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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아나는 다른 곳에 들르지 않고 곧바로 아쉴레앙 공작저로 돌아왔다.
먼저 도착한 종자에게서 연락을 받은 저택 사람들이 현관 앞에 길게 늘어서서 루비아나를 맞이했다.
시녀장과 하녀, 하인들이 보였다. 루이먼드는 보이지 않았다.
“루이는?”
“그것이…….”
“또 우편물 정리 중인가? 그런 건 리먼스 부인이 알아서 하라니까.”
루비아나는 혀를 차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루이먼드는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저택이 썰렁했다. 수십 명의 하녀, 하인들이 있는데도, 그렇게 느껴졌다.
루비아나는 바로 루이먼드의 부재를 알아차렸다.
말없이 루이먼드가 사라졌다?
‘배신?’
순간, 카드릭의 말이 떠올라 짜증이 났다.
가볍게 듣고 넘긴 말이 씨앗이 되어 마음에 뿌려졌었나보다. 씨앗이 불안을 먹고, 불화의 싹을 틔웠다.
“루이는 어디 갔지?”
루비아나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하녀들에게 물었다. 하녀들이 우물쭈물하자 루비아나의 신경은 좀 더 날카로워졌다.
“왜, 또 서쪽 계단 위는 안 찾아 봤나?”
“아니요, 황궁에 가셨습니다.”
뒤에 서 있던 시녀장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
나한테 말도 없이?
루비아나는 임신하고 도망친 여주인공을 잡으러 갈 마음을 먹은 차가운 북부 대공처럼 사나워졌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가 즐겨 있던 책 제목들을 떠올렸다. 갑자기 왜 그 제목들이 떠오르는지는 모를 일이나, 덕분에 기분은 더 더러워졌다.
언제 한 번 날 잡아서 한두 권 정도는 읽어봐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아직 읽지는 않았는데. 책 제목만은 잘 기억하고 있었다.
‘도망 어쩌고 저쩌고 하는 제목들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은데. 다 오늘을 위한 독서였던 건가?’
루비아나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으득, 이를 갈았다.
저택 전체가 그 사나움에 치여 북부만큼 싸늘해지려는데. 밖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문가에 서 있던 하인 몇이 자기들만 살아남겠다며 냉큼 밖으로 달려 나갔다. 몸이 얼어붙는 바람에 도망치지 못한 하녀, 하인들이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구원이 찾아들었다.
“루이먼드 님! 루이먼드 님이 오셨습니다!”
“공작 부군님이 우리 곁으로 돌아오셨습니다아아!”
문밖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다들 무슨 일이야, 왜 그래?”
루이먼드는 난데없는 환대에 당황하며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비아? 일찍 돌아왔군요!”
그러다가 동쪽 계단에 반쯤 올라가 있는 루비아나를 발견하고는 활짝 웃었다. 겨울 날씨 같던 저택에 환한 햇살이 드리워지는 순간이었다.
하녀와 하인들은 죽다 살아난 기분에 루이먼드에게 감사, 그저 감사, 압도적으로 감사하는 와중에도, 루비아나의 눈치를 살폈다.
“루이, 당신은 어딜 다녀왔나 보군요?”
그리고 언제 화냈냐는 듯 인상을 펴고 평범하게 말하는 루비아나를 보며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뭐? 왜? 뭐? 루비아나가 스윽-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녀와 하인들은 깨갱하며 포르르 사방으로 흩어졌다.
“예, 잠깐 좀. 그런데 제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루이먼드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니요, 딱히.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저택에 주인이 있다 없으니, 고용인들이 좀 어수선해졌나 봅니다.”
너 없다고 하인들이 풀어졌나 봐, 그러니까 왜 나한테 말도 없이 어딜 나갔어? 루비아나가 하고 싶은 말을 부드럽게 돌려 말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감탄했다. 수도에 좀 머물렀더니, 내가 이렇게 세련되게 말을 돌려 말하는 법을 습득했나 보다!
피먼스 상단주가 알았다면, 수도의 세련된 말씨를 익힌 게 아니라 부부 싸움을 시작할 때 반격당하지 않기 위한 기초 스킬이라고 말해 주었을 것을.
‘우, 우린 왜?’
‘우리가 뭘?’
남아 있던 하녀 하인들은 루이먼드에게 게으른 고용인으로 오해받을까 싶어 억울해했다.
루비아나 옆에 서 있던 시녀장이 그들을 따사로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나중에 따로 루이먼드에게 말해 오해를 풀어 주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럴 사람들이 아닌데요. 설마요.”
굳이 시녀장이 나서지 않더라도. 루이먼드가 고용인들에 대한 믿음을 내보였다.
그가 막 루비아나보다 두 계단쯤 아래에 섰을 때였다.
“루이.”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턱을 손으로 잡고 들어 올렸다. 두리번거리던 루이먼드의 얼굴이 루비아나에게 고정됐다.
“비아?”
한 치의 의심 없는 검은 눈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루비아나는 그런 그를 더없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물었다.
“말도 없이 어딜 다녀왔습니까?”
“예, 황궁에 다녀왔습니다. 황제 폐하를 뵙고 왔습니다.”
루이먼드는 황제 앞에서 그랬듯, 루비아나 앞에서도 숨길 것 없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대답을 꾸며 내느라 망설이지도 않았고, 눈 마주치는 걸 피하지도 않았다.
‘황궁에 다녀왔다고?’
피오니와 몰래 만나고 왔다거나, 반란 세력과 비밀리에 접선했다거나, 루이먼드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유의 오해 후보군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던 루비아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황궁에 입궁하는 건 기록이 남아 있으니 감히 거짓말을 못 할 터.
‘그런데 왜 나한테 말도 없이? 무슨 일로?’
의아한 한편, 마음이 누그러졌다.
“왜 미리 말하지 않았습니까?”
루비아나가 한결 너그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폐하께서 당신한테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
칼레나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그러고 보니, 문밖에 서 있는 마차도 황궁에서 쓰는 마차가 맞았다.
저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니.
‘감정이 앞서 시야가 좁아지다니. 애송이들이나 하는 짓을.’
루비아나는 쯧, 혀를 찼다.
“혹시 걱정하셨다면 미안합니다.”
루이먼드는 그 혀 차는 소리를 듣고는 시무룩해졌다. 딱히 거짓말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레나, 이 녀석이 또 심술을 부렸구나.’
그럼 그렇지. 루비아나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펠트하르그 공작이 괜히 배신, 배신거려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버렸다.
물어보면 이렇게 순순하게 말하는데. 말없이 다녀와 미안해하기까지 하는데.
이 순한 사람이 배신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가.
루비아나는 한 가닥 남은 의심마저 풀어 버렸다. 그러고는 루이먼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네요. 자세한 이야기는 올라가서 하도록 하지요.”
루이먼드는 거절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