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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질한 관처럼 적막하던 아쉴레앙 공작저가 단번에 부산스러워졌다.
아쉴레앙 공작저를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둘뿐이었다. 그중 하나가 죽어 온 제국을 놀라게 했으니, 답은 하나였다. 아쉴레앙 공작 부군, 루이먼드.
그는 아침 일찍 뒷문으로 나가 식료품 상자를 하나하나 열어 보고 채소가 싱싱한지, 생선과 고기가 신선한지 확인했다. 조금이라도 시든 게 있으면 값은 치르되 돌려보냈고, 분명히 경고했다.
상인은 루이먼드를 보자마자 모자를 벗고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추모의 뜻이 담긴 그 인사를, 루이먼드는 본체만체했다.
펠틴 상단주와 변호사가 두어 번 찾아와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자고 청했으나 루이먼드는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
펠트하르그 공작 쪽에서 무슨 말이 있었는지, 문전박대당한 두 사람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아무 일 없는 척하는 건 황궁도 마찬가지였다. 루이먼드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어떻게 알았는지 시종을 보내 신년제 연회 준비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물었다.
“며칠 몸이 아파 예정대로 진행하지 못했습니다만, 미리 준비해 두었기에 조급하게 서두를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렇게 폐하께 전해 주세요.”
루이먼드가 황궁 시종에게 태연하게 말했다. 어떻게 봐도 아내를 잃고 제 목을 그은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다.
시녀장과 저택의 하녀, 하인들은 루이먼드의 지시에 따라 바쁘게 움직였다. 누구도 실수로라도 루비아나, 아쉴레앙 공작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아쉴레앙 공작저에서 아쉴레앙 공작은 금기어가 되었다. 그건 황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신년제 전까지 아쉴레앙 공작에 대한 어떤 논의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황제.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모자를 쓰는 대신, 값비싼 은술잔과 진주를 넣은 포도주를 사들이며 신년제 연회를 준비하는 아쉴레앙 공작 부군.
아쉴레앙 공작의 죽음을 가장 애도해야 할 두 사람의 태도가 이러하니, 수도의 귀족과 백성은 감히 슬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슬퍼하기는커녕 입도 벙끗할 수 없었다.
덕분에 루이먼드는 아무렇지 않게 신년제 준비에 몰두할 수 있었다.
‘폐하께 인정 받아야지.’
아쉴레앙 공작 부군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도록 만들리라.
‘그리고 비아가 돌아오면, 신년제를 무사히 치르고 나면 말하자.’
함께 있을 땐 감히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으면서. 떨어져 있으니, 용기가 샘솟았다.
‘이번 일로 경험했다고. 이 잠깐 떨어져 있는 것도 이렇게 끔찍한데, 3년 뒤에 이혼해 헤어질 자신이 없다고. 그러니까 계속 곁에 있게 해 달라고.’
그녀는 착한 사람이니까, 계약 위반이라고 화내지 않을 것이다.
아름다운 신년제 연회장을 보고는 제법 너그러워져선, 왜 그러고 싶으냐고 물어봐 줄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렇게 대답해야지.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아주 오래전부터 사랑하게 되었다고. 그래서 도무지…… 당신 없는 이 세상을 견뎌 낼 자신이 없다고.’
마음속 깊이 품어 두고, 숨겨 왔던 마음을 망설임 없이 고백하리라.
루비아나가 뭐라고 대답할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건 그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결말이니까.
루이먼드는 그저, 신년제가 시작하기 전 루비아나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매일같이 백합꽃을 한 아름씩 끌어안고 루비아나의 서재로 갔다.
루이먼드는 커다란 화병에 백합꽃을 가득 꽂으며 신년제 전에 돌아온 루비아나가 이 백합을 발견하는 날을 상상해 보았다.
‘싫어할까? 질색하진 않겠지? ……의외로 좋아하려나?’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메슥거리던 속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만약, 신년제 전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 좋은 기분은 늘, 순식간에 진창에 처박혔다.
유언장. 불에 타 버려 재조차 남지 않은 그것의 존재가 루이먼드의 심장을 할퀴었다.
‘비아가, 신년제 전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루이먼드는 웃음기가 걷힌 무표정한 얼굴로 백합을 그러쥐었다. 꽃잎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루이먼드는 백합을 끌어안듯 감싸고 고개를 묻어 그 향을 맡았다. 독한 백합향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너무 짙은 향은 독과 같았다.
고백하지 못한 사랑도 그렇지 않을까? 심장에 고이고 고여, 자신을 죽이는 독이 돼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 독이 루이먼드에게 답을 알려 줬다.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가 찾아가면 돼. 다시 찾아가면 돼. 그 방법을 나는 가지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루이먼드는 다시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며,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짙은 백합향이 핏줄을 타고 온몸에 퍼졌다.
루비아나를 안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 속이 편안해졌다. 수프 두 숟갈 정도는 삼킬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겉모습이야 예전으로 돌아간 듯 보이지만, 루이먼드의 속은 여전했다. 음식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물 한 모금 마시는 것도 고역이었다. 물에서도 비린내가 난다는 걸 처음 경험했다.
시녀장은 매일같이 의사를 닦달해 루이먼드를 돌보게 했다. 의사가 매번 공들여 진찰했지만,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아무 이상 없음. 약간의 탈수, 영양 부족 증세를 보임. 잘 먹고 잘 쉬면 될 것 같음.
그때마다 시녀장은 ‘그 정도 소견은 나도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네가 그러고도 의사냐?’ 이런 눈빛으로 의사를 쏘아봤다.
“정말, 정말로 아무 이상이 없으십니다. 편찮으신 곳도, 다치신 곳도 없으시니 말입니다.”
“좀 더 실력 좋은 의사를 구해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저의 실력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제 소견은 정확합니다. 최고의 명의이셨던 제 할아버지의 명예를 걸고!”
의사의 외할아버지에게는 미안한 일이나, 충분히 먹고 마시고 쉬어라. 그건 지금의 루이먼드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수하면 안 돼. 완벽한 신년제여야만 해.’
루이먼드는 집착적으로 신년제 준비에 매달렸다.
쉼 없이 일하고 고민하고 또 일했다. 그가 줄 끊긴 인형처럼 덜컥 멈춰 설 때는, 불타 버린 유언장의 내용이 불쑥 떠오를 때뿐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하루에도 열두 번씩, 아니 백이십 번씩. 유언장의 내용이 생각났다.
단 한 번 읽어 봤을 뿐인데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전부 기억났다. 곱씹고 또 곱씹다 보니, 심장에 새겨져 버린 건지도 몰랐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며 일곱 번 죽고 여덟 번 살아난 루이먼드로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담담한 유언장이었다.
폭군의 사생아이자 유일하게 살아남은 핏줄. 자신을 팔아먹을 생각밖에 없는 조부와 그 가족들.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외모. 멍청한 머리. 검을 들어 본 적 없는 부드러운 손.
가진 거라고는 이것밖에 없는 루이먼드는, 그래도 살고 싶었다.
그런데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가진 루비아나는 삶에 아무런 미련도 없어 보였다.
룩센 백작의 반란에 선두로 나선 제국의 건국 공신. 루텔 수도원의 수도사. 단 셋뿐인 공작 중 하나. 황제의 하나뿐인 혈육. 북부의 지배자.
황제의 총애를 받고, 뭇 제국민의 두려움과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자신의 유언장을 기꺼이 맡길 만큼 친한 친구까지 있는 사람이, 언제나 죽음을 예비하고 있었다.
자신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남에게도 그것을 강요했다.
이 세상에 자신을 묶어 놓을 것이 거의 없는 사람처럼.
유언장의 내용을 곱씹다 보면, 루비아나의 모습과 겹쳐졌다.
그러고 보면 루비아나는 늘, 자신의 삶을 반쯤 내려놓은 사람 같았다.
어디에도 사람들이 말하는 피에 미친 괴물 공작은 없었다. 그저 조금 헐렁하고, 조금은 제멋대로고, 조금은 지쳐 보이는, 그런 사람만 있을 뿐이었지.
루이먼드는 언젠가의 루비아나를 떠올렸다.
자신이 시녀장과 의기투합하여 저택 여기저기를 뛰어다닐 때, 계단 위에서 턱을 괴고 그런 자신을 신기하다는 듯 내려다보았던 그녀를.
루비아나는 눈이 마주치면 씩 웃으며 힘내라고 손을 흔들었다.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않고,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이래야 한다, 저건 저래야 한다 시녀장과 의논하는 자신을. 자신의 지시에 따라 이리로 저리로 우르르 움직이며 커튼을 새로 달고, 그림을 새로 걸던 하녀, 하인들을.
그녀는 그림을 관람하듯 뿌듯이 바라보되, 다가오진 않았다.
‘그때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루이먼드는 뒤늦게 그녀의 마음을 고민했다.
곁에 없고 나서야, 그녀에 대해 고민하고 조금이나마 알아 가는 것 같았다. 함께 있을 때는 함께라는 것만으로도 벅차고 좋아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루비아나의 모습을.
“…….”
루이먼드는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리먼스 부인, 먹을 걸 좀 가져와요.”
루이먼드가 손짓하자, 시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트레이를 밀고 들어왔다.
먹기 적당할 정도로 식어 있는 수프. 물비린내를 조금이라도 숨기고자 레몬즙을 짜낸 물 한 잔.
루이먼드는 한숨 쉬며, 그것들을 입에 집어넣었다.
먹는 게 아니었다.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었으니까. 신년제까지만이라도 살아 있기 위해 씹고 삼키는 것뿐이었다.
이 또한 신년제 준비 중 하나였다.