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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장을 펴 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녀장이 나가고 얼마 안 되어, 루이먼드는 유언장을 손에 들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것을 들어, 아쉴레앙 공작의 인장이 찍힌 밀랍 봉인을 뜯고, 봉투를 열어 두툼한 크림색 종이를 꺼냈다. 모든 동작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웠다. 손짓은 우아하기까지 했다. 전혀 현실감이 없었다.
봉투 안에 든 종이는 총 석 장이었다.
앞의 두 장은 유언장. 마지막 장은 이 유언장이 변호사의 공증을 받은 것이라는 증명서.
루이먼드는 증명서를 반으로 접어 내려놓았다. 앞의 두 장을 펼쳤다.
이 유언장이 공개되었다면,
첫 줄을 보는 순간, 루이먼드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루비아나의 필체였다. 누군가 정교하게 흉내 낸 거라면 어쩔 수 없지만, 아니, 그렇기를 바라지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심장이 먼저 알아챘다. 루비아나의 글씨체가 분명했다.
정말로, 그녀가 쓴 유언장이었다.
이 유언장이 공개되었다면, 루비아나 크리스틸 폰 아쉴레앙은 죽었거나 죽었을 거라고 의심할 상황일 것입니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나의 남편인 루이먼드 폰 아쉴레앙이 이 유언장을 가장 먼저 읽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알면 쓰지 말지. 이런 거 읽게 만들지 말지.’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부디 그렇기를.
만약 어떤 이유로 인해 루이먼드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읽고 있다면, 다시 고이 접어 봉투에 넣고 루이먼드 폰 아쉴레앙에게로 보내길 바라는 바입니다.
나는 루텔 수도원에 적을 두고 있는 수도사입니다. 나의 신명을 걸고 경고하건대, 나의 유언 집행인 외의 다른 자가 나의 유언장을 먼저 개봉했다면 그는 반드시 천벌을 받을 겁니다.
지금 내가 하늘에서 신의 옆에 앉아 당신에게 천벌을 내려 달라 신께 청하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사는 내내 불행해지기 싫다면 지금이라도 유언장에서 얌전히 손을 떼십시오.
자상한 협박이었다. 루비아나다웠다.
“신을 별로 믿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루이먼드는 투정 부리듯 중얼거렸다.
안 믿으면 안 믿는 거고 믿으면 믿는 거지, 루비아나는 꼭 ‘별로 믿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루이먼드는 그녀의 그 말이 좋았다. 신실했으면 아마도 폭군의 사생아 따위 남편으로 삼지 않았을 테니까.
사생아를 남편으로 삼을 정도로 안 믿지만, 하지만 유언장에 이런 협박을 늘어놓을 정도로는 믿는 그 얕은 믿음마저 루비아나다웠기에, 루이먼드는 유언장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나의 장례식에 관해 적습니다.
시체를 찾았다면 간소하게 장례를 치르고, 루텔 수도원의 공동묘지에 묻어 주십시오.
시체를 찾지 못했다면 굳이 찾기 위해 애쓰지 말아 주십시오.
그리고 나와 함께 죽은 자들의 가족을 보살펴 주십시오. 나는 그들에게 그것을 약속했을 겁니다.
이제 나의 재산 상속에 대해 적겠습니다.
우선, 저택은 시녀장으로서 내게 충실히 봉사한 올가 리먼스에게 상속하고자 합니다. 그녀는 그것을 받을 만한 봉사를 내게 해 주었습니다.
그녀가 저택을 유지하고, 더는 노동 없이 자신의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평생 연금을 지급하겠습니다. 그녀의 연금은 내가 피먼스 상단에 투자한 예금에서 지급될 겁니다.
다음으로, 내가 가진 모든 장원과 광산, 평야와 북부의 땅을 황제 폐하께 되돌립니다.
이 유언장이 작성되었을 때 나에게는 나의 작위를 물려받을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황제 폐하께 받은 모든 것을 그분께 되돌려 드립니다.
다만 폐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나의 남편으로 하여금 아쉴레앙의 이름을 이어 가게 하시고, 그를 보호해 주시길 바랍니다.
단, 내가 신께 바친 피의 맹세는 상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펠틴 상단에 투자한 예금은 나의 남편, 루이먼드 폰 아쉴레앙에게 남깁니다. 새 출발을 하기엔 충분할 겁니다. 펠틴 상단주와 함께 펠트하르그 공작을 찾아가십시오. 그가 모든 처리를 맡아 줄 것이며, 당신의 후원자가 되어 줄 겁니다.
첫 장은 여기서 끝이었다.
완벽한 유언장이었다.
그래서 잔인했다. 적어도 루이먼드에게는 그랬다.
바스락. 유언장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루이먼드는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다음 장을 넘기지 못했다.
두 번째 장은 잉크 색이 미묘하게 달랐다. 다른 사람은 쉽게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루이먼드는 바로 알아차렸다. 시간을 두고 고민하다 적은 듯했다.
첫 줄부터 고민한 흔적이 엿보였다. 작은 잉크 얼룩이 번져 있었다.
무엇이 그녀를 고민하게 만들었고, 두 번째 장을 쓰게 만들었던 걸까?
유언장을 쓴 목적을 끝냈으나 몇 자 더 적습니다, 루이.
루이먼드도, 루이먼드 폰 아쉴레앙도 아닌 그저 루이.
두 글자를 확인하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비아?”
루이, 당신은 선한 사람이니까 나의 죽음을 슬퍼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슬퍼하지 말란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건 사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닐 테니 말입니다.
다만, 적당히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적당히 슬퍼하는 건 사람 마음대로 되는 일이던가?
루이먼드는 잔인한 부탁을 앞에 두고 이를 악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유언장에 눈물이 떨어져, 글씨가 번질 것 같았다.
부디, 나를 너무 오래 기억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 노력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툭.
결국 눈물은 떨어지고 말았으니까.
나는 늘 죽음에게 제물을 바치며 살아왔습니다. 언젠가 나 또한 죽음의 제물이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면 어찌 그렇게 살 수 있었겠습니까?
나의 죽음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너무 이른 죽음이 아니었나, 아쉬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는 지금의 내 나이보다 훨씬 어린 적들을 수없이 베어 넘겨 왔기에 이 나이까지 살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머뭇거린 흔적 끝에 마지막 한 문장.
그러니 날 잊고, 얼마든지 다른 사람과 행복해도 좋습니다. 행복하길 바랍니다.
이 한 줄이 첫째 장을 쓰고 난 뒤의 그녀를 고민하게 만들었고, 기어이 두 번째 장을 쓰게 만든 무엇이었다.
루이먼드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이 휘청이고, 신물이 올라왔다.
참았다.
그리고 벽난로에 유언장을 던져버렸다.
화르륵-.
기름을 바른 고급 종이는 순식간에 타 버렸다.
루이먼드는 쉼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 이딴 유언장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반드시 돌아올 거야.”
“신년제 전엔 돌아오겠습니다.”
루이먼드는 종이에 적힌 루비아나의 글씨를 믿지 않았다. 그가 직접 눈을 마주치고 들은 그녀의 목소리를 기억했다.
루이먼드는 비틀거리며 걸어가 문을 활짝 열었다. 눈앞이 핑핑 돌았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리먼스 부인!”
심장을 토해 내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조용한 복도에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루이먼드 님!”
복도 저편에서 시녀장이 달려왔다. 뒤로 하인, 하녀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신년제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신년제 준비라니요?”
“신년제 준비 말입니다. 설마, 신년제가 취소되었습니까?”
“아니요, 아닙니다. 폐하께서…… 강행, 하신다고 발표하셨습니다. 공작님의 장례식은 그 뒤에 국장으로 치르겠다고…….”
시녀장이 말을 흐렸다.
루이먼드는 뒷말은 알아서 걸러 들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앞의 말뿐이었으니까.
신년제는 취소되지 않았다. 그걸 확인한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렇군요. 그러면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요.”
“예?”
“리먼스 부인, 신년제 준비를 서둘러야겠어요. 미리 준비해 둬서 다행이긴 한데. 요 며칠 들여다보지 않은 게 걱정되네요.”
루이먼드가 시녀장을 스치고 지나가다가 비틀댔다.
“루이먼드 님!”
“루이먼드 니임!”
하인들이 기겁하며 그를 부축했다.
“난 괜찮아. 그렇게 아픈 사람 대하듯 붙잡지 않아도 돼.”
루이먼드는 그들의 손을 뿌리쳤다.
당장이라도 부러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데, 동시에 차마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하인들은 감히 다시 그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내가 전에 말했던 꽃가게와는 연락이 된 건가? 조금, 구성을 바꾸고 싶은데. 미리 준비했다면 약속했던 대금을 지불하고, 추가로 주문하는 것으로 하지.”
루이먼드는 벽을 붙잡고 천천히 걸으며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모두 다 신년제와 관련한 내용이었다.
복도에 늘어서 있던 고용인들은 혹시라도 몸이 닿을세라 주춤주춤 물러났다.
“루이먼드 님, 잠시만……”
시녀장만이 그를 뒤따랐다. 여차하면 하인들을 시켜서라도 루이먼드를 붙잡아 침실로 밀어 넣고 의사를 불러들이리라.
루이먼드가 그 생각을 읽은 것처럼 돌아보았다.
“리먼스 부인, 나 멀쩡해요. 제정신입니다.”
“…….”
대놓고 ‘아니요, 그래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순 없었기에, 시녀장은 침묵을 택했다.
“날 좀 도와줘요, 리먼스 부인.”
“얼마든지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루이먼드 님, 지금은 일단 쉬시는 게 먼저입니다. 그러고 나서 신년제 준비든 뭐든 하시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지 모릅니다.”
“…….”
“이거라도 해야 해요. 안 그러면 나, 못 버텨요.”
루이먼드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살짝 손을 대기만 해도 부서져 버릴 마른 꽃 같았다. 한편으로는 독을 품은 유리 꽃 같아 보이기도 했다.
“비아가 나와 약속했어요. 신년제 전엔 돌아오겠다고. 꼭 나와 함께 이번 신년제에 참석하겠다고.”
“……그러셨군요.”
“그러니까 잘 준비해 놔야 합니다. 비아가 깜짝 놀랄 만큼, 완벽하게 준비해야지요. 이전의 그 어떤 신년제보다 화려하게, 아름답게.”
루이먼드가 창밖으로 보이는 황궁을 보며 말했다.
“난 할 수 있어요.”
시녀장에게 하는 말이었으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돌아올 거야. 반드시 돌아올 거야.’
루이먼드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속삭였다.
‘돌아오면 저런 유언장 따위, 다시는 쓰지 말라고 해야지.’
루비아나가 돌아오면, 왜 그런 유언장 같은 걸 남겨서 사람을 놀라게 하느냐고 화낼 생각이었다.
절대 까먹지 말아야지. 돌아온 것만 봐도 반갑고 좋아서 화내는 걸 까먹진 말아야지.
“리먼스 부인?”
루이먼드가 동의를 구하듯 시녀장을 불렀다. 잠시 머뭇거리던 시녀장은 곧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루이먼드 님께선 분명, 그렇게 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