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9/131)

***

루이먼드는 그레이움 백작가에 정식으로 절연장을 보냈다. 루비아나는 옆에 서서 절연장 작성을 구경했다. 루이먼드가 간혹 손을 가볍게 떨면, 그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그러면 루이먼드는 루비아나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루이먼드는 마지막으로 서명하기 전, 크게 심호흡했다. 그러고는 단숨에 이름을 써넣었다.

루이먼드 폰 아쉴레앙.

시녀장이 밀랍으로 봉한 편지 봉투 두 개를 가지고 나갔다. 하나는 그레이움 백작가로, 다른 하나는 황궁으로 가게 될 터였다.

시녀장이 나가자, 루이먼드는 긴장이 풀려 펜을 놓쳤다. 그 펜을 주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의자에 기대 축 늘어졌다. 그러면서도 루비아나의 손은 놓치지 않았다.

“고마워요.”

루이먼드가 속삭이듯 말했다.

“고맙긴,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루비아나는 책상에 기대앉아, 루이먼드에게 잡힌 손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비아, 당신이 있어서 용기를 낼 수 있었으니까요.”

그레이움 백작 말고 다른 가족이 생겼다. 그 가족이 자신을 전적으로 믿고 지지해 준다.

이 상황 자체가 루이먼드에겐 기적이었다.

여덟 번의 삶을 반복해서 산 게 기적이 아니라, 이 여덟 번의 삶 만에 루비아나와 함께일 수 있는 게 기적이었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고맙다는 말이 얼마나 많은 삶의 무게를 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습니까? 그렇게 고마우면, 말로만 고맙다고 하면 안 될 텐데.”

그러니 이렇게 가볍게 응수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루이먼드도 덩달아 가벼워졌다.

“고마우면……”

“고마우면?”

“아기나 만들러 갑시다.”

루비아나가 씩 웃으며 말했다.

“……!”

루이먼드의 얼굴이 펑 터질 듯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버버거리며 당황한 건 잠시뿐이었다.

“비아, 당신은 정말!”

“싫으면 뭐 다른 걸로……”

“싫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루이먼드가 벌떡 일어났다. 하하하, 루비아나는 모처럼 소리 내 웃으며, 제게 달려드는 예쁘고 힘센 토끼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아직 신혼이라는 걸 증명하듯 한달음에 침실로 이동했다. 시녀장은 눈치 있게 알아서, 저녁 식사를 침실에 넣어 주었다.

***

이른 아침.

루비아나는 일찍 눈을 떴다. 폭신한 침대 위였고, 몸에 침대 시트를 둘둘 감은 채였다. 베고 있는 건 오리털 베개가 아니라, 사람의 팔이었다.

“으음…….”

루이먼드가 등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루비아나는 잠깐 고민했다. 루이먼드가 깨어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듯하니, 잠깐 나가서 활이나 100발 정도 쏘고 올까?

하지만 생각뿐이었다. 루비아나는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예전에 한 번, 루이먼드를 침실에 혼자 두고 나갔다가 야단났던 일이 있지 않은가?

루비아나는 그냥 가만히 있는 걸 택했다.

한번 잠이 깨서 다시 잠이 오지는 않고, 눈을 말똥말똥 뜬 채로 루이먼드의 품에 가만히 잡혀 있어 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렇게 결정한 자신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 루이먼드가 생각보다 이르게 눈을 떴기 때문이었다.

긴 속눈썹이 들리고, 까만 눈동자가 나타났다. 그 눈동자가 처음으로 본 건 당연히 루비아나였다.

“…….”

처음엔 꿈인지 생시인지 믿기지 않는지 눈만 몇 번 껌뻑이더니. 이내 루비아나를 보고는 활짝 웃음 지었다.

“비아.”

막 자고 일어나 허스키한 목소리.

“잘 잤어요?”

이마에 살짝 닿았다 떨어지는 입맞춤까지.

루비아나는 자신을 보고 좋아 어쩔 줄 모르는 루이먼드를 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안 나가길 잘했군.’

***

막 눈 뜬 신혼부부는, 당연한 말이지만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서로를 마주 보고, 실없이 웃고, 실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아침 식사 시간이 지난 것 같지만, 아무도 부르러 오는 사람도 없었다. 시녀장이든 누구든 부르러 오면 눈치 없다고 화냈을 거면서, 루비아나는 아무도 부르러 오지 않으니 게으른 고용인들 탓에 굶게 생겼다며 투덜댔다.

루이먼드는 시녀장이 참 나쁘다고 맞장구쳤다. 평소 꼬박꼬박 편들어 주었던 시녀장이 알면 섭섭할 일이나 어쩔 수 없었다.

“제가 잘할 수 있을지 걱정됩니다.”

루이먼드는 비스듬히 누워 턱을 괴고는 중얼거렸다.

방금 전까지 에릭의 살롱을 드나드는 예술가들이 얼마나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즐겁게 말하던 사람답지 않게, 잔뜩 풀죽은 목소리였다.

“잘해 낼 겁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그럼요, 디토 남작 영애의 결혼식 때만큼만 하면……”

“비아, 그건 아니죠.”

루이먼드가 정색했다.

“황궁에서 열리는 신년제인데! 그것도 아쉴레앙 공작가에서 처음으로 주관하는 건데!”

“굳이 그렇게까지?”

“네, 비아.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해요.”

루이먼드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신년제니까.

신년제는 제국 최고의 축제였다. 폐쇄적인 학자의 집마저 그날만큼은 들뜬 분위기에 사로잡혀, 평소보다 즐겁게 공부할 정도였다.

‘그런 신년제를, 내가 준비해야 하다니…….’

엄밀히 따지자면 신년제를 총괄하는 건 아니었다. 그건 내무국장의 몫이었다. 루이먼드는 황궁의 연회장을 장식하고, 연회를 준비하는 일만 맡았다.

그럼에도 막중한 임무였다. 일개 귀족의 결혼식장을 채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루이먼드는 한숨을 푹 내쉬다가 루비아나의 머리에 제 얼굴을 콕 박았다.

“폐하께서 왜 이런 큰일을 제게 맡기신 걸까요?”

“…….”

별 뜻이 있을지도 모르고, 또 별 뜻 없이 그런 걸지도 모르고. 아무튼 걔가 좀 그래요. 루비아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황제의 체면을 생각해 입을 꾹 다물었다.

“너무 부담 가지지 말아요, 루이.”

대신 루이먼드의 머리를 잔뜩 헤집듯 쓸어 주었다.

“반대로 생각해 봅시다. 그런 큰일을 맡기신 건, 루이 당신을 내 남편으로 인정한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황제는 단 한 번도 나를 공작 부군이라고 불러 주지 않았는데요.’

루이먼드는 뒷말을 꿀꺽 삼켰다.

혹시나 루비아나가 이 말을 듣고, 자신을 멀리할까 봐 겁났다.

‘황제가 날 꺼린다고 생각하고, 비아마저 날 꺼리면 어떡해?’

역시 폭군의 사생아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얻는 건 무리수지, 이렇게 생각하며 3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혼하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런 두려움도 없지 않았다.

루이먼드는 루비아나를 사랑했으나 그녀가 자신을 버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은 없었다.

루이먼드가 더욱 시무룩해지자, 루비아나는 잘할 수 있을 거라며 그를 격려해 주었다.

“잘 할 수 있을 겁니다. 너무 잘해서, 폐하께서 마음에 쏙 들어하실지도 모릅니다. 폐하의 언니인 내가 장담하겠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잘해 내서, 정말 황제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까?’

칭찬은 루이먼드를 춤추게 만들었다. 진짜 춤을 추는 건 아니고, 할 수 있다는 용기 정도는 가지게 만들어 주었다.

“모처럼 나도 신년제에 참석할 수 있을 텐데 처음 가는 신년제가 당신의 손길이 닿은 신년제라니, 심적으로 부담이 덜할 듯합니다.”

딱히 어디다 던져 놔도 어색해하거나 부담을 느끼는 성격은 아니지만 일단 이렇게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루비아나는 신년제에 거의 참석하지 못했다. 제국이 신년제를 할 정도로 안정되었을 때에도, 그녀는 늘 전쟁터와 변경을 지켰다. 최근 몇 년간은 아예 북부에만 머물렀다.

“정말요? 단 한 번도?”

루이먼드가 놀라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말도 안 돼…….”

‘나야 학자의 집에 틀어박혀 있었으니 그렇다 해도, 비아는 어디에 매여 있는 사람이 아니잖…… 아.’

뒤늦게 깨달았다. 루비아나야말로 누군가에게 강력하게 매여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루이먼드는 혈육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루비아나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루비아나의 애정을 조건 없이 누리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괜히 속이 탔다.

‘딴 것도 아니고 피붙이를 질투하는 것만큼이나 추한 건 없는데.’

추하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레이움 백작가에 절연장을 보낸 후이기에 더더욱, 마음을 다스리기 쉽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이제 루이먼드의 인생에서 가족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유일하고, 절실한데. 그 사람에게 자신은 유일하지 않다는 것.

‘……생각보다, 아픈 일이구나.’

루이먼드는 제 가슴을 꾹 누르며, 그 마음을 티내지 않으려 애썼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니 기대해도 되겠지요?”

“물론이지요!”

루이먼드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아닌 게 아니라, 루이먼드는 곧 의욕에 불타올랐다.

‘그래, 내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겠어.’

일곱 번 죽고 여덟 번째 살며 깨우친 지식과 유행을 총동원해서 제국 역사서에 길이길이 남을 만한 신년제를 만들고야 말리라. 그래서 별 기대 없이 자신에게 이 일을 맡긴 황제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주고야 말리라!

잘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며 한숨 쉬던 사람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루비아나는 그 모습을 보며 웃고 말았다. 자신이 얼마만큼 편하게 웃고 있는지, 스스로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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