까 봐.”
카드릭은 으득, 이를 갈았다.
여차하면 먼 친척에게 펠트하르그 공작가를 물려주고, 일개 기사 신분으로 내려가 루비아나의 정부라도 될 생각이었다.
하지만 루비아나는 곁을 허락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도대체 그 새끼가 뭐가 그렇게 좋아서, 널 사랑하지 않겠다는 작자에게 홀딱 빠져 버린 거지? 나는 네 곁에 서기 위해서라면 내 가문, 내 작위를 버릴 수도 있는데.’
할 수 없는 건 단 하나, 먼저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카드릭은 제게 걸린 제약이 오늘따라 무겁게 느껴졌다.
“솔직하지 못하기는. 걱정하지 마, 폐하와 제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아이는 꼭 얻을 테니까.”
루비아나는 픽, 웃으며 카드릭을 지나쳤다. 그렇게 떠나려는데, 카드릭이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잊지 마, 그자가 누구의 피를 받아 태어났는지를. 그자는 반드시 널 배신할 거야.”
“충고 고맙다. 앞으로의 결혼 생활에 참고하지.”
루비아나는 가볍게 대꾸하고는 떠났다.
문이 닫히자 홀로 남은 카드릭은 주먹으로 애꿎은 소파를 내리쳤다.
“젠장.”
그럴 리 없는데, 안대로 가린 눈이 욱신거리며 아팠다. 카드릭은 그 눈을 감싸 쥐며 고개를 숙였다.
집사가 카드릭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곁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