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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로 자리를 옮긴 루이먼드는 그간 있었던 일을 술술 다 말했다. 황제를 만난 뒤니까, 이제 와 굳이 비밀을 지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루단테를 어떻게 만났는지, 말하지 말라고 협박을 받았는지 그 부분은 아주 자세하게 설명했다.
“루단테, 이 자식.”
루비아나는 낮게 혀를 찼다.
오늘 자신과 카드릭을 붙잡아 놓고 시간을 끌기에 무슨 일인가 싶었더니, 자신의 남편과 관련한 일이었다. 허탈하다 못해 짜증이 몰려왔다.
“내가 다음에 만나면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뭐, 그렇게까지야…….”
루이먼드는 말리는 척만 하고 진심으로 말리진 않았다.
루비아나가 자신을 편들어 준다는 기분이 드니, 황궁에 가는 길에 그레이움 백작을 만난 일도 편히 말할 수 있었다. 루이먼드는 남은 이야기도 편하게 술술 다 불었다.
“고생했습니다.”
혼자 황제를 만나고 온 것도, 그 길 가는 중에 그레이움 백작을 만나 마음 고생한 것도.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팔을 몇 번 쓸어 주며, 그를 위로했다.
그것만으로도 루이먼드는 오늘 하루 치의 시름과 근심을 다 잊을 수 있었다.
루이먼드는 그동안 자신이 참고 있는 줄도 몰랐던 한숨을 토해 냈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어.’
긴장이 풀리니 몸에서 힘이 빠졌다.
루이먼드는 루비아나의 손을 꼭 붙잡고 그 손등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짐승이 순순히 고개를 조아린 듯한 모습이었다. 루비아나는 만족감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꼈다. 그래서 남은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루이먼드는 그녀의 손길에 녹아내려 흐물대다가, 마음을 콕콕 찌르는 불편함을 못 이기고 입을 열었다.
“내 할아버지…… 그레이움 백작은, 절대 반역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습니까?”
“예. 분명해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솔직히 믿기지 않습니다. 정말 쫓겨났을 리 없어요. 쫓겨났다 해도, 반역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다른 반란 세력에 들어가서라도요.”
“조부의 끈기를 높게 평가하는군요?”
루비아나는 흘러내린 은발을 쓸어 넘겨 주며 물었다.
“반역에 성공하면 얻을 수 있는 권력과 부를 절대 포기하지 못할 테니까요.”
더 큰 권력, 더 큰 부를 얻기 위해서라면 딸도, 손자도 팔아먹을 수 있고, 이미 팔아먹은 전적이 있는 자다. 고작 저 정도에 우는 소리를 낼 리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그레이움 백작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있었다.
“……원망하는데, 정말 끔찍하게 싫은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요?”
“루이.”
“버림받아서 나 말고는 받아 줄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잠깐 흔들릴 뻔했습니다.”
그레이움 백작은 그새 많이 늙어 있었다.
천년만년 황금을 끌어안고 살 줄 알았는데, 그 역시 나이를 먹고 있었다.
그렇게 늙어 부와 권력을 더 많이 얻어 봤자 얼마 누리지도 못할 텐데, 왜 그리도 탐욕스러운 걸까?
늙어서까지 눈을 희번덕 빛내며 탐욕에 찌든 그레이움 백작을 보자니 분노를 넘어서 안타까움마저 느껴졌다.
루이먼드는 그런 자신이 이상했다.
‘그레이움 백작이 일관성 있게 탐욕스럽다면, 나 역시 참 일관성 있게 멍청해.’
루이먼드는 쓰게 웃었다.
“전 정말 나약한 것 같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살아남지도 못해 루비아나에게 빌붙었고, 그토록 고통 받았음에도 그레이움 백작을, 그 가문의 사람들을 완전히 밀어내지도 못했다.
말로는 당신과 나는 끝이라고 하지만, 계속 마음 한구석에 감정의 찌꺼기가 남았다.
‘정말로 괜찮다면, 이렇게 화나고 속상한 마음마저 느끼지 않아야 하는 거 아닌가?’
잠깐이라도 그레이움 백작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다니, 토끼가 멧돼지 걱정해 주는 소리였다.
하하, 루이먼드는 참담한 마음에 허탈히 웃었다.
“나약한 게 아닙니다.”
루비아나가 루이먼드의 손을 맞잡았다.
“비아?”
루이먼드가 고개를 들어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루비아나는 흘러내려 얼굴을 가리는 은발을 쓸어 넘겨 주었다.
“가족이잖습니까.”
“……남만도 못한, 가족도 가족이긴 하죠.”
루이먼드가 입술을 비틀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목소리는 찬데 눈가는 붉었다.
“끔찍하게 싫은데도 끊어 내지 못한다고 약한 게 아닙니다. 그걸 이용해 기어이 제 핏줄을 이용해 먹고, 상처 입히는 쪽이 나쁜 겁니다. 루이, 그레이움 백작은 아주 나쁜 사람입니다. 그렇죠?”
“……네.”
“그럼, 그걸로 된 겁니다. 그자가 나쁘니까, 당신이 자꾸 아프고 상처 입는 겁니다. 나쁜 건 그자이지, 다친 당신이 아닙니다.”
“…….”
“그러니까 자신이 나약하다거나 무르다고 자책하지 말아요. 당신이 나쁜 게 아닙니다. 약한 건 죄가 아닙니다.”
어린 날의 루비아나가 그러했듯, 약한 건 죄가 아니다. 약한 자를 짓밟는 자가 죄를 지은 것이다. 왜 피해자가 자기 자신의 약함을 탓하며 괴로워해야 한단 말인가?
루비아나가 잡은 손을 내려놓았다.
루이먼드는 놀라 손을 뻗었다. 다시 루비아나의 손을 잡으려고 했는데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손을 살짝 밀어내고는 두 팔을 벌렸다. 손가락 끝을 까딱이며 씩, 웃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를 수 없었다.
루이먼드가 루비아나를 끌어안았다. 루비아나는 소파에 앉아, 제게 달려드는 덩치 큰 미인을 끌어안고 그의 너른 등을 쓸어내렸다.
“당신이 하기 힘들면, 옆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됩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아니, 당신이 원치 않더라도 나는 그들을 당신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 수 있습니다.”
실제, 바로 오늘까지도 그렇게 했다.
“그러니까 내게서 멀어지지 말아요. 오늘 같은 일만 없으면 당신이 오늘처럼 힘들어할 일도 더는 없을 겁니다.”
아쉴레앙의 그늘 아래에서 편안하게, 행복하게 살면 된다. 당신의 가족은 이제 나니까.
루비아나는 그렇게 속삭였다. 녹색 눈이 제법 위험하게 빛났다.
루이먼드가 솔직하게 말해 주어 마음이 많이 풀리긴 했지만, 그래도 언짢은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루이먼드를 몰래 부른 황제에게도, 황제가 몰래 부른답시고 말도 안 하고 갔다 온 루이먼드도 문제지만.
둘에게는 차마 화낼 수 없었다. 그러니 비난의 화살은 온전히 도미넨트 공작, 루단테와 그레이움 백작에게로 쏟아져야 했다.
하지만 루비아나도 사람이었다.
루이먼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칼레나와 루단테가 하지 말란다고 정말 자신에게 아무 말도 안 한 루이먼드를 보며 ‘이것 봐라?’ 싶은 마음이 안 들려야 안 들 수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은근히 말하는 것이었다.
루이먼드는 그런 루비아나의 마음을 모두 알아차리진 못했다. 그저, 루비아나가 섭섭해한다는 것만 대략 눈치챘을 뿐이었다.
“미안합니다. 비아.”
그는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루비아나는 이번에는 일단 이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앞으로 도미넨트 공작이 또 이런 수작을 부리면 바로 내게 말해요.”
“네. 바로 비아, 당신에게 말하고 의논하고 움직이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당신을 이렇게 괴롭고 힘들게 만든 그레이엄 백작을 어떻게 하면 당신 속이 좀 나아지겠습니까?”
루비아나가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기 때문에, 루이먼드 역시 가볍게 들었다. 설마 자신의 대답에 따라 그레이움 백작의 목숨이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루비아나는 그레이움 백작을 루이먼드 앞에 영영 나타나지 않게 할 자신이 있었다.
어렵지 않았다. 이러저러한 사정 때문에 그 일을 조금 나중으로 미뤄 두고 있을 뿐이었다.
‘이 참에 슥삭- 해버려?’
루이먼드의 대답에 따라, 그레이움 백작을 왕눈이에게 밟힌 눈덩이처럼 뭉개버릴 수도 있었다.
반란 세력 일망타진의 계획이 조금 어그러지겠으나, 뭐 어떻겠나? 원래 계획이란 건 다시 세우라고 있는 것이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할 만큼, 루비아나는 루이먼드를 아꼈다.
“남편 말고 꼭 애완동물 자랑하는 거 같잖아.”
문득 루단테의 망언이 떠올랐다. 루비아나는 픽, 웃으며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엔 네가 잘못 봤어. 정보기관의 수장씩이나 되어서, 그렇게 사람을 볼 줄 몰라서야.’
사랑을 해 본 적 없는 숙맥이어서 그런 것이다. 사람을 곁에 두다 못해 마음에 담아 버린다는 건, 한낱 애완동물을 귀여워하는 것과는 결이 다른 법인 것을.
왕눈이가 다른 와이번에게 맞고 온다면 루비아나는 곧바로 뛰쳐나가 왕눈이의 복수를 해 줄 것이다. 이게 애완동물을 예뻐하는 마음.
루이먼드가 그레이움 백작 때문에 또 상처 받아 돌아온다면, 루비아나는 일단 그를 끌어안아 줄 것이다.
그러고 나선 내가 어떻게 해야 당신의 마음이 풀리겠냐고 물어보고, 그의 뜻대로 해 줄 것이다. 이게 어느새 마음에 들어와 버린 사람을 아끼는 마음.
두 마음은 분명 다른 온도였다.
“루이, 말해 봐요. 내가 어떻게 해 주면 될까요?”
죽여 줄까? 목을 잘라다 평안한 안식조차 망쳐버릴까. 이렇게 물어보려다가 루이먼드가 놀랄까 봐 말하지 않았다. 결혼식 때 그 가벼운 전투만으로도 겁먹지 않았던가?
대신 나름의 타협안을 제시해 보았다.
“정 그들을 떼어 내기 힘들다면,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게 어느 정도 지원을 해 줄 수도……”
“아니요. 그런 건 원치 않습니다!”
루이먼드가 급히 답했다.
‘나 때문에 다이아몬드 광산과 소금산도 내주었는데. 그 이상으로 폐를 끼칠 수는 없어.’
루비아나는 그의 표정을 읽고는 픽, 웃었다.
‘소박하긴. 예술가 후원이나 사업도 그렇게 소소하고 귀엽게 할 때부터 알아보긴 했는데.’
귀여워도 너무 귀엽지 않은가.
루단테가 이 자리에 있어 루비아나의 생각을 읽었다면, 전혀 이해 안 된다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을 것을. ‘뭐가? 어디가? 어떻게? 왜 귀여워?’
끙끙거리며 열심히 고민하는 루이먼드를 보느라,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깨닫지 못했다.
자신이 어느새 루이먼드의 표정을 보고 그의 생각을 알아차리게 되었다는 것조차도 깨닫지 못했다.
대신, 루이먼드가 너무 자신을 부담스러워하는 것. 그것에만 신경 썼다.
“너무 부담 가지지 말아요. 그래 봤자 내가 가진 것에 비하면 티끌에 불과합니다.”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하지만 비아.”
루이먼드는 잠깐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전 그저…… 더는 사적으로 보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사교계 모임에서 보는 건 어쩔 수 없다지만요.”
오늘처럼 불쑥 찾아와 인정에 호소하지만 않는다면, 그럭저럭 견딜 만할 것 같았다.
어머니에 대해 말을 꺼내지만 않았더라도, 루이먼드는 그레이움 백작의 개소리를 꽤 오랫동안 들어 줬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그레이움 백작의 말에 속아 넘어갔을지도 모를 일이고.
루이먼드는 미끄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루비아나의 무릎에 턱을 괬다.
루비아나는 보드라운 온기를 느끼며 작게 웃었다. 커다란 개가 매달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개 말고 토끼.’
반짝반짝 빛나는 은발 몇 가닥을 손가락에 감고 손장난하며, 루비아나는 그렇게 생각을 정정했다.
따뜻하고 보드랍고 예쁘고, 무해 했으니까.
“그럼 가볍게, 망하게만 해 볼까요?”
가문이 폭삭 망해 더더욱 절박하게 반역 가문에 붙든지 말든지, 아무튼 루이먼드에게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접근할 여유조차 없도록.
루이먼드는 잠깐 솔깃했지만, 참고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그레이움 백작에게, 그 가문의 사람들에게 공을 들이는 것 자체가 아깝습니다. 화도 내지 않고, 기대도 하지 않고, 그냥 아무것도 아닌 사이처럼 살고 싶어요.”
루이먼드는 살짝, 루비아나의 무릎에 입을 맞췄다.
사실은 지금 이런 대화를 나누는 이 순간마저도 아쉬웠다. 어젯밤도 한 침대를 썼고 오늘 아침 식사도 함께했지만 그 뒤로 쭉 떨어져 있었다.
겨우 다시 만났건만, 고작 그레이움 백작에 대해 말을 해야 한다는 게 싫었다.
좀 더 둘만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에게만 집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과 함께 있으면 그렇게 되는 것 같아.’
그레이움 백작에게 화내지도, 기대하지도 않는 삶을 살고 싶다고 소망했었는데.
그 답은 너무도 가까이에 있었다.
루이먼드는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했다.
‘……언제 이 마음이 이렇게 커져 버린 걸까?’
루이먼드는 가슴이 벅차면서도, 한편으로는 슬펐다. 빌어먹을 3년. 그 3년이 축복이자 저주였다.
루이먼드는 루비아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루이?”
루비아나가 의아해서 그를 불렀다. 루이먼드는 몸을 살짝 들어 절 부르는 그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루비아나의 눈이 살짝 커지는가 싶더니, 웃음지었다. 그 녹색 눈에 넋을 잃을 수 있는 건 잠깐뿐이었다.
루비아나가 두 손으로 루이먼드의 옷깃을 붙잡고, 그를 잡아 올렸다. 짧게 닿았다 떨어진 입술이 다시 맞붙었다. 루이먼드는 그녀의 존재 자체에 넋을 잃고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