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131)

***

“가암히이이이! 저를 지금까지 곱게 먹이고 입혀 키운 게 누군데!”

루이먼드가 보낸 절연장이 도착하자 그레이움 백작은 미쳐 날뛰었다. 그는 절연장을 좍좍 찢어 허공으로 흩날리며 포효했다.

“오히려 역효과가 났군. 그러기에 나서지 말라니까.”

쯧쯧. 오딜 후작이 낮게 혀를 찼다.

‘분명 동일한 내용이 황궁으로도 전해졌을 터. 황궁에서 어찌 나올지 미리 준비해 두어야겠군.’

루이먼드가 아쉴레앙 공작과 결혼했을 때, 이쪽의 세력 중 상당수가 흔들렸다.

차기 아덴 왕이 될 분께서 제국의 사냥개와 결혼하다니, 이미 제국에 굴복한 게 아니냐는 항의가 잇따랐다.

그들을 달랠 때 그레이움 백작이 제법 쓸모가 있었다. 루이먼드의 조부가 이쪽에 있다.

그것만으로도 금 간 세력을 봉합할 수 있었다. 그런 쓸모가 있으니 그레이움 백작이 제멋대로 날뛰어도 살려 두는 것이었다.

절연장이 공개되면 그때 흔들렸던 자들은 또 흔들릴 것이다.

‘쓸모없는 것들.’

그레이움 백작이나 신념도, 믿음도, 끈기도 없는 자들이나 모두 못마땅했으나, 아직까진 쓸모가 있으니 끌어안고 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또 적당한 변명을 만들어 두어야 할 터.

가뜩이나 예상치 못한 상황이 계속 발생하고 있어 골치가 아프건만. 그레이움 백작이 일을 더 만들어 버렸다.

‘역시 말릴 걸 그랬습니다. 할 수 있다고, 한번 믿고 맡겨 보란 말을 믿는 게 아니었습니다.’

곁에 선 부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딜 후작은 눈짓으로 입조심을 시켰으나, 그라고 딱히 달리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아, 글쎄. 나만 믿으십시오! 우리 루이는 내 말이면 하늘같이 여깁니다. 이 할애비 보기를 하늘같이 하지요. 내가 찾아가서 사정이 이러저러하게 되었으니 살려 달라고 빌면, 마음 착한 그 녀석은 결코 나를 저버리지 못할 겁니다. 일단 그렇게 방심하게 만들고는, 언제고 적당한 이유를 대서 아쉴레앙 공작에게 비밀로 하고 몰래 만나자고 혼자 공작저에서 빠져나오라고 하면, 그때! 확 납치해서 끌고 와 버리면 될 거 아닙니까!”

그레이움 백작의 계획은 이러했다.

모두가 너무 어설프고 성공 가능성이 적다고 반대했으나, 그레이움 백작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점점 반란 세력 안에서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는 걸 초조해하더니, 더는 견디지 못하고 일을 친 것이었다.

결과는 당연히 실패.

그렇게 친할아버지 말을 잘 듣는다던 아덴 왕의 유일한 핏줄은 그에게 절연장을 보냈다.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는 말은 딱, 그레이움 백작을 위해 존재하는 말이었다.

천박하고 탐욕스러운 주제에 멍청하기까지 한 쓰레기.

하지만 권력의 냄새를 맡고, 살아남는 데에는 도가 튼 인물이었다. 어쨌거나 루이먼드의 조부로서, 반란 세력 내에 어느 정도 위치를 굳히고 있기도 했고.

“입조심하게.”

오딜 후작은 부하를 단속하고는, 그레이움 백작에게 다가가 그를 위로했다.

“후작님, 후작님.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어헝헝. 그레이움 백작은 오딜 후작을 붙잡고 눈물 콧물을 짜냈다.

오딜 후작이 눈짓하자 주변에 서 있던 귀족들이 얼른 그레이움 백작에게 달려들어 그를 위로했다.

사람들이 떠받들어 주자, 그레이움 백작은 금세 눈물을 그쳤다. 아니, 애초부터 그는 울지 않았다.

그레이움 백작은 곁눈질로 오딜 후작을 힐끔힐끔 살폈다. 오딜 후작은 그를 위해 얼굴 근육을 움직여 웃어 주었다.

그제야 그레이움 백작은 우는 척을 멈추고, 주변의 추켜세워 주는 말에 흥분해서는 주먹을 휘둘렀다.

“그것도 여자라고 홀딱 빠져서는 할애비를 제대로 대접하지 않다니 말이야. 내 언제고 루이 그놈을 그냥, 콱!”

자신들이 왕으로 추대할 사람을 대놓고 모욕하는데도,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레이움 백작의 눈물 콧물 쇼가 끝난 후 사람들은 커다란 원탁에 빙 둘러앉았다.

원탁이라 해도 상석이 없을 수 없었다. 그레이움 백작은 문에서 가장 먼 자리를 바라보며 군침을 삼켰다. 그는 늘 그러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절대 그의 것일 수 없었다.

오딜 후작이 상석에 서자, 모두가 고개 숙여 그에게 예를 갖췄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그가 이 세력이 추대하는 왕이라 생각할 정도였다.

‘아니 될 말이지. 새 왕국의 왕은 루이가 될 것이고, 루이의 할애비인 내가 부족한 그 애를 도와 진정한 왕국의 지배자가 될 것이야.’

그레이움 백작만이 고개를 쳐들고 뻔뻔하게 오딜 후작을 쳐다보았다.

오딜 후작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부족한 자를 꾸짖어 봤자 입만 아플 뿐이지.’

멍청한 건 멍청한 대로 놔두면 될 일이었다.

오딜 후작은 그레이움 백작에게 아무 기대가 없었기에 실망하지도, 꾸짖지도 않았다.

오딜 후작이 허름한 천으로 가려져 있는 쪽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또각, 또각. 쪽문에서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 오딜 후작의 딸, 리사나였다.

그녀는 오딜 후작 옆에 서서는 허리를 편 반듯한 자세로 원탁의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열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루이먼드를 공략할 때의 풋풋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이 작은 공간 안에서만큼은, 그들의 우러름을 받는 왕비와 같은 위치였다.

“영애를 뵙습니다.”

귀족들이 정중히 인사했다. 리사나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오만하게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부채를 움켜쥔 손끝이 파르르, 떨렸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들 그레이움 백작의 계획이 실패해 상심이 클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행히도 내 따님께서 여러분에게 작은 위안이 될 수 있을 만한 소식을 가져왔다고 하니, 부디 들어 주길 바랍니다.”

오딜 후작은 그레이움 백작의 성공 가능성 낮은 계획을 그냥 지켜만 보지 않았다. 자신의 딸을 움직여 자신만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위안이라니요?”

“영애께서 무슨 일이라도?”

귀족들이 작게 웅성거렸다. 그레이움 백작은 오딜 후작이 뭔가를 은밀히 시도했고, 그게 성공했음을 깨닫고는 눈을 부릅떴다.

오딜 후작은 인자하게 웃으며 리사나를 바라보았다.

“지난번 실패를 통해 배우셨다고요?”

“네, 아버님.”

리사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오딜 후작이 살짝 눈가를 찌푸리자, 리사나는 더욱 부채를 꽉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오딜 후작이 아니라 원탁의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곧 있을 신년제의 거사에 앞서 일단 북부에…….”

말이 중간에 끊겼다. 문을 지키고 서 있던 사내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리사나에게 쪽지를 건넸다.

“잠시 실례하겠어요.”

리사나는 당당하게 말하고는 쪽지를 폈다. 오딜 후작은 그녀를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이런, 마침 좋은 소식이 도착했군요.”

리사나가 쪽지를 들어 사람들에게 보였다. 귀족들은 깨알같이 작게 적힌 글씨를 용케 알아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쯤 황궁에도 소식이 전해졌겠네요.”

리사나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

아침 겸 점심을 느긋이 먹고 있을 때였다. 황궁에서 온 시종이 막무가내로 식당에 쳐들어왔다.

“이게 무슨 무례……”

“급보, 급보입니다! 공작님, 서둘러 화, 황궁으로!”

시종이 말리는 하인들의 팔에 붙들려 외쳤다. 그의 다급한 목소리가 식당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무슨 일이지?”

루비아나는 고기를 썰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짜증이 나 있었다.

루이먼드와의 오붓한 자리를 방해하다니. 칼레나나 루단테가 장난치는 게 아닌가 가볍게 생각한 감도 없지 않았다. 바로 어제 두 사람의 장난질에 걸려들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어지는 시종의 말에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북부! 북부에서!”

아무리 칼레나와 루단테라 해도, 북부와 관련된 일로 장난 치진 않을 테니까.

쨍그랑. 루이먼드가 포크를 떨어뜨렸다.

“비아!”

루이먼드가 손을 뻗었다. 루비아나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루비아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트는 게 더 빨랐다.

루이먼드는 루비아나의 옷소매조차 잡지 못했다.

“당장 입궁한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가 붙잡지 못한 그 옷소매로 입가를 대충 문질러 닦고는 급히 식당을 빠져나갔다.

어제 루이먼드가 말없이 외출한 걸 못마땅해했으면서, 그 자신은 다녀온다는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떠나 버렸다.

“공작님!”

시녀장이 급히 따라나섰다. 하녀와 하인들도 우르르 뒤따랐다.

한바탕 태풍이 휘몰고 지나간 것 같았다.

“…….”

식당에 혼자 남은 루이먼드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따라나서야 한다고 생각은 했는데, 이상하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루이먼드는 제 앞에 놓인 접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샐러드를 담은 접시에 금이 가 있었다. 장인이 만든 접시였다. 망치로 두드려도 깨지지 않는다고 했건만. 포크에 부딪혔다고 금이 갔다.

루이먼드는 금 간 접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불길하다는 생각을 지우려야 지울 수 없었다.

‘아니야, 설마 무슨 일이 있으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