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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아나는 걱정했던 것보다 일찍 돌아왔다. 그리고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로 루이먼드에게 말했다.
“북부로 가 봐야겠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상황이, 많이 심각한 겁니까?”
루이먼드는 덜컥 겁을 먹어, 아까 붙잡지 못한 루비아나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이대로 말에서 끌어내려 저택에, 침실에 꽁꽁 가두어 둘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 없었다. 루이먼드에겐 그럴 힘도, 권리도 없었다. 무엇보다 루비아나가 그걸 원하지 않을 터였다.
루비아나는 옷소매를 찢을 듯 세게 움켜쥔 루이먼드의 손을 바라보았다.
힘줄 돋은 손등이 그의 불안하고 절박한 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루이.”
루비아나는 그 손등을 어루만지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렇게,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비아.”
루이먼드의 목소리가 떨렸다.
“루이.”
“달래듯이, 부르지 말아요. 전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나는…….”
루이먼드가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세게 깨물어 피가 나건만, 아픈 줄 몰랐다.
“이런.”
루비아나는 자신의 입술이 찢어졌을 때보다 더 아픈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꺼내려 했으나, 주머니가 비어 있었다.
시녀장은 한숨을 내쉬며 손수건을 내밀었다. 루비아나는 그것으로 루이먼드의 입술을 닦아 주었다.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루이먼드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손길을 피했다. 그러면서 그녀의 다른 한 팔, 그 팔의 옷소매는 절대 놓지 않았다.
루비아나는 예상치 못한 거절에 잠깐 굳었으나, 다시 손을 뻗어 기어이 루이먼드의 입술에 난 피를 모두 닦아 주었다.
“비아!”
“금방, 다녀올 겁니다.”
“…….”
“큰일이 아닙니다. 위험한 일도 아니고.”
여전히 아이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였다.
“비아, 당신 이렇게 자상하게 말하는 사람 아니잖아요?”
거짓말이었다. 루이먼드가 아는 루비아나는 이보다 훨씬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바로 아침까지 한 침대에 누워, 아침 식사도 거르고 웃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떠나야 한다니?
이렇게? 그런 곳으로?
북부에 대한 온갖 흉흉한 소문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황궁에서 급히 말달려 온 시종이 얼마나 다급했는지, 그의 목소리와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남편이 입술을 깨물어 피를 흘리는데, 어쩝니까?”
“그냥 놔둬요.”
“그럴 순 없지요.”
“그러면 가지 마요.”
“…….”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가지 말아요.”
루이먼드는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보내면 안 돼. 어서 안으로, 저택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야 해.’
불안해 미칠 것 같았다. 이대로, 이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해선 안 되는 말을 하고야 말았다.
“당신밖에 갈 사람이 없습니까?”
“루이, 폐하의 명령입니다.”
“폐하! 그 폐하께서는, 당신의 동생이잖습니까. 언니를 사지에 몰아넣는 동생이 어딨습니까? 그러고도 정말 친동생이……”
“루이!”
루비아나가 큰소리를 냈다.
루이먼드는 멈칫했다. 루비아나를 올려다보는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이 큰 제국에, 그렇게 인재들이 바글바글한데, 왜 당신이어야 합니까?”
“진정하십시오. 당신, 너무 흥분했어.”
“흥분 안 하게 생겼습니까? 왜 또! 당신만 가야 하는 겁니까?”
그간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게 느껴졌다.
‘그 대단한 황제도, 공작들도 모두 수도에 붙어서 매년 신년제를 편안히 즐기는데. 왜 이 사람만, 왜 이 사람만!’
루이먼드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황제와 다른 두 공작을 향한 원망의 말이 쏟아질 것 같았다.
“펠트하르그 공작도 있고, 도미넨트 공작도 있잖습니까? 왜 그들은 안 되고, 당신만 가야 하는 겁니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할 일이 있습니다.”
“그 할 일, 북부에 다녀와서 해도 되지 않습니까? 아니, 비아, 당신이 하고 그들을 북부로……”
“루이, 그만하십시오. 이 이상 말하면 곤란해질 수 있습니다.”
나 말고 당신이.
루비아나가 단호하게 루이먼드의 말을 끊어 냈다. 루이먼드가 멈칫했다.
“……내가, 당신을, 곤란하게 만드는 건가요?”
맺혀 있던 눈물이 또르르, 뺨을 타고 흘렀다.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곤란해지는 건 루이먼드였다. 어디에 루단테의, 혹은 황제의 눈과 귀가 있을지 모른다.
루이먼드의 투정 자체는 별거 아니었다. 루비아나는 하나도 곤란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마웠다.
그 아쉴레앙 공작이 북부로 간다는데, 걱정해 주고 가지 말라고 말리는 사람이 있다니. 신기하기까지 했다.
‘학자의 집에 박혀 있다 나와서 나에 대해 잘 모르나?’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고작 이런 일로 울지 말아요, 루이.”
루비아나는 손수건의 깨끗한 부분으로 그 눈물을 닦아 주었다. 닦아 주어도, 이미 생긴 눈물 길 위에 새로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루이, 이런 일로 울지 말아요.”
“그럼 가지 말아요, 비아.”
“그럴 수 없는 거, 알고 있잖습니까?”
“……몰라요. 모릅니다.”
루이먼드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험한 곳으로 떠나보내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그냥 익숙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리고 아마 이번에 루비아나가 무사히 돌아온다면, 앞으로도 계속 반복해서 겪어야 하겠지.
‘매번, 매번 이래야 한다고?’
생각만으로 숨이 턱, 막혔다.
안전하고 편안한 곳에 숨어선, 죽을지 살지 알 수 없는 위험한 곳으로 떠나는 아내를 배웅하라고? 살아 돌아오세요, 라고 말하며 웃으라고?
‘그게 어떻게, 어떻게 가능하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루비아나를 보낼 수 없었다.
“비아, 제발.”
루이먼드는 심장을 토해 내듯 목소리를 쥐어짰다.
“신년제 전엔 돌아오겠습니다.”
“……!”
“말했잖습니까? 그동안 한 번도, 신년제에 참석해 본 적이 없다고.”
“그랬, 죠.”
바로 오늘 아침의 일이다. 기대된다며 웃던 루비아나의 얼굴이, 목소리가 너무 선명했다.
“당신이 준비한다면, 이전의 그 어떤 신년제보다 화려하고 아름다울 겁니다. 그렇겠지요?”
“…….”
“대답해요, 루이.”
“……그럴, 그럴 겁니다.”
“애써 준비했는데 내가 참석하지 않으면 당신도 많이 섭섭하겠지요?”
“……그럼요.”
“그러니까 이번 신년제는 꼭 참석할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걱정 말고…….”
루비아나가 말을 하다 말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녀답지 않게 망설이다가, 한숨 쉬듯 말했다.
“날 기다려 줘요, 루이. 난 무사히 돌아올 겁니다. 당신 곁으로.”
“약속할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어디 드래곤이 또 나타나 그걸 잡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북부에 잠시 다녀오는 것뿐인데 못 돌아올 이유가 뭐 있겠습니까?”
루비아나가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떠날 준비를 하고 말 위에 올라탄 부하들의 안색은 어두웠다.
“일이 이렇게 되지만 않았어도, 같이 갈 수 있었을 텐데.”
“그럼 저도 같이 가게 해 주세요. 따라가겠습니다.”
“이번 말고, 다음에.”
“어째서요? 위험하지 않을 거라면서요?”
“그러니까 다음에요, 루이.”
“왜요? 위험해서요?”
“위험하지 않은 북부가 아니라, 그럭저럭 볼만한 북부를 보여 주고 싶습니다. 첫인상이 아무래도 중요하니까 말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털옷을 열 겹 둘러 들고 가고 싶었다.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면야, 얼마든지.
루이먼드의 말이 맞았다. 루비아나는 우는 아이를 달래 떼어 내고 달아나려고 애써 상냥하게 말하는 나쁜 어른이었다.
“북부는 소문처럼 그렇게 무서운 곳이 아닙니다. 나름 살 만하고, 또 나름 경치도 볼 만합니다. 루이, 당신도 북부가 마음에 들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그 나쁜 어른은 이런 상황에서, 제멋대로 제 마음을 고백했다.
영주가 이성에게, 그것도 결혼한 남편에게 자신의 영지가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게 무슨 뜻이겠는가? 나랑 같이 거기서 평생 살아야 할 텐데, 정 붙이라는 뜻이지. 3년 말고, 평생 나랑 살자는 말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루이먼드는 그 고백을 알아듣지 못했다. 루비아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자고 마음먹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루이.”
“비아, 잠깐만!”
“신년제 준비를 잘 부탁합니다. 폐하가 깜짝 놀랄 만큼, 멋있게 준비해 줘요.”
루비아나는 제 옷소매를 붙잡은 루이먼드의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그의 뒤에 서 있는 시녀장에게 당부했다.
“내 남편이 너무 놀란 것 같아. 리먼스 부인, 루이를 잘 부탁해.”
“네. 부디 몸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그래.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루비아나는 그렇게 떠났다. 열 명 남짓한 부하들이 그녀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루이먼드는 잘 다녀오라는 말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그녀를 떠나보냈다.
“…….”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면서도 끝내, 잘 다녀오라는 말 한마디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끝까지 가지 않기를 바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